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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브로시오 스피놀라 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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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암브로시오 스피놀라 도리아는 제노바 명문가 출신으로, 스페인 군에서 활약한 장군이다. 그는 플랑드르에서 군사적 업적을 쌓았으며, 특히 브레다 포위전 승리로 명성을 얻었으나, 펠리페 4세의 총신인 올리바레스 백작과의 갈등으로 인해 만토바 공국 계승 전쟁에서 불운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생애는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그림 '브레다의 항복'에 묘사되어 있으며,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2. 초기 생애

암브로시오 스피놀라는 제노바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스피놀라 가문은 섹스텐과 베나프로의 후작 가문으로 은행업을 운영했다. 제노바 국내 정쟁에서 패배한 암브로시오는 제노바의 종주국이었던 스페인의 장수로 나섰다. 1602년, 동생 페데리코와 함께 스페인 왕국과 용병 계약을 맺고 플랑드르로 향했다.

2. 1. 가문 배경

제노바 명문가의 장남으로 태어난 암브로시오 스피놀라는 섹스텐과 베나프로의 후작 필리포 스피놀라와 그의 아내 폴리세나 그리말디(살레르노 공 니콜로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2] 스피놀라 가문은 제노바에서 매우 오래되고 부유하며 강력한 가문이었다.[3] 암브로시오 스피놀라의 여동생 도나 렐리아는 제2대 갈라토네 후작인 돈 줄리오 체사레 스콰르치아피코와 결혼했으며, 그들의 후손은 벨몬테 공작이다.

16세기, 제노바 공화국은 실질적으로 스페인 제국의 보호국이었으며, 제노바인들은 스페인 군주의 은행가이자 재정 관리자였다. 암브로시오 스피놀라의 여러 남동생들은 스페인에서 성공을 추구했고, 그중 한 명인 페데리코는 플랑드르 육군에서 군인으로 두각을 나타냈다.[2]

맏이였던 암브로시오는 가문을 잇기 위해 결혼하여 집에 남았다. 1592년, 그는 갈레라타 백작의 딸 조반나 바치아돈네와 결혼했다.[3]

2. 2. 유년 시절

암브로시오 스피놀라는 제노바에서 섹스텐과 베나프로의 후작 필리포 스피놀라와 그의 아내이자 살레르노 공 니콜로의 딸인 폴리세나 그리말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2] 스피놀라 가문은 제노바에서 매우 오래되고 부유하며 강력한 가문이었다.[3] 돈 암브로시오의 여동생 도나 렐리아는 제2대 갈라토네 후작인 돈 줄리오 체사레 스콰르치아피코와 결혼했으며, 그들의 후손은 벨몬테 공작이다.

16세기, 이탈리아의 제노바 공화국은 실질적으로 스페인 제국의 보호국이었으며, 제노바인들은 스페인 군주의 은행가로서 재정을 관리했다. 암브로시오 스피놀라의 여러 남동생은 스페인에서 성공을 추구했고, 그중 한 명인 페데리코는 플랑드르 육군에서 군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맏이였던 암브로시오는 가문을 잇기 위해 결혼하여 집에 남았다. 1592년, 그는 갈레라타 백작의 딸 조반나 바치아돈네와 결혼했다.[3]

3. 스페인 군 복무

안토니 반 다이크가 그린 암브로시오 스피놀라 초상화


제노바 공화국 명문가 출신 암브로시오는 제노바 내 정쟁에서 패배 후, 당시 제노바의 종주국이었던 스페인의 장수로 활약하기로 결심했다. 1602년 동생 페데리코와 함께 스페인과 용병 계약을 맺고 플랑드르로 향했다.

스페인은 암브로시오 부대를 잉글랜드 침공에 활용할 계획이었으나, 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고, 암브로시오는 팔십 년 전쟁에 투입되었다. 1603년부터 오스텐데 포위전을 지휘하여 1604년 함락시키고 플랑드르 주둔군 서열 2위로 승진했으며, 1605년에는 군사 재정 최고 책임자인 "재정 감독관"이 되었다.

테르시오. 1625년, 암브로시오 스피놀라가 브레다 포위전을 지휘하고 있다.


