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원정군 (제2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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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 원정군(BEF)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 육군이 프랑스에 파견한 군대이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존 베레커 경이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프랑스로 파견되었으며, 1940년 5월 독일의 프랑스 침공으로 벨기에로 이동했으나 독일군에 의해 덩케르크에서 포위되었다. 다이나모 작전을 통해 병력 대부분을 영국 본토로 철수시켰지만, 중화기를 상실했다. 덩케르크에서 철수하지 못한 부대는 사이클 작전, 에어리얼 작전을 통해 철수했고, BEF는 해체되었다. 영국군은 프랑스 전투에서 6만 6천여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덩케르크 철수 과정에서 상당한 장비를 손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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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원정군 (제2차 세계 대전)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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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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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기간 | 1939년 9월 2일 – 1940년 5월 31일 |
종류 | 원정군 |
역할 | 프랑스 및 저지대 국가에서 야전 작전 |
규모 | 390,000명 |
지휘 구조 | 1re (제1군 집단) |
해체 | 1940년 |
주요 지휘관 | 존 베레커, 제6대 고트 자작 (고트 경) |
전투 | |
주요 전투 | 가짜 전쟁 네덜란드 침공 벨기에 전투 프랑스 전투 덩케르크 전투 |
관련 전투 상자 | |
피해 | |
사망 | 66,426명 |
실종 | 11,014명 |
부상 | 14,074명 |
포로 | 41,338명 |
관련 정보 |
2. 역사적 배경
1932년, "10년 규칙"이 폐지되었지만, 영국군은 여전히 유럽에서의 전쟁에 대비가 부족했다. 육군성은 보병 사단과 기병 여단을 동원하는 데 3주가 걸릴 정도로 준비가 미흡했다.[3]
2. 1. 1918–1932: 10년 규칙
1918년 이후, 전쟁 가능성이 매우 희박해 보였기 때문에, 영국 정부는 향후 10년간 대규모 전쟁이 없을 것이라는 "10년 규칙"을 적용하여 국방비를 책정했다. 1928년 7월부터 1932년 3월까지 제국 방위 위원회(CID)의 공식은 다음과 같았다.육군 장비 지출은 1924년부터 1933년까지 연간 150만파운드에서 260만파운드 사이였으며, 연평균 200만파운드 또는 무기 지출의 약 9%였다. 1930년대 초, 육군성은 소규모 기동력 있는 전문 육군을 목표로 기병대와 포병대의 기계화를 추진했다. 1930년까지 왕립 육군 수송대(RASC)는 기계화되었고, 일부 포병대는 트랙터로 이동할 수 있었으며, 몇몇 공병대, 통신대 및 기병대 부대가 트럭을 받았다. 1930년부터 1934년까지 향토군(TA) 포병대, 공병대, 통신대 부대는 트럭을 장비했으며, 1938년에는 정규군이 바퀴 달린 차량과 절반의 궤도 차량(전차 제외)을 배치했다. 1923년부터 1932년까지 연간 약 500대씩 총 5,000대의 자동차가 주문되었으며, 이 중 절반은 6륜 트럭이었다. 1936년까지 육군은 379대의 전차를 보유했는데, 이 중 209대가 경전차였고 166대가 중형 전차였다. 304대는 구식이었고, 경전차 69대는 최신형이었지만 1935년까지 육군에 배치되지 않았다.[2] 이 규칙으로 전쟁 지출은 1920년 7.66억파운드에서 1932년 3월 23일 폐지될 때 1.02억파운드로 감소했다. 영국군은 1914년보다 병력이 적었고, 유럽 전쟁을 위한 조직이나 장비가 없었으며, 육군성은 보병 사단과 기병 여단을 동원하는 데 3주가 걸렸을 것이다.[3]
2. 2. 1932–1939: 재무장
