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노르만인의 잉글랜드 정복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노르만인의 잉글랜드 정복은 1066년 노르만 공작 윌리엄이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잉글랜드를 침략하여 잉글랜드를 정복한 사건이다. 윌리엄은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잉글랜드 왕 해럴드 2세를 격파하고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이 사건은 잉글랜드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는데, 앵글로색슨 귀족은 노르만 귀족으로 대체되었고, 봉건 제도가 강화되었으며, 언어와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잉글랜드는 노르만 왕조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고, 잉글랜드의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066년 잉글랜드 - 스탬퍼드브리지 전투
    1066년 9월 25일, 해럴드 2세가 하랄 3세와 토스티 고드윈손 연합 바이킹 군대를 스탬퍼드브리지에서 격파한 전투는 잉글랜드 바이킹 시대 종식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지만, 해럴드 2세는 곧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전사한다.
  • 1066년 잉글랜드 - 헤이스팅스 전투
    헤이스팅스 전투는 1066년 10월 14일 잉글랜드 왕위 계승 분쟁 속에서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이끄는 노르만-프랑스 군대와 해럴드 2세가 이끄는 잉글랜드 군대가 헤이스팅스 인근에서 벌인 전투로, 해럴드 2세의 사망과 잉글랜드 군의 패배를 가져와 노르만 정복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 1066년 분쟁 - 스탬퍼드브리지 전투
    1066년 9월 25일, 해럴드 2세가 하랄 3세와 토스티 고드윈손 연합 바이킹 군대를 스탬퍼드브리지에서 격파한 전투는 잉글랜드 바이킹 시대 종식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지만, 해럴드 2세는 곧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전사한다.
  • 1066년 분쟁 - 헤이스팅스 전투
    헤이스팅스 전투는 1066년 10월 14일 잉글랜드 왕위 계승 분쟁 속에서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이끄는 노르만-프랑스 군대와 해럴드 2세가 이끄는 잉글랜드 군대가 헤이스팅스 인근에서 벌인 전투로, 해럴드 2세의 사망과 잉글랜드 군의 패배를 가져와 노르만 정복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 11세기 잉글랜드 - 앵글로색슨 잉글랜드
    앵글로색슨 잉글랜드는 5세기부터 11세기까지 게르만 부족들이 브리튼 섬에 정착하여 여러 왕국을 건설하고 기독교 전파, 왕국 간 다툼, 바이킹 침략 등을 겪으며 발전했지만 1066년 노르만 정복으로 막을 내린 시기로, 고대 영어 발전과 독특한 문화, 정치 체제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 11세기 잉글랜드 - 무정부시대
    무정부 시대는 1120년 윌리엄 애설링의 죽음으로 시작되어 헨리 1세 사후 왕위 계승 분쟁으로 잉글랜드 내전이 발생했으며, 스티븐과 마틸다 간의 다툼, 스코틀랜드 침공 등으로 혼란을 겪다가 1153년 월링퍼드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노르만인의 잉글랜드 정복 - [전쟁]에 관한 문서
노르만 정복
개요
전투명노르만 정복
캠페인노르만 정복
시기1066년 - 1071년
장소잉글랜드
결과노르만인의 승리, 노르만 왕조 잉글랜드 왕국 건국
교전 세력
교전 1노르망디 공국
교전 2잉글랜드 왕국, 덴마크
교전 3노르웨이, 잉글랜드 반란군, 오크니 백국, 도서부 왕국
지휘관 및 지도자
노르만노르망디 공 윌리엄 2세
주요 노르만 지휘관알랭 르 루
윌리엄 피츠오스번
외스타슈 2세 드 불로뉴
브라이언 오브 브르타뉴
앵글로-색슨해럴드 2세
기르트 고드윈슨
레오프윈 고드윈슨
에드거 2세
고드윈 해럴드슨
에드먼드 해럴드슨
주요 앵글로-색슨 지휘관에드윈
모카르
귀다 토르켈스도티르
고스파트릭 백작
시워드 바른
헤리워드 더 웨이크
기타 반란 영주
데인족스벤 2세
주요 데인족 지휘관하랄 쇠렌
크누드 4세
노르드인하랄 하르드라디
주요 노르드인 지휘관토스티그 고드윈슨
에이스테인 올리
폴 토르핀손
올라프 3세
병력 규모
노르만 (1066년)7,000명 ~ 8,000명
잉글랜드 (1066년)7,000명 ~ 12,000명
덴마크 함대240척 ~ 300척
노르드인9,000명 ~ 10,000명
전투 목록
주요 전투풀퍼드 전투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
헤이스팅스 전투
사우스워크 방화
엑서터 공성전
북부 유린
데인족의 공격
백작들의 반란

2. 배경

1066년 참회왕 에드워드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잉글랜드 왕위를 둘러싼 분쟁이 발생했다.[9] 에드워드의 뒤를 이어 웨섹스 백작 해럴드 고드윈슨이 왕위에 올랐다. 해럴드는 잉글랜드 귀족 중 가장 강력한 인물이었으며, 잉글랜드 위테나게모트에 의해 왕으로 선출되고 요크의 앨드레드 대주교에 의해 즉위했다. 그러나 노르만 측은 해럴드의 즉위가 비정식으로 선출된 캔터베리 대주교 스티갠드에 의해 거행되었다고 주장하며 정통성에 문제를 제기했다.[9][10]

해럴드는 즉위 직후 두 명의 강력한 도전자와 마주했다.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은 에드워드 왕으로부터 왕위를 약속받았고, 해럴드가 이에 동의하는 맹세를 했다고 주장했다.[11] 노르웨이 왕 하랄 3세(하랄 하르드라다)는 선왕 마그누스 선왕과 하르다크누트 사이의 협약(둘 중 상속자 없이 사망하는 쪽이 있으면 다른 쪽이 잉글랜드와 노르웨이를 모두 상속)을 근거로 왕위를 주장했다.[12] 윌리엄과 하랄은 잉글랜드 침공을 위해 군대와 배를 소집했다.[16]

이러한 왕위 계승 분쟁은 잉글랜드가 외부 세력의 영향력에 취약함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2. 1. 노르만족의 기원과 잉글랜드와의 관계



노르만인의 기원은 91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카롤링거 왕조프랑스 왕 샤를 단순왕은 롤로가 이끄는 바이킹에게 노르망디 정착을 허가했다. 생클레르쉬르엡토 조약에 따라 롤로는 '다른 바이킹의 프랑크 습격을 막는다'는 조건으로 노르망디에 정착했다.[1] 이들은 ''노르스인''으로 알려졌으며, ''노르망디''와 ''노르만인''이라는 말은 여기서 파생되었다.[2] 노르만인들은 이교 신앙을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했으며,[3] 오일어를 받아들여 고대 노르드어와 융합해 노르만어를 만들었다. 현지인과 결혼하며 동화되었고,[4] 노르망디를 거점으로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며, 코탕탱 반도, 아브랑슈 등을 병합했다.[5]

