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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클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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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이클 작전은 1940년 6월 프랑스 공방전 당시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철수 작전을 의미한다. 프랑스군이 붕괴되면서 영국군은 르아브르와 생발레리앙코에서 철수를 시도했다. 윌리엄 제임스 제독은 르아브르에서 대규모 철수를 계획했지만, 루프트바페의 폭격과 독일군의 진격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생발레리앙코에서는 51 (하이랜드) 사단을 포함한 많은 연합군 병력이 포로로 잡혔다. 르아브르에서는 11,059명의 영국군이 철수했고, 이후 브르타뉴 방어 거점 계획이 논의되었으나, 프랑스군의 후퇴로 인해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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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클 작전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1940년 6월 4일-12일 프랑스 전투에서의 독일군 공세.
1940년 6월 4일–12일 센 강으로 향하는 독일군의 공세.
종류철수 작전
위치르 아브르
좌표49° 29′ N, 0° 06′ E
날짜1940년 6월 10일 ~ 13일
목표철수
실행 주체영국 해군
프랑스 해군
연합군 해군 함정
결과연합군 성공
전투 정보
일부프랑스 공방전
병력 규모
영국군338,226명 (다이나모 작전: 5월 26일 – 6월 4일).
철수 규모
영국군11,059명
프랑스군1,184명
총 병력191,870명

2. 배경

프랑스 공방전이 진행되면서 1940년 5월 말, 독일군의 빠른 진격으로 영국 원정군(BEF)을 포함한 연합군 주력은 됭케르크 지역에 고립되었다. 다이나모 작전으로 많은 병력이 영국 본토로 철수했지만, 솜강 남쪽 지역에는 여전히 상당수의 영국군 및 연합군 병력이 남아 있었다.

특히 제51(하이랜드)보병사단을 비롯한 부대들과 르아브르, 루앙 등지에 위치한 영국군의 보급 기지 및 병력은 독일군의 계속되는 남하 공세(폴 로트)로 인해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아브빌 등 솜 강 남안에서의 전투는 연합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고, 이들 잔류 병력의 추가적인 철수가 시급한 상황이었다.

2. 1. 프랑스 공방전

1940년 5월 10일, 독일군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를 상대로 공세 작전인 ''폴 겔프''(Fall Gelb)를 개시했다. 작전 시작 며칠 만에,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상급대장이 지휘하는 A 집단군은 세당 인근에서 앙드레 코라프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제9군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하인츠 구데리안 중장의 제19군단과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 중장의 제41기갑군단으로 구성된 ''클라이스트 기갑단''이 선봉에 서서 솜강 계곡을 따라 서쪽으로 빠르게 진격했다.

5월 20일, 독일군은 솜강 하구의 아브빌을 점령함으로써 북부 프랑스와 벨기에에 주둔 중이던 영국 원정군을 포함한 연합군 주력을 성공적으로 고립시켰다. 다음 날인 5월 21일, 프랑스군과 영국군은 아라스에서 반격을 시도했다. 이 반격은 독일군의 진격을 일시적으로 늦추는 효과는 있었으나, 독일군이 솜강을 넘어 남쪽으로 진격하는 대신 영국 해협의 항구들을 향해 북쪽으로 계속 공격하도록 방향을 바꾸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연합군의 추가 반격을 우려한 독일 상급 지휘부는 5월 21일 '아라스 일시 정지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로 인해 헤르만 호트 장군 휘하의 인접한 제15군단은 예비대로 남겨졌고, 제41군단의 한 사단은 됭케르크에서 불과 50km 떨어진 지점까지 진격했음에도 동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한편, 제4군집단 B군은 대부분의 기동 부대를 포함한 47개 사단으로 파리 양쪽에서 공세를 시작했다. 초기 48시간 동안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공격을 비교적 잘 막아냈다. 제4군은 솜강에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지만, 엔 강을 넘으려는 시도는 깊게 구축된 프랑스 방어선에 막혀 실패했다. 아미앵에서는 독일군이 프랑스 포병의 강력한 사격에 여러 차례 격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세 시작 3일째 되는 날 저녁, 독일군은 프랑스 공군(''Armée de l'Air'')의 폭격에도 불구하고 결국 솜강과 엔 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독일군 역시 상당한 손실을 입었으며, 프랑스군은 독일군이 돌파한 지역의 숲이나 엄폐물을 활용하며 끈질기게 저항했다.

아브빌 남쪽 지역에서는 독일 제15군단이 숲길이나 마을을 피해 비교적 방어가 허술한 완만한 구릉지대를 따라 진격했다. 기갑 부대가 선두에 서고 보병 수송 차량이 뒤따르는 방식이었다. 프랑스 제10군은 결국 돌파당해 센 강을 따라 루앙과 남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군의 선봉 부대는 측면 공격에 취약한 상태였지만, 독일 공군인 Luftwaffe|루프트바페deu의 효과적인 작전은 프랑스군의 병력 집결을 방해했으며, 공습에 대한 두려움은 프랑스군의 대규모 부대 운용과 기동성을 크게 저해했다.

6월 6일, 전사한 독일 장교에게서 회수한 문서를 통해 6월 7일과 8일의 독일군 작전 계획 일부가 연합군에게 알려졌다. 영국군 지휘관인 보먼, 에반스, 마셜-콘월은 제10군 사령부에서 이 정보를 논의했지만, 프랑스 주둔 최고위 영국 장교였던 카슬레이크는 이 논의에서 배제되었다. 문서에 따르면 독일군은 보먼 사단이 위치한 포르주-레-조 지역까지 진출하여 6월 8일에는 루앙을 점령할 계획이었다. 회의에서는 고립된 제51(하이랜드)보병사단의 위험한 상황과 프랑스 측의 지원 약속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사단이 결국 궤멸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까지 나왔다. 카슬레이크는 이미 통합된 지휘 체계의 부재 문제를 지적하며 참모총장에게 개선을 요청한 상태였다. 6월 6일, 존 딜 경은 조르주 장군 사령부의 스웨인 사절단에게 앨런 브룩 중장이 다음 주에 도착할 것이며 제52(로우랜드)보병사단도 곧 도착할 예정이라는 서신을 보냈다. 딜은 또한 포우널을 프랑스로 보내 새로운 영국 원정군(BEF) 구성에 대해 프랑스군과 논의하고 영국 지휘관들과 연락을 취하도록 지시했다. 카슬레이크는 포우널에게 제51(하이랜드) 사단을 너무 늦기 전에 철수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한 앨런 브룩 중장을 조속히 프랑스로 파견하여 모든 영국군을 통합 지휘할 군단 사령부를 설치해야 한다고 촉구했으며, 이 지휘부가 반드시 프랑스 제10군 사령관 알트마이어의 지휘 아래 있을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브룩은 6월 2일에 새로운 영국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지만, 제51(하이랜드) 사단이 결국 포위되어 제9군단과 함께 항복한 6월 12일까지 영국에 머물렀다.

2. 2. 영국군의 보급선

솜 강 계곡


1940년 5월 20일, 독일군이 솜강 하구의 아브빌을 점령하면서 북부 프랑스와 벨기에에 주둔한 연합군은 남쪽과 고립되었다. 5월 22일과 23일 밤 사이 독일군이 생토메르와 불로뉴로 진격하면서, 솜강 북쪽에 있던 연합군은 완전히 차단되었다. 이로 인해 영국 원정군(BEF)은 코탕탱 반도의 셰르부르, 브르타뉴낭트에 위치한 주요 보급 창고(entrepôts프랑스어)와 연결이 끊어졌다.

솜 강과 센 강 사이의 해안 지역인 Pays de Caux는 영국 원정군 보급선에서 '북부 지구'로 알려졌으며, 준장 대리 아치볼드 보먼이 지휘했다. 이 지역에는 디에프루앙 지구가 하위 지역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디에프는 영국 원정군의 주요 의료 기지였고, 르아브르는 주요 보급품 및 병기 공급원이었다. 또한 생-생에서 루앙 북동쪽 뷔시까지 영국 원정군의 주요 탄약 저장소가 있었으며, 보병, 기관총 및 기타 기지 저장소는 루앙, 에브뢰, 레피네에 분산되어 있었다. 이 기지들을 연결하고 서쪽의 노르망디 기지 및 북쪽의 영국 원정군 본대와 연결하는 주요 철도 노선은 루앙, 아베빌, 아미앵을 통과했다.

