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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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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디치 가문은 13세기 이탈리아 무젤로 지역에서 기원하여 약업, 모직물 교역, 은행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가문이다. 14세기 피렌체에서 메디치 은행을 설립하며 성장했고, 15세기에는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의 은행업 성공을 바탕으로 코시모 데 메디치 시기에 피렌체 공화국의 실권을 장악하며 황금기를 맞았다. 예술과 문화를 후원하며 르네상스 시대를 이끌었으나, 로렌초 데 메디치 사후 은행의 몰락과 프랑스 침공으로 추방당했다. 이후 교황 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를 배출하며 권력을 회복했으나, 16세기 후반부터 쇠퇴하여 18세기 안나 마리아 루이자 데 메디치의 사망과 함께 대가 끊겼다. 메디치 가문은 예술 후원과 주요 인물 배출을 통해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가문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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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가 - [인물]에 관한 문서
메디치 가문 정보
메디치 가문의 문장
메디치 가문의 문장, 문장 설명: 금색 바탕에 붉은색 공 다섯 개가 원형으로 배열되어 있고, 상단에는 프랑스 왕가의 문장인 푸른색 바탕에 금색 백합 세 개가 추가됨
가문 유형이탈리아 귀족 가문
국적피렌체 공화국
토스카나 대공국
교황령
우르비노 공국
어원포트로네의 영주 메디코에서 유래, 가문의 시조로 여겨짐
기원무젤로, 투스카 (현재의 토스카나)
설립일1230년
설립자잠부오노 데 메디치
해산일1743년 (본가)
분가14개의 분가, 현재 2개 분가만 존재
데 메디치 오타야노
데 메디치 토르나퀸치
마지막 통치자잔 가스토네 데 메디치
마지막 가주안나 마리아 루이자 데 메디치
작위교황 (세습되지 않음)
토스카나 대공
피렌체 공작
피렌체 영주 (비공식)
우르비노 공작
느무르 공작
오타야노 공작
프랑스 왕비
주요 가문 구성원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
코시모 데 메디치
로렌초 데 메디치
교황 레오 10세
교황 클레멘스 7세
교황 레오 11세
카트린 드 메디시
코시모 1세 데 메디치
마리 드 메디시
훈장성 스테파노 기사단
종교가톨릭교
가훈Festina lente
가훈 (라틴어)서두르되 천천히
가문의 유산
가문의 유물메디치 은행 (1397~1494)
토스카나 대공관
메디치 꽃병
메디치 도자기
가문의 부동산베키오 궁전
피티 궁전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
토스카나의 여러 빌라
기타 정보
로마자 표기법 (영어)MED-itch-ee
로마자 표기법 (영국식)mə-DEE-chee
로마자 표기법 (이탈리아어)ˈmɛːditʃi

2. 역사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 북쪽의 농업 지대인 무젤로[8] 출신으로, 1230년 문서에 처음 언급되었다.[9] 가문 이름의 기원은 불확실하다. ''Medici''는 "의사"를 뜻하는 ''medico''의 복수형이다.[10] 이 가문은 1397년 피렌체에 메디치 은행을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

### 가문의 기원과 성장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 북쪽의 농업 지방인 무겔로 출신으로, 1230년대 문헌에서 처음으로 기록되었다.[80] 메디치가의 이름은 '약사(藥師)'를 의미하는 '메디코(medico)'에서 유래했으며, 가문의 문장은 정제(錠劑) 혹은 환전상의 저울추를 나타내는 붉은 공을 배치한 형태이다.[80] 이들은 약업(藥業)으로 재산을 모은 후, 14세기 초에는 모직물 교역으로, 이후에는 은행업으로 발전하여 부를 축적했다.[80]

13세기 대부분 동안 이탈리아의 주요 은행 중심지는 시에나였으나, 1298년 본시뇨리 가문이 파산하면서 피렌체가 그 지위를 넘겨받았다.[11] 14세기 후반까지 피렌체의 주요 가문은 알비치 가였다.[11] 1293년에는 정의 칙령이 제정되어 피렌체 공화국의 헌법 역할을 했다.[12]