바이에 태피스트리에 그려진 참회왕 에드워드


1002년,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1세의 여동생 에마는 잉글랜드 왕 에설레드 2세와 결혼했다.[6] 이들의 아들 에드워드는 데인족 습격으로 노르망디에 망명했다가 1042년 잉글랜드 왕이 되었다.[7] 에드워드는 노르만인과의 관계가 깊었고, 잉글랜드 왕이 된 후 요직에 노르만인을 등용하여 노르만인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에드워드는 자식이 없었고, 웨섹스 백작 고드윈과 그의 아들들과 대립했다. 당시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는 이러한 잉글랜드 내정을 알고 왕위 획득 야망을 품었을 수 있다.[8]

참회왕 에드워드가 붕어하는 장면


해럴드 고드윈슨이 잉글랜드 왕위에 즉위하는 장면


1066년, 참회왕 에드워드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며 잉글랜드 왕위를 둘러싼 항쟁이 시작되었다.[9] 에드워드 사후, 해럴드 고드윈슨이 왕위에 올랐다. 해럴드는 웨게모트에서 왕위 계승을 인정받고, 요크의 앨드레드 대주교에 의해 대관식을 치렀다. 노르만인은 "해럴드는 교회법 합의 없이 캔터베리 대주교에 선출된 스티갠드에 의해 대관식을 치렀다"고 주장하며 정통성을 부정했다.[9][10] 해럴드는 잉글랜드 왕위를 주장하는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정복왕 윌리엄)와 노르웨이 왕 하랄 3세의 도전을 받았다. 기욤 2세는 '에드워드에게 왕위 계승을 약속받았고 해럴드도 동의했다'고 주장했고,[11] 하랄 3세는 '마그누스 선왕과 하르다크누드 사이에 한 명이 먼저 죽으면 다른 한 명이 잉글랜드와 노르웨이 왕을 계승한다는 협정이 있었고, 하르다크누드의 잉글랜드 왕위를 마그누스가 계승했으며, 마그누스의 후계자인 자신이 잉글랜드 왕위를 주장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12] 기욤 2세와 하랄 3세는 군대를 소집해 잉글랜드 침공을 꾀했다.[16]

2. 2. 1066년 왕위 계승 분쟁

1066년 참회왕 에드워드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잉글랜드 왕위를 둘러싼 분쟁이 발생했다.[9] 에드워드의 직계 후계자는 잉글랜드 귀족 중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웨섹스 백작 해럴드 고드윈슨이었다. 해럴드는 잉글랜드의 위테나게모트에 의해 왕으로 선출되었고 요크의 앨드레드 대주교에 의해 즉위되었지만, 노르만 측은 그의 즉위 정통성을 문제삼았다.[9][10]

해럴드는 즉시 두 명의 강력한 이웃 통치자에게 도전을 받았다.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은 에드워드 왕으로부터 왕위를 약속받았고 해럴드가 이에 동의하는 맹세를 했다고 주장했다.[11] 노르웨이 왕 하랄 3세(일반적으로 하랄 하르드라다로 알려짐) 역시 왕위 계승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의 왕위 주장은 그의 전임자 선량왕 마그누스와 이전 잉글랜드 왕 하르다크누트 사이의 합의에 근거했는데, 그 합의에 따르면 어느 쪽이든 상속자 없이 사망하면 다른 쪽이 잉글랜드와 노르웨이를 모두 상속받게 된다는 것이었다.[12] 윌리엄과 하랄은 잉글랜드 침공을 위해 군대와 배를 소집하기 시작했다.[16]

이처럼 11세기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 분쟁은 유럽 정치 지형의 불안정성을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특히, 노르망디와 노르웨이의 개입은 잉글랜드가 외부 세력의 영향력 아래 놓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3. 노르만 침공과 잉글랜드 정복

윌리엄은 노르망디와 프랑스 전역에서 군대를 소집했는데, 브르타뉴와 플랑드르 출신 병사들도 포함되었다.[41] 윌리엄 군대의 정확한 규모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7,000~8,000명에서 최대 12,000명 정도로 추정한다.[34][33] 이들은 기병, 보병, 궁수 또는 석궁병으로 구성되었으며, 기병과 궁수의 수는 거의 같았고 보병은 이 둘을 합친 수와 비슷했을 것으로 보인다.[36]

푸아티에의 윌리엄에 따르면, 윌리엄은 교황 알렉산데르 2세의 침공 승인을 받았고 교황의 깃발과 다른 유럽 통치자들의 외교적 지원도 받았다고 한다.[39][40]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윌리엄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였을 가능성이 크며, 침략 전에 교황의 지원을 받았다는 다른 증거는 없다.

윌리엄은 8월 초에 군대와 함대를 준비했지만, 불리한 바람 때문에 9월 말까지 출항하지 못했다. 윌리엄은 잉글랜드에서 해럴드의 군대가 해안에 배치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저항 없이 상륙할 때까지 기다렸을 가능성이 있다.[40]



1066년 9월 28일, 노르만군은 서식스의 페벤시에 상륙하여 헤이스팅스에 나무 성을 쌓고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41] 이는 군대에 보급품을 확보하고, 해럴드와 그의 가족이 그 지역의 많은 토지를 소유했기 때문에 윌리엄의 적을 약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42]

3. 1. 토스티그의 공격과 노르웨이의 침공

1066년 초, 해럴드의 동생 토스티그 고드윈슨은 플랑드르에서 모집한 함대를 이끌고 잉글랜드 남동부를 습격했다. 토스티그는 노섬브리아 반란으로 쫓겨나 플랑드르로 망명했었다.[22] 이후 오크니에서 온 다른 배들이 합류했다. 해럴드의 함대에 위협을 느낀 토스티그는 북쪽으로 이동하여 이스트 앵글리아와 링컨셔를 습격했지만, 머시아 백작 에드윈과 노섬브리아 백작 모카에 의해 쫓겨났다. 대부분의 추종자에게 버려진 토스티그는 스코틀랜드로 물러나 여름을 보내며 새로운 병력을 모집했다.[23] 말콤 3세는 토스티그의 의형제였다고 한다.[22]

9월 초, 노르웨이 왕 하랄 3세는 300척 이상의 함대(약 15,000명)를 이끌고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했다. 하랄의 군대는 토스티그의 병력으로 더욱 증강되었다. 9월 20일, 풀포드 전투에서 에드윈과 모카가 이끄는 잉글랜드 북부 군대를 격파하고 요크를 점령했다.[25] 해럴드 고드윈슨이 에드윈과 모카의 누이와 결혼했음에도, 두 백작은 해럴드를 불신했을 수 있다. 그 결과 그들의 군대는 초토화되었고 1066년 나머지 전투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지만, 두 백작은 전투에서 살아남았다.[26]

