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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오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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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오 동맹은 18세기 초, 영국과 오스트리아 간에 맺어진 외교적 동맹으로, 유럽의 복잡한 외교 환경 속에서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진되었다. 1731년 빈 조약 체결을 통해 공식적으로 성립되었으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영국은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며 동맹 관계를 강화했다. 그러나, 7년 전쟁을 거치면서 오스트리아는 영국이 진정한 동맹이 아니라고 의심했고, 1756년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으면서 붕괴되었다. 이후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다시 동맹을 맺었지만, 과거와 같은 긴밀한 관계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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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오 동맹
개요
이름영오 동맹
존속 기간1731년 - 1756년
동맹 배경
주요 목표유럽 대륙의 세력 균형 유지
영국의 하노버 왕가 보호
오스트리아의 국권 유지
주요 이유영국오스트리아의 공동의 이익 추구
프랑스의 세력 확장에 대한 공동의 견제
주요 내용
상호 방위동맹국이 공격받을 경우 상호 지원
공동 외교유럽 문제에 대한 공동 대응
군사 협력필요시 군사 지원 제공
주요 사건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1733년-1738년)동맹국이 폴란드 왕위 계승 문제에 공동 대응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0년-1748년)동맹국이 마리아 테레지아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을 지지
동맹 해체
해체 원인외교적 변화
러시아와 프랑스의 관계 변화
프로이센의 부상
외교 혁명 (1756)영국프로이센의 동맹
오스트리아프랑스의 동맹
영오 동맹의 종식
중요성
유럽 외교18세기 유럽 외교에 중요한 영향
세력 균형유럽의 세력 균형 유지에 기여
외교 관계영국오스트리아의 관계 변화를 보여줌
기타
참고'국가의 카드릴 (Stately quadrille)'의 일부

2. 배경

영국의 남부 담당 국무 대신 뉴캐슬 공작은 친 오스트리아파 정치인이었으며, 영오 동맹을 추진했다.


1725년, 오스트리아빈 조약을 체결하여 스페인이 영국으로부터 지브롤터를 탈환하는 것을 돕겠다고 약속했다[9]. 당시 영국은 프랑스와 영불 동맹 관계였으나, 두 나라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어 1731년에는 다시 적대 관계로 돌아섰다[10].

1727년, 영서 전쟁 중 스페인이 지브롤터를 포위하자, 영국 외교관들은 오스트리아에 여러 양보를 제안하며 스페인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도록 설득했다. 결국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지 못한 스페인은 포위를 풀고 평화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11].

한편, 영국 내에서는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에 대항할 만한 육군을 가진 유일한 유럽 국가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전부터 영-오 동맹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특히 오스트리아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하며 동맹에 반대했던 타운센드 자작이 1730년에 사임하면서, 영국과 오스트리아 사이의 관계 개선이 급물살을 탔다. 이후 뉴캐슬 공작이 영국의 외교 정책을 주도하게 되었는데, 그는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이 필수적이라고 굳게 믿는 대표적인 친 오스트리아파 정치인이었다.

3. 동맹의 성립

뉴캐슬 공작은 저명한 친오스트리아파였으며 영오 동맹의 주요 설계자 중 한 명이었다.


1725년, 오스트리아빈 조약 (1725년)을 통해 스페인영국으로부터 지브롤터를 되찾으려는 노력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1] 당시 영국은 프랑스와 영불 동맹 관계였으나, 이 관계는 점차 약화되어 1731년경에는 사실상 적대 관계로 돌아섰다.[2] 1727년, 영국-스페인 전쟁 중 스페인이 지브롤터를 포위하자, 영국 외교관들은 오스트리아에 양보안을 제시하며 스페인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도록 설득했다. 결국 스페인은 포위를 풀고 평화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3]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육군을 가진 유일한 유럽 국가로 여겨졌기 때문에, 영국 내에서는 오랫동안 친오스트리아파 인사들을 중심으로 영오 동맹 체결 주장이 제기되었다. 오스트리아에 강경한 입장이었던 타운센드 자작이 1730년에 사임하면서 친오스트리아파의 입지가 강화되었고, 뉴캐슬 공작이 영국의 외교 정책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는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이 필수적이라고 굳게 믿었다.

