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다 쓰네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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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시다 쓰네나가는 가마쿠라 시대의 공경으로, 1244년에 관위를 시작으로 1303년 출가할 때까지 다양한 관직을 역임했다. 그는 가메야마 천황과 고우다 천황을 섬기며 조정 정치에 깊이 관여했고, 특히 《길속기》라는 일기를 통해 가마쿠라 시대 후기의 정치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길속기》에는 몽골의 일본 침공에 대한 내용과 삼별초의 일본 접근 시도 등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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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력
1244년(간겐 2년) 종5위하 관위를 받았다. 1251년(겐초 3년) 종5위상·이즈미노카미에 서임되었고, 1255년(겐초 7년) 정5위하를 받았다.
1259년(쇼카 3년) 병부권소보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가메야마 천황이 즉위하자 측근으로 승진하였다. 1261년(고초 원년) 중궁권대진, 1263년(고초 3년) 미노노카미를 거쳐 1267년 1월 5위 구란도에 보임되었다. 1267년 4월 5일, 저택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7월 10일에는 산문봉행(山門奉行)으로 쓰네나가가 견책되어 병거(屏居)를 명받았으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4] 1269년 1월 춘궁권대진에 임명되어 요히토 친왕(훗날의 고우다 천황)을 섬겼고, 1269년 춘궁대진으로 옮겼다. 1270년 좌소변에 임명되었고, 1271년 종4위하·권우중변이 되었다.
1272년 종4위상에 이어 정4위하가 되었다. 1273년 우중변·우궁성사를 맡았고 고우다 천황 즉위 후 1274년 우대변, 1275년 구란도노토에 보임되어 좌대변으로 전임하였다. 조동대사장관을 거쳐 1277년 참의로 임명되어 구교 반열에 들었다. 1278년 종3위·오미노곤노카미가 되었다. 1281년 정3위를 받았다.
1283년 권중납언으로 옮기고 1285년 종2위로 올랐다. 1287년 1월 병부경을 겸임하였으며 1288년 정2위·중납언에 서임되었지만, 지묘인 왕통의 후시미 천황이 즉위하고 다이가쿠지 왕통인 가메야마 상황에 대한 충성의 의미로 같은 해 사퇴하였으나,[5] 그 뒤로도 조정의 정치에 계속 관여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1301년 가메야마 상황의 손자 고니조 천황이 즉위하면서 중납언으로 복직하였다. 그러나 1302년 11월 18일, 쓰네나가는 가메야마 법황에 대한 무례를 이유로 칩거를 명받았다. 12월 5일에 다시 출사하는 것이 허락되었고,[6] 1303년 권대납언에 이르렀으나 그 해에 출가하였다.
2. 1. 관직 경력 상세
요시다 쓰네나가의 일기 《길속기》(吉続記, きつぞくき)는 《경장경기》(経長卿記, つねながきょうき) 또는 《길속어기》(吉続御記)라고도 하는데, 쓰네나가 자신의 고조할아버지이자 헤이안 시대의 구교였던 요시다 쓰네후사(吉田経房, 후지와라노 쓰네나가)가 남긴 일기 《깃키》(吉記)를 잇는다는 의미를 담은 제목이다. 《길속기》의 원본은 사라졌고 사본으로 분에이 4년부터 겐겐 원년까지 18년 정도의 단속적인 내용의 기사가 전해지고 있다.
요시다 쓰네나가는 가메야마 천황의 측근으로 승진하여 고우다 천황 즉위 후에도 요직을 맡았다. 후시미 천황 즉위 후 다이가쿠지 왕통인 가메야마 상황에 대한 충성심으로 사퇴했으나, 조정 정치에 계속 관여했다.[5] 고니조 천황 즉위 후 복직했으나, 가메야마 법황에게 무례를 범해 칩거를 명받기도 했다.
3. 계보
4. 《길속기》
쓰네나가 본인이 가메야마, 고우다 두 상황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조정의 정치에도 깊게 관여하였으며, 아울러 당시 조정과 막부 사이의 여러 가지 교섭을 담당하였던 인물이기에, 그의 일기인 《길속기》는 가마쿠라 후기 정치사를 연구하는 기본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일기에는 양통질립을 둘러싼 문제에 있어 다이카쿠지 왕통 지지측의 입장이라던가 일본 전근대사 초유의 국난이라 일컫는 몽골의 침공에 대한 당시 전국 각지 지샤에서의 가지기도, 방어책 등에 대한 상세한 기사를 싣고 있다. 또한 1970년대 고려첩장 불심조조 문서 발견으로 알려진 당시 삼별초의 일본으로의 접근 시도 또한 언급하고 있다.[7] 일본의 『사료집성』(史料大成)에 수록되었다.
5. 평가
그의 일기 《길속기》(吉続記)는 원나라의 침공이라는 국난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담고 있다.
5. 1. 몽골 침입과 쓰네나가의 역할
요시다 쓰네나가의 일기 《길속기》(吉続記, きつぞくき)는 《경장경기》(経長卿記, つねながきょうき) 또는 《길속어기》(吉続御記)라고도 불린다. 쓰네나가는 원나라의 침공이라는 일본 전근대사 초유의 국난에 대한 당시 전국 각지 지샤에서의 가지기도, 방어책 등에 대한 상세한 기사를 자신의 일기에 기록하였다.[7] 또한 1970년대 고려첩장 불심조조 문서 발견으로 알려진 당시 삼별초의 일본으로의 접근 시도 또한 언급하고 있다.[7]
참조
[1]
서적
大日本史料
1267-08-08 # 문영 4년 7월 10일 -> 1267년
[2]
서적
吉田経長
朝日日本歴史人物事典
[3]
서적
吉続記
1302-01-06 # 정안 4년 12월 5일 -> 1302년
[4]
서적
大日本史料
1267-08-08 # 문영 4년 7월 10일 -> 1267년
[5]
서적
吉田経長
朝日日本歴史人物事典
[6]
서적
吉続記
1302-01-06 # 정안 4년 12월 5일 -> 1302년
[7]
서적
伴牒狀趣, 蒙古兵可來責日本, 又乞糴, 此外乞救兵歟, 就狀了見區分.
서울대출판부
1271-09-05 # 분에이 8년 9월 5일 -> 127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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