하랄 3세는 요크로 이동했고, 요크는 그에게 항복했다. 9월 24일, 노르웨이군은 스탬퍼드 브리지라는 작은 마을로 향했다.[27] 해럴드 왕은 9월 중순에 노르웨이의 침략에 대해 알게 되었고, 가는 길에 병력을 모아 북쪽으로 급히 이동했다.[29] 9월 25일 새벽, 해럴드의 군대는 요크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노르웨이군의 위치를 알게 되었다.[28] 잉글랜드군은 침략자들을 향해 진격하여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그들을 기습하여 격파했다. 노르웨이의 하랄 3세와 토스티그는 사망했고, 노르웨이군은 큰 손실을 입어 300척의 배 중 생존자를 수송하는 데 24척만 필요했다. 하지만 잉글랜드의 승리는 대가가 컸으며, 해럴드의 군대는 훼손되고 약화된 상태로 남겨졌다.[29]

3. 2. 노르만군의 상륙과 헤이스팅스 전투

기욤 공이 이끄는 노르만 함대가 바다를 건너는 장면


해럴드 왕이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노르웨이 군을 격파한 9월 25일로부터 며칠 후, 해럴드 왕이 잉글랜드 해군을 일시 해산시킨 틈을 타 기욤 2세가 이끄는 노르망디 군이 잉글랜드에 상륙했다. 노르만 군은 9월 28일 서식스 지방 페벤시에 상륙하여 헤이스팅스에 목조 요새를 건축했다. 그리고 그 요새를 거점으로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172] 이 약탈로 기욤 군은 충분한 병량을 확보할 수 있었고, 또한 이 지역에는 해럴드 왕의 직할지가 많이 존재했기 때문에, 해럴드 측의 세력 삭감에도 기여했다.[173]

토스티 고드윈슨과 하랄 하르드라다 왕을 물리친 해럴드 왕은, 모카 백작과 에드윈 백작을 비롯한 다수의 군세를 북부에 남겨두고, 자신은 노르만 군을 맞이하기 위해 남은 군세를 이끌고 남진했다.[174] 해럴드 왕이 언제 노르만 군의 침공을 알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도 남진하는 중에 알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남진하는 해럴드 왕은 런던으로 향해 일주일 정도 머무른 후, 헤이스팅스로 진군을 재개했다.[175] 해럴드 왕은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사용했던 기습 작전을 노르만 군에게도 실행하려 했지만, 노르만 군은 정찰병을 통해 해럴드 군의 접근을 감지했다. 전투 전의 상황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기욤 군은 헤이스팅스의 요새에서 나와 접근하는 해럴드 군을 향해 진군했다.[176] 해럴드 왕은 헤이스팅스 요새에서 6km 정도 떨어진 배틀 부근의 센락 힐이라는 언덕 위에 진을 치고, 방어 진지를 구축하여 노르만 군을 기다렸다.[177]

이때 충돌한 해럴드 군의 정확한 규모를 기록한 당시의 문헌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노르만 측의 당시 문헌에 따르면 해럴드 군의 규모는 1,200,000명 또는 400,00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178] 현대 역사가들은 헤이스팅스 전투에 참전한 해럴드 군의 규모를 5,000~13,000명 규모였다고 주장하지만,[179] 특히 7,000명~8,000명 정도의 규모였다는 의견이 가장 많다.[180][181] 이 해럴드 군은 민병 보병 부대와 하스칼이라고 불리는 직업 군인, 해럴드 왕과 참여한 제후들이 소유한 자체 부대로 구성되었으며, 대부분은 보병이었다. 퓨르드와 하스칼의 차이점으로는 무장을 들 수 있으며, 하스칼은 퓨르드에 비해 더 무거운 갑옷을 장비했다. 또한 소수였지만 궁병도 있었다.[131] 해럴드 군에 참가한 귀족 중, 소수의 귀족만이 확인되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자는 기르트 고드윈슨, (둘 다 해럴드 왕의 형제)이다.[163] 그 외에도 해럴드 왕의 두 친척을 포함한 18명의 귀족들이 실제로 헤이스팅스 전투에 참가했다는 것이 특정되었다.[170]

양군이 격돌하는 순간. 노르만 군과 잉글랜드 군의 병사들이 함께 쓰러지고 있다.


방패벽으로 노르만 기병의 돌격을 막아내는 잉글랜드 보병


1066년 10월 14일 오전 9시경, 양군은 격돌했다. 전투는 하루 종일 이어졌다. 전투의 대략적인 경과는 알려져 있지만, 전투 중의 상세한 사건은 명확하지 않다. 당시 문헌에서 모순이 확인되기 때문이다.[182] 기욤 군과 해럴드 군 모두 규모는 거의 동일했다고 여겨지지만, 기욤 군은 보병, 기마대, 궁병이 모두 갖춰져 있었던 반면, 해럴드 군은 대다수가 보병이고 궁병은 극소수였다.[183] 해럴드 군은 방패벽을 언덕을 따라 구축하고, 언덕 아래에서 쳐들어오는 기욤 군을 격퇴했다. 기욤 군은 해럴드 군의 방패벽을 뚫지 못하고, 많은 희생자를 냈다. 기욤 공 휘하의 브르타뉴인 부대 중에는 너무 많은 희생에 공황 상태에 빠져 전선에서 이탈한 부대도 있었다. 그리고 해럴드 군 휘하의 잉글랜드 부대 일부가 도주하는 브르타뉴인 부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노르만 군의 기마대는 브르타뉴인을 추격하는 잉글랜드 군에게 돌격을 감행했다. 브르타뉴인이 도주하는 와중에 노르만 군에서는 ''"기욤 공이 전사했다"''는 잘못된 소문이 퍼져, 노르만 군은 크게 동요했다. 기욤 공은 자신의 투구를 벗고, 군대를 돌아다니며 동요를 잠재우고, 병사들을 고무했다. 그 후 노르만 군은 두 차례에 걸쳐 가짜 퇴각을 실시하여, 잉글랜드 군이 전열을 무너뜨리고 각자 추격하도록 유인했고, 전열에서 돌출하여 추격해 온 잉글랜드 부대에 대해 기마대를 이용하여 여러 번 돌격했다.[184] 현재 남아있는 문헌에 있는 오후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기술에는 모순이 있다. 다만, 오후에 일어난 사건 중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해럴드 왕의 전사'일 것이다. 해럴드 왕이 전사한 이유는 각각의 문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에 따르면, 해럴드 왕은 기욤 공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한다. 바이에 태피스트리에 따르면, 해럴드 왕은 눈에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태피스트리가 제작된 12세기경에 창작된 이야기일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진다.[185] 다른 문헌에는 해럴드 왕의 전사 이유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 "헤이스팅스에서의 전투는 매우 격렬한 근접전이었기 때문에, 누가 해럴드 왕을 쓰러뜨렸는지 볼 수조차 없었다."라는 것이 그 이유로 여겨진다.[186] 기욤 드 푸아티에는 해럴드 왕의 죽음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187]