동맹 체결의 걸림돌이었던 오스텐드 회사 문제는 1727년 오스트리아가 이 회사의 해외 무역 활동 중단에 동의하면서 해결되었다. 이는 양국 간 공식적인 동맹 조약인 1731년 빈 조약 체결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 조약은 1731년 3월 16일, 오스트리아 측의 사보이 공자 외젠, 진첸도르프 백작, 슈타렘베르크 백작과 영국 측 특사인 체스터필드 백작에 의해 서명되었다. 조약의 주요 내용 중 하나는 오스텐드 회사의 완전한 해산 약속이었으며, 이는 영국 정부를 만족시켰다. 또한 양국은 서로의 영토를 침략으로부터 방어해 주기로 약속했다.[12][4]

그러나 동맹 관계가 순탄하게 출발한 것만은 아니었다.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1733년 ~ 1738년)이 발발했을 때 오스트리아는 영국의 지원을 기대했지만, 영국 정부는 이 전쟁을 정당하게 선출된 폴란드 왕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에 대한 침략으로 간주하여 지원을 거부했다. 이는 양국 관계에 긴장을 유발하기도 했다. 이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양국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면서 동맹 관계는 다시 활성화되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갈등의 불씨를 안게 되었다.

3. 1.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8년 아헨 조약 이후의 유럽 지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영국은 오스트리아의 주요 동맹국으로 부상했다. 영국은 살리카법에 따른 상속 원칙에도 불구하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합스부르크 가문 영지를 계승하는 것을 지지하며, 이를 위해 영국군 파병과 함께 '성 조지 금기병'이라 불릴 정도의 막대한 재정 지원을 제공했다.[13]

전쟁 초기, 오스트리아는 1745년까지 프로이센프랑스에 의해 영토가 분할될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영국이 플랑드르 지방에서 대프랑스 군사 작전을 개시하면서 프랑스군의 전력이 분산되었고, 이는 오스트리아가 반격에 성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영국은 외교적 압력을 통해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드레스덴 조약을 맺고 전쟁에서 이탈하도록 유도했다. 이로써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의 전쟁에 역량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13]

하지만 양국 동맹 관계가 항상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1746년 프랑스의 브뤼셀 포위전 당시, 오스트리아는 영국이 브뤼셀 함락을 막는 데 소극적이었다고 여겨 불만을 표했다. 동맹의 균열은 전쟁 종결을 위한 브레다 회의 과정에서 더욱 심화되었다. 영국은 신속한 종전 협상 타결을 원했지만, 오스트리아 측의 더딘 협상 진행에 짜증을 내며 3주 안에 합의하지 않으면 단독으로 강화 조약을 체결하겠다고 위협하기까지 했다.[14]

결국 오스트리아는 영국의 압력에 못 이겨 1748년 아헨 조약에 서명했다. 오스트리아는 전쟁에서의 노력에 비해 얻은 실익이 거의 없다고 느꼈으며, 반면 영국은 프랑스에게 지나치게 관대한 조건으로 조약이 체결되었다고 생각하는 등 양측 모두 조약 결과에 대해 아쉬움을 나타냈다.

이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1748년 아헨 조약 체결 이후 영오 동맹은 유지되었다. 오스트리아는 당시 영국의 유력 정치인이었던 뉴캐슬 공작이라는 강력한 지지자를 확보하고 있었고, 현실적으로 다른 강대국과 동맹을 맺기 어려운 상황이었다.[15] 영국 또한 이 동맹을 하노버 선제후국,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공화국을 연결하여 독일 지역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뉴캐슬 체제'의 중요한 일부로 간주했다.

