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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꼴 방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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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연꼴 방패는 1000년대 서유럽에서 널리 사용된 방패로, 기병의 다리와 몸통을 보호하기 위해 개발되었다는 추측이 있다. 11세기에는 서유럽, 비잔틴 제국, 코카서스 등지에서 사용되었으며, 제1차 십자군을 통해 중동에도 전파되었다. 12세기 중반 이후에는 상단이 평평한 형태로 변화하였고, 서유럽에서는 히터 실드에 밀려 쇠퇴했지만, 비잔틴 제국에서는 13세기까지 사용되었다. 연꼴 방패는 에나르메스를 장착하여 팔에 고정되었으며, 적층 목재, 가죽, 철제 부품으로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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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꼴 방패
개요
카이트 실드의 재구성
카이트 실드의 재구성
종류방패
사용 시기중세 시대
문화권유럽
형태 및 특징
형태위쪽은 둥글고 아래쪽은 뾰족한 형태
좁은 어깨를 보호하고 다리까지 덮는 형태
제작 재료나무
장착 방식가죽 끈을 사용하여 팔에 장착
역사
등장 시기10세기 말 또는 11세기 초
사용 시기노르만족 시대
십자군 전쟁 시대
퇴장 시기14세기
진화탑 실드
용도 변화기병과 보병 모두 사용
사용 감소 원인갑옷의 발전
보다 짧은 방패 선호
언어별 명칭
영어Kite shield (카이트 실드)
일본어カイト・シールド (카이토 시-루도)
한국어연꼴 방패

2. 역사

종종 이 방패는 기병을 위해 개발되었으며, 그 치수가 말의 목과 기수의 허벅지 사이의 대략적인 공간과 관련이 있다는 추측이 있다.[4] 좁은 하단은 기수의 왼쪽 다리를 보호하는 것으로 보이며, 뚜렷한 상단 곡선은 기수의 어깨와 몸통을 보호하는 것으로 보인다.[3] 이것은 버클러와 같이 더 흔한 원형 방패보다 개선된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창을 들고 돌격할 때 기병의 왼쪽 측면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기 때문이다.[4] 그러나 이러한 원형 방패는 연꼴 방패가 사용되기 훨씬 전부터, 그리고 사용된 후에도 아시아의 기병 중심적이고 유목적인 문화에서 우세했다. 또한 바이에-외 태피스트리에서 연꼴 방패가 기병들에 의해 다리를 보호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유리한" 하향 위치로 잡히지 않고, 오히려 다리와 말을 멀리하기 위해 뒤로 향하게 잡고 있는 것을 분명히 관찰할 수 있다. 이 하향 위치는 실제로 잉글랜드 방패 벽과 같이 전사들이 도보로 싸울 때 잡는 방식에 적용된다. 또한, 이 시대의 전사들은 종종 전투에 말을 타고 왔지만, 도보로 싸우기 위해 하마했으며, 방패는 분명히 바이에-외 태피스트리에서 보병에 의해 사용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므로, 이 방패를 "기병" 전용으로 지정하는 것은 보병의 사용을 무시하고, 북유럽에서 순전히 "기병" 부대가 일반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연꼴 방패는 인기를 얻어 1000년대에 서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4][5] 바이에-외 태피스트리에서 대부분의 잉글랜드인들은 연꼴 방패를 들고 도보로 묘사되는 반면, 소수는 여전히 원형 방패를 사용하고 있다.[4] 노르망디 외에도 스페인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 지역에서도 초기에 나타났다. 이 세 지역 중 어디에서 디자인이 시작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2] 한 가지 이론은 연꼴 방패가 노르만족이 바이킹 선조로부터 물려받았다는 것이다.[2] 그러나 바이킹 시대의 연꼴 방패에 대한 문서나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바이킹의 매우 기동성이 뛰어난 경보병에게 이상적이지 않았다.[2] 연꼴 방패는 주로 11세기 삽화에 묘사되었으며, 주로 서유럽과 비잔틴 제국에서, 그리고 코카서스, 파티마 칼리파조, 키예프 루스에서도 나타났다.[2] 예를 들어, 조지아의 보초르마 요새에서 발견된 11세기 은 조각상에 성 게오르기우스가 연꼴 방패를 들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으며, 12, 13세기에 제작된 다른 조지아 예술 작품에서도 발견된다.[2] 연꼴 방패는 또한 1087년경에 건설된 카이로의 바브 알-나스르에서도 나타난다. 아랍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이를 ''타리카'' 또는 ''자누위야''라고 묘사했다.[2]