바이에 태피스트리에 그려진 해럴드 왕 전사의 순간


패주하는 잉글랜드 군


전투 다음 날, 해럴드 왕의 유해는 그의 방어구 또는 신체적 특징으로 확인되었다.[189] 그의 개인 깃발은 기욤에게 헌납되었고,[190] 나중에 교황에게 보내졌다.[191] 전사한 잉글랜드 병사들의 유해는 해럴드의 동생과 하스칼을 포함하여 전장에 남겨졌지만,[192] 나중에 친족들이 일부를 옮겨갔다.[193]

헤이스팅스 전투는 윌리엄 공작이 이끄는 노르만 군대가 잉글랜드를 정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잉글랜드의 해럴드 왕이 전사하고 잉글랜드 군이 패배함으로써, 잉글랜드는 노르만 왕조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는 잉글랜드 역사에 큰 전환점을 가져왔으며,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로의 이행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3. 3. 윌리엄의 런던 입성과 즉위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한 윌리엄은 남은 앵글로색슨 귀족들이 복종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들은 저항을 계속했다. 웨섹스 왕조의 마지막 남자인 에드거 애설링이 현자 평의회에서 잉글랜드 왕으로 선언되었고, 에드윈 백작, 모카 백작, 캔터베리 대주교 스티건드와 요크 대주교 엘드레드의 지지를 받았다.[197]

이에 윌리엄은 켄트 해안을 따라 런던으로 진격했다. 도중에 노르만 군에게 저항한 사우스워크를 불태우는 등 저항 세력과 싸웠지만, 런던교 공격에 실패하여 우회해야 했다.[198]

윌리엄은 템스 계곡을 거쳐 월링퍼드에서 템스 강을 건너 캔터베리 대주교 스티건드의 항복을 받았다. 이후 칠턴 언덕을 따라 북동쪽으로 진격하며 런던에서 출격한 잉글랜드 군과 교전했고, 북서쪽에서 런던으로 계속 진군했다.[199]

마침내 앵글로색슨 귀족들은 하트퍼드셔의 버컴스테드에서 윌리엄에게 항복했다. 1066년 12월 25일, 윌리엄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잉글랜드 왕 '''윌리엄 1세'''로 즉위했고, 엘드레드 대주교 아래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200][198]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 왕이 된 후에도 앵글로색슨 귀족들의 반란을 억누르기 위해 노력했다.

4. 잉글랜드 저항과 노르만 지배 체제 확립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한 후에도 잉글랜드 각지에서는 노르만 지배에 대한 저항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저항은 초기에는 잉글랜드 귀족들과 웨일스 세력의 연합, 그리고 덴마크의 개입 등으로 나타났다.

1067년 켄트에서 볼로뉴의 유스타스 2세와 연합한 반란군이 도버 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같은 해 와일드의 에드릭이 웨일스 통치자들과 연합하여 머시아 서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67] 1068년에는 해럴드의 어머니 기사도 포함된 엑서터 반란군을 윌리엄이 진압했고, 에드윈과 모카 형제, 노섬브리아 백작 고스패트릭이 각각 머시아와 노섬브리아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윌리엄에게 진압되었다.[71]

1069년에는 노르만 노섬브리아 백작 로베르 드 코민이 학살당하고, 에드거 애설링, 고스패트릭 등이 이끄는 노섬브리아 반란군이 요크를 공격했다. 윌리엄은 이들을 격파하고 요크에 두 번째 성을 건설했다.[74] 덴마크의 스벤 2세가 보낸 함대가 잉글랜드 해안에 도착하여 반란을 지원했지만, 윌리엄은 덴마크인들을 매수하여 철수시키고 북부 황폐화를 통해 노섬브리아의 저항을 분쇄했다.[76]

1070년, 덴마크의 스벤 2세가 직접 함대를 이끌고 잉글랜드에 도착하여 헤레워드 더 웨이크가 이끄는 반군과 합류했으나, 추가 데인겔드를 받고 덴마크로 돌아갔다.[80] 1071년 초, 엘리 섬에서 마지막 반란이 일어났지만, 윌리엄은 부교를 건설하여 섬을 함락시키고 잉글랜드의 저항을 종식시켰다.[81]

4. 1. 초기 반란과 진압

잉글랜드 귀족들의 항복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 각지에서는 노르만 왕조에 대한 저항이 계속되었다.[67] 1067년 켄트에서는 볼로뉴의 유스타스 2세와 연합한 반란군이 도버 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67] 같은 해, 셔롭셔의 지주 와일드의 에드릭[68]은 그위네드와 파위스의 웨일스 통치자들과 동맹을 맺고 머시아 서부에서 반란을 일으켜 헤리퍼드에 주둔한 노르만 군대와 싸웠다.[67]

이러한 상황 때문에 윌리엄 1세는 1067년 말 잉글랜드로 돌아와야 했다.[66] 1068년, 윌리엄 1세는 엑서터에서 해럴드 2세의 어머니 기사를 포함한 반란군을 포위했고, 많은 사상자를 낸 끝에 도시를 함락시켰다.[69] 그해 말, 에드윈과 모카 형제가 웨일스의 지원을 받아 머시아에서, 노섬브리아 백작 고스패트릭[70]이 노섬브리아에서 각각 반란을 일으켰다. 윌리엄 1세는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각지에 성을 쌓고 군대를 주둔시켰다.[71] 에드윈과 모카 형제는 항복했고, 고스패트릭은 스코틀랜드로 도망쳤다. 에드거 애설링과 그의 가족도 스코틀랜드로 피신했다.[72] 한편, 해럴드 2세의 아들들은 아일랜드에서 서머싯, 데번, 콘월을 습격했다.[73]



1069년 초, 새로 임명된 노르만 노섬브리아 백작 로베르 드 코민과 그의 병사들이 더럼에서 학살당했다. 에드가, 고스패트릭 등이 이끄는 노섬브리아 반란군은 요크의 성주를 죽이고 노르만 성을 포위했다. 윌리엄 1세는 군대를 이끌고 요크로 가 반란군을 격파하고, 요크에 두 번째 성을 건설했다.[74] 이후 지역 봉기는 요크 주둔군에 의해 진압되었다.[74] 해럴드 2세의 아들들은 노덤 전투에서 노르만 군대에 패배했다.[75] 1069년 8월 또는 9월, 덴마크의 스벤 2세가 보낸 함대가 잉글랜드 해안에 도착하여 새로운 반란을 촉발했다. 덴마크인들은 노섬브리아 반란군과 연합하여 요크의 노르만 주둔군을 격파하고 성을 점령했다. 그러나 링컨셔 공격은 실패했다.[76]