1939년 9월 1일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영국은 유럽 대륙에 병력을 파견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따라 제6대 고트 자작존 베레커 대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영국 해외 파견군(BEF)을 편성하여 프랑스에 병력을 파견하기 시작했다.[1] 지휘권은 협정에 따라 프랑스군 소속이었다.[1]3. 프랑스 파견 (1939-1940)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영국은 고트 경을 사령관으로 하는 영국 원정군(BEF)을 프랑스에 파견했다. 고트 경은 프랑스 북동부 작전 극장의 사령관인 알퐁스 조르주 장군에게 종속되었지만, 영국 정부에 상소할 권한을 가졌다.[1]
대부분의 영국 원정군은 프랑스-벨기에 국경을 따라 주둔했지만, 일부 영국 사단은 마지노선에서 프랑스 제3군과 번갈아 가며 복무했다. 1940년 4월, 제51 하이랜드 보병 사단은 추가 부대로 증강되어 자르 군이라고 불리며 프랑스 전선의 일부를 인수했다.[1]
벨기에와 네덜란드는 중립국이었고 연합국이나 독일 군대도 없었으며, 마지노선에 주둔한 군인들은 비활동적이었고,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는 요새에 과도하게 의존하여 "토미 로트"(노래 "마지노선에서 나를 상상해 보세요"에 묘사됨)라는 말이 생겨났다. 영국 군인들의 사기는 높았지만, 1940년 5월 9일까지 독일의 군사 활동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대규모 독일 공격이 없을 것이라고 추정했다.[1]
3. 1. BEF 파견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9월 3일 존 베레커, 제6대 고트 자작(고트 경)이 영국 원정군(BEF)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9월 4일 "W4 계획"에 따라 군대의 선발대가 포츠머스를 출발했으며, 첫 수송선단은 9월 9일 브리스틀 해협과 사우스햄튼에서 출발하여 9월 10일 셰르부르에, 이틀 뒤 프랑스 대서양 해안의 낭트와 생나제르에 상륙했다.[1] 9월 27일까지 152,000명의 군인과 21,424대의 차량이 프랑스에 상륙했다.[1]10월 3일, 제1 군단 (제1 보병 사단, 제2 보병 사단)이 영국 원정군에 배정되었고, 10월 12일에는 제2 군단 (제3 보병 사단, 제4 보병 사단)이 합류했다.[2] 1940년 5월까지 영국 원정군은 제1 군단, 제2 군단, 제3 군단 및 자르 군에서 실전 준비가 된 10개의 보병 사단으로 구성되었다.[3]
3. 2. 가짜 전쟁
1939년 9월부터 1940년 5월 10일까지의 기간은 "가짜 전쟁"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 시기에는 정찰 초계 부대의 사소한 충돌 외에는 별다른 활동이 없었다.[4] 당시 영국 원정군(BEF)이 방어해야 할 프랑스-벨기에 국경선은 아르망티에르에서 메넨 방향으로 서쪽으로 뻗어 있다가, 국경과 스헬데 강(프랑스어로 Escaut)의 합류점인 모드에서 남쪽으로 꺾여 릴과 루베 주변에 돌출부를 형성했다. 영국군은 고트 선에 참호, 무기 구덩이, 방호 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4] 영국 원정군의 첫 번째 사망자는 1939년 12월 9일 부비트랩에 걸린 정찰대에 아군이 사격을 가하면서 사망한 제1보병사단 제3보병여단 소속 킹스셔롭셔 경보병대대 제1대대 소속 27세의 하사 토마스 프라이데이였다.[5] 1939년 11월까지 프랑스는 벨기에의 딜 선을 따라 방어가 가능하다는 결정을 내렸지만, 영국은 벨기에 진격에 미온적이었다. 가믈랭은 그들을 설득했고, 11월 9일 딜 계획/D 계획이 채택되었으며, 11월 17일 가믈랭은 기베에서 나뮈르, 젬블루 갭, 바브르, 루뱅, 앤트워프에 이르는 노선을 자세히 설명하는 지침을 발표했다. 그 후 4개월 동안 네덜란드와 벨기에군은 방어 시설 건설에 매달렸고, 영국 원정군은 확장되었으며, 프랑스군은 더 많은 장비와 훈련을 받았다.
1940년 1월부터 4월까지 8개의 영토군 사단이 프랑스에 도착했지만, 제12 (동부) 보병 사단, 제23 (노섬브리아) 사단 및 제46 보병 사단은 비공식적으로 노동 사단이라고 불렸으며, 전투 훈련이나 장비를 갖추지 못했다.[2] 노동 사단은 처음 몇 달 동안 잉글랜드의 취약점을 지키며 보낸 26개의 새로운 보병 대대로 구성되었지만, 훈련을 거의 받지 못했다. 대대와 일부 공병대는 명목상의 여단으로 편성되었지만, 포병, 통신 또는 수송 수단이 부족했다. 이 사단은 훈련을 완료하기 전에 전투에 투입되지 않는다는 이해하에 노르망디의 생나제르에서 프랑스 플랑드르의 생폴쉬르테르누아즈까지 노동에 투입되었다.[3]
4. 프랑스 전투 (1940)
1940년 5월 10일, 독일군이 프랑스와 저지대 국가를 침공하면서 서부 전역이 시작되었다. 영국 원정군(BEF)은 딜 계획에 따라 벨기에로 진격하여 딜 선에서 독일군과 교전할 예정이었다.