연꼴 방패는 제1차 십자군에 의해 중동에 대량으로 도입되었으며, 아랍과 비잔틴 군인들이 노르만 십자군들이 휴대하는 이 유형의 방패를 처음 관찰했다. 이것은 비잔틴에 매우 긍정적인 인상을 주어, 12세기 중반까지 코메네 왕조에서 원형 방패를 완전히 대체하게 되었다.[2]

12세기 중후반경, 전통적인 연꼴 방패는 상단이 둥근 모양이 아닌 평평한 변형으로 대체되었다. 이 변화는 병사가 시야를 제한하지 않고 방패를 똑바로 잡는 것을 더 쉽게 만들었다.[5] 평평한 상단의 연꼴 방패는 나중에 서유럽 군대에서 훨씬 작고 더 컴팩트한 ''히터 실드''를 선호하여 점차적으로 사라졌다.[5] 그러나 13세기까지도 비잔틴 보병에 의해 계속 휴대되었다.[3]

2. 1. 초기 역사

연꼴 방패는 기마병을 위해 개발되었으며, 그 치수가 말의 목과 기수의 허벅지 사이의 공간과 관련이 있다는 추측이 있다.[4] 좁은 하단은 기수의 왼쪽 다리를 보호하고, 상단 곡선은 기수의 어깨와 몸통을 보호하는 것으로 보인다.[3] 이는 을 들고 돌격할 때 기병의 왼쪽 측면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던 버클러와 같은 원형 방패보다 개선된 형태였다.[4] 그러나 바이에-외 태피스트리에서 연꼴 방패가 기병이 아닌 보병에 의해서도 사용되는 모습이 나타나고, 북유럽에서 순수 기병 부대가 일반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기병 전용"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4]

연꼴 방패는 1000년대에 서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4][5] 바이에-외 태피스트리에는 대부분의 잉글랜드인이 연꼴 방패를 들고 도보로 묘사되며, 소수만이 여전히 원형 방패를 사용하고 있다.[4] 노르망디 외에도 스페인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 지역에서도 초기에 나타났다.[2]

연꼴 방패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가설이 있다. 한 가지 이론은 노르만족이 바이킹 선조로부터 물려받았다는 것이지만,[2] 바이킹 시대의 연꼴 방패에 대한 문서나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바이킹의 경보병에게 이상적이지 않았다는 반론도 있다.[2] 연꼴 방패는 11세기 삽화에 주로 묘사되었으며, 서유럽과 비잔틴 제국 외에도 코카서스, 파티마 칼리파조, 키예프 루스에서도 나타났다.[2] 조지아의 보초르마 요새에서 발견된 11세기 은 조각상에 성 게오르기우스가 연꼴 방패를 들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2] 또한, 1087년경에 건설된 카이로의 바브 알-나스르에서도 연꼴 방패가 나타난다.[2] 아랍 역사가들은 이를 ''타리카'' 또는 ''자누위야''라고 묘사했다.[2]

제1차 십자군을 통해 중동에 대량으로 도입된 연꼴 방패는, 12세기 중반까지 코메네 왕조에서 원형 방패를 완전히 대체하게 되었다.[2]

