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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리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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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나리아 왕국은 1402년 프랑스 탐험가 장 드 베탕쿠르에 의해 시작된 카나리아 제도 정복 과정에서 건국되었다. 란사로테 섬을 시작으로 푸에르테벤투라, 엘 이에로를 정복했으며, 1404년 베탕쿠르는 교황 인노첸시오 7세에 의해 카나리아 제도의 왕으로 선포되었다. 베탕쿠르 사후 그의 조카 마시오 드 베탕쿠르가 왕위를 계승했으나, 폭정으로 인해 카스티야와 포르투갈 사이의 분쟁을 야기했다. 1448년 마시오가 왕국을 포르투갈에 매각하려 하자 반란이 발생했고, 1479년 알카소바스 조약을 통해 카나리아 왕국은 카스티야 연합왕국에 귀속되었다. 마지막으로 알론소 페르난데스 데 루고가 라 팔마 섬과 테네리페 섬을 정복하면서 카나리아 제도 정복이 완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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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리아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현지 이름카나리아 왕국
다른 표기Regnum Canaria (라틴어)
존속 기간 시작1404년
존속 기간 끝1448년
지위카스티야 연합왕국의 속국
수도베탄쿠리아 (1404 ~ 1425)
수도 (이후)테기세 (1425 ~)
공용어스페인어(카스티야), 노르만어, 관체어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관체인 신앙
정부 형태군주제
역사
시작 사건란사로테섬 정복 (1404년)
종료 사건포르투갈 왕국에 매각 (카스티야 반발) (1448년)
이전관체인
이후카스티야 연합왕국, 포르투갈 왕국
통치자
국왕장 드 베텐쿠르 (1404 ~ 1425)
국왕 (이후)마시오 드 베텐쿠르 (1425 ~ 1448)
기타 정보
장 드 베탕쿠르 왕실 깃발
장 드 베탕쿠르 왕실 깃발
장 드 베탕쿠르 문장
장 드 베탕쿠르 문장
현재
현재 국가스페인

2. 역사

로마 제국 시대 이후 카나리아 제도에 대한 유럽인의 본격적인 접촉은 14세기제노바 공화국의 항해사 란셀로토 말로첼로의 방문으로 시작되었으나, 원주민 구안체족의 저항에 부딪혔다.[1] 15세기 초, 프랑스 출신의 노르만 탐험가 장 드 베탕쿠르가 카스티야의 지원을 받아 카나리아 제도 정복에 나서면서 유럽 세력의 영향력이 본격화되었다.

베탕쿠르는 일부 섬을 정복하고 교황청으로부터 왕으로 인정받았으나, 실제로는 카스티야 국왕에게 종속된 형태였다. 그의 사후, 조카 마시오 드 베탕쿠르의 통치 시기에는 포르투갈과의 영유권 분쟁이 발생하기도 했으나, 1479년 알카소바스 조약을 통해 카스티야의 지배권이 확립되었다. 이후 카스티야의 군사 총독 알론소 페르난데스 데 루고가 15세기 말까지 나머지 섬들을 완전히 정복하면서, 카나리아 제도는 카스티야 왕관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2. 1. 왕국 성립 이전

카나리아 왕국이 세워지기 전, 카나리아 제도에는 관체인이라 불리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언어와 인종적인 측면에서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인과 유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세 시기에는 아랍인들이 상업적인 이유로 카나리아 제도를 방문하기도 했다. 999년에는 그라나다 출신의 무슬림 항해사 이븐 파루흐(Ibn Farrukh)가 그란카나리아섬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다.

14세기부터는 서유럽의 여러 항해사들이 이곳을 찾기 시작했다. 1312년에는 제노바 공화국의 항해사 란체로토 말로첼로(Lancelotto Malocello)가 란사로테섬에 상륙했는데, 이 섬의 이름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말로첼로는 약 20년 가까이 섬에 머물렀으나, 원주민인 관체인(구안체)들이 그들의 왕 존자마스(Zonzamas)의 지도 아래 일으킨 반란으로 인해 결국 쫓겨났다.[1]

2. 2. 카나리아 왕국 건국과 멸망

1402년 프랑스의 노르만 출신 항해사이자 탐험가인 장 드 베텐쿠르가 카나리아 제도 정복을 시작했다. 그는 1401년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를 출발했으며, 현지 원주민인 관체의 도움을 받아 란사로테섬을 점령했다. 이후 푸에르테벤투라와 엘 이에로 섬도 차례로 정복해 나갔다.

1402년 출항하는 장 드 베텐쿠르의 배 ('르 카나리엔'에서 인용)


베텐쿠르가 카스티야 연합왕국에 원군과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정복에 참여했던 노르만 장교 가디퍼 드 라 살레와 베르틴(Berthin)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여 소요가 일어났다. 이 소요는 베텐쿠르가 돌아와 상황을 진정시키면서 마무리되었다.

푸에르테벤투라에서 장 드 베텐쿠르와 가디퍼 드 라 살레의 활동을 묘사한 연대기 '르 카나리엔'의 삽화.


1404년 2월 27일, 관체 지도자들은 세례를 받고 유럽인들에게 항복했다. 이후 장 드 베텐쿠르는 교황 인노첸시오 7세에 의해 카나리아 국왕으로 인정받았으나, 실제로는 카스티야를 자신의 주군으로 인정하며 종속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장 드 베텐쿠르가 사망한 후, 그의 조카인 마키오 드 베텐쿠르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그는 폭군으로 평가받았으며, 수도를 테기세로 정했다. 당시 카나리아 제도를 둘러싸고 카스티야포르투갈 사이에 경쟁이 치열했다. 1448년, 마키오 드 베텐쿠르가 왕국을 포르투갈에 매각하려 하자, 카스티야인들과 관체 원주민들은 이에 크게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1459년까지 계속되었고, 결국 포르투갈 세력은 물러나게 되었다.

1479년, 포르투갈알카소바스 조약을 통해 카나리아 제도에 대한 카스티야의 지배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이후 카스티야의 군사 총독 알론소 페르난데스 데 루고가 라 팔마 섬(1492-1493년)과 테네리페 섬(1494-1496년)을 차례로 정복하면서 카나리아 제도는 완전히 카스티야 왕관 아래 편입되었고, 카나리아 왕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3. 국왕

wikitext

이름재위 기간
장 드 베텐쿠르1404년 ~ 1425년
마키오 드 베텐쿠르1425년 ~ 144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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