보먼 준장은 원래 왕립 공병대, 왕립 육군 병기 군단, 왕립 신호 군단 및 구 보병대에서 차출된 병력으로 영국 공군을 위해 건설 중이던 13개 비행장의 기지 보안 및 경비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군의 빠른 진격과 보급선 차단 위협으로 인해 그의 임무는 보급선 방어로 확장되었다. 센 강 남쪽의 '남부 지구'에는 3개의 영토 사단과 일부 보급선 대대가 있었으나, 5월 17일 예방 조치로 북부 지구로 이동했다.

독일군의 폭격과 점령으로 인해 이 기지들과 솜 강 사이의 철도 이동은 점점 어려워졌다. 북쪽에서 오는 열차는 주로 벨기에와 프랑스 군인을 수송했고, 도로는 퇴각하는 군인과 피난민으로 가득 찼다. 보먼은 영국 원정군 총사령부(GHQ)와 연락이 두절되었고, 연합군이 솜 강과 센 강 중 어디에 방어선을 구축할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5월 18일, 보급선 병력을 총괄 지휘하는 필립 드 퐁블랑케 소장은 보먼에게 북부 지구에 방어 시설을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따라 'Beauforce'라는 임시 부대가 제12 (동부) 보병 사단의 제2/6 이스트 서리 연대, 제4 버프스 연대, 4개 기관총 소대, 제212 육군 부대 공병 중대 등으로 급히 편성되었다. 또한 'Vicforce'(커넬 C. E. 비카리 지휘)는 보병 및 일반 기지 창고의 병력으로 구성된 5개의 임시 대대를 인수했으며, 이들은 병력은 많았지만 무기와 장비는 거의 없었다.

Beauforce는 5월 20일 도로를 통해 불로뉴로 파견되었으나, 독일군이 이미 항구를 차단하여 아베빌 근처의 제12 사단으로 복귀해야 했다. 같은 날 독일군이 아미앵을 점령하고 솜 강 남쪽을 순찰하기 시작하자, 정확한 정보 부재 속에서 공황 상태와 잘못된 소문이 퍼졌다. 보먼은 앙델 강과 베튄 강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하도록 지시했는데, 이 강들은 브레스 강 남쪽에서 디에프와 루앙을 동쪽으로부터의 공격에서 방어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탱크 장애물로 여겨졌다. 주요 다리들은 폭파 준비가 되었고, 접근로에는 장애물이 설치되었다.

2. 3. 아브빌 전투

1940년 5월 20일, 독일 제2 기갑사단은 90km를 진격하여 영국 해협아브빌에 도달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 50 (노섬브리아) 보병 사단 소속 제25 보병 여단을 제압하고 오후 8시 30분에 도시를 점령했다. 살아남은 소수의 영국군은 솜강 남쪽 강둑으로 간신히 퇴각했다. 5월 21일 오전 2시에는 소총 연대 제3대대가 노옐-쉬르-메르 서쪽 해안에 도착했다. 한편, 로저 에반스 소장이 지휘하는 영국 제1 기갑사단은 5월 15일부터 프랑스에 도착하기 시작했으나, 포병 지원 없이 상륙했으며 기갑 연대와 지원 부대의 보병 병력도 부족한 상태였다. 이들 중 일부는 칼레로 방향을 돌려야 했다.

6월 4일부터 7월 4일까지 아브빌 교두보 남쪽에서 프랑스-영국 연합군은 반격을 시도했다. 이 지역은 처음에는 독일 제2 기갑사단이, 이후에는 제57 보병사단이 점령하고 있었는데, 연합군은 이 지역의 약 절반을 탈환하는 데 그쳤다. 이 과정에서 연합군은 많은 전차를 잃었고, 독일군 역시 많은 보병 손실을 입었으며 일부 부대는 솜 강 너머로 후퇴하기도 했다. 6월 5일, 독일 제4군은 솜 강 남쪽 교두보의 남은 지역에서 공격을 재개했다. 지난 4주간의 반격 시도로 인해 심하게 약화된 프랑스-영국 사단은 이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많은 사상자를 내며 브레스르까지 밀려났다.

3. 연합군의 방어 준비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 지역 지도


프랑스군과 제2차 영국 원정군(2nd BEF)은 됭케르크 철수 작전 이후 내선 작전을 수행하며 기지와 보급품에 더 가까이 위치하게 되었다. 됭케르크에서 철수한 약 112,000명의 프랑스군이 노르망디브르타뉴 항구를 통해 프랑스로 복귀했으며, 이 지역에 이미 주둔 중이던 약 100,000명의 영국군은 영국 본토에서 온 약 60,000명의 전투 병력으로 증강되었다. 프랑스는 또한 제1 기갑 사단과 제2 기갑 사단(중기갑 사단)의 전차 및 기타 장갑차 손실을 상당 부분 보충했으며, 제4 기갑 사단 역시 손실을 메웠다. 이러한 재편성과 보충 덕분에 5월 말까지 프랑스군의 사기는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대부분의 프랑스군 대체 병력은 북부 전선의 붕괴를 직접 경험하지 않았고, 됭케르크에서 돌아온 장교들은 독일 기동 부대에 대한 전술적 경험을 쌓았다. 특히 전차전에서 프랑스 차량이 더 두꺼운 장갑과 우수한 주포를 갖추어 독일 전차보다 성능이 좋다는 점이 확인되었고, 프랑스 포병 또한 효과적인 전투력을 보여주었다.

5월 23일부터 28일까지 제7군과 로베르 알트마이어 장군이 지휘하는 제10군이 재건되었다. 총사령관 막심 베이강 장군은 독일군의 전술에 대응하기 위해 새로운 방어 전략을 채택했다. 그는 독일군에게 최대한의 소모를 강요하고자 종심 방어와 지연 전술을 활용했다. 마을과 도시는 전방위 방어가 가능한 고슴도치 거점으로 요새화되었으며, 새로 편성된 보병, 기갑, 반기계화 사단들이 예비대로 대기하며 반격하거나 포위된 부대를 구출하는 임무를 맡았다. 포위된 부대는 어떤 상황에서도 진지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4. 독일군의 공세 계획

1940년 5월 말, 독일 육군 최고 사령부(OKH)는 프랑스 전역의 다음 단계를 위한 새로운 공세 계획인 ''폴 로트''(Fall Rot|팔 로트de, 적색 작전)를 수립하여 5월 31일 최종 승인했다. 이 계획은 솜 강 전투 이후 프랑스군의 남은 저항을 분쇄하고 전쟁을 종결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기동전루프트바페(독일 공군)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 프랑스군 주력을 포위 섬멸하는 것을 핵심 전략으로 삼았다.

4. 1. 폴 로트 (Fall Rot)

1940년 5월 21일, 육군 최고 사령부(OKH) 참모총장 할더 대령은 프랑스의 최종 패배를 위한 작전 계획인 ''폴 로트''(Fall Rot|팔 로트de, 적색 작전)를 히틀러에게 제출했다. 이 계획은 수정 후 5월 31일에 최종 채택되었다.

