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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기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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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기차르는 칭기즈 칸의 4대손이자 오고타이 한국의 통치자 카이두 칸의 아들로, 1307년 두아에 의해 오고타이 한국의 칸으로 선출되었으나 실권은 없었다. 1301년 아버지 카이두 칸 사후, 차파르, 오로스 등과 권력 투쟁을 벌였으며, 차가타이 한국의 두아에게 의탁하기도 했다. 이후 차파르, 투크메와 연합하여 차가타이 한국을 상대로 교전했으나 1309년 전투에서 패하여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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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기차르

2. 생애

칭기즈 칸의 4대손이자 오고타이 칸의 증손으로, 오고타이 한국의 통치자 카이두 칸의 아들이다. 차파르, 쿠툴룬은 그의 형제들이다. 『집사』에 따르면 몽골 제국 제2대 황제 오고타이의 손자 카이두의 둘째 아들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머니에 대해서는 『집사』에서 이름과 출신 부족 모두 기록이 없어 자세한 내용은 불분명하다. "아름다운 용모에 재능이 있었다"고 하며 카이두는 야기차르를 매우 사랑했다고 한다.

카이두가 생존해 있는 동안, 야기차르는 조치 울루스의 좌익부인 오르다 울루스의 최전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카이두는 '오르다 울루스 당주 바얀이 대원 울루스/훌레구 울루스와 연합하여 카이두 울루스의 사업 손실을 초래하는 것'을 우려하여 야기차르, 샤, 트레 테무르, 메리크 테무르라는 4명의 왕자를 오르다 울루스와의 경계선에 파견했다.

1301년 8월 원나라와의 전투에서 얻은 부상으로 아버지 카이두 칸이 사망하자, 야기차르는 아버지 카이두 칸이 후계자로 지명한 오로스의 편에 섰다. 오로스가 패하자 그는 차가타이 한국의 두아에게로 망명하였다.

1306년 차파르 칸과 싸우다가 일련의 패배를 겪은 후 그는 자신의 군대와 귀족들에게 버림받았다. 1307년 두아쿠릴타이를 소집했고, 야기차르를 오고타이 한국의 새로운 칸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실권은 차가타이 한국 두아에게 있었다. 또한 두아는 오고타이 한국의 일부를 분할해 투크메에게 넘겼고, 차파르는 울루스의 일부만을 다스릴 수 있었다.

야기차르는 1308년 두아가 죽을 때까지 그에게 충실하였다. 이후 차가타이 한국에서 권력을 차지하려는 탈리쿠의 편에 섰다. 그러나 차가타이 한국의 다른 왕위 경쟁자와 대립하게 된 야기차르는 차파르 및 투크메와 협력하여 차가타이 한국을 상대로 교전, 1309년 알말리크 근처의 결전에서 패하고 야기차르는 전사하였다.

2. 1. 가문 배경

칭기즈 칸의 4대손이자 오고타이 칸의 증손으로, 오고타이 한국의 통치자 카이두 칸의 아들이다. 차파르, 쿠툴룬은 그의 형제간이다. 『집사』에 따르면 몽골 제국 제2대 황제 오고타이의 손자 카이두의 둘째 아들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머니에 대해서는 『집사』에서 이름과 출신 부족 모두 기록이 없어 자세한 내용은 불분명하다. "아름다운 용모에 재능이 있었다"고 하여 카이두는 야기차르를 매우 사랑했다고 한다.

2. 2. 초기 활동: 쿠페레크의 난

카이두가 생존해 있는 동안, 야기차르는 조치 울루스의 좌익부인 오르다 울루스의 최전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라시드 앗딘의 《집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1]

"조치 칸기: 이(1303.1-2경 바얀에 의한 대 가잔 유시) 이전, (오르다 울루스령과 대원 울루스령은) 서로 인접해 있었다. 이 수 년 동안, 카이두는 그들(바얀과, 주치 가문 종주 토크타의 군)이 카안(=성종 테무르) 군에 합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야기차르라는 이름의 자신의 차남, 그리고 샤라는 이름의 또 다른 아들을, 그리고 몽케 카안의 아들 실리게의 아들 트레 테무르, 그리고 아릭 부케의 아들 메리크 테무르를 군과 함께 바얀의 제주의 국경에 파견하여, 그 경역을 그들에게 맡겼다. 즉, (그들이) 카안 군과 바얀 군 사이에 장애물이 되어, (양군이) 함께 하지 못하도록."

즉, 카이두는 '오르다 울루스 당주 바얀이 대원 울루스/훌레구 울루스와 연합하여 카이두 울루스의 사업 손실을 초래하는 것'을 우려하여 야기차르, 샤, 트레 테무르, 메리크 테무르라는 4명의 왕자를 오르다 울루스와의 경계선에 파견했다. 야기차르 등의 파견은 '쿠페레크의 난(오르다 가문 왕족 쿠페레크에 의한, 바얀에 대한 반란)'과 연동된 것으로, 이에 대해 대원 울루스 측도 토토가크나 유와스와 같은 장군을 시베리아 방면에 전개하여 카이두 울루스 군과 싸운 것이 한문 사료상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빌 시빌의 전투).

2. 3. 카이두 사후의 권력 투쟁

칭기즈 칸의 4대손이자 오고타이 칸의 증손이며, 오고타이 한국의 통치자 카이두 칸의 아들이다. 1301년 8월 원나라와의 전투에서 얻은 부상으로 아버지 카이두 칸이 사망하자, 야기차르는 아버지 카이두 칸이 후계자로 지명한 오로스의 편에 섰다. 오로스가 패하자 그는 차가타이 한국의 두아에게로 망명하였다.