이후 펠리페 3세의 지원을 받아 네덜란드 군을 이끄는 마우리츠 판 나사우와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1606년 디스트에서 4,000명 이상의 병사가 반란을 일으키고, 스페인 왕실 정책 변화로 인해 1609년 12년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공세가 불가능했다.

1618년 30년 전쟁이 발발하자, 스페인 군을 이끌고 팔츠를 침공하여 라인 계곡을 점령하고, 이탈리아와 네덜란드를 잇는 새로운 통행로를 확보했다. 1621년 네덜란드와의 휴전이 종료되자 다시 플랑드르로 돌아와 1622년 베르겐 옵 좀을 포위했지만, 병력의 36%를 잃는 큰 패배를 겪었다. 이후 병력 회복에 힘썼고, 1624년부터 1625년까지 브레다 포위전을 지휘했다. 1621년, 스페인 국왕으로부터 로스 바르바세스 후작 작위를 받아 그란데 특권을 얻었다.

그러나 올리바레스 백작은 플랑드르 정책에서 스피놀라와 대립했고, 스피놀라에게 비협조적이었다. 이는 프레데릭 헨드릭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여 전황이 악화되었다.

1628년 1월, 올리바레스 백작은 스피놀라를 플랑드르 주둔 스페인 군 총사령관에서 해임하고 마드리드로 소환했다. 스피놀라는 마드리드로 가던 중 루이 13세와 리슐리외 추기경과 회담하여 라 로셸 공격에 대한 조언을 했다. 마드리드 궁정에 합류한 스피놀라는 그 인간성으로 궁정을 매료시켰지만, 이는 올리바레스 백작의 고립감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1629년, 만토바 공국 계승 전쟁을 지휘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파견되었으나, 올리바레스 백작의 비협조적인 태도는 계속되었고, 스피놀라는 모든 재산을 잃고 실의에 빠져 병사했다. 결국, 스피놀라 가문에 스페인 왕실로부터 전비가 지급되지 않았다.

3. 1. 용병 계약

스피놀라 가문과 도리아 가문은 제노바 공화국 내에서 권력을 놓고 경쟁하는 관계였다. 암브로시오 스피놀라는 도리아 가문의 수장인 투르시 백작과 경쟁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도리아 가문이 구매하려던 살레르노 가문의 궁전 우선 매수 권리 행사 소송에서 패배한 후, 도시를 떠나 플랑드르에서 스페인 군주에게 복무하며 가문의 운을 개척하기로 결심했다.[1]

1602년, 암브로시오와 그의 형제 페데리코는 스페인 정부와 용병 계약을 맺었다. 이는 옛 이탈리아 방식의 콘도타 계약으로, 스피놀라 가문의 모든 재산을 건 도박이었다. 암브로시오는 육상 근무를 위해 9,000명의 롬바르디 용병을 모집했고,[1][4] 페데리코는 해안 경비를 위해 갤리선 부대를 편성했다.[3]

3. 2. 초기 군사 활동

스피놀라 가문과 도리아 가문은 제노바 공화국 내에서 권력을 놓고 경쟁하는 관계였다. 암브로시오 스피놀라는 도리아 가문의 수장인 투르시 백작과 경쟁을 이어갔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도리아가 구매하려던 살레르노 가문의 궁전에 대한 우선 매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시작한 소송에서 패배한 후, 도시를 떠나 플랑드르에서 스페인 군주에게 복무하여 가문의 운을 개척하기로 결심했다.

1602년, 그와 그의 형제 페데리코는 스페인 정부와 계약을 맺었다. 이는 옛 이탈리아 모델의 ''콘도타''였다. 스피놀라가 가문의 모든 재산을 걸고 감행한 도박이었다. 암브로시오 스피놀라는 육상 근무를 위해 9,000명의 롬바르디 용병을 모집하기로 했고,[1][4] 페데리코는 해안 경비를 위해 갤리선 부대를 편성하기로 했다.[3]