작전 계획에 따르면, 6월 5일에는 A 집단군이 파리 양쪽에서 센 강 방향으로 공격을 개시하고, 6월 9일에는 B 집단군의 주력이 파리 동쪽에서 랭스 방향으로 공격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약 일주일 후에는 육군 집단 C가 마지노 선과 상 라인 강을 통해 공격을 개시하여, 세 개의 집단군이 파리 남동쪽의 랑그르 고원과 마지노 선 후방에서 합류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각 집단군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폴 로트 작전 독일군 집단군 구성'''
집단군지휘관예하 군주요 사단 구성예비대/기타
A 집단군룬트슈테트 (상급대장)제2군, 제12군, 제16군보병 39개, 기동보병 2개, 기갑 4개구데리안 기갑 집단 (제12군 예하)
B 집단군보크 (대령)제4군, 제6군, 제9군보병 36개, 기병 1개, 기동보병 4개, 기갑 6개, 기동보병 여단 2개클라이스트 기갑 집단 (제6군 예하), 제15군단 (제4군 예하)
육군 집단 C레프 (대령)-보병 24개-
기타-제18군 (퀴힐러 장군)보병 4개덩케르크 주둔
OKH 예비대--보병 22개-
기타 주둔군--7개 사단 (동독), 7개 사단 (노르웨이)-



기동보병 및 ''기갑'' 사단은 두 개의 기갑 집단, 즉 A 집단군의 ''구데리안 기갑 집단''과 B 집단군의 ''클라이스트 기갑 집단''(클라이스트 장군) 및 제15군단으로 집중되었다. 이 계획은 Bewegungskrieg|베베궁스크리크de(기동전)이 적군 포위와 파괴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통적인 ''베르니히퉁스게단케''(섬멸 이론) 개념에 기반했다. 그러나 기갑 그룹은 독립적인 작전 권한 없이 각 군에 종속되었다. ''구데리안 기갑 집단''은 제12군(리스트 대령)의 지휘를, ''클라이스트 기갑 집단''은 제6군(라이헤나우 대령)의 지휘를, 제15군단은 제4군(클루게 대령)의 지휘를 받았다. 구데리안은 엔 강 공격을 보병 작전 위주로 계획하고 ''기갑'' 사단을 돌파구 활용 예비대로 두려는 리스트의 계획에 항의했다. 또한, 광범위한 부대 재배치로 인해 병력의 피로가 누적되고 차량 마모가 심각해졌다. 예를 들어, ''구데리안 기갑 집단''은 덩케르크로 이동하는 동안 약 482.80km를 이동한 후, 다시 작전 개시선까지 약 321.87km를 이동해야 했다.

루프트바페(독일 공군)는 6월 1일부터 4일까지 파리의 항공기 산업 시설과 마르세유 주변의 연료 저장소를 공격했으며, 이후 ''폴 로트'' 작전을 위해 육군에 대한 근접 항공 지원 임무를 재개했다. 6월 14일 파리 점령 후에는 영국 해협 항구와 영국 원정군(BEF)이 후퇴하고 있던 대서양 항구에 대한 공격에 집중했다.

독일군의 우익, 즉 프랑스 제10군을 상대할 B 집단군 소속 제4군은 제5 기갑 사단, 제7 기갑 사단 등 다수의 기동 및 보병 사단을 동원하여 아브빌에서 아미앵에 이르는 전선에서 공격을 개시할 예정이었다. 주력 부대는 파리를 향해 측면 방어를 유지하며 하세느 강으로 진격하여 르아브르를 신속히 점령하고, 루앙, 레장들리, 베르농에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센 강 남쪽 또는 남서쪽으로의 추가 진격은 상황에 따라 결정하기로 했다.

작전이 개시되자, B 집단군은 파리 양쪽을 47개 사단(대부분 기동 부대 포함)으로 공격했다. 초기 48시간 동안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저지했다. 제4군은 솜강에 교두보를 확보했지만, 엔 강에 대한 공격은 깊이 구축된 프랑스 방어선에 막혔다. 아미앵에서는 독일군이 프랑스 포병의 강력한 사격에 여러 차례 격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세 3일째, 독일군은 프랑스 공군의 폭격에도 불구하고 솜강과 엔 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독일군 역시 상당한 손실을 입었으며, 프랑스군은 독일군이 돌파한 지역의 숲이나 엄폐물을 이용해 완강히 저항했다. 아브빌 남쪽에서는 독일 제15군단이 참호가 거의 없는 완만한 구릉지대를 ''기갑'' 부대를 선두로 신속하게 통과했다. 결국 프랑스 제10군은 돌파당하여 센 강을 따라 루앙과 남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군 선봉 부대는 측면 공격에 취약한 상태였지만, 루프트바페의 지속적인 공중 작전은 프랑스군의 병력 집결을 방해하고 공습에 대한 두려움을 확산시켜 프랑스군의 대규모 기동을 사실상 마비시켰다.

한편, 6월 6일에는 사망한 독일 장교로부터 6월 7일과 8일의 독일군 작전 계획이 담긴 문서가 회수되었다. 이 문서에는 독일군이 포르주-레-조 지역에 도달하여 6월 8일까지 루앙을 점령할 계획이 명시되어 있었다. 프랑스 제10군 사령부에서는 이 정보를 논의했지만, 프랑스 주둔 최고위 영국 장교였던 카슬레이크는 이 회의에서 배제되었다. 회의에서는 고립된 제51(하이랜드)사단의 위험한 상황과 프랑스 측의 지원 약속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으며, 사단이 전멸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카슬레이크는 이미 통합 지휘 체계 부재에 대해 영국 참모총장에게 문제를 제기한 상태였다. 그는 프랑스로 파견된 포우널에게 제51(하이랜드) 사단을 너무 늦기 전에 철수시키는 것이 중요하며, 앨런 브룩 중장을 프랑스로 보내 모든 영국군을 통합 지휘할 군단 사령부를 설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앨런 브룩은 6월 2일 새로운 영국 원정군(BEF)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지만, 제51(하이랜드) 사단이 제9군단과 함께 항복한 6월 12일이 되어서야 프랑스에 도착했다.

4. 2. 제4군 계획

독일군의 우익에서 프랑스 제10군을 상대하는 공격은 B 집단군 소속 제4군이 담당했다. 제4군은 다음과 같은 부대들로 구성되었다.

제4군 예하 부대
종류부대명
기갑 사단제5 기갑 사단, 제7 기갑 사단
보병 사단제57 보병 사단, 제31 보병 사단, 제12 보병 사단, 제32 보병 사단, 제27 보병 사단, 제46 보병 사단, 제6 보병 사단
기계화 부대제2 기계화 사단, 제11 기계화 여단
기병 사단제1 기병 사단



제4군은 아브빌에서 아미앵에 이르는 선에서 진격을 시작하여, 주력 부대는 센 강으로 향할 계획이었다. 이 과정에서 파리를 마주보는 좌익에는 측면 경계 병력을 배치했다. 주요 목표는 르아브르를 신속하게 점령하고, 루앙, 레장들리, 베르농에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센 강 남쪽 또는 남서쪽으로의 추가 진격은 상황을 보며 결정하기로 했다. 진격은 기갑 부대가 선두에 서고 보병 부대가 뒤따르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5. 팔 로트 (Fall Rot) 작전 전개

B 집단군파리 양쪽을 47개 사단(대부분의 기동 부대 포함)으로 공격하며 작전을 개시했다. 초기 48시간 동안 프랑스군은 독일의 공세를 비교적 잘 막아냈으나, 솜강에서는 독일 제4군이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반면 엔 강 방면 공격은 프랑스의 견고한 종심 방어에 막혀 초기에 실패했다. 아미앵에서는 프랑스 포병의 효과적인 사격으로 독일군이 여러 차례 격퇴되기도 했다. 그러나 공세 3일째 늦은 시간에 독일군은 프랑스 공군의 폭격에도 불구하고 솜 강과 엔 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독일군은 상당한 손실을 입었으며, 프랑스군은 독일군이 돌파한 지역의 숲이나 기타 은폐물을 활용해 저항을 이어갔다. 아베빌 남쪽에서는 독일 제15군단이 기갑 부대를 선두로 하여 숲길과 마을을 피해 참호가 거의 없는 완만한 구릉지대를 따라 이동했고, 제10군은 결국 돌파당해 센 강을 따라 루앙과 남쪽으로 후퇴했다. 독일군의 선봉 부대는 측면 공격에 취약했지만, Luftwaffe|루프트바페de(독일 공군)의 작전은 프랑스군의 집결 시도를 방해했고, 공습에 대한 두려움은 프랑스군의 대규모 병력 동원과 기동성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았다.

6월 6일, 사망한 독일 장교에게서 회수한 문서에는 6월 7일과 8일에 대한 독일군의 작전 계획이 담겨 있었다. 이 정보는 일부 영국군 지휘관들에게 공유되었으나, 통합적인 대응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당시 영국군 내부에서는 제51(하이랜드) 사단의 고립 가능성에 대한 우려와 프랑스 주둔 영국군 지휘 체계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었다. 앨런 브룩 중장이 새로운 영국 원정군(BEF)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그가 프랑스에 도착하기 전인 6월 12일 제51(하이랜드) 사단은 제9군단과 함께 포위되어 항복하게 된다.