서부 머시아에서는 에드릭의 군대가 웨일스 동맹군과 함께 슈루즈버리의 성을 공격했다. 남서부에서는 데번과 콘월 출신의 반군이 엑서터를 공격했지만 격퇴당했다. 다른 반군들은 몬터큐트 성을 포위했지만, 쿠탕스의 제프리가 이끄는 노르만 군대에 패배했다.[76] 윌리엄 1세는 덴마크인들을 험버강 북쪽으로 몰아내고, 폰테프락트에서 덴마크인들을 격파한 후 요크를 점령했다. 그는 덴마크인들을 매수하여 철수시켰고, 1069-70년 겨울 동안 북부 황폐화를 통해 노섬브리아를 황폐화시켜 저항을 분쇄했다.[76]

1070년 초, 윌리엄 1세는 왈테오프와 고스패트릭의 항복을 받고, 에드가와 그의 지지자들을 스코틀랜드로 몰아낸 후, 머시아로 돌아와 체스터를 거점으로 남은 저항을 진압했다.[76]

4. 2. 덴마크의 개입과 마지막 저항

1070년, 덴마크의 왕 스벤 2세는 함대를 이끌고 잉글랜드에 도착하여, 이전에 윌리엄과 맺었던 철수 합의를 파기했다.[80] 그는 습지대로 군대를 보내 헤레워드 더 웨이크가 이끄는 잉글랜드 반군과 합류했다. 헤레워드는 당시 엘리 섬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스벤 2세는 곧 윌리엄으로부터 추가 데인겔드를 받고 덴마크로 돌아갔다.[80]

덴마크인들이 떠난 후, 습지대의 반군은 습지의 보호를 받으며 계속 활동했다. 1071년 초, 이 지역에서 마지막 반란이 일어났다. 에드윈과 모카는 다시 윌리엄에게 등을 돌렸지만, 에드윈은 곧 배신당해 살해되었다. 모카는 엘리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헤레워드 및 스코틀랜드에서 온 망명 반군과 합류했다. 윌리엄은 이 마지막 저항 거점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와 함대를 이끌고 왔다. 몇 차례의 실패를 겪은 후, 노르만족은 엘리 섬에 도달하기 위한 부교를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교두보에서 반군을 격파하고 섬을 함락시켜, 잉글랜드에서의 저항을 사실상 종식시켰다.[81] 모카는 남은 생애 동안 투옥되었고, 헤레워드는 사면받고 그의 땅을 돌려받았다.[82]

5. 노르만 정복의 영향

노르만 정복은 잉글랜드 사회, 정치, 문화, 언어 등 다방면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정복 이전 잉글랜드는 샤이어라는 행정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 샤이어는 샤이어 리브 또는 셰리프로 알려진 관리들이 운영했다. 윈체스터에는 상설 재무부가 있었고, 토지세(겔드)를 기반으로 한 왕국의 부는 잉글랜드 군주의 강점 중 하나였다. 잉글랜드 왕들은 관리들에게 영장을 발급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둠스데이 북의 한 절. 워릭셔 지역에 관한 기술이 있다.


이러한 앵글로색슨 시대의 정교한 행정 시스템은 노르만인에게 계승되어 더욱 발전했다. 윌리엄 1세는 정부의 틀은 유지했지만, 대부분의 관리들을 노르만인으로 교체했다. 공식 문서의 언어는 고대 영어에서 라틴어로 바뀌었다. 산림법이 도입되어 잉글랜드의 대규모 구역이 왕실 삼림으로 지정되었다. 둠스데이 북 편찬을 통해 왕국의 토지 소유에 대한 행정적 목록이 작성되었으며, 이는 중세 유럽에서 유일한 것이었다. 둠스데이 북은 샤이어를 기반으로 구획되었고, 왕의 각 수석 토지 보유자의 모든 토지 소유를 나열했다.

정복의 가장 뚜렷한 영향 중 하나는 잉글랜드 지배 계급의 언어로서 고대 영어를 대체한 앵글로-노르만어의 도입이었다. 앵글로-노르만어는 제한적인 북유럽 영향을 받은 고대 프랑스어의 북부 방언이었다. 노르만 프랑스어 단어들이 영어에 유입되었고, 윌리엄, 로버트, 리처드와 같은 프랑스식 남성 이름이 곧 흔해졌다. 여성 이름은 더 느리게 바뀌었다.

서퍽주 웨스트 스토 앵글로색슨 마을의 앵글로색슨 마을 현대식 재건축 모습


노르만 정복 이후 잉글랜드 사회 하층민에 대한 영향은 정확히 평가하기 어렵다. 가장 큰 변화는 잉글랜드의 노예제가 12세기 중반까지 사라졌다는 것이다.[254] 1086년 둠즈데이 북에는 약 28,000명의 노예가 기록되었는데, 이는 1066년보다 줄어든 수치이다. 에식스주와 같은 일부 지역에서는 노예 수가 20년 동안 20% 감소했다.[255]

많은 앵글로색슨 자유 농민들이 지위를 잃고 자유롭지 않은 농노와 구별할 수 없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변화가 전적으로 정복 때문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침략과 그 후유증은 이미 진행 중이던 과정을 가속화했을 것이다.[254] 농민들의 생활 방식은 1066년 이후 수십 년 동안 크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257]

5. 1. 지배 계층의 교체와 봉건 제도 강화



잉글랜드 정복 이후, 노르만인들은 잉글랜드를 통치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88] 노르만인은 잉글랜드 원주민에 비해 수가 매우 적었는데, 역사가들은 프랑스 출신을 포함하여 노르만 토지 소유자가 약 8,000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89] 윌리엄 1세의 부하들은 침략에 대한 대가로 토지와 작위를 받았지만,[90]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 토지에 대한 궁극적인 소유권을 주장하며, 자신의 뜻대로 처분할 권리를 주장했다.[91] 이후 모든 토지는 군사적 봉사의 대가로 왕으로부터 직접 "보유"되는 봉건적 토지 보유(Feudal land tenure) 형태로 바뀌었다.[91] 노르만 영주들은 대개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전역에 흩어져 있는 재산을 소유했다.[92]