2. 2. 서유럽으로의 확산

연꼴 방패는 1000년대에 서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4][5] 바이에-외 태피스트리에서 대부분의 잉글랜드인들은 연꼴 방패를 들고 도보로 묘사되는 반면, 소수는 여전히 원형 방패를 사용하고 있다.[4] 이는 노르망디 외에도 스페인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 지역에서도 초기에 나타났다. 이 세 지역 중 어디에서 디자인이 시작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2] 한 가지 이론은 연꼴 방패가 노르만족이 바이킹 선조로부터 물려받았다는 것이다.[2] 그러나 바이킹 시대의 연꼴 방패에 대한 문서나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바이킹의 매우 기동성이 뛰어난 경보병에게 이상적이지 않았다.[2] 연꼴 방패는 주로 11세기 삽화에 묘사되었으며, 주로 서유럽과 비잔틴 제국에서, 그리고 코카서스, 파티마 칼리파조, 키예프 루스에서도 나타났다.[2] 예를 들어, 조지아의 보초르마 요새에서 발견된 11세기 은 조각상에 성 게오르기우스가 연꼴 방패를 들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으며, 12, 13세기에 제작된 다른 조지아 예술 작품에서도 발견된다.[2] 연꼴 방패는 또한 1087년경에 건설된 카이로의 바브 알-나스르에서도 나타난다. 아랍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이를 ''타리카'' 또는 ''자누위야''라고 묘사했다.[2]

연꼴 방패는 제1차 십자군에 의해 중동에 대량으로 도입되었으며, 아랍과 비잔틴 군인들이 노르만 십자군들이 휴대하는 이 유형의 방패를 처음 관찰했다. 이것은 비잔틴에 매우 긍정적인 인상을 주어, 12세기 중반까지 코메네 왕조에서 원형 방패를 완전히 대체하게 되었다.[2]

12세기 중후반경, 전통적인 연꼴 방패는 상단이 둥근 모양이 아닌 평평한 변형으로 대체되었다. 이 변화는 병사가 시야를 제한하지 않고 방패를 똑바로 잡는 것을 더 쉽게 만들었다.[5] 평평한 상단의 연꼴 방패는 나중에 서유럽 군대에서 훨씬 작고 더 컴팩트한 ''히터 실드''를 선호하여 점차적으로 사라졌다.[5] 그러나 13세기까지도 비잔틴 보병에 의해 계속 휴대되었다.[3]

2. 3. 비잔틴 제국과 중동에서의 사용

연꼴 방패는 기병의 사용을 위해 개발되었다는 추측이 있으며, 그 크기는 말의 목과 기수의 허벅지 사이 공간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4] 좁은 하단은 기수의 왼쪽 다리를, 뚜렷한 상단 곡선은 기수의 어깨와 몸통을 보호하는 것으로 보인다.[3] 이는 을 들고 돌격할 때 기병의 왼쪽 측면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던 버클러와 같은 원형 방패보다 개선된 형태였다.[4]

연꼴 방패는 1000년대에 서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4][5] 바이에-외 태피스트리에서는 대부분의 잉글랜드인들이 연꼴 방패를 들고 도보로 묘사되는 반면, 소수는 여전히 원형 방패를 사용하고 있다.[4] 노르망디 외에도 스페인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 지역에서도 초기에 나타났다.[2] 이 디자인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바이킹 선조로부터 물려받았다는 이론이 제기되기도 한다.[2] 그러나 바이킹 시대의 연꼴 방패에 대한 문서나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바이킹의 기동성이 뛰어난 경보병에게는 적합하지 않았을 것이다.[2]

연꼴 방패는 11세기 삽화에 주로 묘사되었으며, 서유럽과 비잔틴 제국뿐만 아니라 코카서스, 파티마 칼리파조, 키예프 루스에서도 나타났다.[2] 조지아의 보초르마 요새에서 발견된 11세기 은 조각상에 성 게오르기우스가 연꼴 방패를 들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으며, 12, 13세기에 제작된 다른 조지아 예술 작품에서도 발견된다.[2] 또한 1087년경에 건설된 카이로의 바브 알-나스르에서도 나타난다. 아랍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이를 ''타리카'' 또는 ''자누위야''라고 묘사했다.[2]