5. 1. 6월 5일

5일, 프랑스의 패배를 완료하기 위한 독일의 공세인 "폴 로트"(Fall Rot, 사례 적색)가 시작되었고, A 집단군은 파리 양쪽에서 센 강을 향해 공격했다. 솜 강에서의 제4군 공세는 오전 4시에 생발레리쉬르솜에서 제51(하이랜드) 사단과 마주한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독일 보병은 사이그네빌, 몽, 카티니, 팡데, 틸루아와 제7, 8대대 아르가일 앤드 서덜랜드 하이랜더스(아르가일)가 지키는 살레넬을 향해 전진했고, 다른 부대들은 마을 사이로 침투했다. 마을들은 서로 지원하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사이그네빌, 몽, 카티니, 팡데와 틸루아는 오후 늦게 함락되었고, 제7 아르가일 부대는 프랑르에서 몽과 아레스트 사이로 침투한 병력에 의해 포위되었다. 예비대였던 제4 블랙 워치는 프랑르를 구원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푀키에르에서 독일군에 의해 저지되었고, 아르가일 중대는 프랑르 가장자리에 포위되었다. 밤이 되자 제154 보병 여단의 남은 병력은 우앵쿠르에서 외까지의 전선으로 밀려났다.

오른쪽에서는 제153 보병 여단이 전선의 나머지 지역에서 사용된 박격포와 포병 사격과 함께 Ju 87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의 폭격을 받았다. 독일 보병은 대대를 토플르, 조토, 프리에르로 밀어냈고, 그곳에서 영국 기관총과 포병 사격이 독일군의 진격을 막았다. 프랑스 제31(알파인) 사단은 리메에서 리메르쿠르와 베앙까지 영국군과 나란히 후퇴해야 했고, 제152 보병 여단은 우아제몽에서 블랑지-아베빌 도로까지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제1 로시안 앤드 보더 호스는 브레에서 공격을 받았고 우아제몽 마을 동쪽으로 후퇴했다. 혼성 연대는 여러 차례 교전을 벌였고 브레스 강가의 보샹으로 집결하기 전에 전차 손실을 입었다. 제51 하이랜드 사단과 제31(알파인) 사단은 약 64.37km의 전선을 지키려 했으나, 6월 4일까지의 교두보 공격 이후 병력이 고갈되어 제1 블랙 워치는 좁은 지역에서 약 4.02km의 전선을 지켜야 했다. 영국군은 포병의 엄호 아래 압도당하거나 후퇴할 때까지 버텼고, 포병 역시 후퇴하기 전 마지막 순간까지 사격했다.

아베빌 근처 솜 계곡의 지형도


제51(하이랜드) 사단 사령부는 부스에 있는 남부 구성 사령부에 항공 지원을 요청했지만, 세 개의 AASF(Advanced Air Striking Force) 전투기 비행대는 18대의 비행 가능한 항공기로 줄어들었고, 아침에 또 4대를 잃었다. 주요 산업 도시이자 철도 및 도로 중심지이며 영국-프랑스 작전 기지인 루앙에 대규모 루프트바페(독일 공군) 공격이 예상되었다. 1 비행대와 프랑스 전투기는 이른 아침에 공습을 가로막고 여러 항공기를 격추했지만 나머지는 통과하여 부스 비행장과 군 캠프를 폭격했다. 저녁에 다른 공습은 501 비행대에 의해 포착되었지만 비행장과 캠프, 주요 다리, 발전소, 철도 및 공장을 다시 폭격했다. AASF와 폭격 사령부의 폭격은 더 동쪽에서 이루어졌고, 밤 동안 103대의 항공기가 프랑스의 독일 통신 시설과 독일의 석유 및 수송 목표물을 공격했다.

한편, B 집단군은 파리 양쪽을 47개 사단(대부분의 기동 부대 포함)으로 공격했으며, 처음 48시간 동안 프랑스군은 독일의 공격을 비교적 잘 견뎌냈다. 제4군은 솜강에 교두보를 확보했지만, 엔 강에 대한 공격은 깊이 있는 프랑스 방어에 막혀 실패했다. 아미앵에서 독일군은 프랑스 포병 사격에 여러 차례 격퇴당했다. 공세 3일째 늦은 시간에 독일군은 프랑스 공군의 폭격에도 불구하고 솜강과 엔 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독일군의 성공에는 대가가 따랐으며, 프랑스군은 독일군이 돌파한 숲과 기타 은폐 지점에서 저항했다. 아베빌 남쪽에서 독일 제15군단은 숲길과 마을을 피해, 참호가 거의 없는 완만한 구릉지대를 기갑 부대가 선두에서, 보병 차량이 뒤따르며 이동했다. 제10군은 돌파당해 센 강을 따라 루앙과 남쪽으로 후퇴했다. 독일군의 선봉대는 측면 공격에 취약했지만, 루프트바페의 작전은 프랑스군의 집결 시도를 방해했고, 공습에 대한 두려움은 프랑스군의 대규모 병력 이동과 기동성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았다.

5. 2. 6월 6일

6월 6일, 독일군은 오아즈몽을 포격과 폭격으로 공격했으나, 제1 로시안 연대와 제2 기병 경사단(2 DLC, 베르니케 대령)이 방어전을 펼쳐 피해를 입었지만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다른 지역에서의 독일군 공격도 대부분 포병과 소화기 사격으로 저지되었으나, 보샹에서는 어려움을 겪었다. 1 기갑 사단의 혼성 연대는 뫼와 퐁에마레 주변에서 독일군의 침투 시도를 간신히 막아냈으며, 이후 뫼로 이동하여 그곳의 침투에 반격했다.

그날 늦게, 제40 사단은 세나르퐁에서 오말까지 브레슬 강 너머로 이동하여 왕립 공병대와 대전차 포병대를 지원했다. 한편, 독일 제5 기갑사단제7 기갑사단루앙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고, 선두 부대는 푸아-루앙 도로 너머까지 진격했으며 제2 기동 사단이 뒤따랐다. 제6 보병 사단은 독일군 좌측으로, 제32 보병 사단은 우측으로 진격하여 약 약 16.09km 간격을 유지했다. 이로 인해 브레슬에 주둔 중인 제9군단은 아브르 반도에서 고립될 위험에 처했다. 영국에서는 제52(로우랜드) 사단의 여단이 6월 7일 도착할 예정이었고, 영국 육군성은 프랑스 사령부에 르아브르의 위험 지역에서 센 강 남쪽의 영국 원정군(BEF) 통신선으로 이어지는 동남쪽 후퇴로를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베이강 장군은 후퇴를 금지하고 브레슬 방어선 사수를 명령했다. 공중에서는 영국 공군(RAF)의 브리스톨 블레넘 12대가 영국에서 출격하여 솜 강 도하 지점으로 이동하는 독일군 부대를 공격했으나 5대의 손실을 입었다. 그날 늦게 다시 24대의 블레넘이 아베빌에서 생 발레리 쉬르 솜까지의 다리와 도로를 폭격했지만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했다. AASF 전투기는 루앙 상공을 순찰했고, 저녁에는 제9군단 지역 상공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오후에는 영국에서 온 2개 전투기 비행대가 부스 비행장에서 연료를 보급하고 전선을 순찰했으나, 이는 오아즈몽과 밀르보스크에 대한 독일군의 공습 이후였다. 베이강은 더 많은 전투기 지원을 요청했고, 영국 공군성은 여러 비행대에 경고 명령을 내렸다. 밤 동안 67 폭격 사령부와 17 AASF 항공기가 독일군 통신 시설과 유류 목표를 공격했다.



폴 로트 작전의 일환으로 B 집단군은 파리 양쪽에서 47개 사단(대부분 기동 부대 포함)으로 공세를 시작했으며, 프랑스군은 초기 48시간 동안 독일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제4군은 솜강에 교두보를 확보했지만, 엔 강 방면 공격은 견고한 프랑스 방어선에 막혀 실패했다. 아미앵에서는 프랑스 포병의 효과적인 사격으로 독일군이 여러 차례 격퇴되었다. 공세 3일째 늦은 시간에 독일군은 프랑스 공군의 폭격에도 불구하고 솜 강과 엔 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독일군은 큰 손실을 감수하며 강을 건넜지만, 프랑스군은 독일군이 돌파한 지역의 숲과 은폐물을 활용하여 끈질기게 저항했다. 아베빌 남쪽에서는 독일 제15군단이 기갑 부대를 선두로 하여 숲길과 마을을 피해 완만한 구릉지대를 따라 이동했다. 제10군은 돌파당해 센 강을 따라 루앙과 남쪽으로 후퇴했다. 독일군의 선봉 부대는 측면 공격에 취약했지만, Luftwaffe|루프트바페de(독일 공군)의 작전은 프랑스군의 집중 시도를 방해했고, 공습에 대한 두려움은 프랑스군의 대규모 병력 동원과 기동성을 제한했다.