페데리코의 갤리선 중 몇 척은 6월 세심브라 만 해전에서, 그리고 10월 영불 해협 해전에서 영국과 네덜란드 군함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는 1603년 5월 24일 네덜란드와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암브로시오 스피놀라는 1602년, 자신이 직접 모집한 병사들을 이끌고 육로로 플랑드르로 진군했다. 플랑드르에 머무는 동안 스페인 정부는 그를 잉글랜드 침공에 투입하는 계획을 세웠지만, 결국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해 말, 그는 더 많은 병력을 모으기 위해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그의 군인으로서의 경험은 1603년 9월 29일, 34세의 나이로 장군이 되어 오스텐데 포위전을 계속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같은 시기에 포위된 슬루이스를 구출하는 데 실패했지만, 1604년 9월 22일 오스텐데의 잔해를 손에 넣었다.[3] 이 승리로 그는 1605년 금모리스 기사단의 기사로 임명되었다.

4. 플랑드르 전쟁

알베르트 대공과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는 오스텐데 점령에 성공한 스피놀라를 높이 평가했다. 1602년 스페인과 용병 계약을 맺고 플랑드르에 온 스피놀라는 1604년 오스텐데를 함락시키고 플랑드르 주둔군 서열 2위로 승격, 1605년에는 군사 재정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스피놀라는 전쟁 준비를 위해 바야돌리드의 궁정을 방문하여 플란데르 총사령관 임명을 요구했다.[3]

이후 브뤼셀로 돌아와 첫 번째 캠페인을 이끌었다. 이 시기 저지대 국가의 전쟁은 거의 전적으로 포위전으로 이루어졌으며, 스피놀라는 나사우의 모리츠가 방어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로엔로를 포함한 많은 장소를 점령하여 명성을 얻었다.[3]

1606년, 스피놀라는 다시 스페인에서 겉치레뿐인 영예를 받았지만, 그란데 지위는 얻지 못했다. 그는 전쟁 비용 담보로 자신의 재산을 걸어야 했고, 결국 재정적 파산에 이르렀다. 스페인 정부는 그를 멀리하려 했으나, 1609년 12년 휴전까지 그는 성공적인 지휘를 계속했다. 휴전 후에도 직책을 유지하며, 앙리 2세 관련 협상을 수행하기도 했다.[3]

1611년, 스피놀라는 재정적 파탄에도 불구하고 귀족 칭호인 그란데사를 받았다. 1614년, 율리히 계승 전쟁에 참여했고, 1620년부터 1622년까지 30년 전쟁에서 하부 팔츠의 팔라티네이트 캠페인을 이끌어 대장군 지위를 받았다.[3]

1618년 30년 전쟁이 발발하자, 스피놀라는 스페인 군을 이끌고 팔츠를 점령하여 라인 계곡을 장악, 이탈리아와 네덜란드를 잇는 새로운 통행로를 확보했다. 1621년 휴전이 끝나자, 다시 플란데르로 돌아가 1622년 베르겐 옵 좀을 포위했지만, 병력의 36%를 잃는 큰 패배를 겪었다. 이후 병력을 회복하여 1624년부터 1625년까지 브레다 포위전을 지휘했다. 같은 해, 스페인 국왕으로부터 로스 바르바세스 후작 작위를 받아 그란데 특권을 얻었다.

펠리페 4세는 브레다 포위가 너무 위험하고 비용이 많이 든다고 생각했지만, 오라녜 공 모리츠 나사우의 구원 노력에도 불구하고, 1624년 8월 28일부터 1625년 6월 5일까지의 긴 포위 끝에 브레다를 점령했다.[3] 브레다의 항복은 벨라스케스의 유명한 그림인 ''라스 란자스''의 주제이다.[3]

4. 1. 오스텐데 점령

알베르트 대공과 펠리페 2세의 딸인 스페인 인판타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는 오스텐데를 점령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스피놀라의 성공은 그들을 기쁘게 했고, 당시 군인들 사이에서 그의 평가를 높였다. 그는 캠페인이 끝날 무렵, 전쟁 지속을 위한 준비를 위해 당시 바야돌리드에 있던 궁정을 만나러 스페인으로 갔다. 바야돌리드에서 그는 플란데르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3]