3. 2. 브레다 의회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끝내기 위한 협상이 브레다 의회에서 진행되었다. 이 회의는 1748년 아헨 조약 체결로 이어졌지만, 그 과정에서 영국오스트리아 사이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이미 1746년 프랑스가 브뤼셀 포위전을 통해 브뤼셀을 점령했을 때, 오스트리아는 영국이 이를 막기 위해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여겨 불만을 품고 있었다.[14] 이러한 갈등은 브레다 의회에서 더욱 심화되었다.

영국은 전쟁을 빨리 마무리 짓고 싶어 했으나, 오스트리아는 협상 조건에 대한 합의를 서두르지 않았다. 이에 영국은 오스트리아의 느린 태도에 불만을 느끼고, 3주 안에 조약에 동의하지 않으면 단독으로 프랑스와 강화 조약을 맺겠다고 위협했다.[14] 결국 오스트리아는 마지못해 아헨 조약에 서명했다.

조약 체결 이후에도 양측의 불만은 남았다. 오스트리아는 전쟁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얻은 실질적인 이득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으며, 영국 측에서는 프랑스에게 지나치게 관대한 조건으로 조약이 맺어졌다고 여겼다.

4. 외교 혁명과 동맹의 붕괴

18세기 중반, 유럽의 외교 지형은 '외교 혁명'이라 불리는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며 기존의 영오 동맹은 붕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동맹국 영국에 대한 불신이 깊어지고 있었다. 영국이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고, 엑스라샤펠 조약(또는 아헨 조약)에서 오스트리아의 슐레지엔 영토 회복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은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 영국이 자국의 이익에 부합할 때만 동맹에 관심을 가진다는 인식이 퍼졌으며, 1753년 외무 장관으로 취임한 벤첼 안톤 폰 카우니츠는 이러한 반(反)영국 정서를 주도했다.

결정적으로 1756년, 프로이센보헤미아 침공 위협이 가시화되고, 영국이 북아메리카 오하이오 영토에서 프랑스와의 식민지 분쟁(프랑스-인디언 전쟁)에 몰두하여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자, 오스트리아는 오랜 적대 관계였던 프랑스와 손을 잡는 파격적인 외교 노선 변경을 단행했다(프랑스-오스트리아 동맹).

갑작스럽게 외교적으로 고립된 영국은 이에 대응하여 프로이센과 웨스트민스터 조약을 체결하며 새로운 동맹 관계를 구축했다. 영국은 이를 통해 새로운 세력 균형을 형성하여 전쟁 발발을 억제하고자 기대했다.[8][16]

그러나 영국의 기대와 달리, 1756년 프로이센이 영국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를 침공하면서 7년 전쟁이 발발했다. 영국은 결국 프로이센과의 동맹 약속을 이행하기로 결정했고(영국-프로이센 동맹 (1756년)), 이로써 영국과 오스트리아는 공식적인 선전포고는 없었지만 전쟁에서 서로 적대적인 진영에 서게 되었다. 이는 수십 년간 지속된 영오 동맹의 실질적인 종말을 고하는 사건이었다. 전쟁 중 1758년 엠덴 점령 당시에는 양국 군대가 직접적인 전투 직전까지 가는 긴장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전쟁은 결국 오스트리아의 슐레지엔 탈환 실패로 끝났고, 1763년 파리 조약을 통해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영유권이 국제적으로 확정되면서 영오 동맹의 복원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4. 1. 외교 혁명

오스트리아에서는 영국이 진정한 동맹이 아니라는 의심이 항상 남아 있었다. 이러한 의혹을 가진 이들은 영국이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다는 것과 아헨 조약 (1748년)에서 슐레지엔의 반환을 견고하게 지지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거로 들었다. 그들은 영국이 동맹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영국의 목적에 부합할 때뿐이라고 믿었다. 반(反)영국적인 주요 인물 중 하나는 1753년 오스트리아 외무 장관으로 취임한 벤첼 안톤 폰 카우니츠 백작이었다.