이날, 사망한 독일 장교에게서 6월 7일과 8일의 독일군 작전 계획이 담긴 문서가 회수되었다. 문서에 따르면 독일군은 보먼 사단 지역의 포르주-레-조에 도달하여 6월 8일에 루앙을 점령할 계획이었다. 보먼, 에반스, 마셜-콘월은 제10군 사령부에서 이 정보를 논의했지만, 프랑스 주둔 최고위 영국 장교인 카슬레이크는 이 회의에서 배제되었다. 회의에서는 제51(하이랜드) 사단의 고립된 위치와 프랑스 측의 지원 약속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사단이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카슬레이크는 이미 연합군 지휘 체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참모총장에게 통합 지휘의 필요성을 제기한 상태였다. 6월 6일, 딜 참모총장은 조르주 사령부의 스웨인 사절단에게 앨런 브룩 중장이 다음 주에 도착할 것이며 제52(로우랜드) 사단도 곧 도착할 것이라고 알렸다. 딜 참모총장은 포우널을 프랑스로 보내 새로운 BEF 구성에 대해 프랑스군과 논의하고 현지 영국 지휘관들과 소통하도록 지시했다. 카슬레이크는 포우널에게 고립된 제51(하이랜드) 사단의 상황이 심각하므로 너무 늦기 전에 철수시켜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모든 영국군을 통합 지휘할 군단 사령부 설립을 위해 브룩 중장을 프랑스로 파견할 것을 촉구했다. 이는 반드시 제10군 사령관 알트마이어의 지휘 하에 있을 필요는 없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앨런 브룩 중장은 6월 2일 새로운 BEF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제51(하이랜드) 사단이 제9군단과 함께 포위되어 항복하는 6월 12일까지 영국에 남아 있었다.

5. 3. 6월 7일

보먼 사단의 A 여단은 제4버프스 연대, 제1/5 셔우드 포레스터 연대, 제4보더 연대의 병력 약 3,00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제51(하이랜드) 사단을 증원하기 위해 파견되어 사단의 좌측 방어선을 인수했다. 당시 제51(하이랜드) 사단의 제152, 153, 154 보병여단은 각각 80%, 60%, 25%의 손실을 입은 상태였다. 제152보병여단의 남은 병력은 외 숲(Haute forêt d'Eu)으로 이동하여 예비대가 되었다. 6월 7일까지 제51(하이랜드) 사단은 브레스 강에 새로운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우측의 제31(알파인) 사단과 연락을 유지했다. 제31(알파인) 사단은 다시 프랑스 지휘 체계로 복귀했다. 브레스 강은 특히 제방이 범람한 강 하구가 좋은 전차 장애물이 되어 효과적인 방어선 역할을 했으나, 외(Eu)와 퐁에마레(Ponts-et-Marais) 지역은 취약했다. 이날 제4보더 대대와 제1/5포레스터 중대는 남쪽 강둑의 독일군 점령 지역을 공격했지만, 독일군을 외 숲 북서쪽 끝으로 밀어내는 데 그쳤다. 제1로시안 연대와 혼성 연대가 예방 차원에서 이동했으며, 연합군은 남은 시간 동안 독일군과 교전을 벌였다.

남동쪽의 전황은 계속 악화되었다. 제51(하이랜드) 사단 사령관 포춘 소장은 제31(알파인) 사단과 연락하여 지원 부대(F. E. 모건 준장 지휘)의 한계와 제1기갑사단의 상황을 공유했다. 제1기갑사단은 전날 제10군 사령부의 알트마이어 장군 지휘 하에 편입된 상태였다. 지원 부대는 제51(하이랜드) 사단, 제31(알파인) 사단, 제40보병사단, 제2경기병사단(2e DLC), 제5경기병사단(5e DLC)과 분리되어 있었다. 6월 7일, 제1기갑사단 사단장 에반스 소장은 영국에서 온 영국 원정군(BEF)의 전 참모차장 마셜-콘월과 헨리 파우넬 중장을 만났다.

이때 제5기갑사단이 그랑빌리에(Grandvilliers)와 포르므리(Formerie)에서 프랑스군 방어선을 돌파하여 오말(Aumale) 남쪽의 영국군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오말-세르크(Serqueux) 지역의 다른 지원 부대는 독일군 공격을 격퇴했지만, 독일 기갑 부대는 포르주레조(Forges-les-Eaux) 근처에서 남서쪽으로 공격해왔고, 지원 부대의 남은 병력은 바스 외 숲(Basse Forêt d'Eu)으로 철수했다. 제5기갑사단제7기갑사단은 이미 브레스 강 방어선을 우회하여 루앙 남쪽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제1기갑사단은 구르네앙브레(Gournay-en-Bray)로 이동하여 독일군 돌파 부대의 측면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사단은 제3기갑여단에 순항전차 41대와 경전차 31대, 제2용기병근위대에 경전차 6대, 그리고 제2기갑여단의 트럭에 탑승한 제10왕립후사르연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5월 솜강 교두보 공격 이후 재정비를 마친 상태였다.

저녁에는 막심 베이강 장군이 제10군 사령부에 도착했다. 그는 프랑스-영국 장교들에게 제10군이 "전쟁의 결정적인 전투"를 치르고 있으며 예비대가 없다고 말했다. 또한 프랑스군이 남쪽에서 반격하는 동안 제1기갑사단이 놀르발(Neufchâtel-en-Bray)에서 세르크(Serqueux)까지 약 약 16.09km의 앙델 강(Andelle) 방어선을 사수하는 데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에반스 소장은 자신의 사단이 이름뿐이며 포병, 대전차포, 보병이 분리되어 있고, 전차는 고정 방어에 부적합하며 이미 독일군 측면 공격을 위해 이동 중이라고 설명했다. 베이강은 별다른 동요 없이, 만약 사단이 앙델 강에서 밀려날 경우 센 강으로 철수하는 것을 허락했다. 에반스 소장은 이미 일부 부대가 구르네앙브레 북서쪽 약 약 8.05km 지점에서 독일군과 교전 중이었기 때문에 측면 공격 명령을 취소해야 했다. 6월 8일 새벽까지 독일 기갑 부대는 루앙에 근접했고, 브레스 강의 IX 군단은 포위될 위기에 처했다.

한편, 6월 6일에 사망한 독일 장교에게서 회수한 문서에는 6월 7일과 8일의 독일군 작전 계획이 담겨 있었다. 보먼 사단 사단장 보먼, 제1기갑사단 사단장 에반스, 마셜-콘월은 제10군 사령부에서 이 정보를 논의했지만, 프랑스 주둔 최고위 영국 장교였던 카슬레이크는 이 논의에서 배제되었다. 문서에 따르면 독일군은 보먼 사단 지역의 포르주레조(Forges-les-Eaux) 지역에 도달하여 6월 8일에 루앙을 점령할 계획이었다. 회의에서는 제51(하이랜드) 사단의 고립된 위치와 프랑스 측 지원 약속의 신뢰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으며, 사단이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카슬레이크는 이미 통합 지휘체계 부재에 대해 영국 참모총장에게 문제를 제기한 상태였다. 존 딜 참모총장은 앨런 브룩 중장이 차주에 도착할 것이며 제52(로우랜드) 사단도 곧 도착할 것이라고 알렸다. 딜은 파우넬 중장을 프랑스로 보내 새로운 영국 원정군(BEF) 구성에 대해 프랑스군과 논의하고 영국 지휘관들과 연락하도록 했다. 카슬레이크는 파우넬에게 제51(하이랜드) 사단을 너무 늦기 전에 철수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앨런 브룩 중장을 프랑스로 보내 모든 영국군을 통합 지휘할 군단 사령부를 창설할 것을 촉구했다. 브룩은 6월 2일 새로운 BEF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지만, 제51(하이랜드) 사단이 IX 군단과 함께 포위되어 항복하는 6월 12일까지 영국에 머물렀다.