제12 로열 랜서스의 장갑차가 5월 10일 오후 1시에 벨기에 민간인들의 환호를 받으며 국경을 넘었다. 영국 원정군은 루뱅에서 남서쪽 와브르까지 약 약 35.41km에 달하는 다일 강을 방어했다. 제3사단 (제2군단)이 북쪽을, 제1사단과 제2사단(제1군단)이 남쪽을 맡았으며, 일부 대대는 영국 교범에서 권장하는 것보다 두 배나 넓은 전선을 방어했다. 나머지 BEF는 에스코 강까지 방어 종심을 형성했다.
영국 보병은 5월 11일에 다일 강에 도착하기 시작하여 5월 14일까지 강 서쪽에서 운용되는 경전차와 브렌 장갑차의 엄호 아래 참호를 팠고, 이때 최전선 부대가 준비되자 다리를 폭파했다. 그날 늦게 독일 보병 사단 3개의 정찰 부대가 공격했지만 격퇴되었다. 다음 날, 독일 제19사단의 루뱅 공격은 제3사단에 의해 격퇴되었다. 더 남쪽으로, 강은 폭이 약 약 4.57m에 불과하여 전차의 도강은 불가능했지만, 보병은 건널 수 있었다. 남부 지역의 더럼 경보병대의 리처드 애넌드는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받았다. 다일 강을 건너온 독일 교두보는 영국군의 반격으로 제거되거나 고립되었다.
5월 21일, 영국 원정군은 에스코 강(에스카우)에서 9개 독일 보병 사단의 공격을 받았으나, 반격으로 격퇴하거나 봉쇄했다. 같은 날, 영국군은 아라스에서 반격을 시도했다. 5월 22일 밤, 독일군은 에스코 강에서 철수했고, 남쪽 상황의 변화로 영국 원정군은 프랑코-벨기에 국경의 고트 선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5월 26일, 영국 해협 항구들이 함락될 위험에 처한 가운데, 불로뉴 전투와 칼레가 독일군에 점령되었다. 고트는 BEF에게 덩케르크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나이젤 해밀턴은 이 명령을 "그의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결정"이라고 묘사했다.
4. 1. 딜 계획
1940년 5월, 제1군집단은 해협 해안에서 마지노선 서쪽 끝까지 방어했다. 제7군, 영국 원정군(BEF), 제1군, 제9군은 남쪽의 제2군을 중심으로 회전하며 딜 선으로 진격할 준비를 했다. 제7군은 안트베르펜 서쪽을 담당하여 네덜란드로 진입할 준비를 했고, 벨기에군은 독일군의 진격을 지연시킨 후 알베르트 운하에서 안트베르펜에서 루뱅 사이의 딜 선으로 후퇴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영국 원정군은 루뱅에서 와브르까지 약 20km의 딜 선을 방어하고, 영국 원정군의 오른쪽에 있는 제1군은 와브르에서 젬블루 갭을 지나 나뮈르까지 35km를 방어할 예정이었다. 딜 선에서 삼브르 강 북쪽의 나뮈르까지의 젬블루 갭은 마스트리흐트와 몽스 양쪽에 있으며 자연적인 장애물이 거의 없어 파리로 바로 이어졌다. 제9군은 나뮈르 남쪽, 뫼즈 강을 따라 제2군의 왼쪽(북쪽) 측면에 배치될 예정이었다.
독일의 프랑스 및 저지대 국가 침공은 시작되었다. 프랑스 제7군은 북쪽 측면으로 전진하여 선발대가 5월 11일 브레다에 도달했다. 프랑스군은 제9기갑사단과 충돌했고, 제25기동보병사단의 진격은 독일 보병, 전차, Ju 87(독일어: Stuka) 급강하 폭격기에 의해 저지되었고, 제1기계화경사단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제7군은 앤트워프에서 약 32.19km 떨어진 베르겐 옵 좀-터른하우트 운하 선을 떠나 5월 12일 리에르에서 약 16.09km 떨어진 곳으로 후퇴했고, 5월 14일 네덜란드는 항복했다.