1756년 프로이센 왕국보헤미아를 침공하려고 한 것과 영국이 오하이오 영토를 둘러싸고 프랑스와의 분쟁(프랑스-인디언 전쟁)에 몰두하여 원조를 하지 않을 것을 우려한 오스트리아는 오랜 적국인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했다. 고립된 영국은 당황해서 프로이센과 웨스트민스터 조약 (1756년)을 체결하고, 이 새로운 세력 균형이 전쟁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8][16]

그러나 1756년 프로이센이 영국의 제지를 뿌리치고 오스트리아를 공격하자, 영국은 프로이센과의 동맹(영국-프로이센 동맹 (1756년))을 정식으로 체결했다. 영국과 오스트리아는 서로 선전포고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이제 양국은 유럽의 큰 전쟁 속에서 다른 진영에 속하게 되었다. 특히 1758년의 엠덴 점령에서는 영국군과 오스트리아군이 간발의 차로 전투를 피했다. 그리고 전쟁의 결과 오스트리아는 슐레지엔 탈환에 실패했고, 1763년의 파리 조약은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영유권을 확정지었다.

4. 2. 7년 전쟁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2세는 영국의 제지를 무시하고 1756년에 오스트리아를 공격하였다. 이에 영국은 프로이센과의 약속을 지켜 영국-프로이센 동맹을 정식으로 체결했다.[16] 이로써 영국과 오스트리아는 서로에게 직접 선전포고를 하지는 않았지만, 7년 전쟁이라는 유럽 대전쟁에서 서로 다른 진영에 속하게 되었다. 양국의 관계는 긴장 상태에 놓였으며, 특히 1758년 엠덴 점령 당시에는 영국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가는 상황도 발생했다. 전쟁은 결국 오스트리아의 패배로 끝났고, 오스트리아는 슐레지엔 지역을 되찾는 데 실패했다. 1763년 체결된 파리 조약은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영유를 공식적으로 확정지었다.

5. 동맹의 유산 및 영향

7년 전쟁 이후 영국에게 오스트리아는 동맹 상대로서의 매력을 점차 잃어갔다. 영국 내에서 오스트리아를 지지하던 세력의 영향력 역시 감소했는데, 이는 오스트리아의 전제적인 통치 방식이 영국의 자유 민주주의 가치에 반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1778년 프랑스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하여 미국의 독립을 지지하자, 영국은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얻고자 했다. 오스트리아가 참전할 경우 미국으로 파견된 프랑스군을 분산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지만, 오스트리아는 영국의 제안을 진지하게 검토조차 하지 않고 거부했다.

두 나라는 이후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다시 동맹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이는 여러 나라가 참여한 광범위한 반(反)프랑스 동맹의 일원으로서 협력한 것일 뿐, 과거 영오 동맹 시절과 같은 긴밀한 관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 시기에도 영국은 오스트리아에 자금을 지원했는데, 예를 들어 1793년부터 1794년까지 이어진 플랑드르 전역에서는 오스트리아군을 지원하기 위해 100만파운드를 제공했다.

참조

[1] 서적 Browning p.48
[2] 서적 Simms p.215-221
[3] 서적 Browning p.55
[4] 서적 Simms p.219
[5] 서적 Simms p.338
[6] 서적 Browning p.154
[7] 서적 Browning p.56
[8] 서적 Anderson p.128-29
[9] 서적 Browning, p. 48.
[10] 서적 Simms, pp. 215-221.
[11] 서적 Browning, p. 55.
[12] 서적 Simms, p. 219.
[13] 서적 Simms, p. 338.
[14] 서적 Browning, p. 154.
[15] 서적 Browning, p. 56.
[16] 서적 Anderson, pp. 128-129.
[17] 서적 Browning p.48
[18] 서적 Simms p.215-221
[19] 서적 Browning p.55
[20] 서적 Simms p.219
[21] 서적 Simms p.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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