5. 4. 6월 8일

브레스 강에서는 IX 군단의 방어선을 포위하려는 독일 기갑사단을 기다리는 동안 독일군의 활동이 소극적이었다. 제4 국경 연대와 제1/5 포레스터 연대는 Haute forêt d'Eu|오트 포레 드 으fra의 독일군을 몰아내려 했지만, 더 이상의 진격을 막는 데 그쳤고, 보샹 부근에서는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새벽녘에 독일 기갑사단은 루앙으로의 공격을 재개했다. 이때 제51 (하일랜드) 사단과 보먼 사단(Beauman Division)의 A 여단 증원 부대는 사단 본부의 지휘 아래 가마슈에서 으까지 브레스 강 방어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제1 기갑 사단은 프랑스 도착 직후 해체되어 칼레 파견 부대 없이 솜강 남쪽 독일 교두보에 대한 연합군 공세에 참여했으며, 이후 제2 기갑 여단의 혼성 연대가 제51 (하일랜드) 사단에 남아 Haute forêt d'Eu|오트 포레 드 으fra를 방어했다. 제2, 3 기갑 여단의 나머지 병력은 손실로 인해 임시 부대로 축소되어 놀레발에서 세르쾨까지의 앙델 강 방어선 일부를 지켰고, 지원 부대의 잔여 병력은 제51 (하일랜드) 사단의 지휘 아래 Basse forêt d'Eu|바스 포레 드 으fra에 있었다. 보먼 사단의 B, C 여단은 센 강에서 디에프까지의 베튀느-앙델 선을 방어하고 있었다.

한편, 폴 로트 작전의 일환으로 B 집단군은 파리 양쪽에서 47개 사단(대부분 기동 부대 포함)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초기 48시간 동안 프랑스군은 독일의 공격을 견뎌냈다. 독일 제4군은 솜강에 교두보를 확보했으나, 엔 강에 대한 공격은 프랑스의 깊이 있는 방어에 막혀 초기에 실패했다. 아미앵에서는 독일군이 프랑스 포병 사격에 여러 차례 격퇴당했다. 공세 3일째 늦게, 독일군은 프랑스 공군(Armée de l'Air|아르메 드 레르fra)의 폭격에도 불구하고 솜강과 엔 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성공은 상당한 대가를 치렀으며, 프랑스군은 독일군이 돌파한 숲과 은폐된 지형에서 저항을 이어갔다. 아베빌 남쪽에서는 독일 제15군단이 숲길과 마을을 피해 참호가 거의 없는 완만한 구릉지대를 기갑 부대를 선두로, 보병 차량을 뒤따르게 하며 이동했다. 제10군은 돌파당해 센 강을 따라 루앙과 남쪽으로 후퇴했다. 독일군의 선봉대는 측면 공격에 취약했지만, Luftwaffe|루프트바페deu(독일 공군)의 작전은 프랑스군의 집결 시도를 방해했고, 공습에 대한 두려움은 프랑스군의 대규모 병력 동원과 기동성을 제약했다.

6월 6일, 사망한 독일 장교에게서 회수한 문서에는 6월 7일과 8일에 대한 독일군의 계획, 특히 6월 8일 루앙 점령 목표가 담겨 있었다. 보먼, 에반스, 마셜-콘월은 제10군 사령부에서 이 정보를 논의했지만, 프랑스 주둔 최고위 영국 장교인 카슬레이크는 이 논의에서 배제되었다. 회의에서는 제51(하이랜드) 사단의 고립된 위치와 프랑스 측 지원 약속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사단이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카슬레이크는 이미 통합 지휘 체계 부재에 대해 참모총장에게 문제를 제기한 상태였다. 6월 6일, 딜은 조르주 사령부의 스웨인 사절단에 브룩 중장이 다음 주에 도착할 것이며 제52(로우랜드) 사단도 곧 도착할 것이라고 알렸다. 딜은 헨리 포우널 중장을 프랑스로 보내 새로운 영국 원정군(BEF) 편성에 대해 프랑스군과 논의하고 영국 지휘관들과 연락하도록 했다. 카슬레이크는 포우널에게 제51(하이랜드) 사단을 너무 늦기 전에 철수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브룩 중장을 프랑스로 데려와 모든 영국군을 통합 지휘할 군단 사령부를 설립할 것을 촉구했다. 이는 반드시 제10군 사령관 알트마이어의 지휘 아래 있을 필요는 없다고 덧붙였다. 브룩은 6월 2일 새로운 영국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지만, 제51(하이랜드) 사단이 제9군단과 함께 포위되어 항복하는 6월 12일까지 영국에 머물렀다. 6월 8일 새벽까지 독일 기갑사단은 루앙에 근접했고, 브레스 강에 있던 IX 군단은 포위될 위기에 처했다.

5. 5. 6월 9일

6월 8일 밤, 독일 기갑사단은 루앙으로의 진격을 계속했다. 제5 기갑사단은 루앙 외곽 이스노빌에서 보먼 사단 소속 심스 대대와 교전을 벌였다. 급조된 이 대대는 급강하 폭격에도 불구하고 몇 시간 동안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며 상당한 피해를 주었으나, 결국 센 강으로 후퇴해야 했다.

같은 시기, 제1기갑사단과 보먼 사단의 남은 병력 대부분도 센 강 남쪽으로 철수했다. 이로 인해 강 북쪽에는 제51(하이랜드) 사단과 지원 부대 일부만 고립된 상태로 남게 되었다.

막심 베이강 장군은 제9군단에게 레장들리와 이미 독일군에게 점령되었거나 함락 직전인 루앙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군단장 일러 장군은 제10군 사령부가 후방으로 이동하면서 통신이 두절된 상태에서 뒤늦게 명령을 받았고, 제시된 철수 계획은 이미 루앙에 근접한 독일군의 빠른 진격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한편, 독일 B 집단군파리 양쪽에서 47개 사단 규모로 대규모 공세를 지속하며 프랑스군 방어선을 압박했다. 비록 공군의 저항과 지역적인 반격이 있었으나, 독일군은 제공권을 바탕으로 꾸준히 남하하고 있었다. 제9군단은 브레스 강 방어선에서 철수를 시작했으나, 독일 기갑 부대의 빠른 남하로 인해 생발레리앙코 방향으로 밀려나며 포위될 위험이 커지고 있었다.

6. 사이클 작전 (Operation Cycle)

제2차 세계 대전프랑스 공방전 말기, 덩케르크 철수 작전 이후 프랑스 북부 해안에 남아있던 영국 원정군(BEF)과 연합군 병력을 구출하기 위해 1940년 6월 10일부터 13일까지 진행된 철수 작전이다. 주요 철수 항구는 생발레리앙코와 르아브르였다.

작전은 독일군의 빠른 진격과 루프트바페의 공습 속에서 진행되었다. 생발레리앙코에서는 제51 (하이랜드) 사단을 포함한 많은 병력이 독일 제7 기갑 사단에 포위되어 철수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짙은 안개와 독일군의 포격으로 인해 철수 작전은 제한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영국군 2,137명과 프랑스군 1,184명만이 탈출에 성공했다. 안타깝게도 제51 (하이랜드) 사단 병력 6,000명 이상을 포함한 다수의 연합군이 6월 12일 항복하고 포로가 되었다.

반면, 르아브르에서는 아크포스를 중심으로 철수가 이루어졌다. 항만 시설이 폭격으로 손상되는 등 어려움이 있었으나, 6월 12일 밤부터 13일 새벽 사이에 집중적인 철수가 진행되어 총 11,059명의 영국군 병력이 성공적으로 탈출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셰르부르로 이동하여 영국 본토로 귀환할 수 있었다.

사이클 작전은 덩케르크 철수 작전에 비해 규모는 작았지만, 프랑스에 고립된 연합군 병력의 일부를 구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생발레리앙코에서의 대규모 병력 손실은 연합군에게 큰 타격이었다.