벨기에에서는 독일의 글라이더 부대가 5월 11일 정오까지 에벤 에마엘 요새를 점령했다. 이 재앙으로 벨기에군은 5월 12일 앤트워프에서 루뱅까지의 선으로 후퇴해야 했고, 이는 프랑스 제1군이 도착하여 참호를 구축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점이었다. 기병군단프랑스어은 하누 전투에서 제16기갑군단과 전투를 벌였는데, 이는 최초의 전차 대 전차 전투였으며, 기병군단프랑스어은 이후 딜 선에 도착한 제1군 뒤로 물러났다. 5월 15일, 독일군은 딜 선을 따라 제1군을 공격하여 가믈랭이 피하려 했던 우발적 교전을 일으켰다. 제1군은 제16기갑군단을 격퇴했지만, 젬블루 전투 (14–15 May) 동안 GQG는 독일군의 주 공격이 아르덴을 통해 더 남쪽으로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벨기에에서의 프랑스의 성공은 뮈즈 강에서 벌어진 세당에서의 재앙에 기여했고, 5월 16일 블랑샤르에게 프랑스 국경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4. 2. 5월 10–21일: 벨기에 전투
1940년 5월, 제1군집단은 영국 해협 해안에서 마지노선의 서쪽 끝까지 방어했다. 앙리 지로가 이끄는 프랑스 제7군, 고트 경이 이끄는 영국 원정군(BEF), 조르주 모리스 장 블랑샤르가 이끄는 프랑스 제1군과 앙드레 코라프가 이끄는 프랑스 제9군은 남쪽의 제2군을 중심으로 회전하며 딜레선으로 진격할 준비를 했다. 제7군은 안트베르펜 서쪽을 담당하여 네덜란드로 진입할 준비를 했고, 벨기에군은 독일군의 진격을 지연시킨 후 알베르트 운하에서 안트베르펜에서 루뱅 사이의 딜레선으로 후퇴할 것으로 예상되었다.영국 원정군은 루뱅에서 와브르까지 약 20km의 딜레선을 방어하고, 영국 원정군의 오른쪽에 있는 제1군은 와브르에서 젬블루 갭을 지나 나뮈르까지 35km를 방어할 예정이었다. 딜레선에서 삼브르강 북쪽의 나뮈르까지의 젬블루 갭은 마스트리흐트와 몽스 양쪽에 있으며 자연적인 장애물이 거의 없어 파리로 바로 이어졌다. 제9군은 나뮈르 남쪽, 뫼즈강을 따라 제2군의 왼쪽(북쪽) 측면에 배치될 예정이었다.
5월 10일, 독일의 프랑스 및 저지대 국가 침공이 시작되었다. 프랑스 제7군은 북쪽 측면으로 전진하여 선발대가 5월 11일 브레다에 도달했다. 프랑스군은 제9기갑사단과 충돌했고, 제25기동보병사단의 진격은 독일 보병, 전차, Ju 87(독일어: Stuka) 급강하 폭격기에 의해 저지되었고, 제1기계화경사단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제7군은 앤트워프에서 약 32.19km 떨어진 베르겐 옵 좀-터른하우트 운하선을 떠나 5월 12일 리에르에서 약 16.09km 떨어진 곳으로 후퇴했고, 5월 14일, 네덜란드는 항복했다.
벨기에에서는 독일의 글라이더 부대가 5월 11일 정오까지 에벤 에마엘 요새를 점령했다. 이 재앙으로 벨기에군은 5월 12일 앤트워프에서 루뱅까지의 선으로 후퇴해야 했고, 이는 프랑스 제1군이 도착하여 참호를 구축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점이었다. 5월 15일, 독일군은 딜 선을 따라 제1군을 공격했고, 5월 16일, 블랑샤르에게 프랑스 국경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제12 로열 랜서스의 장갑차는 5월 10일 오후 1시에 벨기에 민간인들의 환호를 받으며 국경을 넘었다. 영국 원정군(BEF)의 구역은 루뱅에서 남서쪽의 와브르까지 약 약 35.41km에 달하는 다일 강을 따라 이어졌다. 제3사단(제2군단)은 북쪽을, 제1사단과 제2사단(제1군단)은 남쪽을 맡았는데, 일부 대대는 영국 교범에서 권장하는 것보다 두 배나 넓은 전선을 방어했다. 나머지 BEF는 에스콜트 강까지 방어 종심을 형성했다. 영국 보병은 5월 11일에 다일 강에 도착하기 시작하여 5월 14일까지 강 서쪽에서 운용되는 경전차와 브렌 장갑차의 엄호 아래 참호를 팠고, 이때 최전선 부대가 준비되자 다리를 폭파했다. 그날 늦게 독일 보병 사단 3개의 정찰 부대가 공격했지만 격퇴되었다. 다음 날, 독일 제19사단의 루뱅 공격은 제3사단에 의해 격퇴되었다. 더 남쪽으로, 강은 폭이 약 약 4.57m에 불과하여 전차의 도강은 불가능했지만, 보병은 건널 수 있었다. 남부 지역의 더럼 경보병대의 리처드 애넌드는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받았다. 다일 강을 건너온 독일 교두보는 영국군의 반격으로 제거되거나 고립되었다.