제1차 십자군을 통해 중동에 대량으로 도입된 연꼴 방패는 비잔틴 군인들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주었고, 12세기 중반까지 코메네 왕조에서 원형 방패를 완전히 대체하게 되었다.[2] 12세기 중후반경, 전통적인 연꼴 방패는 상단이 평평한 변형으로 대체되었는데, 이는 병사가 시야를 제한하지 않고 방패를 똑바로 잡는 것을 더 쉽게 만들었다.[5] 평평한 상단의 연꼴 방패는 나중에 서유럽 군대에서 히터 실드에 밀려 점차 사라졌지만,[5] 13세기까지도 비잔틴 보병에 의해 계속 사용되었다.[3]

2. 4. 형태 변화와 쇠퇴

연꼴 방패는 12세기 후반, 상단이 둥근 형태에서 평평한 형태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병사가 시야를 제한받지 않고 방패를 똑바로 잡는 것을 더 쉽게 만들었다.[5] 이후 서유럽에서는 히터 실드가 등장하면서 연꼴 방패는 점차 쇠퇴하였다.[5] 그러나 비잔틴 제국에서는 13세기까지도 연꼴 방패가 계속 사용되었다.[3]

3. 구조

연꼴 방패는 어색한 특성을 보완하기 위해 에나르메스를 장착했는데, 이는 방패를 팔에 단단히 고정하여 기사가 팔의 힘을 풀 때에도 방패가 제자리에 있도록 돕는 역할을 했다. 이는 이전의 대부분의 원형 방패가 단일 손잡이만 가지고 있던 것과는 큰 차이를 보였다.[5][10] 일부 연꼴 방패는 사용하지 않을 때 어깨에 걸 수 있도록 추가적인 기주 끈을 장착한 것으로 보인다.[5][10] 비잔틴 제국 병사들은 종종 연꼴 방패를 등 뒤에, 때로는 거꾸로 메고 다녔다.[3][8] 제1차 십자군 시대에는 대부분의 연꼴 방패가 여전히 돔 형태의 금속 중심부(방패 보스)를 갖추고 있었지만, 에나르메스를 사용하면 이것이 불필요했을 것이다.[2][7] 방패에는 에나르메스와 보조 손잡이가 모두 장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전형적인 연꼴 방패는 최소 91cm 높이였으며, 적층 목재, 늘어난 동물의 가죽, 철제 부품으로 제작되었다.[5][3] 1200년대 비잔틴 제국의 기록에 따르면 방패 프레임이 목재와 철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몸체는 드럼 표면에 사용되는 재료와 유사하게 가죽, 양피지, 또는 경화된 가죽으로 제작되었다.[3][8]

3. 1. 형태와 크기

연꼴 방패는 전형적으로 상단이 둥글거나 평평하고 하단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를 띠고 있다. 최소 3피트(약 91cm) 높이였으며, 적층 목재, 늘어난 동물의 가죽, 철제 부품으로 제작되었다.[5] 1200년대 비잔틴 제국의 기록에 따르면 방패 프레임이 목재와 철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몸체는 드럼 표면에 사용되는 재료와 유사하게 가죽, 양피지, 또는 경화된 가죽으로 제작되었다.[3]

연꼴 방패는 에나르메스를 장착하여 팔에 단단히 고정할 수 있었는데, 이는 기사가 팔의 힘을 풀 때에도 방패가 제자리에 있도록 돕는 역할을 했다.[5] 이전의 대부분의 원형 방패가 단일 손잡이만 가지고 있던 것과는 큰 차이를 보였다.[5] 일부 연꼴 방패는 사용하지 않을 때 어깨에 걸 수 있도록 추가적인 기지 끈을 장착하기도 했다.[5] 비잔틴 제국 병사들은 종종 연꼴 방패를 등 뒤에, 때로는 거꾸로 메고 다녔다.[3] 제1차 십자군 시대에는 대부분의 연꼴 방패가 여전히 돔 형태의 금속 중심부(방패 보스)를 갖추고 있었지만, 에나르메스를 사용하면 이것이 불필요했을 것이다.[2] 방패에는 에나르메스와 보조 손잡이가 모두 장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3. 2. 재료와 제작 방법