14세기 초, 메디치 일족들은 프랑스스페인과의 모직물 교역으로 성장했다. 도시 정부에 일부 구성원들이 참여했지만, 알비치나 스트로치 가문보다는 중요성이 떨어졌다.[16] 살베스트로 데 메디치는 치옴피의 난 동안 모직물 제작자 조합의 의장직을 맡았고, 1396년 안토니오라는 사람은 사형을 선고받았다.[16] 1400년에는 메디치 일가가 음모에 연루되어, 두 명을 제외하고 20년 동안 피렌체의 정치에서 추방되었다.[16] 이 둘 중 한 명인 아베라르도(비치) 데 메디치는 훗날 메디치 왕조 시대를 열었다.

아베라르도의 아들 조반니 디 비치는 메디치 은행을 설립하여 가문의 재산을 늘렸고, 피렌체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이 되었다.[14] 그는 가문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으며, 이후 메디치 가문은 그의 장남 국부 코시모 계통과 차남 대 로렌초 계통으로 나뉜다.[14] 1434년, 조반니 디 비치의 장남 코시모 데 메디치가 그란 마에스트로(비공식적인 국가원수)의 자리를 인계받아 피렌체 공화국의 실권자가 되었다.

메디치 가문의 창시자,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


코시모와 그의 아버지는 은행업과 제조업에 기반을 둔 가문의 재산으로 예술과 문화, 교회를 후원하며 가문의 출세 기반을 다졌다. 피렌체 시민들의 절반이 메디치 가문의 경영 지점에 고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금융에서의 업적

메디치 은행은 유럽을 통틀어 가장 부유하고 훌륭한 은행이었으며, 그 덕분에 한동안 메디치 가문은 유럽에서 가장 유복한 가문으로 평가받았다. 메디치가는 이를 토대로 피렌체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획득하였으며, 이 영향력은 나중에 이탈리아 전역과 유럽에까지 확대되었다. 회계 전문직에서 그들은 신용과 차변을 추적하기 위한 복식부기 체제의 개선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이 체제는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을 위해 일하는 회계사들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메디치 가문은 조반니 디 비치(1360년 ~ 1429년) 시대에 은행업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메디치 은행은 로마베네치아로 지점망을 확장했고, 1410년에는 로마 교황청 회계원의 재무 관리자가 되어 교황청의 금융 업무에서 우위를 점하고 막대한 수익을 얻는 데 성공했다. 이는 교회 분열(시스마)이 계속되는 기독교계의 대립에 개입하여, 추문에 휩싸인 인물인 발다사레 코사를 지원하여 대립교황 요하네스 23세로 즉위시킨 결과였다. 1422년, 로마 교황 마르티누스 5세는 몬테 베르데 백작 작위를 수여하려 했지만, 조반니는 정치적인 고려로 사양하고 시민의 신분으로 남았다.

### 15세기: 피렌체의 황금기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년)는 도시를 이끌고 통치하는 데 능숙하여, 사후 “위대한 로렌초”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는 가문의 성공을 지속하기 위해 자녀들의 미래 직업을 계획했다.[20] 그는 고집 센 피에로 2세를 그의 후계자로 키웠고, 조반니(미래의 교황 레오 10세)는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들어갔으며[21], 그의 딸 마달레나에게는 정치적으로 유리한 결혼을 위해 호화로운 지참금을 제공하여 메디치 가문과 치보(Cybo) 가문 및 알토비티 가문(House of Altoviti)의 로마 지파 간의 동맹을 굳혔다.[22]

1478년 파치 음모는 부활절 예배 중 로렌초와 그의 동생 줄리아노를 살해하여 메디치 가문을 축출하려는 시도였다. 이 암살 시도는 줄리아노의 죽음과 로렌초의 부상으로 끝났다. 이 음모에는 파치(Pazzi) 가문과 살비아티 가문(Salviati (bankers)) 가문뿐만 아니라 피사 대주교 심지어 어느 정도 시스투스 4세까지도 연루되어 있었다. 음모자들은 시스투스 4세의 승인을 얻기를 바랐지만, 교황은 공식적인 승인을 하지 않았다. 공식적인 승인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로렌초의 암살 시도 실패 후에도 교회를 위해 저지른 범죄에 대한 면죄부(Dispensation (Catholic Church))를 부여했다. 그 후 로렌초는 동생의 사생아인 줄리오 데 메디치(1478~1535년, 미래의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입양했다.[23]

