안준 (대동민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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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준은 1889년 경상남도 창원에서 태어난 인물로, 3.1 운동 이후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여 조선청년회연합회 집행위원 등을 역임했다.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고려공산동맹 경상남도 위원장, 적성회 간부 등으로 활동했으나, 1930년 '격문사건'으로 검거된 후 전향하여 친일 행적을 보였다. 1936년에는 대동민우회 발기인 및 이사장을 맡아 '내선일체'를 주장하고 일장기 말소사건을 비난했으며, 중일전쟁 이후 시국 강연 활동을 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교육 및 학술 분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재되었다.
안준은 1919년 창원에서 '남면(南面)청년회' 결성을 주도하며 청년 운동을 시작했다. 1920년 조선청년회연합회 창립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1] 1921년과 1923년에도 조선청년회연합회 활동을 이어갔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한 친일인명사전에 교육, 학술 분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재되었다.[1] 그의 사회주의 운동 경력과 친일 행적은 한국 근현대사의 복잡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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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924년에는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 창립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비밀결사 고려공산동맹 경상남도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25년 창원에서 사회주의 사상단체 ‘적성회’를 결성하고 간부로, 시대일보 진해분국 기자를 맡았으며, 조선청년총동맹 집행위원으로서 이재민 구호활동을 벌였다. 1926년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창립준비위원을, 1927년에는 밀양 은산 농민조합 집행위원장, 동아일보 밀양지국 수산분국 분국장, 조선농민총동맹 중앙집행위원, 신간회 밀양지회 창립준비위원을 역임했다.
1928년 동아일보 밀양지국 분국장을 사임하고 부산에서 경남인쇄주식회사를 경영했다. 1930년 ‘격문사건’으로 체포된 후 전향, 1936년 사상전향자 단체인 백악회와 대동민우회 창립을 주도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전쟁을 지지하는 활동을 했다.
2. 1. 공산주의 운동 활동
1919년 창원에서 '남면(南面)청년회' 결성을 주도하며 청년 운동을 시작했다. 1920년 조선청년회연합회 창립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1] 1921년 조선청년회연합회 제2회 정기총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재선되었다. 1923년 조선청년회연합회 제4회 총회에 참석하여 조선물산장려운동에 가담한 집행부를 공격하는데 앞장섰다.
1924년 4월 15일부터 경성에서 열린 ‘조선노농대회’ 총회에 남면노농회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다. 같은 달 17일 조선노농총동맹 창립총회에 참석하여 집행부 선출을 위한 10인 전형위원에 선임되었다. 대회 마지막 날 일본 경찰의 집회 해산 명령에 항의하여 1000여 명 인파와 더불어 시위에 주동하여 나섰으나, 이 사건으로 안준을 포함한 시위 참가자 25명이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었다. 같은 달 21일부터 23일까지 열린 조선청년총동맹 창립대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4년 10월 무렵 비밀결사 고려공산동맹 대회에 참석하여 경상남도 위원장에 선임되었는데, 이 비밀결사는 세칭 ‘서울파 공산당’이라고 불렀다. 1925년 1월 창원에서 사회주의 사상단체 ‘적성회’를 결성하고 간부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2월 경남사회운동자동맹을 조직하려다 일제 경찰에 의해 금지되었다. 4월 5일 창원군 내 7개 청년단체를 통합하여 창원청년연맹을 결성하는 데 참여하고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달 17일 전국적 사상단체를 표방한 조선사회운동자동맹 발기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1925년 6월 시대일보 진해분국 기자를 맡았다. 같은 달에 청년총동맹 제6회 집행위원회에 출석하여 제2기 집행부 선출을 위한 5인 전형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임되었고 신임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특히 1925년 7월 29일과 30일에 열린 제1회 신임 집행위원회에서 의장으로 선임되어 사회를 맡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같은 해 7월 경남수해구제회를 발기했고, 8월 청년총동맹 집행위원으로서 각지를 순방하며 이재민 구호활동을 벌였다. 1926년 4월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창립준비위원을 맡았다. 1926년 11월 서울파 비밀결사 구성원들이 조선공산당 가입문제를 둘러싸고 두 진영으로 분열될때, 약 30%에 이르는 비가입파에 가담했다. 1927년 5월 밀양 은산 농민조합 집행위원장을 맡았고, 6월 동아일보 밀양지국 수산분국 분국장에 취임했으며, 9월 조선농민총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12월 신간회 밀양지회 창립준비위원으로 활동했다.
2. 2. 친일 행적
1928년 12월 동아일보 밀양지국 수산분국 경영을 중단하고 분국장을 사임한 뒤 부산에서 경남인쇄주식회사를 경영했다. 1930년 6월 인쇄소를 경영하던 중 ‘격문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검거되었다. 그 후 조선총독부 전직촉탁이자 잡지사 신민사 사장인 이각종의 종용과 전향 권유를 받아들여 변절했다.
1936년 2월 사상전향자 13명으로 이뤄진 백악회 창립 총회에 참석했다. 이후 사상전향자의 복지와 후생을 목적으로 하는 백악회를 더 활성화하여 일본국가주의를 표방하는 적극적인 사상운동단체로 바꾸는 것에 주도하였고, 대동민우회 발기에 나섰다. 같은 해 7월 대동민우회 발기인대회에 참석하고 창립대회에서 의장을 맡았다. 창립 대회에서 대회 주도권을 둘러싸고 참석자들이 이각종 파벌과 김경식 파벌로 분열되자, 안준은 이각종 파벌에 가담했다.
그 후 반대파를 배제하고 자파 소속 사상전향자를 규합하여 대동민우회 독자 창립 움직임을 이끌었다. 그 해 8월 중순 대동민우회 창립위원회 명의로 '내선일체' 등을 주장하는 글을 발표하고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을 격렬히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같은 해 9월 사상전향자 140명을 결집하여 대동민우회 창립대회를 성사시키고 최고위직인 이사장에 취임한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이를 지지하는 다양한 활동에 착수했다. 1937년 7월 19일 ‘시국인식강연회’ 개최를 주도하고 강연회를 여는가 하면 조선총독부에서 주최하는 전 조선 순회 시국강연반에 참가하여 시국강연에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3. 사후
4.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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