4. 3. 5월 21–26일: 에스코 강 전투와 아라스 전투
5월 21일, 영국 원정군(BEF)은 에스코 강(에스카우)에서 9개 독일 보병 사단의 공격을 받았다. 독일군은 강력한 포격 후 보병 공격을 시작하여 강을 건넜으나, 영국군의 반격으로 격퇴되거나 봉쇄되었다.[1] 같은 날, 영국군은 아라스에서 반격을 시도했다.[1]5월 22일 밤, 독일군은 에스코 강에서 철수했다. 남쪽 상황의 변화로 영국 원정군은 프랑코-벨기에 국경의 고트 선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1]
5월 26일, 영국 해협 항구들이 함락될 위험에 처한 가운데, 불로뉴 전투와 칼레가 독일군에 점령되었다.[1] 고트는 영국 원정군에게 덩케르크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1] 나이젤 해밀턴은 이 명령을 "그의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결정"이라고 묘사했다.[1]
4. 4. 5월 26일–6월 4일: 덩케르크 철수 (다이나모 작전)
A 집단군이 해안으로 진격하고, B 집단군이 북동쪽에서 접근하면서 영국 원정군(BEF)은 3면이 포위되었고, 5월 21일까지 BEF는 솜 강 남쪽의 보급 기지에서 차단되었다. 영국군은 같은 날 아라스 전투에서 반격을 가했다. 이 전투는 에스카우에 주력군이 배치된 곳의 남쪽에 있었는데, 7개 BEF 사단이 최전선에 배치되었다. 영국 사단은 9개 독일 보병 사단에 맞서 싸웠고, 이들은 5월 21일 아침에 강력한 포격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병 공격이 전 전선에서 시작되어, 팽창식 보트나 파괴된 다리의 잔해를 넘어 운하화된 강을 건넜다.[5] 에스카우 선이 여러 곳에서 돌파되었지만, 모든 독일 교두보는 강력하지만 대가가 큰 영국군의 반격으로 격퇴되거나 봉쇄되었고, 남은 독일군은 5월 22일 밤까지 강 건너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날 밤 늦게, 남쪽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BEF에게 다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했는데, 이번에는 프랑코-벨기에 국경에 있는 고트 선으로 후퇴하라는 것이었다. 영국 해협 항구들은 함락될 위험에 처해 있었다. 신병들이 불로뉴와 칼레를 방어하기 위해 영국에서 급파되었지만, 치열한 전투 끝에 두 항구는 5월 26일까지 불로뉴 전투와 칼레 포위전에서 점령되었다. 5월 26일, 고트는 BEF에게 BEF가 여전히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항구인 덩케르크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나이젤 해밀턴은 버나드 몽고메리의 전기에서 고트의 명령을 "그의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결정"이라고 묘사했다.
덩케르크에서 포위되지 않은 부대와 후방 부대는 그 후에도 프랑스 영내에서 행동했으며, 이어지는 사이클 작전, 에어리얼 작전으로 6월 중에 영국 본토로 철수했다. 이로 인해 유럽 대륙에 파견된 영국 병력은 소멸되었고, BEF는 폐지되었다.
5. 덩케르크 철수 이후
덩케르크 철수 이후에도 영국 원정군(BEF)의 후방 부대는 프랑스에 남아 통신선을 방어해야 했다. 셰르부르, 브르타뉴, 낭트의 보급 창고에서 차단되었기 때문에, 디에프는 BEF의 주요 의료 기지였고, 르아브르는 주요 보급 및 병기 공급원이었다. BEF의 주요 탄약고와 보병, 기관총 및 기지 부대는 루앙, 에브뢰, 에피네 주변에 있었다.
