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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부아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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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앙부아즈 성은 루아르 강을 내려다보는 고지대에 위치한 역사적인 성으로, 갈로-로마 시대부터 요새가 존재했던 곳에 11세기에 건설되었다. 15세기에 프랑스 왕가의 소유가 된 후 여러 왕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샤를 8세와 프랑수아 1세 시기에 이탈리아 건축 양식이 도입되어 프랑스 르네상스 건축의 중요한 사례가 되었다. 특히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초청되어 클로 뤼세에서 생활하며 생 위베르 예배당에 묻히는 등 예술적,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앙부아즈 음모와 같은 종교 전쟁의 무대가 되기도 했으며, 프랑스 혁명 이후 쇠퇴기를 겪었지만, 현재는 역사 기념물로 지정되어 복원 및 보존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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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부아즈성 - [지명]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앙부아즈 성, 루아르 강이 내려다보임
앙부아즈 성, 루아르 강이 내려다보임
다른 이름앙부아즈 성
위치 정보
위치앙부아즈, 앵드르에루아르, 프랑스
상세 정보
건축 양식고딕 건축
프랑스 르네상스 건축
웹사이트앙부아즈 성 공식 웹사이트
문화재 정보
메리메 데이터베이스PA00097503

2. 역사

앙부아즈 성은 루아르 강을 내려다보는 고지대에 건설되어 중요한 여울목을 통제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 곳에는 갈로-로마 문화 시대부터 요새가 있었으며, 중세 시대에는 다리로 대체되었다. 11세기에 성이 건설되었을 때, 앙주 백작 풀크 3세가 요새를 돌로 재건했다.

1431년, 당시 성주 루이 당부아즈가 루이 11세에 대한 음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1434년 9월 4일 샤를 7세가 성을 압류하면서 왕가의 소유가 되었다. 이후 앙부아즈 성은 역대 프랑스 왕들의 사랑을 받았다. 샤를 8세는 성의 대대적인 개축을 결심하고, 1492년에는 프랑스 후기 고딕의 초기 플람보이앙 양식으로, 1495년에는 이탈리아 건축가 도메니코 다 코르토나와 프라 조콘도를 고용하여 프랑스 건축에 최초로 르네상스 장식 모티프를 도입했다.

프랑수아 1세는 앙부아즈 성에서 성장했으며,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성은 영광의 정점에 달했다. 1515년 12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왕의 손님으로 앙부아즈 성에 초대되어 근처 클로 뤼세에서 생활하며 성과 지하도로 연결되어 있었다. 다 빈치는 성에 인접한 생 위베르 예배당에 묻혔다.[15] 앙리 2세와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앙부아즈 성에서 자녀들과 메리 스튜어트를 양육했다.

1560년, 프랑스 종교 전쟁 기간 동안 위그노가 기즈 가문에 대항하여 일으킨 앙부아즈 음모가 발각되어 진압되었다. 이 과정에서 1,200명의 개신교도들이 처형되었고, 그 시신은 성벽 등에 매달렸다. 1563년 3월 12일에는 앙부아즈 칙령이 체결되어 프로테스탄트의 신앙 자유가 제한적으로 인정되었다.

17세기 초, 앙부아즈 성은 루이 13세의 동생 가스통, 오를레앙 공작에게 넘어갔다가 왕실 재산으로 돌아와 프롱드의 난 동안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루이 14세 시대에는 니콜라 푸케 등이 갇혔으며, 루이 15세는 에티엔 프랑수아 드 줴수, 쇼아젤 공작에게 성을 선물했다. 프랑스 혁명 시기(1793년)에는 국가에 몰수되기도 했다.[17] 나폴레옹은 로제 뒤코에게 앙부아즈를 선물했고, 뒤코는 성의 상당 부분을 파괴했다. 이후 앙부아즈는 루이즈 마리 아델라이드 드 부르봉, 오를레앙 공작 부인이 되찾았다.