1602년, 암브로시오는 동생 페데리코와 함께 스페인 왕국과 용병 계약을 맺고 플랑드르로 향했다. 처음에는 스페인이 암브로시오 부대를 잉글랜드 침공에 사용할 예정이었지만, 이 계획은 백지화되었고 암브로시오는 팔십 년 전쟁에 투입되었다. 암브로시오는 1603년부터 오스텐데 포위전을 이어받아 1604년 이를 함락시키고 플랑드르 주둔군 서열 2위로 승격했으며, 1605년에는 "재정 감독관"으로서 군사 재정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4. 2. 12년 휴전

1609년 12년 휴전이 서명될 때까지, 스피놀라는 전장에서 계속해서 성공적인 지휘를 했다.[3] 휴전이 체결된 후에도 그는 직책을 유지했으며, 프랑스와의 협상을 담당해야 했다. 이 협상은 앙리 2세 드 부르봉, 콩데 공작이 그의 아내 샤를로트-마르그리트 드 몽모렌시와 함께 늙은 프랑스 앙리 4세의 관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플란데르로 도망쳤을 때 이루어졌다.[3]

1606년 원정 종료 시 디스트에서 4,000명 이상의 병사가 참여하는 대규모 반란이 발생했고, 스페인 왕실의 정책 전환 등으로 인해, 이후 1609년 12년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공세가 불가능해졌다.

4. 3. 30년 전쟁 참전

플란데르 총독 알베르트 대공과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는 오스텐데 점령에 성공한 스피놀라를 높이 평가했다. 스피놀라는 전쟁 준비를 위해 바야돌리드의 궁정을 방문하여 플란데르 총사령관 임명을 요구했다.[3]

1606년, 스피놀라는 다시 스페인에서 겉치레뿐인 영예를 받았지만, 그란데 지위는 얻지 못했다. 그는 전쟁 비용 담보로 자신의 재산을 걸어야 했고, 결국 재정적 파산에 이르렀다. 스페인 정부는 그를 멀리하려 했으나, 1609년 12년 휴전까지 그는 성공적인 지휘를 계속했다. 휴전 후에도 직책을 유지하며, 앙리 2세 관련 협상을 수행하기도 했다.[3]

1611년, 스피놀라는 재정적 파탄에도 불구하고 귀족 칭호인 그란데사를 받았다. 1614년, 율리히 계승 전쟁에 참여했고, 1620년부터 1622년까지 30년 전쟁에서 하부 팔츠의 팔라티네이트 캠페인을 이끌어 대장군 지위를 받았다.[3]

1621년, 저지대 국가에서 전쟁이 재개되자 브레다 점령이라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스페인 펠리페 4세는 포위가 위험하고 비용이 많이 든다고 생각했지만, 오라녜 공 모리츠 나사우의 구원 노력에도 불구하고, 1624년 8월 28일부터 1625년 6월 5일까지의 긴 포위 끝에 승리했다. 브레다 항복은 벨라스케스의 그림 ''라스 란자스''의 주제가 되었다.[3]

브레다 포위전.


1618년 30년 전쟁이 발발하자, 스피놀라는 스페인 군을 이끌고 팔츠를 점령하여 라인 계곡을 장악, 이탈리아와 네덜란드를 잇는 새로운 통행로를 확보했다. 1621년 휴전이 끝나자, 다시 플란데르로 돌아가 1622년 베르겐 옵 좀을 포위했지만, 병력의 36%를 잃는 큰 패배를 겪었다. 이후 병력을 회복하여 1624년부터 1625년까지 브레다 포위전을 지휘했다. 같은 해, 스페인 국왕으로부터 로스 바르바세스 후작 작위를 받아 그란데 특권을 얻었다.