1306년 차파르 칸과 싸우다가 일련의 패배를 겪은 후 그는 자신의 군대와 귀족들에게 버림받았다. 1307년 두아쿠릴타이를 소집했고, 야기차르를 오고타이 한국의 새로운 칸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실권은 차가타이 한국 두아에게 있었다. 또한 두아는 오고타이 한국의 일부를 분할해 투크메에게 넘겼고, 차파르는 울루스의 일부만을 다스릴 수 있었다.

야기차르는 1308년 두아가 죽을 때까지 그에게 충실하였다. 이후 차가타이 한국에서 권력을 차지하려는 탈리쿠의 편에 섰다. 그러나 차가타이 한국의 다른 왕위 경쟁자와 대립하게 된 야기차르는 차파르 및 투크메와 협력하여 차가타이 한국을 상대로 교전, 1309년 알말리크 근처의 결전에서 패하고 야기차르는 전사하였다.

카이두가 1301년 테켈리크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사망하자 카이두 울루스는 혼란 상태에 빠졌다. 카이두는 아들들 중에서 오로스를 가장 마음에 들어 후계자로 여겼지만, 차가타이 가문의 수장인 두아는 굳이 서장자인 차파르를 지원했고, 1303년에는 두아의 지원을 받아 차파르가 에밀 강에서 즉위했다. 이에 원래 후계자였던 오로스, 그의 여동생이자 전사로도 유명했던 쿠르룬, 구육 가문의 토크메 등은 차파르의 즉위를 "카이두의 의지와 명령에 거스르는 것"이라 비난하며, 양측은 내전에 돌입했다. 애초에 두아가 차파르를 옹립한 목적은 오고데이 가문 내부에 불화를 일으켜 세력을 약화시키고, 그 대신 차가타이 가문이 "카이두 울루스"의 주도권을 잡는 데 있었으며, 오로스와 차파르가 오고데이 가문끼리 서로 다투는 것은 두아의 의도대로였다.

1304년 두아는 오랫동안 적대 관계에 있던 대원 울루스와 단독 강화 조약을 맺었고, 1306년에 이르러서는 카이산이 이끄는 대원 울루스 군과 두아 군의 협공으로 대부분의 오고데이계 제후들이 포로가 되었으며, 차파르, 오로스, 토크메, 야기차르 등만이 추격을 피해 중앙아시아에 머물 수 있었다(이르티쉬 강 전투). 부하의 영민을 거의 잃은 차파르 등은 어쩔 수 없이 차가타이 가문의 두아에게 투항했고, 같은 해 쿠나스 초원에서 쿠릴타이를 개최한 두아는 차파르를 폐위시킴으로써 명실상부하게 카이두의 후계자이자 중앙아시아의 지배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올제이투 사》에 따르면, 이때 두아에 의해 야기차르는 "카이두 울루스의 제왕위"에 올랐다고 하지만, 실질을 동반하지 않는 장식적인 제왕임은 분명했다. 마찬가지로 《올제이투 사》는 이 무렵의 야기차르가 "나우루즈의 제왕(=명목상의 왕)"이라고 불리며 조롱당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두아가 1307년에 사망하자, 그 뒤를 이은 아들 곤체크 역시 재위 1년 만에 급사했고, 먼 친척이자 원로인 나리크가 즉위하게 되었지만, 이번에는 나리크와 두아의 유아들 사이에서 내전이 일어났다. 이를 호기로 여긴 차파르는 야기차르, 오로스, 토크메 등 오고데이 가문의 잔당과 함께 봉기하여 나리크를 격파하고 즉위한 케베크를 한때 격파했다. 그러나 대원 울루스의 지원을 받아 체제를 정비한 케베크에 의해 차파르 등은 패배를 겪었고, 당시 대원 울루스의 카안이던 카이산(무종 쿠르크 카안)의 권유도 있어 대원 울루스로의 망명을 결심했다. 《올제이투 사》에 따르면, 차파르 등은 1천 2백 마리의 우라크(역마)를 이용하여 쿠르크 카안의 아래로 왔지만, 칸발리크(대도)에 도착했을 때 야기차르는 "독의 샤르바트(약)"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한다.

2. 4. 최후

1301년 8월 원나라와의 전투에서 얻은 부상으로 아버지 카이두 칸이 그해 혹은 이듬해 사망하자, 야기차르는 아버지 카이두 칸이 후계자로 지명한 오로스의 편에 섰다. 오로스가 패하자 그는 차가타이 한국의 두아에게로 망명하였다.

1306년 차파르 칸과 싸우다가 일련의 패배를 겪은 후 그는 자신의 군대와 귀족들에게 버림받았다. 1307년 두아쿠릴타이를 소집했고, 야기차르를 오고타이 한국의 새로운 칸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실권은 차가타이 한국 두아에게 있었다. 또한 두아는 오고타이 한국의 일부를 분할해 투크메에게 넘겼고, 차파르는 울루스의 일부만을 다스릴 수 있었다.

야기차르는 1308년 두아가 죽을 때까지 그에게 충실하였다. 이후 차가타이 한국에서 권력을 차지하려는 탈리쿠의 편에 섰다. 그러나 차가타이 한국의 다른 왕위 경쟁자와 대립하게 된 야기차르는 차파르 및 투크메와 협력하여 차가타이 한국을 상대로 교전, 1309년 알말리크 근처의 결전에서 패하고 야기차르는 전사하였다.

3. 몽골 제국 내에서의 위치

이전 답변에서는 요약만 주어지고 원문 소스가 없어 내용을 작성할 수 없었습니다. 원문 소스가 제공되면 몽골 제국 내 야기차르의 위치에 대한 내용을 작성하고, 위의 지시사항에 따라 검토 및 수정을 진행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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