로렌초의 아들 피에로 2세는 로렌초의 죽음 후 피렌체의 수장이 되었다. 메디치 가문은 피에로가 침략자 샤를 8세의 모든 요구를 받아들인 후 1494년부터 1512년까지 피렌체에서 추방되었다.[23]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 로렌초 데 메디치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는 도시를 이끌고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사후 “위대한 로렌초”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는 자녀들에게 많은 사랑과 관심을 쏟았으며, 자신의 성공적인 도시경영을 지속하기 위해 자녀들의 능력을 파악하고 미래와 직업을 설계하였다. 1478년 4월 26일 부활절피렌체 대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던 로렌초의 동생 줄리아노는 암살당한다. 로렌초는 죽은 줄리아노의 사생아 줄리오 데 메디치(1478-1535)를 자신의 아들로 입적한후 양육하였다. 줄리오는 훗날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된다.[23] 로렌초가 죽자 능력 없는 그의 아들 피에로 2세가 피렌체의 통치권을 물려받았는데, 피에로는 1494년에서 1512년 동안 메디치가 피렌체에서 추방당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위대한"이라는 별명을 가진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년)는 도시를 이끌고 통치하는 데 더 능숙했지만, 가문의 은행 사업을 방치하여 결국 몰락으로 이어졌다.[20] 로렌초는 가문의 성공을 지속하기 위해 자녀들의 미래 직업을 계획했다.[20] 그는 고집 센 피에로 2세를 그의 후계자로 키웠고; 조반니(미래의 교황 레오 10세)는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들어갔으며[21]; 그의 딸 마달레나에게는 정치적으로 유리한 결혼을 위해 호화로운 지참금을 제공하여 메디치 가문과 치보(Cybo) 가문 및 알토비티 가문(House of Altoviti)의 로마 지파 간의 동맹을 굳혔다.[22]

1478년파치 음모는 부활절 예배 중 로렌초와 그의 동생 줄리아노를 살해하여 메디치 가문을 축출하려는 시도였다. 이 암살 시도는 줄리아노의 죽음과 로렌초의 부상으로 끝났다. 이 음모에는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을 종식시키려는 경쟁 은행 가문인 파치(Pazzi) 가문과 살비아티 가문(Salviati (bankers)) 가문뿐만 아니라 예배당 예배를 집전한 사제인 피사 대주교 심지어 어느 정도 시스투스 4세까지도 연루되어 있었다. 음모자들은 메디치 가문과 오랜 라이벌 관계를 맺고 있던 시스투스 4세의 승인을 얻기를 바랐지만, 교황은 이 계획에 공식적인 승인을 하지 않았다. 공식적인 승인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로렌초의 암살 시도 실패 후에도 교회를 위해 저지른 범죄에 대한 면죄부를 부여했다. 그 후 로렌초는 동생의 사생아인 줄리오 데 메디치(1478~1535년, 미래의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입양했다.[23] 로렌초의 아들 피에로 2세는 로렌초의 죽음 후 피렌체의 수장이 되었다. 메디치 가문은 피에로가 침략자 샤를 8세의 모든 요구를 받아들인 후 1494년부터 1512년까지 피렌체에서 추방되었다.[23]

### 파치 음모 사건

파치 음모는 파치 가문이 주도하여 피렌체의 통치자로 군림하던 메디치 가문을 전복시키고 정권을 잡기 위해 벌인 사건이다. 1478년 4월 26일 피렌체 대성당에서 미사를 들이고 있는 메디치 가문의 형제 2명에 대한 살해를 감행하였다. 형 로렌초는 부상을 입었지만 탈출에 성공하여 살아남았으나 동생 줄리아노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암살과 동시에 프렌체스코 살비아티페루자에서 데려온 용병들을 이용해 시뇨리아 궁으로 쳐들어가서 정부를 전복시키고 장악하려 했으나 이것마저 실패하고 말았다.[81]

