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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침몰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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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연호 침몰 사고는 1963년 1월 18일 전라남도 목포시와 해남군 연호리 사이를 운항하던 여객선 연호가 영암군 가지도 앞 해상에서 침몰한 사건이다. 정원 초과, 과적, 폭풍주의보 발효 등 악천후 속 무리한 운항으로 인해 발생했으며, 이 사고로 승객 140명이 사망하고 1명이 생존했다. 사고 이후 수색 작업과 책임자 처벌, 선체 인양 등이 이루어졌으며, 정원 초과 및 과적, 악천후 속 무리한 운항, 선박 노후화 및 관리 부실, 정부의 부실 감독 등이 사고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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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침몰 사고
사고 개요
사건연호 침몰 사고
날짜1963년 1월 18일
시간오전 10시경
위치전라남도 목포시 허사도 근해 해역
원인과적, 돌풍
결과배 침몰
인명 피해
사망자140명
생존자1명

2. 사고 경위

여객선 연호는 전라남도 목포시해남군 황산면 연호리 사이를 운행하는 84마력, 34.5ton급 정기 여객선이었다. 정원은 선원 8명을 포함하여 86명이었고, 선령은 21년이었다.[1][2][4][5]

1963년 1월 18일 오전 8시 연호리를 출발한 연호는 낮 12시경 영암군 삼호면 가지도 앞 해상에서 돌풍을 만나 선체가 기울어지면서 침몰하였다.[1] 생존자와 부근을 운행하던 여객선 용당호 관계자의 목격에 따르면, 강풍에 배가 기울어지자 선실까지 물결이 들어왔고, 갑판에 있던 몇 사람은 뛰어 내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선실에 갇힌 채 5분 안에 침몰하였다고 하였다.[10]

이 사고로 생존자 1명을 제외한 140명 전원이 사망했다.

3. 수색 및 사고 처리

사고 직후 목포서는 구조정과 민간 선박 2척을 투입하여 수색 및 구조 작업을 진행하였다. 당시 파도는 3m로 높은 편이었다. 오후 2시까지 8구의 시신을 인양하였으며, 사고 현장에서 500m 떨어진 허사도에서 생존자 1명이 표착하여 경비정에 의해 구조되었다.[1][2]

치안국장은 교통부 해운당국이 정원 초과에 책임이 있다며, 현지 해운 관계자들에게 형사적 책임을 철저히 묻겠다고 밝혔다.[6] 또한 버스 정원제를 철저히 지키겠다고 덧붙였다.[7]

침몰된 선체는 1월 21일 음파탐지기로 발견되었고,[8] 구정인 1월 26일에 인양되었다.[9]

4. 원인 분석 및 논란

1963년 1월 18일, 전라남도 목포시해남군 황산면 연호리 사이를 운행하던 여객선 연호가 영암군 삼호면 가지도 앞 해상에서 돌풍을 만나 침몰했다.[1] 연호는 84마력, 34.5톤급의 정기 여객선으로, 정원은 선원 8명을 포함하여 86명이었고, 건조된 지 21년이 지난 배였다.[1][2][4][5]

생존자와 부근을 운행하던 여객선 용당호 관계자의 증언에 따르면, 강풍에 배가 기울어지자 선실까지 물결이 들어왔고, 갑판에 있던 몇 사람은 뛰어 내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선실에 갇힌 채 5분 안에 침몰하였다고 한다.[10] 이 사고로 생존자 1명을 제외한 140명 전원이 사망했다. 초기에는 사망자 수가 선원 7명을 포함하여 119명으로 보도되었다.[13]

4. 1. 정원 초과 및 과적

설날을 앞두고 연호는 승객 정원을 초과하여 141명의 승객과 곡물 150가마 이상을 싣고 운항하였다.[4][2] 연호 침몰 사고는 정원 초과와 과적, 그리고 악천후 속에서의 무리한 운항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4. 2. 악천후 속 무리한 운항

사고 당일, 설날을 앞두고 연호는 승객 정원을 초과하여 141명의 승객과 150가마 이상의 곡물류를 실었다.[4][2] 또한, 폭풍주의보가 발효된 악천후 속에서 항해하다가[10] 목포항을 20분 남겨두고 극심한 북서돌풍과 동쪽 방향의 횡파에 부딪혀 선체가 완전히 침몰했다.

1963년 1월 19일 기자회견에서 교통부 장관은 배가 침몰한 것은 두 차례 불어닥친 돌풍으로 인해 45도 이상 기울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11] 치안국에서는 선체의 부식이 심각했음을 지적하였다.[12]

4. 3. 선박 노후화 및 관리 부실

사고 선박 연호는 건조된 지 21년이 지난 노후 선박이었으며, 선체 부식 문제도 심각했던 것으로 드러났다.[12] 설날을 앞두고 승객 정원을 초과하여 승객 141명과 곡물 150가마 이상을 싣고,[4][2] 폭풍주의보가 발효된 악천후 속에서 항해하다가[10] 목포항 도착 20분 전에 극심한 북서돌풍과 동쪽 방향의 횡파에 맞아 침몰했다. 1월 19일 기자회견에서 교통부 장관은 배가 두 차례 불어닥친 돌풍으로 45도 이상 기울어져 침몰했다고 설명하였다.[11] 초기 보도에는 선원 7명을 포함하여 119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13]

참조

[1] 뉴스 木浦앞바다서旅客船沈沒 乘客百餘名溺死?一名生還 동아일보 1963-01-18
[2] 뉴스 木浦·海南間 旅客船沈沒事件 詳報 동아일보 1963-01-19
[3] 뉴스 木浦앞바다燕號沈沒 (1月18日·死亡122) 동아일보 1963-12-30
[4] 뉴스 木浦앞바다 海上慘變을보고 동아일보 1963-01-19
[5] 뉴스 21年前建造·性能 84馬力 침몰된 燕號 경향신문 1963-01-19
[6] 뉴스 李治安局長談 刑事責任묻겠다 경향신문 1963-01-21
[7] 뉴스 뻐스定員制 철저히實施 李治安局長담 경향신문 1963-01-21
[8] 뉴스 燕號의船體發見 동아일보 1963-01-21
[9] 뉴스 燕號,木浦에曳引 경향신문 1963-01-26
[10] 뉴스 暴風注意報모른채出航 동아일보 1963-01-19
[11] 뉴스 "慘事原因은突風" 朴交通해명 경향신문 1963-01-19
[12] 뉴스 遭難原因이엇갈려 경향신문 1963-02-02
[13] 뉴스 木浦앞 바다서 旅客船顚覆 경향신문 1963-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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