아치볼드 보먼 준장은 디에프와 루앙을 방어하기 위해 임시 부대인 보포스를 편성했다. 보포스는 2개 보병 대대, 4개 기관총 소대, 왕립 공병대 1개 중대로 구성되었다. C. E. 비커리 대령은 무기와 장비가 거의 없는 기지 부대 병력으로 5개의 임시 대대인 빅포스를 인수했다. 보먼은 안델 강과 베튀느 강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5월 31일, 연합군 본부(GHQ BEF)가 폐쇄되었다. 6월 2일, 앨런 브룩 중장은 육군성을 방문하여 51 (고지) 보병사단과 제1 기갑사단으로 구성된 새로운 제2군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이 군단에는 영국 본토의 52 (로랜드) 보병사단과 제1 캐나다 보병사단이 합류할 예정이었고, 준비되는 즉시 제3 보병사단도 합류할 예정이었다.[1] 그러나 브룩은 이 계획이 정치적 제스처 외에는 무의미하다고 경고했다.[1] 6월 6일, 영국 내각은 BEF(제2차 BEF는 비공식적인 전후 용어)를 재구성하기로 결정했다.[2]
생발레리앙코스 전투와 사이클 작전에서, 어둠이 내린 후 해안으로 철수가 시작되었고, 마지막 부대는 베튄 강에서 벗어났다. 부대들은 불필요한 장비를 버리고 각 포의 탄약을 100발로 줄여 병사들을 위한 수송 공간을 확보했다. 프랑스군, 특히 말에 탄 병사들이 영국군의 이동 경로를 침범하고 불안감을 조성하는 소문이 퍼지면서 야간 이동은 어려움을 겪었다. 포춘과 일러는 베르-레-로즈 근처 교차로에 자리를 잡고 병사들을 안내했으며, 6월 11일 아침까지 제9군단은 생 발레리 주변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프랑스 수송대가 계속해서 방어선에 도착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독일군이 뒤따라오는 것을 알아보기 어려워 방어 사격이 저해되었다.
그날 밤, 포춘은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고 신호를 보냈다. 방어선을 지킬 필요가 없는 병사들은 해변과 항구로 이동했다. 67척의 상선과 140척의 소형 선박으로 구성된 함대가 구성되었지만, 무선 통신 장비가 거의 없었고 짙은 안개로 인해 시각 신호가 불가능해져 선박이 해안으로 진입할 수 없었다. 방어선 동쪽 끝 베르-레-로즈에서만 많은 병사들이 독일 포병의 공격을 받으며 구조되었고, 구축함 HMS 불독, ''보디세아'', ''앰부스케이드''가 손상되었다. 영국군 2,137명과 프랑스군 1,184명이 탈출했다. 새벽 무렵, 항구에 있던 병사들은 다시 마을로 돌아갔고, 오전 7시 30분에 포춘은 다음날 밤 탈출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신호를 보냈지만, 곧 현지 프랑스 사령관이 이미 항복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40년 6월 22일 휴전 협정에 따라 6월 25일에 공식적인 철수가 종료되었지만, 비공식적인 철수는 8월 14일까지 프랑스 지중해 항구에서 계속되었다. 르아브르에서 사이클 작전을 시작으로, 해협 해안을 따라 에어리얼 작전이 종료될 때까지 191,870명의 영국 원정군(BEF) 병력이 추가로 구조되었으며, 프랑스 전역에서 영국으로 귀환한 군인 및 민간인 총원은 558,032명이었고, 이 중 368,491명이 영국군이었다.
1940년 6월 15일부터 25일까지 영국과 연합군 함선은 프랑스 주둔 영국 공군(RAF) 전투기 5개 비행대대의 엄호를 받으며 영국, 폴란드, 체코 군인, 민간인 및 장비를 프랑스 대서양 항구, 특히 생나제르와 낭트에서 싣고 철수했다. 독일 공군(Luftwaffe)은 철수 선박을 공격했고, 6월 17일에는 수송선 (RMS Lancastria)를 루아르 강 하구에서 격침시켰다. 약 2,477명의 승객과 승무원이 구조되었지만, 수천 명의 군인, 영국 공군(RAF) 요원 및 민간인이 탑승하고 있었고 최소 3,500명이 사망했다. 일부 장비가 선적되었지만, 독일 국방군(Wehrmacht)의 진격 상황에 대한 무지함과 과장된 보고로 인해 일부 작전이 조기에 종료되었고 많은 장비가 불필요하게 파괴되거나 버려졌다.
에어리얼 작전에서 버려진 장비는 다음과 같다.