4. 4. 브레다 포위전

펠리페 4세는 포위가 너무 위험하고 비용이 많이 든다고 생각했고, 오라녜 공 모리츠 나사우의 구출 노력에도 불구하고, 브레다 점령은 긴 포위 (1624년 8월 28일 ~ 1625년 6월 5일) 끝에 이루어졌다.[3] 브레다의 항복은 벨라스케스의 유명한 그림인 ''라스 란자스''의 주제이다.[3]

암브로조 스피놀라의 판화


1621년 스피놀라의 테르시오 깃발


스피놀라는 오랜 포위 끝에 도시를 점령했다. 항복 후 그는 지도자와 군인들에게 안전한 통행을 보장했고, 그들은 깃발과 무기를 가지고 도시를 떠날 수 있었다. 이것은 스피놀라를 유럽 전역에 유명하게 만든 특별하고 관대한 제스처였다. 스피놀라는 "El valor del vencido es la gloria del vencedor" (패배한 자의 용기는 승리자의 영광이다)라고 주장했다. 진정한 기독교적 자비로 이해된 이 제스처는 벨라스케스의 작품에 묘사되어 있다.[5]

브레다 점령은 스피놀라의 경력의 절정이었다.

5. 만토바 계승 전쟁과 죽음

만토바 공국 계승 전쟁에서 스페인은 스피놀라를 전권 대사이자 장군으로 임명했다. 1629년 9월 19일 제노바에 상륙한 그는[3]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제안으로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와 함께 이탈리아 각지의 명화를 감상했다. 그러나 올리바레스 백작 공작은 스피놀라를 견제하며 그의 전권 대사 권한을 박탈하려 했다.

이미 61세였던 스피놀라는 30년 이상 전장에서 활동하여 건강이 좋지 않았고, 결국 1630년 9월 25일 카살레 포위전에서 "명예"와 "평판"을 언급하며 숨을 거두었다.[3] 펠리페 4세는 그의 공적을 기려 디에고 벨라스케스에게 ''브레다의 항복''을 그리게 했다. 스피놀라 가문은 "로스 발바세스 후작" 작위를 받았지만, 스페인 왕실로부터 전비 지원은 받지 못했다.[3]

5. 1. 만토바 계승 전쟁 참전

스페인 정부는 만토바 공국 계승 전쟁을 일으켰고, 스피놀라는 전권 대사이자 장군으로 임명되었다. 1629년 9월 19일 제노바에 상륙한 스피놀라는[3]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제안으로 스페인 왕실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와 함께 제노바, 밀라노, 베네치아, 로마의 유명한 그림들을 보러 갔다.

이탈리아에서 스피놀라는 올리바레스 백작 공작의 견제를 받았으며, 올리바레스 백작 공작은 스피놀라의 전권 대사 권한을 박탈하려 했다.

61세의 나이로 30년 이상 전장에서 활약한 스피놀라는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다. 결국 1630년 9월 25일 만토바 계승 전쟁 중 카살레 포위전에서 "명예"와 "평판"이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했다.[3]

5. 2. 올리바레스 백작과의 갈등

스페인 펠리페 4세의 총신으로 정치를 펼치던 올리바레스 백작은 플랑드르 정책에서 스피놀라와 의견이 대립했고, 스피놀라에게 비협조적이었다.[3] 이 정쟁은 1625년에 사망한 마우리츠 판 나사우의 뒤를 이어 네덜란드 군을 지휘한 프레데릭 헨드릭에게 유리하게 작용했고, 전황은 악화되었다.

1628년 1월, 올리바레스 백작은 스피놀라를 플랑드르 주둔 스페인 군 총사령관 임무에서 해임하고 마드리드로 소환했다. 스피놀라는 마드리드로 향하던 중, 라 로셸 포위전을 진행 중이던 프랑스 군의 루이 13세와 리슐리외 추기경과 회담하여 라 로셸 공격에 대한 조언을 했다. 마드리드 궁정에 합류한 스피놀라는 그 인간성으로 스페인 궁정을 매료시켰지만, 이는 본래 까다로운 성격으로 고립되기 쉬웠던 올리바레스 백작의 고립감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고 한다.

1629년, 암브로시오는 만토바 공국 계승 전쟁을 지휘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파견되었지만, 올리바레스 백작의 비협조적인 태도는 계속되었다.[3] 올리바레스는 스피놀라가 전권 대사로서의 권한을 박탈하게 했다. 결국 스피놀라는 모든 재산을 잃고 실의에 빠져 병사했다.

