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율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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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율유가는 1212년 금나라에 반기를 들고 몽골 제국에 협력한 인물이다. 몽골군과 연합하여 금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1213년 동요를 건국했다. 요나라의 부흥을 꾀했지만, 금나라의 반격과 내부 갈등을 겪었다. 1215년에는 금나라의 동경을 평정하고 칭기즈 칸에게 요왕으로 봉해졌다. 사후에는 그의 아내 요리씨가 섭정했고, 아들 야율설저가 몽골 제국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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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율유가 | |
|---|---|
| 기본 정보 | |
![]() | |
| 성 | 야율(耶律) |
| 이름 | 유가(留哥) |
| 시호 | 충순(忠順) |
| 생애 | |
| 출생 | 1165년 |
| 사망 | 1220년 |
| 묘지 | 장릉(長陵) |
| 작위 | |
| 봉작 | 요왕(遼王) |
| 가족 | |
| 아버지 | 야율록(耶律祿) |
| 어머니 | 이름 미상 |
| 배우자 | 요리씨(姚里氏) |
| 아들 | 야율습렬(耶律習涅) 야율설도(耶律薛闍) |
| 형제 | 야율사(耶律謝) 야율안(耶律按) |
| 경력 | |
| 주요 활동 | 동요(東遼) 건국 |
| 기타 | |
| 관련 인물 | 금 선종 몽골 태조 야율걸노 야율수사보 포선만노 |
2. 생애
야율유가는 본래 금나라 북쪽 변방에 거주했다. 몽골 제국의 칭기즈 칸이 사막 북쪽에서 발흥했을 때, 금나라는 요나라 유민의 반란을 경계하여 요나라 백성 1호에 여진족 2호를 붙여 감시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야율유가는 1212년(임신년) 융안·한주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2] 이 무렵, 알치 노얀이 이끄는 몽골군이 처음으로 요서 지방에 들어오자, 야율유가는 자신이 가진 병력을 제공하고, 화살을 꺾어 몽골 제국에 섬길 것을 맹약했다. 알치는 "나는 [칭기스 칸에게] 돌아가 요나라 정복은 그대에게 맡기도록 주청하겠다"라고 화답했다.[3]
금나라는 군대를 보내 추포를 시도했지만, 모두 야율유가에 의해 격퇴되었다. 야율유가는 동족인 야율야적의 군대와 합류하여, 수개월 만에 십수만 명의 군세를 이끌게 되었다. 사람들은 야율유가를 도원수, 야율야적을 부원수로 추대하여 요동 지역에서 큰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1213년 3월, 야율유가는 왕을 칭하고 국호를 요(遼)로 정했으며, 연호를 원통(元通)이라 하였다.[2] 요리씨를 황후로, 동생 야율사불을 군왕으로, 야율파사, 야율승가노, 야율야적, 야율이가노 등을 승상, 원수, 상서로 임명하여 건국 체제를 굳혔다.[7] 그러나 같은 해 금나라 선종의 반격으로 일시적인 패배를 겪었다.
1214년, 야율유가는 귀인의 북하에서 금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요동의 주군을 점령, 함평을 중경으로 삼았다.[8] 1215년, 석말에센 등과 함께 금나라의 동경(요양부)을 평정하고[9] 칭기즈 칸에게 요왕으로 봉해졌다.
1216년, 야율유가의 동생 야율사불은 야율걸노, 야율금산, 야율청구, 야율통고여 등의 추대를 받아 황제 자리에 올랐고, 국호를 요로 정했다. 이를 후세에 '''후요'''라고 부른다.[10] 그러나 야율사불은 부하 야율청구에게 살해당했고, 야율금산, 야율통고여, 야율함사 등이 잇따라 독립하여 고려로 도망치면서, 건국 초기에 60만 명이라고 칭했던 후요 정권은 크게 세력이 줄어들었다.[10]
1218년 말, 야율유가의 요청에 따라 몽골군, 거란군, 대진국 연합군은 1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고려로 들어와 고려에 협력하여 후요 정권을 토벌할 것을 제안했다.[10] 1219년, 고려와 동맹을 맺는 데 성공한 몽골군은 야율함사의 근거지인 강동성을 함락시켰고, 야율유가는 후요에게 빼앗겼던 백성을 다시 자신의 세력 아래 두었다.[11][12]
1220년 야율유가가 사망하자 몽골은 그의 아내 요리씨를 섭정으로 삼아 7년 동안 이 지역을 통치하게 하고, 야율유가의 후계자이자 요리씨의 의붓아들인 야율설저(1193년 - 1238년)를 보좌하게 했다.[1] 야율설저는 칭기스 칸의 서정에 종군하여 오고타이 칸을 구출하는 등의 공적을 세웠다.[1] 야율설저의 생모는 일찍 사망했고, 망부의 후계자가 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으나, 계모 요리씨는 자신의 아들을 제쳐두고 설저를 후계자로 삼았다.[1] 오고타이 칸 시대에 야율설저는 남송, 고려 원정에 종군했고, 여러 격전을 통해 행광녕로도원수부사에 임명되었으며, 1238년에 4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2. 1. 몽골군과의 협력 (1212년 ~ 1213년)
