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폰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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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폰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녀는 1691년에 태어나 1750년에 사망한 인물로,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루이 루돌프의 딸이다. 1708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와 결혼하여 스페인 왕비, 신성 로마 제국 황후가 되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시기에 결혼하여 남편의 스페인 왕위 계승을 도왔으나, 카를 6세가 황제가 되면서 스페인 왕위는 포기했다. 류마티스로 휠체어 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1713년 국사조칙으로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가 상속자가 되었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4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남편 사후에는 비엔나 근처의 헤첸도르프 궁전에서 생활하다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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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폰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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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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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폰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
독일어 이름 | Elisabeth Christine von Braunschweig-Wolfenbüttel |
작위 | |
신성 로마 황후 | 재위: 1711년 10월 12일 – 1740년 10월 20일 |
헝가리 왕비 | 해당사항 없음 |
보헤미아 왕비 | 해당사항 없음 |
오스트리아 대공비 | 해당사항 없음 |
시칠리아 왕비 | 해당사항 없음 |
나폴리 왕비 | 해당사항 없음 |
사르데냐 왕비 | 해당사항 없음 |
생애 | |
출생 | 1691년 8월 28일, 브라운슈바이크,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 |
사망 | 1750년 12월 21일, 빈, 오스트리아 대공국 |
매장지 | 빈, 카푸친 납골당 |
가문 | |
가문 | 벨프 가문 |
아버지 | 루트비히 루돌프 폰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
어머니 | 크리스티네 루이제 폰 에팅겐-에팅겐 |
결혼 | |
배우자 | 카를 6세 (신성 로마 황제) |
결혼일 | 1708년 8월 1일, 산타 마리아 달 마르 교회 |
자녀 | 레오폴트 요한 폰 오스터라이히 대공 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아 안나 폰 외스터라이히 (1718-1744) 마리아 아말리아 |
종교 | |
종교 | 가톨릭교 (이전: 루터교) |
2. 생애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1691년 8월 28일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국의 브라운슈바이크에서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루이 루돌프와 외팅겐-외팅겐의 크리스티네 루이제 공녀 사이에서 태어났다. 형제로는 3명이 있었다.[3]
13세에 미래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와 약혼했으나, 루터교 신자였던 그녀는 가톨릭으로 개종해야 했기에 처음에는 결혼을 반대했다. 그러나 결국 1707년 5월 1일 독일 밤베르크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3]
1708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바르셀로나에서 카를 6세와 결혼했다. 당시 카를 6세는 스페인 왕위를 두고 펠리페 5세와 경쟁하고 있었다. 이후 카를 6세가 황제가 되면서 스페인 왕위는 포기했다.[3]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남편에게 "하얀 피부의 리슬"이라고 불렸지만, 자녀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1716년에 아들 레오폴트 요한을 낳았으나 1세가 되기 전에 사망했다.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아 안나, 마리아 아말리아 세 딸을 낳았다.[3]
카를 6세는 1713년 국사 조칙을 발표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 분할을 금지하고, 남성 상속자가 없을 경우 여성의 상속권을 인정했다. 이에 따라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가 상속자가 되었다.[3]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류마티스로 휠체어 생활을 했으나, 요제프 2세 출산 때 잠시 걷기도 했다.[3]
2. 1. 어린 시절과 스페인 왕비 시절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1691년 8월 28일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국의 브라운슈바이크에서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루이 루돌프와 그의 아내 외팅겐-외팅겐의 크리스티네 루이제 공녀의 첫째이자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에게는 샤를로테 아우구스테(1692년 출생 및 사망),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샤를로테 크리스티네,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안토니에트 아말리에 공녀와 같이 3명의 형제가 있었다.13세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미래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와 약혼했는데, 이는 그녀의 할아버지인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안톤 울리히와 카를의 처형인 황후 빌헬미네 아말리에 사이의 협상을 통해 이루어졌다. 빌헬미네 아말리에의 아버지는 브라운슈바이크-칼렌베르크 공작 요한 프리드리히였으며, 벨프 가문의 다른 분파에 속했다. 루터교 개신교 신자였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처음에 가톨릭교로 개종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결혼에 반대했지만, 결국 동의했다. 그녀는 시어머니인 황후 노이부르크의 엘레오노레 막달레네에게 가톨릭을 배웠고, 1707년 5월 1일 독일 밤베르크에서 정식으로 개종했다. 결혼 전, 그녀는 의사와 카를의 예수회 고해 신부에 의해 출산 가능성을 증명하기 위한 신체 검사를 받아야 했다.