장비 종류 | 수량 |
---|---|
전차 | 약 700대 |
오토바이 | 20,000대 |
승용차 및 트럭 | 45,000대 |
야포 | 880문 |
대형 장비 | 310문 |
대공포 | 약 500문 |
대전차포 | 850문 |
대전차 소총 | 6,400정 |
기관총 | 11,000정 |
5. 1. 통신선 방어
덩케르크 철수 이후, 영국 원정군(BEF)의 후방 부대는 프랑스에 남아 통신선을 방어해야 했다. 셰르부르, 브르타뉴, 낭트에 있는 보급 창고에서 차단되었기 때문에, 디에프는 BEF의 주요 의료 기지였고, 르아브르는 주요 보급 및 병기 공급원이었다. BEF의 주요 탄약고와 보병, 기관총 및 기지 부대는 루앙, 에브뢰, 에피네 주변에 있었다.아치볼드 보먼 준장은 임시 부대인 보포스를 편성하여 디에프와 루앙을 방어했다. 보포스는 2개의 보병 대대, 4개의 기관총 소대, 왕립 공병대 1개 중대로 구성되었다. 빅포스(C. E. 비커리 대령)는 무기와 장비가 거의 없는 기지 부대의 병력에서 5개의 임시 대대를 인수했다. 보먼은 안델 강과 베튀느 강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5. 2. 제2 BEF 편성 시도
5월 31일, 연합군 본부(GHQ BEF)가 폐쇄되었다. 6월 2일, 앨런 브룩 중장은 육군성을 방문하여 51 (고지) 보병사단과 제1 기갑사단으로 구성된 새로운 제2군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이 군단에는 영국 본토의 52 (로랜드) 보병사단과 제1 캐나다 보병사단이 합류할 예정이었고, 준비되는 즉시 제3 보병사단도 합류할 예정이었다.[1] 그러나 브룩은 이 계획이 정치적 제스처 외에는 무의미하다고 경고했다.[1] 6월 6일, 영국 내각은 BEF(제2차 BEF는 비공식적인 전후 용어)를 재구성하기로 결정했다.[2]5. 3. 생발레리앙코스 전투와 사이클 작전
어둠이 내린 후 해안으로의 철수가 시작되었고, 마지막 부대들은 베튄 강에서 벗어났다. 부대들은 불필요한 장비를 버리라는 명령을 받았고, 각 포는 병사들을 위한 RASC 수송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탄약을 100발로 줄였다. 프랑스군, 특히 말에 탄 병사들이 영국군의 이동 경로를 침범하고 불안감을 조성하는 소문이 퍼지면서 야간 이동은 어려움을 겪었다. 포춘과 일러는 베르-레-로즈 근처의 교차로에 자리를 잡고 병사들을 각자의 위치로 안내했으며, 6월 11일 아침까지 제9군단은 생 발레리 주변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프랑스 수송대가 계속해서 방어선에 도착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독일군이 뒤따라오는 것을 알아보기 어려워 방어 사격이 저해되었다.
그날 밤, 포춘은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고 신호를 보냈다. 방어선을 지킬 필요가 없는 병사들은 해변과 항구로 이동했다. 67척의 상선과 140척의 소형 선박으로 구성된 함대가 구성되었지만, 무선 통신 장비가 거의 없었고 짙은 안개로 인해 시각 신호가 불가능해져 선박이 해안으로 진입할 수 없었다. 방어선의 동쪽 끝에 있는 베르-레-로즈에서만 많은 병사들이 독일 포병의 공격을 받으며 구조되었고, 구축함 HMS 불독, ''보디세아'', ''앰부스케이드''가 손상되었다. 영국군 2,137명과 프랑스군 1,184명이 탈출했다. 새벽 무렵, 항구에 있던 병사들은 다시 마을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고, 오전 7시 30분에 포춘은 다음날 밤 탈출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신호를 보냈지만, 곧 현지 프랑스 사령관이 이미 항복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5. 4. 노르망디 철수와 에어리얼 작전
1940년 6월 22일 휴전 협정에 따라 6월 25일에 공식적인 철수가 종료되었지만, 비공식적인 철수는 8월 14일까지 프랑스 지중해 항구에서 계속되었다. 르아브르에서 사이클 작전을 시작으로, 해협 해안을 따라 에어리얼 작전이 종료될 때까지 191,870명의 영국 원정군(BEF) 병력이 추가로 구조되었으며, 프랑스 전역에서 영국으로 귀환한 군인 및 민간인 총원은 558,032명에 달했으며, 여기에는 368,491명의 영국군이 포함되었다.1940년 6월 15일부터 25일까지 영국과 연합군 함선은 프랑스 주둔 영국 공군(RAF) 전투기 5개 비행대대의 엄호를 받으며 영국, 폴란드, 체코 군인, 민간인 및 장비를 프랑스 대서양 항구, 특히 생나제르와 낭트에서 싣고 철수했다. 독일 공군(Luftwaffe)은 철수 선박을 공격했고, 6월 17일에는 수송선 (RMS Lancastria)를 루아르 강 하구에서 격침시켰다. 약 2,477명의 승객과 승무원이 구조되었지만 수천 명의 군인, 영국 공군(RAF) 요원 및 민간인이 탑승하고 있었고 최소 3,500명이 사망했다. 일부 장비가 선적되었지만, 독일 국방군(Wehrmacht)의 진격 상황에 대한 무지함과 과장된 보고로 인해 일부 작전이 조기에 종료되었고 많은 장비가 불필요하게 파괴되거나 버려졌다.