1840년부터 앙부아즈 성은 프랑스 문화부에 의해 ''역사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루이 필리프 1세는 성을 복원했지만, 1848년 퇴위하면서 다시 정부에 몰수되었다. 알제리 정복에 저항했던 압드 알 카디르가 1848년부터 1852년까지 앙부아즈 성에 갇혀 있었다. 1873년, 루이 필리프의 상속인들이 재산을 관리하게 되었고, 외젠 비올레르 뒤크의 지휘 아래 대규모 수리가 이루어졌다. 나치 독일의 1940년 침공으로 성은 다시 손상되었으나, 현재는 생루이 재단을 통해 성을 수리 및 유지보수하고 있다.

2. 1. 기원

루아르 강 위의 돌출부에 건설된 앙부아즈 성은 중세 시대 이전부터 전략적 가치를 인정받아, 골족에 의해 오피둠이 건설되었다.[2] 9세기 말, 잉겔거는 오를레앙의 자작이 되었고, 그의 어머니를 통해 프랑스 왕들의 튜터인 위그 수도원장과 연관되었다. 잉겔거는 앙부아즈 성을 소유한 유력 가문의 아델라이스 드 앙부아즈와 결혼하여 앙주 백작이 되었으며, 그의 정치적 연계와 군사적 명성을 통해 출세했다. 앙부아즈 성은 잉겔거와 아델라이스의 상속자들에게 넘어갔고, 그의 아들 붉은 풀크가 영토를 확장하면서 앙부아즈, 로슈, 빌랑트루아는 그의 소유지의 핵심이 되었다.[3] 앙부아즈는 앙주 가문의 동쪽 경계에 위치했다.[4]

앙부아즈와 그 성은 987년 네라의 풀크에게 이어졌다. 풀크는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려는 블루아 백작 오도 1세와 다투어야 했다. 오도 1세는 렌 백작 코난 1세, 소뮈르의 젤두인, 생 플로랑 드 소뮈르 수도원장 로버트에게 풀크의 재산을 괴롭히도록 지시했다. 코난이 앙주의 서쪽 국경에서 분주한 동안 젤두인과 로버트는 소뮈로를 습격하고 통신을 방해하여 앙부아즈와 로슈의 동쪽 성들을 고립시키려 했다.[5] 앙부아즈를 더욱 위협하기 위해 쇼몽과 몽소로에 요새가 건설되었고, 생-아니앙에는 수비대가 주둔했다.[6]

11세기에 성이 건설되었을 때, 앙주 백작 풀크 3세가 요새를 돌로 재건했다.

2. 2. 중세 시대

루아르 강을 내려다보는 고지대에 건설된 앙부아즈 성은 갈로-로마 문화 시대부터 중요한 여울목을 통제하는 요새였다. 이 역할은 중세 시대에 다리로 대체되었다. 11세기에 성이 건설되었을 때, 악명 높은 앙주 백작 풀크 3세가 요새를 돌로 재건했다.[14]

2. 3. 왕실 거주지 (르네상스 시대)

샤를 8세는 1492년에 프랑스 후기 고딕 양식인 플랑부아얀 양식으로 앙부아즈 성의 대대적인 재건을 시작했다.[7] 1495년 이후에는 이탈리아인 건축가 도메니코 다 코르토나와 프라 지오콘도를 고용하여 프랑스 건축에서 처음으로 볼 수 있는 르네상스 장식 모티프를 앙부아즈에 도입했다. 콜린 비아르, 기욤 스노, 루이 아르망게르 등 3명의 프랑스 건축가들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다.

1494-1495년 이탈리아 전쟁 이후, 샤를 8세는 이탈리아 건축가와 장인을 프랑스로 데려와 성을 개조하여 "프랑스 최초의 이탈리아 양식 궁전"으로 만들었다.[8] 이들 중에는 파첼로 다 메르콜리아노가 있었는데, 그는 앙부아즈 성과 블루아 성의 정원을 설계했으며, 그의 작품은 프랑스 조경 디자이너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9] 샤를 8세는 1498년, 문설주에 머리를 부딪혀 앙부아즈 성에서 사망했다.[8] 그는 사망하기 전 더 큰 파르테르를 수용하고 격자 세공과 파빌리온으로 둘러싸기 위해 윗층 테라스를 넓혔다. 그의 후계자인 루이 12세는 앙드루에 뒤 세르소가 그린 1576년의 삽화, "프랑스 최고의 바스티망"에서 볼 수 있는 테라스 주변의 갤러리를 지었다. 파르테르는 20세기에 자갈밭에 조성된 잔디 직사각형과 나무의 공식적인 보스케로 재현되었다.