윌리엄 1세는 노르만족 부하들에게 보상으로 줄 토지를 찾기 위해,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와 함께 싸우다 죽은 잉글랜드 영주들의 영지를 몰수하고 그 토지의 일부를 재분배했다.[93] 이러한 몰수는 반란을 일으켰고, 그 결과 더 많은 몰수가 발생했으며, 이는 헤이스팅스 전투 이후 5년 동안 계속되었다.[90] 반란을 진압하고 추가 반란을 막기 위해 노르만인들은 이전에는 없었던 수많은 성과 요새를 건설했으며,[94] 초기에는 대부분 모트와 베일리(motte-and-bailey) 양식이었다.[95] 역사가 로버트 리디어드는 "노리치, 더럼 또는 링컨의 도시 경관을 보면 노르만 침략의 영향을 강하게 상기하게 된다"고 말한다.[96] 윌리엄 1세와 그의 귀족들은 또한 과부와 딸의 재산 상속에 대해 더 엄격하게 통제했으며, 종종 노르만인과의 결혼을 강요했다.[97]

1072년부터 1204년 노르망디 프랑스 침공(French invasion of Normandy (1202–1204))까지 윌리엄 1세와 그의 후계자들이 대부분 잉글랜드를 떠나 있었음에도 통치가 가능했다는 것은 윌리엄 1세의 통제권 장악이 성공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1072년 이후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보다 프랑스에서 75% 이상의 시간을 보냈다. 그는 외국의 침략으로부터 왕국을 방어하고 내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노르망디에 직접 가 있어야 했지만, 멀리서도 잉글랜드를 통치할 수 있는 왕실 행정 구조를 구축했다.[98]

노르만 정복으로 잉글랜드 구 귀족은 거의 완전히 사라지고, 잉글랜드의 가톨릭교회에 대한 통제권도 잃게 되었다.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그 재산을 대륙에서 온 자신의 부하들에게 넘겨주었다. 둠스데이 북(Domesday Book)은 이러한 몰수 과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1086년까지 티스 강 남쪽 잉글랜드 토지의 약 5%만이 잉글랜드인의 손에 남아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작은 잔여분조차도 그 이후 수십 년 동안 더욱 줄어들었고, 토지 소유자의 제거는 특히 잉글랜드 남부 지역에서 가장 완벽하게 이루어졌다.[99][100]

또한 잉글랜드 원주민들은 정부와 교회의 고위 직책에서 제거되었다. 1075년 이후 모든 백작령은 노르만인이 차지했고, 잉글랜드인들은 가끔 보안관으로 임명되었을 뿐이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도 잉글랜드 고위직들은 자리에서 쫓겨나거나, 그들의 생애 동안 자리를 지키다가 죽으면 외국인으로 교체되었다. 1095년 울프스탄이 사망한 후, 어떤 주교직도 잉글랜드인이 차지하지 못했으며, 잉글랜드인 수도원장은 흔치 않게 되었고, 특히 대형 수도원에서는 더욱 그러했다.[101]

5. 2. 행정 및 사법 제도 정비

노르만 정복 이전 잉글랜드는 샤이어라는 행정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 샤이어는 샤이어 리브 또는 셰리프로 알려진 관리들이 운영했다.[109] 잉글랜드는 윈체스터에 상설 재무부를 가지고 있었고,[111] 토지세(겔드)를 기반으로 한 왕국의 부는 잉글랜드 군주의 강점 중 하나였다.[112] 잉글랜드 왕들은 관리들에게 영장을 발급하는 시스템을 개발했다.[113]

이러한 앵글로색슨 시대의 정교한 행정 시스템은 노르만인에게 계승되어 더욱 발전했다.[108] 윌리엄 1세는 정부의 틀은 유지했지만, 대부분의 관리들을 노르만인으로 교체했다. 공식 문서의 언어는 고대 영어에서 라틴어로 바뀌었다. 삼림법이 도입되어 잉글랜드의 대규모 구역이 왕실 삼림으로 지정되었다.[109] 둠스데이 북 편찬을 통해 왕국의 토지 소유에 대한 행정적 목록이 작성되었으며, 이는 중세 유럽에서 유일한 것이었다. 둠스데이 북은 샤이어를 기반으로 구획되었고, 왕의 각 수석 토지 보유자의 모든 토지 소유를 나열했다.[115] 둠스데이 북 편찬은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강화하고 효율적인 조세 징수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한국의 관점에서 볼 때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5. 3. 언어와 문화의 변화

정복의 가장 뚜렷한 영향 중 하나는 잉글랜드 지배 계급의 언어로서 고대 영어를 대체한 앵글로-노르만어의 도입이었다. 앵글로-노르만어는 제한적인 북유럽 영향을 받은 고대 프랑스어의 북부 방언이었다.[116] 노르만 프랑스어 단어들이 영어에 유입되었고, 윌리엄, 로버트, 리처드와 같은 프랑스식 남성 이름이 곧 흔해졌다. 여성 이름은 더 느리게 바뀌었다. 노르만 침략은 이전의 스칸디나비아 침략 이후 크게 변화한 지명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116]

무역과 기본적인 의사소통의 필요성 때문에 적어도 일부 노르만인과 토착 잉글랜드인들은 이중 언어 구사자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복왕 윌리엄은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고, 그 후 수세기 동안 영어는 귀족들에게 잘 이해되지 못했다.[116][117]

5. 4. 사회 구조의 변화

노르만 정복 이후 잉글랜드 사회 하층민에 대한 영향은 정확히 평가하기 어렵다. 가장 큰 변화는 잉글랜드의 노예제가 12세기 중반까지 사라졌다는 것이다.[120] 1086년 둠즈데이 북에는 약 28,000명의 노예가 기록되었는데, 이는 1066년보다 줄어든 수치이다. 에식스주와 같은 일부 지역에서는 노예 수가 20년 동안 20% 감소했다.[121] 노예 소유가 감소한 주된 이유는 교회의 반대와, 농노와 달리 소유주가 전적으로 부양해야 하는 노예를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 때문으로 보인다.[122] 노예 제도는 불법화되지 않았고, 헨리 1세 치세의 ''Leges Henrici Primi''는 노예 소유를 여전히 합법적인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121]

많은 앵글로색슨 자유 농민들이 지위를 잃고 자유롭지 않은 농노와 구별할 수 없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변화가 전적으로 정복 때문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침략과 그 후유증은 이미 진행 중이던 과정을 가속화했을 것이다.[120] 흩어져 있는 농장보다는 도시의 확산과 시골의 핵형 정착지의 증가는 노르만족의 잉글랜드 진출에 의해 가속화되었을 것이다.[120] 농민들의 생활 방식은 1066년 이후 수십 년 동안 크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123]

과거 역사가들은 여성들이 정복으로 인해 덜 자유로워지고 권리를 잃었다고 주장했지만, 현재의 학문은 이러한 견해를 대부분 거부하고 있다. 토지를 소유한 계층 외에는 여성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므로 1066년 이후 농민 여성의 지위에 대해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다. 귀족 여성들은 주로 친족 관계를 통해 정치 생활에 계속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1066년 이전과 이후 모두 귀족 여성은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고, 일부 여성은 원하는 대로 재산을 처분할 수 있는 능력을 계속 유지했다.[124]

