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델라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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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르델라피는 9세기 말 게르만 병사 로르 데 라피아의 후손을 자처하며 시작된 이탈리아의 가문이다. 13세기에 포를리를 장악하여 기벨린 세력의 거점으로 삼았으나, 14세기 중반 교황령의 세력 확장에 밀려 쇠퇴했다. 로마냐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떨쳤으며, 일부는 베네치아로 이주하여 팔리에로 가를 형성하여 도제를 배출하기도 했으나, 14세기 말에 몰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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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델라피가 | |
---|---|
지도 | |
기본 정보 | |
국가 | 이탈리아 |
지역 | 에밀리아로마냐주 |
광역 자치체 | 포를리체세나 현 |
코무네 | 포를리 |
지방 자치 단체 | 이탈리아 |
면적 | 9.4 km² |
해발 고도 | 33 m |
인구 | |
인구 (2009-12-31) | 1,176 명 |
인구 밀도 | 125 명/km² |
행정 | |
우편 번호 | 47122 |
지역 번호 | 0543 |
기타 | |
시간대 | CET (UTC+1) |
여름 시간 (DST) | CEST (UTC+2) |
지명 약칭 | 오르델라피 |
2. 역사
13세기 기벨린 세력이었던 테오발도 오르델라피는 포를리를 정복하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 함께 라벤나와 파엔차를 포위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그를 포를리의 시뇨레로 임명하였다.
테오발도의 아들 스카르페타 오르델라피는 단테 알리기에리가 이끄는 "백" 구엘프의 지지를 받는 피렌체 공화국을 상대로 1302년에 전쟁을 시작했다.[1] 1303년에는 포를리의 소유권을 두고 포데스타 풀치에리 다 칼볼리와 다툼을 벌여 칼볼리가를 도시에서 추방시켰다.[2] 그 후 스카르페타는 베르티노로를 정복했다. 스카르페타의 형제 프란체스코 1세 오르델라피는 형의 뒤를 이어 포를리를 다스렸으며, 체세나와 리미니를 통치하던 구엘프 세력 가문인 말라테스타 가에 맞서 몬테펠트로 가와 동맹을 맺었다.
프란체스코 1세 오르델라피의 조카 프란체스코 2세 오르델라피는 1356년에 알보르노스 추기경이 로마냐의 교황 대리인으로 재임명되며 세력을 잃었다. 프란체스코 2세는 파엔차, 체세나, 1357년에는 베르티노로를 상실하였다. 대용병단을 고용하려했으나, 알보르노스가 먼저 고용하여 패배한 프란체스코 2세는 포를리에서 추방당하고 카스트로카로와 포를리폼폴리만을 유지하였다.[3]
1376년 시니발도 1세 오르델라피가 포를리와 그 일대를 재정복했으나 조카 피노 1세 오르델라피에게 독살당했고, 피노 1세도 1399년에 포를리를 얻길 원하던 시니발도의 아들 조반니에게 독살당했다. 이후 오르델라피 가는 쇠퇴하기 시작하여 피노의 후계자들도 몇 년밖에 통치하지 못했다. 테오발도 2세 오르델라피 사망 후 1425년에 포를리는 가톨릭 교회 교구의 소유로 넘어갔다. 1433년 안토니오 오르델라피가 시뇨리아 지위를 복위했지만 교황 식스토 4세에 의해 추방당한다. 1503년에 체사레 보르자와 그의 가문이 교황령에서 세력을 잃자 안토니오 마리아 오르델라피가 다시 한번 포를리를 되찾으나 1년 만에 안토니오 마리아가 아들을 두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오르델라피 가는 단절되었다.
2. 1. 기원 및 초기
오르델라피 가문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으며, 가문에서는 889년 베렌가리오 1세 휘하의 게르만 병사 '로르 데 라피아'(Lor de Laffia)의 혈통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포를리의 관리자로 임명되어 자유 코무네로서 통치하기 시작했다. 910년 로르 데 라피아는 포를리 장악을 시도했으나, 라벤나로 추방당했다. 그의 후계자들은 "로르델라피"(Lordelaffi), "오르델라프"(Ordelaf)라고 불리다가 마침내 "오르델라피"(Ordelaffi)가 되었다.2. 2. 로마냐 계
오르델라피 가문의 기원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가문에서는 889년 베렌가리오 1세 휘하의 게르만족 병사 '로르 데 라피아'(Lor de Laffia)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포를리의 관리자로 임명되어 자유 코무네로 통치하기 시작했다. 910년 로르 데 라피아는 포를리 장악을 시도했으나 라벤나로 추방되었다. 그의 후계자들은 "로르델라피"(Lordelaffi), "오르델라프"(Ordelaf) 등으로 불리다가 마침내 "오르델라피"(Ordelaffi)로 굳어졌다.[1]2. 3. 베네치아 계 (팔리에로 가)
로르 데 라피아의 또 다른 후손들은 베네치아 공화국으로 이주하여, 그들의 성을 "오르델라프"(Ordelaf)를 거꾸로 뒤집어 '''팔리에로'''(Faliero) 또는 '''팔레드로'''(Faledro)로 바꿨다.[4] 베네치아에서 팔리에로 계는 강력한 세력이 되었고 12세기 초에 비탈레 팔리에로 (1084년–1095년), 오르델라포 팔리에로 (1102년–1117년) 등 두 명의 도제를 배출해내기도 했다.[5]
1211년 팔리에로 가는 다른 지중해 국가들과의 수익성있는 교역을 시작하기 위해 칸디아 공국에 정착한 최초의 베네치아 정착자들이기도 하다.
도제 마리노 팔리에로가 쿠데타를 일으켜 군주제를 세우려 했다가 실패하고 참수를 당한 1355년에 가문의 쇠퇴가 시작되었다.[6] 또한 뛰어난 팔리에로 가 일원이 있더라도 그들은 다시는 도제에 선출되지 못했고 14세기 말에는 가문이 몰락하였다.
참조
[1]
웹인용
Ordelaffi, Scarpetta
http://www.treccani.[...]
Treccani
2013
[2]
서적
Cronica delle cose occorrenti ne' tempi suoi
1726
[3]
웹인용
Ordelaffi, Francesco di Sinibaldo
http://www.treccani.[...]
Treccani
2013
[4]
서적
Storia del Friuli
Bordandini
1826
[5]
웹인용
Falier, Vitale
http://www.treccani.[...]
Treccani
1994
[6]
서적
Curiosità Veneziane
Filippi Editore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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