프랑수아 1세는 어머니 사부아의 루이즈의 소유였던 앙부아즈에서 자랐으며, 그의 통치 초기에 성은 영광의 정점에 달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515년 12월 앙부아즈 성에 왕의 손님으로 초빙되어 지하 통로로 연결된 인근 클로 뤼세에서 생활하고 작업했다. 기록에 따르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1519년 5월 2일에 사망했을 때 그는 원래 생 위베르 예배당에서 100m 떨어진 생 플로랑탱 예배당에 묻혔다고 한다(18세기 말에 철거되기 전).

프랑스 혁명 (1789-1799) 이후 생 플로랑탱 예배당은 너무나 낡은 상태가 되어 나폴레옹이 임명한 기술자는 보존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여 철거했다. 남은 석조물은 앙부아즈 성을 수리하는 데 사용되었다. 약 60년 후(레오나르도의 사망 및 원래 매장 후 330년) 생 플로랑탱 예배당의 기초 부지가 발굴되었는데, 그의 이름의 일부 문자가 포함된 석조 비석 조각과 함께 완전한 해골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서는 프랑스 전역의 예배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뼈 무더기와 아이들이 두개골을 차고 놀았다는 일화가 묘사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동시대 기록을 바탕으로 완전하고 머리뼈가 유난히 큰 뼈의 모음이 생 위베르 예배당에 묻힌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그곳에는 바닥 높이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금속 메달리온 부조 초상("멜지 초상"을 기반으로 함)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는 글자가 새겨진 대리석 석판이 있어 그의 최종 안식처임을 나타내는 듯하다.

앙리 2세와 그의 아내 메디치 가문의 카트린은 프랑스의 미래 프랑수아 2세와의 결혼이 약속된 스코틀랜드의 어린 여왕 메리 스튜어트와 함께 앙부아즈 성에서 아이들을 키웠다.

2. 4. 앙부아즈 음모 (종교 전쟁)

1560년, 프랑스 종교 전쟁 기간 동안, 어린 프랑수아 2세의 이름으로 프랑스를 사실상 통치했던 기즈 가문에 대항하여 위그노의 일원인 부르봉 가문이 일으킨 음모가 프랑수아 드 기즈 공작에 의해 발각되었다. 이 음모는 처형을 통해 진압되었는데, 처형은 한 달이 걸려 진행되었다. 처형이 끝났을 때, 1,200명의 개신교도들이 교수형에 처해졌고, 도시 성벽, 축제 때 깃발과 태피스트리를 걸던 쇠고리, ''Logis du Roy''의 발코니에 매달렸다.[16] 시체 냄새 때문에 곧 궁정은 도시를 떠나야 했다.

1563년 3월 12일, 국왕 납치 음모에 연루되었던 콩데 공 루이 1세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 사이에 앙부아즈에서 평화 조약이 서명되었다. "앙부아즈 칙령"은 프로테스탄트에게 도시 성벽 밖이라면 영주와 재판관의 교회에서만 신앙을 인정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어느 쪽도 이 타협에 만족하지 못했고, 널리 준수되지도 않았다.

2. 5. 쇠퇴기

17세기 초, 앙부아즈 성은 사실상 버려진 채 루이 13세의 동생인 가스통, 오를레앙 공작에게 넘어갔다. 가스통 공작 사후 왕실 재산으로 돌아왔고, 프롱드의 난 동안에는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루이 14세 시대에는 실각한 재상 니콜라 푸케와 로장 공작이 이곳에 갇히기도 했다.[11] 루이 15세는 자신의 재상 에티엔 프랑수아 드 줴수, 쇼아젤 공작에게 앙부아즈 성을 선물했다. 이후 쇼아젤이 사망하자 루이 장 마리 드 부르봉, 팡티에브르 공작이 이 성을 사들였다.