5. 3. 죽음

스피놀라는 61세의 나이로 30년 이상 전장에서 활동하여 건강이 악화되었다. 1630년 9월 25일 만토바 계승 전쟁 중 카살레 포위전에서 "명예"와 "평판"이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사망했다.[3]

펠리페 3세펠리페 4세에 대한 충성으로 막대한 재산을 쓴 대가로, 스페인에서 그의 후손들이 여전히 사용하는 "로스 발바세스 후작" 칭호를 받았다.[3] 그는 1635년 펠리페 4세의 명령에 따라 디에고 벨라스케스에 의해 사후에 ''브레다의 항복''에 그려졌다.

6. 유산

암브로시오 스피놀라는 뛰어난 야전 사령관으로, 대담한 전투 방식을 통해 종종 적의 허를 찔러 무찔렀다.[6] 기술 혁신가는 아니었지만, 군사 기술의 대가로서 빠른 기동과 혼전 작전을 펼쳤으며, 적의 약점을 파고들어 승리하는 데 능숙했다.[6]

디에고 벨라스케스1634년~1635년에 그린 명화 "브레다의 항복"에는 패장인 유스틴 판 나사우를 위로하는 암브로시오의 모습이 담겨 있다. 비록 스페인 왕실에 의해 그의 생애와 재산 전부를 잃었지만, 이 그림과 그가 이끈 스페인 병사들의 숭배는 스피놀라가 스페인으로부터 얻은 작은 영광의 일부가 되었다.

6. 1. 가족

암브로시오 스피놀라는 제노바에서 태어났으며, 섹스텐과 베나프로의 후작 필리포 스피놀라와 그의 아내 폴리세나 그리말디(살레르노 공 니콜로의 딸)의 장남이었다.[2] 스피놀라 가문은 제노바에서 매우 오래되고 부유하며 강력한 가문이었다.[3] 암브로시오 스피놀라의 여동생 도나 렐리아는 제2대 갈라토네 후작인 돈 줄리오 체사레 스콰르치아피코와 결혼했으며, 그들의 후손은 벨몬테 공작이다.

맏이였던 암브로시오는 가문을 잇기 위해 집에 남아 결혼했다. 1592년, 그는 갈레라타 백작의 딸 조반나 바치아돈네와 결혼했다.[3]

스피놀라와 조반나 바치아돈은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 필리포 (1594년 - 1659년 8월 8일): 발바세스 제2대 후작이자 그의 후계자.
  • 폴리세나 (1639년 사망): 디에고 펠리페 데 구스만(레가네스 제1대 후작)과 결혼, 플랑드르 총독.
  • 아구스틴 (1597년 - 1649년 2월 12일): 1625년 토르토사 주교, 1627년 그라나다 대주교, 1630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주교, 1645년 세비야 대주교.

7. 평가

스피놀라는 뛰어난 야전 사령관으로, 대담한 전투를 통해 상대를 우회하여 방심하게 만드는 전술을 자주 사용했다.[6] 그는 뛰어난 기술 혁신가는 아니었지만, 군사 기술의 대가였다. 전투에서 신속한 기동과 혼전 작전을 사용했으며, 적의 가장 약한 지점을 찾아 그곳에 힘을 집중시켜 승리하는 데 능숙했다.[6]

1634년부터 1635년에 걸쳐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명화 "브레다의 항복"에는 중앙에서 패장인 유스틴 판 나사우를 위로하는 암브로시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암브로시오는 그의 생애와 재산 전부를 스페인 왕실에 바쳤지만, 이 그림에 그의 모습이 그려진 것은 그가 이끈 스페인 병사들의 숭배와 함께 그가 스페인으로부터 얻은 영광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참조

[1] 서적 Lives of the warriors of the seventeenth century: Vol.I
[2] 서적 Collezione D'Autografi Di Famiglie Sovrane https://archive.org/[...]
[3] 백과사전 Spinola, Ambrose
[4] 서적 World History of Warfare https://archive.org/[...]
[5] 서적 La obra completa de Velázquez Taschen
[6] 서적 Who's Who in Military History: From 1453 to the Present Day Routledge
[7] 서적 Lives of the warriors of the seventeenth century: Vo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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