에어리얼 작전에서 버려진 장비는 다음과 같다.
장비 종류 | 수량 |
---|---|
전차 | 약 700대 |
오토바이 | 20,000대 |
승용차 및 트럭 | 45,000대 |
야포 | 880문 |
대형 장비 | 310문 |
대공포 | 약 500문 |
대전차포 | 850문 |
대전차 소총 | 6,400정 |
기관총 | 11,000정 |
6. 결과 및 영향
영국 원정군(BEF)은 프랑스 전투에서 66,426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 중 11,014명이 사망하거나 부상으로 사망했고, 14,074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41,338명이 실종되거나 포로로 잡혔다. 다이나모 작전으로 366,162명을 구조하고, 추가로 191,870명이 철수하여 총 558,032명이 철수했으며, 그 중 368,491명이 영국군이었다.[4] 많은 민간인들도 프랑스 대서양 및 지중해 항구를 통해 영국으로 탈출했다.[5]
회수된 장비는 다음과 같다.
장비 종류 | 수량 |
---|---|
대포 | 322문 |
차량 | 4,739대 |
오토바이 | 533대 |
경전차 | 13대 |
순항전차 | 9대 |
손실된 장비는 다음과 같다.
장비 종류 | 수량 |
---|---|
대포, 대공포, 대전차포 | 2,472문 |
오토바이 | 20,548대 |
자동차 및 트럭 | 63,879대 |
또한, 탄약 약 77927756.76kg, 보급품 및 장비 약 422614589.18kg, 휘발유 약 167575615.66kg가 손실되었다.
덩케르크에서 탈출한 병사 7명 중 1명은 전쟁 포로로 남겨졌으며, 이들은 독일 내 포로 수용소로 보내져 전쟁 기간 동안 독일 산업 및 농업 분야에서 일했다.
독일 제4군단의 정보 보고서는 영국 원정군 병사들에 대해 "영국 군인은 훌륭한 신체 상태를 유지했다.... 전투에서 그는 강하고 끈기 있었다. 영국이 결국 승리할 것이라는 그의 신념은 흔들리지 않았다.... 영국 군인은 항상 높은 가치의 전사임을 보여주었다."라고 평가했다.
덩케르크에서 포위되지 않은 부대와 후방 부대는 프랑스 영내에서 계속 작전을 수행했으며, 사이클 작전과 에어리얼 작전을 통해 6월 중에 영국 본토로 철수했다. 이로써 유럽 대륙에 파견된 영국 병력은 소멸되었고, BEF는 폐지되었다.
7. 기념
프랑스 전역에 대한 종군 기장은 수여되지 않았지만, 1939년 9월 3일부터 1940년 6월 19일 사이에 프랑스 또는 벨기에에서 복무한 군인은 1939–1945 성표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5]
참조
[1]
웹사이트
Defeat in the West, 1940
https://www.nam.ac.u[...]
2020-08-25
[2]
웹사이트
Massacre of Royal Norfolk Soldiers At Le Paradis
http://www.roll-of-h[...]
War Memorials Trust
2007-12-12
[3]
웹사이트
Ritterkreuzträger Fritz Knöchlein
http://www.ritterkre[...]
Uwe Schweisfurth
2007-12-20
[4]
웹사이트
Private Pooley's Revenge
http://www.stephen-s[...]
British Military & Criminal History
2016-01-24
[5]
웹사이트
The 1939–1945 Star Regulations
http://medals.nzdf.m[...]
2016-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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