프랑스 혁명 시기(1793년)에는 성이 국가에 몰수되기도 했다.[17] 나폴레옹은 로제 뒤코에게 앙부아즈를 선물했는데, 뒤코는 비용 절감을 위해 성의 상당 부분을 파괴했다. 뒤코는 1816년 추방되었고, 앙부아즈는 루이즈 마리 아델라이드 드 부르봉, 오를레앙 공작 부인(팡티에브르의 딸이자 루이 필리프 1세의 어머니)이 되찾았다.

1840년부터 앙부아즈 성은 프랑스 문화부에 의해 ''역사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루이 필리프 1세는 성을 복원하기 시작했지만, 1848년 퇴위하면서 성은 다시 정부에 몰수되었다. 알제리 정복에 저항했던 압드 알 카디르와 그의 가족 및 수행원들은 1848년 11월 앙부아즈 성으로 이송되었다.[11] 1852년 ''Bentley's Miscellany''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압드 알 카디르가 성에 거주하기 전에는 관광객들이 자주 방문했었다고 한다.

1852년 10월,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대통령은 압드 알 카디르를 방문하여 석방 소식을 전했다.[13] 1873년, 루이 필리프의 상속인들이 재산을 관리하게 되었고, 외젠 비올레르 뒤크의 지휘 아래 대규모 수리가 이루어졌다. 나치 독일의 1940년 침공으로 성은 또다시 손상되었다. 현재는 루이 필리프의 후손인 파리 백작이 생루이 재단을 통해 성을 수리하고 유지보수하고 있다.

3. 건축

루아르 강을 내려다보는 고지대에 건설된 앙부아즈 성. 주변 마을 위에 솟아 있다.


앙부아즈 성은 루아르 강을 내려다보는 고지대에 건설되어 중요한 여울을 통제하는 역할을 했다. 이 장소에는 갈로-로마 문화 시대부터 요새가 세워졌으며, 중세 시대에 다리로 대체되었다. 11세기에 성이 건설되었을 때, 앙주 백작 풀크 3세가 요새를 돌로 재건했다.

1431년 성주 루이 당부아즈가 루이 11세에 대한 음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1434년 9월 4일 샤를 7세가 성을 압류했다. 왕가의 손에 들어간 후, 앙부아즈 성은 프랑스 왕들이 선호하는 곳이 되었다.

샤를 8세는 1492년에 프랑스 후기 고딕 양식인 플람보이앙 양식으로 대대적인 재건을 시작했다. 1495년 이후에는 이탈리아인 건축가 도메니코 다 코르토나와 프라 지오콘도를 고용하여 프랑스 건축에서 처음으로 볼 수 있는 르네상스 장식 모티프를 앙부아즈에 도입했다. 콜린 비아르, 기욤 스노, 루이 아르망게르 등 3명의 프랑스 건축가의 이름이 보존되어 있다.

1494-1495년 이탈리아 전쟁 이후, 샤를 8세는 이탈리아 건축가와 장인을 프랑스로 데려와 성을 개조하여 "프랑스 최초의 이탈리아 양식 궁전"으로 만들었다.[8] 이탈리아에서 데려온 사람들 중에는 앙부아즈 성과 블루아 성의 정원을 설계한 파첼로 다 메르콜리아노가 있었는데, 그의 작품은 프랑스 조경 디자이너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9]

프랑수아 1세는 어머니 사부아의 루이즈의 소유였던 앙부아즈에서 자랐으며, 그의 통치 초기에 성은 영광의 정점에 달했다. 앙리 2세와 그의 아내 메디치 가문의 카트린은 앙부아즈 성에서 아이들을 키웠다.