야율유가는 본래 금나라 북쪽 변방에 거주했다. 몽골 제국의 칭기즈 칸이 사막 북쪽에서 발흥했을 때, 금나라는 요나라 유민의 반란을 경계하여 요나라 백성 1호에 여진족 2호를 붙여 감시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야율유가는 1212년 (임신년)에 융안·한주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2] 이 무렵, 알치 노얀이 이끄는 몽골군이 처음으로 요서 지방에 들어오자, 야율유가는 자신이 가진 병력을 제공하고, 화살을 꺾어 몽골 제국에 섬길 것을 맹약했다. 이를 받아들인 알치는 "나는 [칭기스 칸에게] 돌아가 요나라 정복은 그대에게 맡기도록 주청하겠다"라고 말했다.[3]금나라는 군대를 보내 추포를 시도했지만, 이들은 모두 야율유가에 의해 격퇴되었다. 야율유가는 동족인 야율야적의 군대와 합류하여, 수개월 만에 십수만 명의 군세를 이끌게 되었다. 사람들은 야율유가를 도원수, 야율야적을 부원수로 추대하여 요동 지역에서 큰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2. 2. 동요 건국 (1213년 ~ 1215년)
1213년 3월, 야율유가는 왕을 칭하고 국호를 요(遼)로 정했으며, 연호를 원통(元通)이라 하였다.[2] 요리씨를 황후로, 동생 야율사불을 군왕으로, 야율파사, 야율승가노, 야율야적, 야율이가노 등을 승상, 원수, 상서로 임명하여 건국 체제를 굳혔다.[7] 그러나 같은 해 금나라 선종의 반격으로 일시적인 패배를 겪었다.1214년, 야율유가는 귀인의 북하에서 금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요동의 주군을 점령, 함평을 중경으로 삼았다.[8]
1215년, 석말에센 등과 함께 금나라의 동경(요양부)을 평정하고[9] 칭기즈 칸에게 요왕으로 봉해졌다.
2. 3. 후요와의 갈등 및 고려와의 관계 (1216년 ~ 1219년)
1216년, 야율유가의 동생 야율사불은 야율걸노, 야율금산, 야율청구, 야율통고여 등의 추대를 받아 황제 자리에 올랐고, 국호를 요로 정했다. 이를 후세에 '''후요'''라고 부른다.[10] 그러나 야율사불은 부하 야율청구에게 살해당했고, 야율금산, 야율통고여, 야율함사 등이 잇따라 독립하여 고려로 도망치면서, 건국 초기에 60만 명이라고 칭했던 후요 정권은 크게 세력이 줄어들었다.[10]1218년 말, 야율유가의 요청에 따라 몽골군, 거란군, 대진국 연합군은 1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고려로 들어와 고려에 협력하여 후요 정권을 토벌할 것을 제안했다.[10] 1219년 고려와 동맹을 맺는 데 성공한 몽골군은 야율함사의 근거지인 강동성을 함락시켰고, 야율유가는 후요에게 빼앗겼던 백성을 다시 자신의 세력 아래 두었다.[11][12]
2. 4. 사망과 그 후 (1220년 ~ 1238년)
1220년 야율유가가 사망하자 몽골은 그의 아내 요리씨를 섭정으로 삼아 7년 동안 이 지역을 통치하게 하고, 야율유가의 후계자이자 요리씨의 의붓아들인 야율설저(1193년 - 1238년)를 보좌하게 했다.[1]야율설저는 칭기스 칸의 서정에 종군하여 오고타이 칸을 구출하는 등의 공적을 세웠다.[1] 야율설저의 생모는 일찍 사망했고, 망부의 후계자가 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으나, 계모 요리씨는 자신의 아들을 제쳐두고 설저를 후계자로 삼았다.[1]
오고타이 칸 시대에 야율설저는 남송, 고려 원정에 종군했고, 여러 격전을 통해 행광녕로도원수부사에 임명되었으며, 1238년에 4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참조
[1]
서적
Rawshan 1373,p.451/Thackston 2012,p.157/余大鈞・周建奇1985,pp.237
[2]
서적
『元史』巻149列伝36耶律留哥伝
[3]
서적
『元史』巻149列伝36耶律留哥伝
[4]
서적
『元史』耶律留哥伝には迪吉脳児の戦いの日時の記載がないが、『金史』巻13衛紹王本紀には「[至寧元年]二月、詔撫諭遼東」とあり、この記述が迪吉脳児の戦いにおける敗戦を歪曲して伝えたものであると考えられている
[5]
서적
[6]
서적
『元史』巻149列伝36耶律留哥伝
[7]
서적
『金史』巻103列伝41紇石烈桓端伝
[8]
서적
『元史』巻149列伝36耶律留哥伝
[9]
서적
耶律留哥伝には耶律留哥一人で東京を攻略したかのように記しているが、実際には石抹エセンも東京攻略に尽力していた
[10]
서적
『元史』耶律留哥伝は耶律留哥が主将となって後遼を討伐したかのように記すが、『高麗史』などは耶律留哥に一切言及せずモンゴル軍を率いていたのは「哈真」なる人物であるとするため、耶律留哥はあくまで一武将としてモンゴル軍に属したものとみられる
[11]
서적
『元史』巻149列伝36耶律留哥伝
[1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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