6. 1. 생발레리앙코

6월 10일, 포츠머스 사령관인 윌리엄 제임스 제독은 르아브르에 도착했다. 그는 구축함에 동쪽의 작은 항구들을 정찰하도록 지시했으며, 이 과정에서 구축함 앰부스케이드와 보디시아가 이미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1] 제임스는 해군본부에 르아브르에서 대규모 병력 철수를 계획 중이며, 반드시 그날 밤 안에 작전을 실행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해안으로의 후퇴는 해가 진 후 시작되었고, 마지막 부대는 별다른 방해 없이 오후 11시에 베튠을 출발했다. 51사단장 포춘(Fortune) 소장은 육군성에 식량이 이틀 치밖에 남지 않았으며, 생발레리앙코에서 뒤르당 강 어귀로 철수해야 할 것 같다고 보고했다. 병력 수송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부대는 불필요한 장비를 파기하고 포탄 보유량을 포문당 100발로 제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야간 이동은 프랑스 부대와의 혼선과 과장된 소문 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포춘 소장과 프랑스 제9군단장 일러(Ihler) 장군은 트루프(Veules-les-Roses) 근처에 지휘소를 설치했다. 6월 11일 아침까지 제9군단은 생발레리앙코 주변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프랑스 수송 부대가 계속 방어선 안으로 들어오면서, 뒤따르는 독일군을 식별하기 어려워져 방어 사격에 제약이 있었다. 그날 저녁, 구축함 코드링턴의 함장은 철수 작전 개시 명령을 받았고, 두 시간 뒤 포춘 소장은 지금 철수하지 않으면 기회가 없을 것이라고 타전했다.

방어 임무가 없는 병력은 해변과 항구로 이동했으나, 짙은 안개로 인해 선박들이 해안에 접근하지 못하면서 철수 작전은 차질을 빚었다. 철수를 위해 상선 67척과 소형 선박 140척이 동원되었지만, 대부분 무선 통신 장비가 없었고 안개 때문에 시각 신호 교환도 불가능했다. 방어선 동쪽 끝의 트루프에서는 독일군의 포격 속에서 많은 병사들이 구조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구축함 불독, 보디시아와 앰부스케이드가 추가적인 피해를 입었다. 새벽녘, 항구에 대기하던 병력은 다시 마을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오전 7시 30분, 포춘 소장은 다음 날 밤에 다시 탈출을 시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보고했으나, 직후 지역 프랑스군 사령관이 독일군과 항복 협상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트루프에서 영국군 2,137명과 프랑스군 1,184명이 철수하는 데 성공했지만, 제51 (하이랜드) 사단의 6,000명 이상을 포함한 나머지 병력 대부분은 6월 12일 에르빈 롬멜이 지휘하는 제7 기갑 사단에 항복하고 포로가 되었다. 제7 기갑 사단은 이후 노르망디를 계속 진격하여 6월 18일 셰르부르에 도달했다. 한편, 르아브르에서는 6월 12일 밤부터 13일 새벽까지 철수 작전이 진행되어 가장 많은 병력이 빠져나왔다. 이때 철수한 영국군 11,059명 중에는 보먼 사단 A여단 소속 병력 9,000명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셰르부르로 이동했다. 제154 보병 여단은 셰르부르를 거쳐 영국으로 철수했다.

6. 2. 르아브르

6월 9일, 르아브르에 주둔 중이던 프랑스 해군 제독은 제10군과 제51 (하이랜드) 사단에 독일군이 루앙을 점령하고 해안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달했다. 제9군단 사령관 일러(Ihler)와 51사단장 포춘(Fortune) 소장은 이 소식을 듣고 유일한 탈출로는 르아브르를 통하는 것이라고 판단하여, 루앙을 경유하려던 기존의 철수 계획을 포기했다. 르아브르 항만 사령관은 약 85,000명의 병력을 철수시키기 위해 영국 해군 본부에 충분한 선박 지원을 요청했으나, 이는 연합군 총사령관 베이강(Weygand)이 제9군단의 철수를 위해 제시했던 계획과 상충되었다. 또한, 영국 총참모장 (Dill) 경은 통신 지연으로 인해 현장 상황 변화를 제때 파악하지 못하고 철수 승인을 망설였다. 영국군 연락 장교 카슬레이크(Karslake) 역시 여러 차례 철수를 촉구했지만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었다. 포춘이 제51 (하이랜드) 사단이 제9군단과 함께 르아브르를 향해 철수 중임을 확인하는 메시지를 보낸 후에야 딜은 실제 상황을 인지하게 되었다.

포춘은 르아브르 방어를 위해 제154 보병 여단, 보먼 사단(Bowman Division)의 A 여단, 2개 포병 연대, 공병대로 구성된 임시 부대를 편성했다. 이 부대는 처음 집결했던 마을 아르크라바타유의 이름을 따 아크포스(Arkforce)로 명명되었으며, 스탠리-클라크(Stanley-Clarke) 준장이 지휘를 맡았다. 아크포스는 6월 9일 밤에서 10일 새벽 사이 페캉으로 이동했는데, 제7 ''기갑'' 사단이 도착하기 전에 대부분의 병력이 해당 지역을 통과했다. A 여단은 간신히 포위를 피했지만, 제51 (하이랜드) 사단과의 연락을 유지하는 데 사용하던 무선 트럭을 잃었다. 페캉에서 릴본(Lillebonne)까지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은 고려되지 않았고, 스탠리-클라크는 아크포스에 르아브르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왕립 해군 파괴반은 5월 말부터 르아브르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항구는 6월 7일 루프트바페의 심한 폭격을 받았다. 이틀 뒤인 6월 9일, 영국 해군 본부는 철수 명령을 내렸다. 포츠머스 사령관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제독은 구축함 HMS ''코드리нгтон''(Codrington)을 포함한 영국 및 캐나다 구축함 6척, 소형 선박들, 그리고 다수의 네덜란드 연안 무역선(schuyt|스하우트nl)을 해협 건너로 급파했다. 한편, 디에프 항구를 봉쇄하려는 계획도 급히 세워졌다. 6월 10일, HMS ''베가''(Vega)가 3척의 블록선을 항구로 호송했으나, 2척은 접근 항로에서 침몰했고 나머지 1척은 내항 입구 바로 바깥에서 기뢰에 부딪혀 계획은 실패했다.

6월 10일, 철수를 통제하기 위한 해안 부대가 르아브르에 상륙했으며, 24시간의 지연 끝에 6월 11일부터 철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루프트바페의 폭격으로 항만 시설이 손상되어 철수는 지연되었다. 수송선 SS ''브뤼주''(Bruges)가 폭격으로 피격되어 좌초했고, 전력 공급이 끊겨 부두의 크레인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차량을 선적하기 위해 임시 경사로를 설치했지만 작업 속도는 매우 느렸다. 6월 12일, 영국 공군 전투기들이 항구 상공을 순찰하며 추가 공습을 저지했고, 동시에 센 강 건너 퀴베프(Quillebeuf)의 페리 선착장이나 선박을 이용해 수송 차량과 장비를 구출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제14 로열 푸실리어 연대의 보급 장교는 수송 차량을 성공적으로 이동시키기도 했다.

주요 병력 철수는 6월 12일 밤부터 13일 새벽 사이에 이루어졌으며, 새벽까지 완료되었다. 이 작전을 통해 총 11,059명의 영국군 병력이 르아브르에서 철수했다. 이 중 보먼 사단의 A 여단 소속 병력 약 9,000명은 셰르부르로 이동했고, 제154 보병 여단은 셰르부르를 경유하여 영국 본토로 항해했다. 하지만 르아브르로 철수하지 못한 제51 (하이랜드) 사단의 6,000명이 넘는 병력을 포함한 잔류 병력 다수는 6월 12일 생발레리앙코에서 롬멜(Rommel)이 지휘하는 제7 기갑 사단에게 포로로 잡혔다.

7. 후속 작전

사이클 작전 이후에도 연합군은 프랑스 공방전의 전세를 바꾸기 위한 노력을 이어갔다. 주요 계획으로는 됭케르크 철수작전 이후 해체된 영국 원정군(BEF)을 재건하여 프랑스에 다시 파견하는 것과, 브르타뉴 반도에 연합군 최후의 방어 거점, 이른바 '국가 요새'(réduit national|레뒤 나시오날프랑스어)를 구축하는 방안이 추진되었다.