정권탈취를 위한 쿠테타는 실패로 끝났고 파치가문의 프란체스코를 포함한 주동자 5명등 공모자들의 대부분은 곧 체포되어 성난 군중에 의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파치 가문의 수장인 야코포는 탈출에 성공했지만 곧 잡혀 송환된후 화형에 처해졌다. 파치 가문 일족들은 피렌체에서 추방당했고, 그들의 재산은 모두 몰수당하였다. 파치 가문의 명칭과 문장들은 영구적으로 사용금지 조치를 당했으며 가문 이름이 공공장소에서 지워졌다.[81]

메디치 가문과 적대관계에 있던 교황 식스토 4세(재위 1471~84)는 이번 반란을 간접적으로 지원하였다. 재위기간 내내 교황령과 자기 가문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는데 관심이 많았던 교황은 메디치 가문을 피렌체에서 몰아낸후 피렌체를 교황령에 포함시키려고 하였다. 주모자중에 한 사람인 프렌체스코 살비아티 추기경(피사 대주교)이 효수당하자 교황은 이에 격노하였고 피렌체 전체를 파문하고 피렌체와 1478년에서 1480년까지 2년간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81]

1478년의 파치 음모는 부활절 예배 중 로렌초와 그의 동생 줄리아노를 살해하여 메디치 가문을 축출하려는 시도였다. 이 암살 시도는 줄리아노의 죽음과 로렌초의 부상으로 끝났다. 이 음모에는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을 종식시키려는 경쟁 은행 가문인 파치(Pazzi) 가문과 살비아티 가문(Salviati (bankers)) 가문뿐만 아니라 예배당 예배를 집전한 사제인 피사 대주교 심지어 어느 정도 식스토 4세까지도 연루되어 있었다. 음모자들은 메디치 가문과 오랜 라이벌 관계를 맺고 있던 식스토 4세의 승인을 얻기를 바랐지만, 교황은 이 계획에 공식적인 승인을 하지 않았다. 공식적인 승인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로렌초의 암살 시도 실패 후에도 교회를 위해 저지른 범죄에 대한 면죄부(Dispensation (Catholic Church))를 부여했다. 그 후 로렌초는 동생의 사생아인 줄리오 데 메디치(Giulio de' Medici, 1478~1535년, 미래의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입양했다. 로렌초의 아들 피에로 2세는 로렌초의 죽음 후 피렌체의 수장이 되었다. 메디치 가문은 피에로가 침략자 샤를 8세의 모든 요구를 받아들인 후 1494년부터 1512년까지 피렌체에서 추방되었다.[23]

### 메디치 은행의 몰락

로렌초 데 메디치는 뛰어난 외교관이자 정치인이었지만, 경영에는 무능했다. 그는 기업과 금융에 문외한이었고, 재무제표조차 이해하지 못했다.[84] 전문 경영인에게 운영을 위임하고,[85] 자신은 문화예술 후원과 정치 활동에 몰두하면서 사업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결과, 메디치 은행은 로렌초의 재임 기간 동안 급격히 쇠퇴했다. 1472년 런던 지점, 1478년 밀라노 지점, 1480년 브뤼제 지점, 1481년 베네치아 지점이 차례로 문을 닫았다.[86] 은행들이 계속 도산하는 상황에서도 로렌초는 이를 막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예술 분야에 막대한 금액을 계속해서 쏟아부었다.

1472년에 부도난 런던 지점은 잉글랜드 에드워드 4세에게 거액을 빌려주었다가 돌려받지 못해 파산했다.[88] 이는 '국왕이나 귀족에게 돈을 빌려줄 때는 주의하라'는 선대의 가르침을 어긴 결과였다.[88] 잉글랜드가 양모 수출을 금지하면서 가업인 모직물업이 어려워지자, 잉글랜드산 양모를 수입하기 위해 에드워드 4세에게 접근했고, 에드워드 4세는 양모 거래를 조건으로 대출을 요구했다. 메디치 은행은 이를 거절하지 못하고 응했다가 결국 돈을 떼이게 된 것이다.[89]