카를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펠리페에 맞서 스페인 왕위를 주장하며 바르셀로나에 머물고 있었다.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1708년 7월 스페인에 도착하여 1708년 8월 1일 바르셀로나 산타 마리아 델 마르 교회에서 카를과 결혼했다. 펠리페는 이미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즉시 아들을 낳으라는 압박을 받았다. 스페인에 머무는 동안 그녀는 어머니와 장기간 서신을 주고받았는데, 이는 아들을 낳으라는 지속적인 압박에 대한 위로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1711년, 카를은 형 요제프 1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황제가 되기 위해 빈으로 떠났다. 그는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를 스페인에 남겨두고 부재 중 카탈루냐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녀는 1713년까지 카탈루냐를 단독으로 통치했는데, 이 해에 전쟁이 끝나고 오스트리아의 모든 동맹국이 펠리페를 인정했다. 그녀의 공식적인 섭정 역할은 카를의 카탈루냐 신민들의 사기를 유지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카를이 스페인 통치 기간 동안보다 더 효과적으로 통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후 그녀는 오스트리아에서 남편과 합류했다.
2. 2. 신성 로마 제국 황후 시절
카를 6세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이던 1708년, 펠리페에 맞서 바르셀로나에서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와 결혼했다. 펠리페 5세가 이미 아들을 낳았기에,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아들을 낳으라는 압박을 받았다.[3]1711년, 카를 6세는 형 요제프 1세의 사망으로 황제가 되기 위해 빈으로 떠났고,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를 카탈루냐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녀는 1713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카탈루냐를 통치하며, 카를 6세의 신민들의 사기를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황후가 된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음악, 신중함, 겸손함, 근면함으로 묘사되었으며, 사냥과 무도회 등 궁정 생활을 잘 수행했다.[3] 사격과 당구 실력이 뛰어났고, 암호-프로테스탄트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3]
카를 6세는 그녀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허용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장관들과 관계를 맺고 정치에 참여하려 노력했다. 1720년대에는 러시아와의 조약에 영향을 미쳤고, 딸들을 스페인 왕실과 결혼시키려는 계획에 반대했다.[3]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1716년 아들 레오폴트 요한을 낳았지만, 7개월 만에 사망했다. 궁정 의사들은 그녀의 임신을 돕기 위해 술을 처방했고, 얼굴이 붉어지는 부작용을 겪었다.[3] 이후에도 임신을 위한 처방으로 건강이 악화되었지만, 카를 6세는 그녀를 걱정하며 '백색 리즈'라는 애칭으로 불렀다.[3]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시어머니, 시누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를 지원했다.
정치적 영향력은 부족했지만, 1732년 조카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와 프리드리히 대왕의 결혼, 1739년 조카 안톤 울리히 공작과 안나 레오폴도브나의 결혼을 성사시켰다.[3] 그러나 1740년 남편의 사망 후, 조카 프리드리히 2세가 슐레지엔을 침공하며 제1차 슐레지엔 전쟁이 발발했다.
류마티스로 휠체어 생활을 했지만, 요제프 2세 출산 때는 기쁨에 일시적으로 걷기도 했다.
2. 3. 과부 시절
1740년 카를 6세가 사망하면서 그녀는 과부가 되었다. 과부가 된 그녀는 국가 위기 때문에 카를 6세의 유언에 따라 받기로 했던 큰 수입을 전혀 받지 못했지만, 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그녀의 궁정에 편안한 생활을 제공했다.[4] 그녀는 과부의 거처로 비엔나 근처의 헤첸도르프 궁전을 하사받았다.
전통적인 견해는 그녀가 딸인 여제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이지만, 실제로 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없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에게 애정을 자유롭게 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어머니에게는 한 번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기적으로 어머니를 방문했지만, 그 방문은 형식적이었으며, 만나는 동안 엄격하게 스페인 궁정 예법을 따랐다.[4] 1747년 프로이센 대사는 그녀가 정치적으로 활동적이며 "개입하려 한다는 의심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정치 문제에 관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비엔나에서 사망했다.
3. 자녀
참조
[1]
웹사이트
Charles VI
http://www.infopleas[...]
[2]
문서
Her tenure, from 12 October 1711 to 20 October 1740, is about seven months longer than either tenures of two other long-serving empresses, [[Beatrice I, Countess of Burgundy]], and [[Eleonor Magdalene of the Palatinate-Neuburg]].
[3]
서적
Memoirs of the Queens of Prussia
https://archive.org/[...]
W. Kent
1858
[4]
서적
Maria Theresa
Longmans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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