6. 역사적 평가와 논쟁

정복에 대한 논쟁은 거의 즉시 시작되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윌리엄 1세의 죽음에 대해 논하면서 그와 정복을 운문으로 비난했지만, 프랑스인인 윌리엄 드 푸아티에가 쓴 국왕의 부고는 칭찬으로 가득했다.[128] 그 이후 역사가들은 이 문제의 사실과 이를 해석하는 방법에 대해 논쟁을 벌였지만,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128]

"노르만 멍에"라는 이론 또는 신화는 17세기에 등장했으며,[125] 앵글로색슨 사회가 정복 이후 등장한 사회보다 더 자유롭고 평등했다는 생각이다.[126] 이 이론은 역사적 사실보다는 개발된 시대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오늘날까지 정치 및 대중적 사고에서 계속 사용되고 있다.[127]

20세기와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역사가들은 정복 자체의 옳고 그름보다는 침략의 영향에 더 집중했다. 리처드 서던과 같은 일부 역사가들은 정복을 역사적 결정적 전환점으로 보았다.[128] 서던은 "야만인 왕국의 등장과 20세기 사이에 유럽의 어떤 나라도 1066년 이후 잉글랜드가 겪은 것만큼 짧은 시간에 이처럼 급격한 변화를 겪지 않았다"라고 말했다.[129] 반면 H. G. 리처드슨과 G. O. 세일스와 같은 다른 역사가들은 변화가 덜 급진적이었다고 믿는다.[128] 보다 일반적인 용어로 싱만은 정복을 "중세 초기를 특징짓는 민족 이동의 마지막 메아리"라고 불렀다.[130]

정복의 영향에 대한 논쟁은 1066년 이후의 변화를 어떻게 측정하는지에 달려있다. 만약 앵글로색슨 잉글랜드가 침략 전에 이미 봉건제, 성 또는 사회의 다른 변화를 도입하면서 진화하고 있었다면, 정복은 중요했지만 급진적인 개혁을 나타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잉글랜드 귀족의 제거 또는 문학 언어로서 고대 영어의 상실로 측정한다면 변화는 극적이었다. 노르만을 잉글랜드인을 박해하는 자 또는 쇠퇴하는 앵글로색슨 귀족으로부터 나라를 구원한 자로 묘사하면서, 민족주의적 주장이 이 논쟁의 양쪽에서 제기되었다.[128]

7. 노르만 정복을 소재로 한 작품

노르만 정복은 다양한 문학 작품과 게임 등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이러한 작품들은 이 사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반영한다.


  • 『문명 5』
  • 바이킹 (덴마크) 문명을 추가하는 DLC 팩에, 노르만 정복을 소재로 한 시나리오 맵 "1066: 바이킹의 운명의 해"가 동봉되어 있다.
  • 『바이킹: 발할라』
  • 2022년부터 넷플릭스에서 방영되고 있는 역사 드라마. 바이킹의 전설적인 왕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와 그의 아들들의 일생을 그린 대작 역사 드라마 『'''바이킹: 바다의 전사들'''』의 스핀오프 드라마이며, 전작으로부터 100년 후의 북유럽 세계를 그리고 있다. 아이리시 타임스에 따르면, 모험가 '''레이프 에릭손''', 북방 신앙을 굳게 지키는 방패의 처녀 '''프레이디스'''와 전작의 주요 캐릭터였던 노르웨이 통치자 하랄 하르드라다의 후손으로 노르웨이 왕위 탈환을 목표로 하는 '''하랄 왕자'''나 노르만인의 왕 '''정복왕 윌리엄'''에 초점을 맞춘 드라마로 제작하고 있다.