연꼴 방패는 최소 91cm 높이였으며, 적층 목재, 늘어난 동물의 가죽, 철제 부품으로 제작되었다.[3] 1200년대 비잔틴 제국의 기록에 따르면 방패 프레임이 목재와 철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몸체는 드럼 표면에 사용되는 재료와 유사하게 가죽, 양피지, 또는 경화된 가죽으로 제작되었다.[3][8]

연꼴 방패는 에나르메스를 장착했는데, 이는 방패를 팔에 단단히 고정하여 기사가 팔의 힘을 풀 때에도 방패가 제자리에 있도록 돕는 역할을 했다. 이는 이전의 대부분의 원형 방패가 단일 손잡이만 가지고 있던 것과는 큰 차이를 보였다.[5][10] 일부 연꼴 방패는 사용하지 않을 때 어깨에 걸 수 있도록 추가적인 기주 끈을 장착한 것으로 보인다.[5][10] 비잔틴 제국 병사들은 종종 연꼴 방패를 등 뒤에, 때로는 거꾸로 메고 다녔다.[3][8] 제1차 십자군 시대에는 대부분의 연꼴 방패가 여전히 돔 형태의 금속 중심부(방패 보스)를 갖추고 있었지만, 에나르메스를 사용하면 이것이 불필요했을 것이다.[2][7] 방패에는 에나르메스와 보조 손잡이가 모두 장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3. 3. 에나르메스와 기주

연꼴 방패는 에나르메스를 장착하여 팔에 단단히 고정할 수 있었는데, 이는 기사가 팔의 힘을 풀 때에도 방패가 제자리에 있도록 돕는 역할을 했다.[5][10] 이전의 대부분의 원형 방패가 단일 손잡이만 가지고 있던 것과는 큰 차이를 보였다.[5] 일부 연꼴 방패는 사용하지 않을 때 어깨에 걸 수 있도록 추가적인 기주 끈을 장착한 것으로 보인다.[5][10] 비잔틴 제국 병사들은 종종 연꼴 방패를 등 뒤에, 때로는 거꾸로 메고 다녔다.[3][8] 제1차 십자군 시대에는 대부분의 연꼴 방패가 여전히 돔 형태의 금속 중심부(방패 보스)를 갖추고 있었지만, 에나르메스를 사용하면 이것이 불필요했을 것이다.[2][7] 방패에는 에나르메스와 보조 손잡이가 모두 장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4. 한국사와의 관련성 (가설)

4. 1. 고려시대 방패와의 형태적 유사성

4. 2. 추가 연구의 필요성

5. 갤러리

바이에 시의 테피스트리에 묘사된 연꼴 방패. 여기에서 보병은 "아래로 향하게" 방패를 사용하고 다리를 보호하는 반면, 기병은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일반적인 오해와는 다르다.


템플 픽스에 묘사된 연꼴 방패


참조

[1] 서적 Handbuch der Waffenkunde https://archive.org/[...] 1890
[2] 서적 Arms and Armour of the Warrior Saints: Tradition and Innovation in Byzantine Iconography (843–1261) Koninklijke Brill NV 2009
[3] 서적 The Late Byzantine Army: Arms and Society, 1204-1453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97
[4] 서적 The Archaeology of Weapons: Arms and Armour from Prehistory to the Age of Chivalry Dover Publications 1997
[5] 서적 Daily Life in the Middle Ages McFarland and Company Incorporated, Publishers 2001
[6] 서적 Handbuch der Waffenkunde https://archive.org/[...] 1890
[7] 서적 Arms and Armour of the Warrior Saints: Tradition and Innovation in Byzantine Iconography (843–1261) Koninklijke Brill NV 2009
[8] 서적 The Late Byzantine Army: Arms and Society, 1204-1453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97
[9] 서적 The Archaeology of Weapons: Arms and Armour from Prehistory to the Age of Chivalry Dover Publications 1997
[10] 서적 Daily Life in the Middle Ages McFarland and Company Incorporated, Publishers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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