3. 1. 생 위베르 예배당



생 위베르 예배당에 있는 다 빈치의 묘


생 위베르 예배당은 앙부아즈성에 인접해 있으며, 1491년부터 1496년 사이에 지어졌다.[15]

레오나르도 다 빈치1515년 12월 프랑수아 1세의 초대로 앙부아즈 성에 와서 지하 통로로 연결된 인근 클로 뤼세에서 생활하고 작업했다. 기록에 따르면 1519년 5월 2일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사망했을 때 그는 원래 생 위베르 예배당에서 북동쪽으로 100m 떨어진 생 플로랑탱 예배당에 묻혔다고 한다(18세기 말에 철거되기 전).

프랑스 혁명 (1789-1799) 이후 생 플로랑탱 예배당은 너무나 낡은 상태가 되어 나폴레옹이 임명한 기술자는 보존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여 철거했다. 남은 석조물은 앙부아즈 성을 수리하는 데 사용되었다. 약 60년 후(레오나르도의 사망 및 원래 매장 후 330년) 생 플로랑탱 예배당의 기초 부지가 발굴되었는데, 그의 이름의 일부 문자가 포함된 석조 비석 조각과 함께 완전한 해골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서는 프랑스 전역의 예배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뼈 무더기와 아이들이 두개골을 차고 놀았다는 일화가 묘사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동시대 기록을 바탕으로 완전하고 머리뼈가 유난히 큰 뼈의 모음이 생 위베르 예배당에 묻힌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그곳에는 바닥 높이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금속 메달리온 부조 초상("멜지 초상"을 기반으로 함)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는 글자가 새겨진 대리석 석판이 있어 그의 최종 안식처임을 나타내는 듯하다.

4. 정원

파첼로 다 메르콜리아노는 샤를 8세[14]의 명을 받아 앙부아즈 성의 정원을 설계했다. 앙부아즈 성 정원은 프랑스 최초의 이탈리아식 정원으로, 프랑스식 정원(기하학적 구성의 정원)의 시초가 되었다. 샤를 8세는 위쪽 테라스를 넓혀 정원을 확장하고 격자 울타리와 정자를 설치했다. 루이 12세는 정원 주변에 갤러리를 추가했다. 1576년 앙드루에 드 세르소는 저서 "프랑스에서 가장 뛰어난 건축(Les plus excellens bastimens de France)"에서 이 갤러리를 언급했다. 20세기에 재현된 파르테르(장식 화단)는 사각형 잔디밭 둘레에 자갈과 정형된 키 큰 나무를 배치한 형태이다.

5. 갤러리

성에서 바라본 앙부아즈 마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설계한 무장 탱크


앙부아즈 성


자크 I 앙드루에 뒤 세르소가 그린 앙부아즈 성의 평면도


앙부아즈 성의 평면도


성의 내부 장식


참조

[1] Base Mérimée Château d'Amboise
[2] harvnb
[3] harvnb
[4] harvnb
[5] harvnb
[6] harvnb
[7] harvnb
[8] harvnb
[9] harvnb
[10] 웹사이트 Chapel of Saint Hubert, Amboise https://www.worldhis[...] 2019-05-04
[11] harvnb
[12] harvnb
[13] harvnb
[14] 문서 シャルル8世 (フランス王)は1498年、低い戸口にうっかり頭をぶつけ、それが元でこの城で亡くなった。
[15] 문서 記録によれば、レオナルド・ダ・ヴィンチが埋葬された教会は、アンボワーズ城の中にあるサン・フロランタン教会堂であるという。ナポレオン・ボナパルトの時代、教会は壊滅的な状態にあった。フランス革命期に荒廃したサン・フロランタンを、ナポレオンが委託した技術者は保存の価値なしと判断して解体、石造部分は城の補修に使用された。約60年後にサン・フロランタンの跡地が発掘されると、骸骨1体と、ダ・ヴィンチの名の一部が刻まれた石が見つかった。これが現在サン・ユベールの教会堂に保存されている骸骨である。
[16] 서적 いつかは行きたいヨーロッパの世界でいちばん美しいお城 大和書房
[17] 문서 観光客が目にする現在のアンボワーズ城は、かつての規模の5分の1ほどである。城のパラピット(胸壁)を歩くと昔の面影を偲ぶことができ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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