참조

[1] 서적 Normandy Before 1066
[2] 서적 Normans
[3] 서적 Normandy Before 1066
[4] 서적 Normandy Before 1066
[5] 서적 Capetian France
[6] 서적 Æthelred the Unready
[7] 서적 Ruling England
[8] 서적 Unification and Conquest
[9] 서적 Death of Anglo-Saxon England
[10] 서적 Harold
[11] 서적 William the Conqueror
[12] 서적 Death of Anglo-Saxon England
[13] 간행물 "Harthacnut" Blackwell Encyclopaedia of Anglo-Saxon England
[14] 서적 Norman Conquest
[15] 서적 Anglo-Saxon England
[16] 서적 Ruling England
[17] 서적 Norman Conquest
[18] 서적 Norman Conquest
[19] 서적 Unification and Conquest
[20] 서적 William the Conqueror
[21] 서적 Norman Conquest
[22] 서적 Anglo-Saxon England
[23] 서적 Harold
[24] 서적 Harold
[25] 서적 Harold
[26] 서적 1066
[27] 서적 1066
[28] 서적 1066
[29] 서적 Harold
[30] 서적 William the Conqueror
[31] 서적 Hastings
[32] 서적 Campaigns of the Norman Conquest
[33] 서적 Battle of Hastings
[34] 서적 Campaigns of the Norman Conquest
[35] 서적 1066
[36] 서적 Hastings
[37] 서적 1066
[38] 서적 1066
[39] 논문 Norman Conquest of England
[40] 서적 Norman Conquest
[41] 서적 William the Conqueror
[42] 서적 1066
[43] 서적 Struggle for Mastery
[44] 서적 1066
[45] 서적 Norman Conquest
[46] 서적 Battle of Hastings
[47] 서적 1066
[48] 서적 Battle of Hastings
[49] 서적 Battle of Hastings
[50] 서적 Hastings
[51] 서적 1066
[52] 서적 Norman Conquest
[53] 서적 Struggle for Mastery
[54] 서적 Norman Conquest
[55] 서적 Norman Conquest
[56] 서적 1066
[57] 서적 Hastings
[58] 서적 Hastings
[59] 서적 Hastings
[60] 서적 1066
[61] 서적 Norman Conquest
[62] 서적 Campaigns of the Norman Conquest
[63] 서적 William the Conqueror
[64] 서적 William the Conqueror
[65] 서적 Hastings
[66] 서적 Norman Conquest
[67] 서적 William the Conqueror
[68] 간행물 Eadric the Wild
[69] 서적 Harold
[70] 서적 Norman Conquest
[71] 서적 William the Conqueror
[72] 서적 English and the Norman Conquest
[73] 서적 English and the Norman Conquest
[74] 서적 English and the Norman Conquest
[75] 서적 English and the Norman Conquest
[76] 서적 English and the Norman Conquest
[77] 서적 Norman Conquest
[78] 서적 Campaigns of the Norman Conquest
[79] 간행물 Hereward Oxford Dictionary of National Biography
[80] 서적 William the Conqueror
[81] 서적 English and the Norman Conquest
[82] 서적 Norman Conquest
[83] 서적 William the Conqueror
[84] 서적 William the Conqueror
[85] 서적 William the Conqueror
[86] 서적 William the Conqueror
[87] 서적 William the Conqueror
[88] 서적 Unification and Conquest
[89] 서적 Struggle for Mastery
[90] 서적 Struggle for Mastery
[91] 서적 Struggle for Mastery
[92] 서적 Struggle for Mastery
[93] 서적 Struggle for Mastery
[94] 서적 Anglo-Norman England
[95] 서적 Medieval Fortress
[96] 서적 Castles in Context
[97] 서적 Struggle for Mastery
[98] 서적 Struggle for Mastery
[99] 서적 English and Normans
[100] 논문 Significance English Historical Review
[101] 서적 English and Normans
[102] 서적 Western Travellers
[103] 서적 From Norman Conquest to Magna Carta
[104] 서적 Norman Conquest
[105] 서적 Byzantine Armies
[106] 서적 Norman Conquest
[107] 서적 Norman Conquest
[108] 서적 Governance of Anglo-Saxon England
[109] 서적 Norman Conquest
[110] 서적 Norman Conquest
[111] 서적 Norman Conquest
[112] 서적 Norman Conquest
[113] 서적 Norman Conquest
[114] 서적 Charters and Writs
[115] 서적 Norman Conquest
[116] 서적 Norman Conquest
[117] 서적 Story of Middle English
[118] 서적 Norman Conquest
[119] 서적 Norman Conquest
[120] 서적 Norman Conquest
[121] 서적 England and its Rulers
[122] 서적 Ruling England
[123] 서적 Norman Conquest
[124] 서적 Norman Conquest
[125] 서적 Debate
[126] 서적 Debate
[127] 서적 Norman Conquest
[128] 서적 England and its Rulers
[129] 서적 England and its Rulers
[130] 서적 Daily Life
[131] 서적 Hastings
[132] 서적 1066
[133] 서적 Normandy Before 1066
[134] 서적 Normans
[135] 서적 Normandy Before 1066
[136] 서적 Normandy Before 1066
[137] 서적 Capetian France
[138] 서적 Æthelred the Unready
[139] 서적 Ruling England
[140] 서적 Unification and Conquest
[141] 서적 Death of Anglo-Saxon England
[142] 서적 Harold
[143] 서적 William the Conqueror
[144] 서적 Death of Anglo-Saxon England
[145] 간행물 Harthacnut
[146] 서적 Norman Conquest
[147] 서적 Anglo-Saxon England
[148] 서적 Ruling England
[149] 서적 Norman Conquest
[150] 서적 Norman Conquest
[151] 서적 Unification and Conquest
[152] 서적 William the Conqueror
[153] 서적 Norman Conquest
[154] 서적 Anglo-Saxon England
[155] 서적 Harold
[156] 서적 Harold
[157] 서적 Harold
[158] 서적 1066
[159] 서적 1066
[160] 서적 1066
[161] 서적 Harold
[162] 서적 William the Conqueror
[163] 서적 Hastings
[164] 서적 Campaigns of the Norman Conquest
[165] 서적 Battle of Hastings
[166] 서적 Campaigns of the Norman Conquest
[167] 서적 1066
[168] 서적 Hastings
[169] 서적 1066
[170] 서적 1066
[171] 서적 Norman Conquest
[172] 서적 William the Conqueror
[173] 서적 1066
[174] 서적 Struggle for Mastery
[175] 서적 Norman Conquest
[176] 서적 Battle of Hastings
[177] 서적 '1066'
[178] 서적 Battle of Hastings
[179] 서적 Battle of Hastings
[180] 서적 Hastings
[181] 서적 '1066'
[182] 서적 Norman Conquest
[183] 서적 Struggle for Mastery
[184] 서적 Norman Conquest
[185] 서적 Norman Conquest
[186] 서적 '1066'
[187] 서적 Hastings
[188] 서적
[189] 서적
[190] 서적
[191] 서적
[192] 서적
[193] 서적
[194] 서적
[195] 서적
[196] 서적
[197] 서적
[198] 서적
[199] 서적
[200] 서적
[201] 서적 Norman Conquest
[202] 서적 William the Conqueror
[203] 간행물 Eadric the Wild Oxford Dictionary of National Biography
[204] 서적 Harold
[205] 서적 Norman Conquest
[206] 서적 William the Conqueror
[207] 서적 English and the Norman Conquest
[208] 서적 English and the Norman Conquest
[209] 서적 English and the Norman Conquest
[210] 서적 English and the Norman Conquest
[211] 서적 English and the Norman Conquest
[212] 서적 Norman Conquest
[213] 서적 Campaigns of the Norman Conquest
[214] 서적 Hereward Oxford Dictionary of National Biography
[215] 서적 William the Conqueror
[216] 서적 English and the Norman Conquest
[217] 서적 Norman Conquest
[218] 서적 William the Conqueror
[219] 서적 William the Conqueror
[220] 서적 William the Conqueror
[221] 서적 William the Conqueror
[222] 서적 Unification and Conquest
[223] 서적 Struggle for Mastery
[224] 서적 Struggle for Mastery
[225] 서적 Struggle for Mastery
[226] 서적 Struggle for Mastery
[227] 서적 Struggle for Mastery
[228] 서적 Anglo-Norman England
[229] 서적 Medieval Fortress
[230] 서적 Castles in Context
[231] 서적 Struggle for Mastery
[232] 서적 Struggle for Mastery
[233] 서적 English and Normans
[234] 간행물 Significance English Historical Review
[235] 서적 English and Normans
[236] 서적 Western Travellers
[237] 서적 From Norman Conquest to Magna Carta
[238] 서적 Norman Conquest
[239] 서적 Byzantine Armies
[240] 서적 Norman Conquest
[241] 서적 Norman Conquest
[242] 서적 Governance of Anglo-Saxon England
[243] 서적 Norman Conquest
[244] 서적 Norman Conquest
[245] 서적 Norman Conquest
[246] 서적 Norman Conquest
[247] 서적 Norman Conquest
[248] 간행물 Charters and Writs
[249] 서적 Norman Conquest
[250] 서적 Norman Conquest
[251] 간행물 Story of Middle English
[252] 서적 Norman Conquest
[253] 서적 Norman Conquest
[254] 서적 Norman Conquest
[255] 서적 England and its Rulers
[256] 서적 Ruling England
[257] 서적 Norman Conquest
[258] 서적 Norman Conquest
[259] 서적 Debate
[260] 서적 Debate
[261] 서적 England and its Rulers
[262] 서적 England and its Rulers
[263] 서적 Daily Life
[264] 서적 Norman Conquest
[265] 뉴스 Vikings spin-off Valhalla to be filmed for Netflix in Wicklow https://www.irishtim[...] アイリッシュ・タイムズ 2019-11-1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