결국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가 창업한 메디치 은행은 유럽 전역에 16개의 지점을 가졌었지만, 로렌초 대에 이르러 15개가 도산하고, 1492년 그가 사망할 당시에는 피렌체 본점만 남게 되었다. 금고가 바닥나자 로렌초는 피렌체 정부의 공금에 손을 대기도 했다.[87] 마지막 남은 피렌체 본점마저도 로렌초 사후 2년 뒤인 1494년에 도산했다. 가업을 물려받은 지 25년 만에 완전히 파산한 것이다. 메디치 은행의 파산은 곧 피렌체의 르네상스 쇠퇴로 이어졌고, 예술가들은 하나둘씩 피렌체를 떠나기 시작했다.

### 메디치 가문의 추방

1494년 프랑스 국왕 샤를 8세(1470~1498)가 나폴리 왕국 정복을 목적으로 이탈리아 원정을 실시했다. 프랑스군이 10월에 피렌체를 침공하자 피에로 데 메디치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이에 대해 사보나롤라가 시민들을 선동하여 봉기가 일어났고 메디치 가문을 국외로 추방하였다.[19] 메디치 가문의 일원들은 해외를 떠돌아 다니면서 18년간 망명생활을 하였다. 피에로는 베네치아우르비노 등지로 피신다니다가 사고로 익사하였고, 조반니는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등지를 떠돌아다니다가 1500년에 로마로 귀국하여 성직자로 복무하였다.

로렌초가 43세의 나이로 병사하자 장남인 피에로가 가문을 계승했지만, 1494년 샤를 8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의 침공에 대한 대응을 잘못하여(제1차 이탈리아 전쟁)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에서 추방되었고, 메디치 은행/Banco dei Mediciit도 파산했다. 이러한 실책으로 피에로는 "피에로 일 파투오"(어리석은 피에로)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피에로는 체사레 보르자의 군대와 함께 행동했지만, 1503년에 익사했다. 이 때문에 "피에로 로 스포르투나토"(불운한 피에로)라고도 불린다.

피에로의 죽음으로 메디치 가문의 당주는 그의 동생이자 추기경인 조반니(추기경)(로렌초의 차남)에게 계승되었다. 1512년, 조반니를 중심으로 한 메디치 가문은 합스부르크 가의 지원을 받아 스페인 군대와 함께 피렌체로 돌아와 지배권을 재확립했다. 1513년, 조반니는 교황 레오 10세로 즉위했고(재위: 1513년 - 1521년),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와 교황령을 지배하는 명문가가 되었다. 레오 10세는 예술을 사랑했고, 로마를 중심으로 르네상스 문화의 전성기를 가져왔지만, 막대한 낭비를 계속하여 교황청 재정을 압박했고, 산 피에트로 대성당 건설을 위한 명목으로 대규모 면죄부 판매를 허용함으로써 1517년 마르틴 루터종교 개혁 운동의 계기를 만들었다. 1516년 레오 10세가 우르비노 공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 델라 로베레를 파문한 것을 계기로 우르비노 전쟁이 발발했지만, 레오 10세가 발탁한 조반니 델레 반데 네레(후의 흑기병 조반니)에 의해 진압되었다.

조반니 데 메디치(교황 레오 10세)


조반니 델레 반데 네레


레오 10세는 1521년에 사망했지만, 2년 후 사촌인 율리오 추기경이 교황 클레멘스 7세(재위: 1523년 - 1534년)로 즉위한다. 클레멘스 7세는 당시 복잡한 정치 상황 속에서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152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스페인 왕 카를 5세의 보복을 받아 로마 약탈이라는 큰 재앙을 맞게 된다. 동시에 메디치 가문도 다시 피렌체에서 추방되었지만, 1530년 클레멘스 7세와 황제 카를 5세가 화해했기 때문에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로 돌아와 복권한다. 1532년, 클레멘스 7세의 사생아인 알레산드로가 피렌체 공이 되면서 메디치 가문은 마침내 정식으로 군주가 되었다.