앨런 브룩 중장이 지휘하게 될 새로운 영국 원정군(제2 BEF)은 이미 프랑스에 남아있던 부대와 영국 본토 및 캐나다에서 증원될 병력으로 구성될 예정이었다. 동시에 프랑스 정부는 브르타뉴 반도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대서양 항구를 확보하고 연합국과의 연결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들은 독일군의 빠른 진격과 프랑스군의 전면적인 붕괴 앞에서 실현되기 어려웠다. 제2 BEF는 제대로 전력을 갖추기도 전에 프랑스 전선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브르타뉴 방어 거점 계획 역시 군사적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평가 속에서 사실상 포기되었다. 결국 영국 정부는 6월 중순, 프랑스에 남아있던 모든 영국군 병력을 철수시키기로 결정했으며, 이는 에어리얼 작전으로 이어졌다.

7. 1. 제2차 영국 원정군 (2nd BEF)



브룩 중장은 5월 30일 됭케르크에서 영국으로 귀환했지만, 불과 사흘 뒤인 6월 2일 존 딜 육군 원수로부터 새로운 영국 원정군(BEF)을 지휘하기 위해 다시 프랑스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새로운 BEF는 이미 프랑스에 있던 제51(하이랜드) 사단과 제1 기갑 사단, 그리고 영국에서 이동할 제52(로우랜드) 사단과 제1 캐나다 사단으로 구성될 예정이었으며, 제3 사단도 재정비 후 합류할 계획이었다. 제2 군단 본부는 됭케르크 철수 후 영국 각지에 흩어져 있었고, 브룩이 처음 원했던 참모장은 이전 BEF 사령관 고트 경과 함께 보고서를 작성 중이었다. 브룩은 딜과 전쟁 장관 앤서니 이든에게 이 계획이 실질적인 군사적 의미보다는 정치적 제스처에 가깝다고 경고했으나, 프랑스로 돌아가면 베이강 장군의 지휘를 받게 될 것이라는 지시를 받았다.

한편, 프랑스 주둔 영국군 최고위 장교였던 헨리 카슬레이크는 통합된 지휘 체계의 부재를 우려하여 참모총장에게 진정서를 제출한 상태였다. 그는 6월 6일, 프랑스로 파견된 포우널에게 제51(하이랜드) 사단의 고립 위험을 알리고 너무 늦기 전에 철수시켜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브룩 중장을 빨리 프랑스로 보내 모든 영국군을 통합 지휘할 군단 사령부를 설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나 브룩은 제51(하이랜드) 사단이 포위되어 항복한 6월 12일에야 프랑스에 도착했다.

프랑스 전선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고 있었다. 독일군은 6월 13일 마른 강을 돌파하고 서쪽에서는 센 강을 건넜다. 파리 근처의 프랑스 군대는 후퇴하면서 제10군이 분단되었고, 명확한 전선 없이 분산 후퇴하는 상황에 놓였다. 6월 12일, 베이강 장군은 프랑스 정부에 휴전을 모색할 것을 권고했다.

6월 14일 밤, 브룩은 더 이상 프랑스군의 지휘를 받지 않으며, 프랑스 주둔 영국군을 철수시킬 준비를 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는 제52(로우랜드) 사단의 나머지 병력이 전선에 투입되는 것을 막았다. 제임스 마샬-콘월 중장은 노먼 부대(Norman Force)로 명명된 제10군 휘하의 모든 영국군 부대를 지휘하여 프랑스군과 협력을 유지하면서 셰르부르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52(로우랜드) 사단의 나머지 병력은 6월 15일 철수를 엄호하기 위해 셰르부르 근처 방어선으로 이동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영국 공군 선진항공타격대(AASF) 역시 마지막 폭격기 비행대를 영국으로 보내고 전투기들은 철수 엄호에 투입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최종적인 연합군 철수 작전인 에어리얼 작전은 6월 15일에 시작되었다.

7. 2. 브르타뉴 방어 거점 (Breton redoubt)

브르타뉴 지형도


1940년 5월 29일, 프랑스 총리 폴 레노는 막심 베이강 총사령관의 휴전 권고를 거부하고, 브르타뉴 반도의 해군 기지 주변에 국가 요새(réduit national|레뒤 나시오날프랑스어)를 구축하여 대서양으로의 통로를 확보하고 연합국과의 연락을 유지하는 방안을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이 아이디어는 5월 31일 프랑스와 영국 정부 간에 논의되었고, 6월 5일에는 관련 작전 지침이 마련되었다. 이 계획에 따라 앨런 브룩 중장이 프랑스에 파견될 새로운 영국 원정군(제2 BEF)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영국군은 1939년 초기 원정군 파견 계획이었던 'W 계획'을 다시 활용하여, 제52(로우랜드) 보병 사단을 셰르부르 항구로 보내 센 강 북쪽에 배치된 제51(하이랜드) 보병 사단을 지원하도록 했다. 6월 6일, 베이강 총사령관은 르네 알트마이어 장군에게 요새 건설을 시작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이미 6월 9일 센 강을 건넜고, 이는 제52(로우랜드) 사단이 프랑스 땅에 발을 디딘 지 불과 이틀 만의 일이었다. 이로 인해 센 강 북쪽에 있던 제51(하이랜드) 사단은 독일군에게 차단되어 고립되었다.

상황이 급변하자 제52(로우랜드) 사단의 집결지는 브르타뉴의 으로 변경되었고, 가장 먼저 도착한 제157(하이랜드 라이트 보병) 여단은 르망 인근의 보몽쉬르사르트(Beaumont-sur-Sarthe)로 이동했다. 제1 캐나다 사단의 제1 캐나다 보병 여단은 6월 11일부터 브레스트 항에 도착하기 시작하여 사블레쉬르사르트로 이동했다. 당시 연합군 지휘부는 이들 새로운 부대가 방어선을 구축하면, 프랑스 제10군과 영국군 부대가 이들을 통해 질서 있게 후퇴하여 브르타뉴 반도에 마련된 진지를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같은 날인 6월 11일, 브리아르에서는 영프 최고 전쟁 평의회(Anglo-French Supreme War Council)가 열렸고, 당시 국방차관이었던 샤를 드 골 장군이 브르타뉴 요새 건설 진행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렌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다음 날인 6월 12일, 드 골은 브르타뉴에 요새를 성공적으로 구축하고 유지할 가능성이 희박하며, 프랑스 정부가 영국이나 북아프리카로 피신하기에는 캥페르가 더 유리한 후퇴 지점이 될 것이라고 보고했다.

한편, 현장의 알트마이어 장군은 방어 공사가 시작되었고 민간 노동자들이 동원되었으며, 중장비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3,000명의 폴란드군 병력이 투입되어 요새 건설을 진행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6월 13일 마지막으로 프랑스를 방문하여 레노 총리를 만나 브르타뉴 방어 계획을 승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브룩 중장은 6월 14일 브리아르에서 베이강 및 알퐁스 조르주 장군과 회동했을 때, 이들 프랑스 지휘관들조차 계획의 실효성에 대해 회의적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 지도부의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는 분위기 속에서 공동 합의문이 서명되었다. 브룩은 즉시 런던의 존 딜 영국 제국 총참모장에게 전화하여 프랑스 측과 실질적인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처칠 총리가 브르타뉴 계획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처칠은 프랑스에 새로 투입되는 영국군이 최소한 프랑스가 최종적으로 항복할 때까지는 현지에 남아 저항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브룩 중장은 6월 14일 밤, 더 이상 프랑스군의 지휘를 받지 않으며 영국군 부대를 프랑스에서 철수시킬 준비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제임스 마샬-콘월 중장이 이끄는 노먼 부대(Normandy Force)는 프랑스 제10군과 협조하면서 셰르부르 항구를 통해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52(로우랜드) 사단의 나머지 부대 역시 6월 15일 시작될 철수를 엄호하기 위해 셰르부르 인근 방어선으로 이동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러한 결정은 브르타뉴 방어 거점 계획의 사실상 포기를 의미했다. 제52(로우랜드) 사단의 지원을 받지 못한 프랑스 제10군은 결국 브르타뉴에서 고립되었다. 독일군 2개 기갑사단이 먼저 반도 깊숙이 진격하여 프랑스군의 후퇴로를 루아르 강 남쪽으로 차단했기 때문이다. 이미 브르타뉴 지역에 있던 프랑스군은 제1 캐나다 사단이 영국으로 철수한 후 프랑스 본대와 합류할 기회를 잃었다. 최종적인 연합군 철수 작전인 에어리얼 작전은 6월 15일부터 개시되었다. 6월 16일, 알트마이어 장군은 휘하 부대에 브르타뉴 반도로 후퇴하라고 명령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계획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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