율리오 데 메디치(교황 클레멘스 7세)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


### 16세기: 권력 회복과 토스카나 대공국

1508년 교황 율리오 2세가 주도한 캉브레 동맹 전쟁(1508~1516)이 장기화되면서, 전쟁 초기 목적이었던 베네치아의 세력 약화는 성공했지만, 동맹국인 프랑스의 영향력이 커졌다. 이에 교황은 1510년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몰아내려 했다. 프랑스는 성무정지 조치에 반발, 1511년 11월 피렌체피사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여 교황 폐위를 추진했다. 캉브레 동맹전쟁 중 중립을 지키던 피렌체가 이를 수용하자 교황은 분노했다.

조반니 데 메디치(추기경)(이하 조반니 추기경)은 교황군 특사로 임명되어 라벤나 전투(1512년 4월)에 참전했다. 승리하면 피렌체 통치권을 회복해도 좋다는 약속을 받은 후였다. 교황은 피렌체 공화국에 대한 복수를, 조반니 추기경은 메디치 가문의 통치권 회복이라는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그러나 연합군이 패배하며 조반니 추기경은 포로가 되었다. 다행히 프랑스 지휘관 가스통 드 푸아가 전사하며 프랑스군도 타격을 입었고, 이후 패배하여 북이탈리아에서 퇴각했다. 조반니 추기경은 탈출에 성공했다.

1512년 8월, 동맹국들은 만토바에서 피렌체 응징을 결의했다. 교황은 조반니 추기경을 교황군 특사로 임명, 라몬 데 카르도나가 이끄는 스페인 군과 함께 피렌체 정복을 명했다. 신성동맹군(교황령+스페인) 내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반니 추기경은 직접 대포와 식량을 보강하여 1512년 8월 하순 프라토에 도착했다. 프라토는 피렌체의 관문으로, 함락되면 반나절 만에 피렌체에 타격을 줄 수 있는 곳이었다.[90]

조반니 추기경의 항복 권고를 피렌체 종신 총리(總理) 피에르 소데리니는 거부했다. 마키아벨리가 양성한 9,000명의 국민군이 있었고, 요새도 보강했기에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8월 29일 전투에서, 경험 부족한 피렌체 국민군은 노련한 신성동맹군 용병들에게 상대가 되지 못했다.[91][92][93]

오후 6시경 프라토는 함락되었고, 스페인 용병들은 도시를 약탈, 파괴, 방화, 강간했다.[94] 조반니 추기경은 교회에 프라토 부녀자들을 도피시키고 교황군을 동원해 경비를 서야 할 정도였다.[95] 최소 3,000명에서 6,000명 정도의 시민들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스페인군은 21일 동안 약탈을 자행했는데,[94] 이는 피렌체 시민들에게 공포심을 안겨주기 위한 것이었다.

프라토 함락 소식에 피렌체는 공포에 휩싸였고, 시뇨리아 광장에서는 메디치 가(家) 지지자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조반니 추기경의 항복 종용 서신이 도착하자, 소데리니는 망명길에 올랐다. 9월 1일, 조반니 추기경은 1,500명의 군인을 이끌고 피렌체에 입성, 18년 만에 메디치 가문의 통치권을 회복했다.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1526년에 반 황제 방위동맹인 코냑동맹을 결성한후 황제 카를 5세의 세력을 이탈리아에서 축출하려고 코냑동맹전쟁을 일으켰다. 전쟁 초반에는 동맹군이 기세를 잡아나가는듯 했으나 이내 제국군의 반격에 맥을 못추게 되었다. 1527년 5월 6일에 신성 로마 제국의 군대에 의해 교황이 있는 로마가 정복당하자 교황은 즉시 항복하였다. 교황이 패배하자 피렌체에서는 반란이 일어나 메디치 가문이 15년만에 다시 추방을 당하였다. 가문의 구심점이 되어온 교황의 힘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1

2. 1. 가문의 기원과 성장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 북쪽의 농업 지방인 무겔로 출신으로, 1230년대 문헌에서 처음으로 기록되었다.[80] 메디치가의 이름은 '약사(藥師)'를 의미하는 '메디코(medico)'에서 유래했으며, 가문의 문장은 정제(錠劑) 혹은 환전상의 저울추를 나타내는 붉은 공을 배치한 형태이다.[80] 이들은 약업(藥業)으로 재산을 모은 후, 14세기 초에는 모직물 교역으로, 이후에는 은행업으로 발전하여 부를 축적했다.[80]

13세기 대부분 동안 이탈리아의 주요 은행 중심지는 시에나였으나, 1298년 본시뇨리 가문이 파산하면서 피렌체가 그 지위를 넘겨받았다.[11] 14세기 후반까지 피렌체의 주요 가문은 알비치 가였다.[11] 1293년에는 정의 칙령이 제정되어 피렌체 공화국의 헌법 역할을 했다.[12]

14세기 초, 메디치 일족들은 프랑스스페인과의 모직물 교역으로 성장했다. 도시 정부에 일부 구성원들이 참여했지만, 알비치나 스트로치 가문보다는 중요성이 떨어졌다.[16] 살베스트로 데 메디치는 치옴피의 난 동안 모직물 제작자 조합의 의장직을 맡았고, 1396년 안토니오라는 사람은 사형을 선고받았다.[16] 1400년에는 메디치 일가가 음모에 연루되어, 두 명을 제외하고 20년 동안 피렌체의 정치에서 추방되었다.[16] 이 둘 중 한 명인 아베라르도(비치) 데 메디치는 훗날 메디치 왕조 시대를 열었다.

아베라르도의 아들 조반니 디 비치는 메디치 은행을 설립하여 가문의 재산을 늘렸고, 피렌체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이 되었다.[14] 그는 가문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으며, 이후 메디치 가문은 그의 장남 국부 코시모 계통과 차남 대 로렌초 계통으로 나뉜다.[14] 1434년, 조반니 디 비치의 장남 코시모 데 메디치가 그란 마에스트로(비공식적인 국가원수)의 자리를 인계받아 피렌체 공화국의 실권자가 되었다.

코시모와 그의 아버지는 은행업과 제조업에 기반을 둔 가문의 재산으로 예술과 문화, 교회를 후원하며 가문의 출세 기반을 다졌다. 피렌체 시민들의 절반이 메디치 가문의 경영 지점에 고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2. 금융에서의 업적

메디치 은행은 유럽을 통틀어 가장 부유하고 훌륭한 은행이었으며, 그 덕분에 한동안 메디치 가문은 유럽에서 가장 유복한 가문으로 평가받았다. 메디치가는 이를 토대로 피렌체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획득하였으며, 이 영향력은 나중에 이탈리아 전역과 유럽에까지 확대되었다. 회계 전문직에서 그들은 신용과 차변을 추적하기 위한 복식부기 체제의 개선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이 체제는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을 위해 일하는 회계사들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메디치 가문은 조반니 디 비치(1360년 ~ 1429년) 시대에 은행업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메디치 은행은 로마베네치아로 지점망을 확장했고, 1410년에는 로마 교황청 회계원의 재무 관리자가 되어 교황청의 금융 업무에서 우위를 점하고 막대한 수익을 얻는 데 성공했다. 이는 교회 분열(시스마)이 계속되는 기독교계의 대립에 개입하여, 추문에 휩싸인 인물인 발다사레 코사를 지원하여 대립교황 요하네스 23세로 즉위시킨 결과였다. 1422년, 로마 교황 마르티누스 5세는 몬테 베르데 백작 작위를 수여하려 했지만, 조반니는 정치적인 고려로 사양하고 시민의 신분으로 남았다.

2. 3. 15세기: 피렌체의 황금기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년)는 도시를 이끌고 통치하는 데 능숙하여, 사후 “위대한 로렌초”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는 가문의 성공을 지속하기 위해 자녀들의 미래 직업을 계획했다.[20] 그는 고집 센 피에로 2세를 그의 후계자로 키웠고, 조반니(미래의 교황 레오 10세)는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들어갔으며[21], 그의 딸 마달레나에게는 정치적으로 유리한 결혼을 위해 호화로운 지참금을 제공하여 메디치 가문과 치보(Cybo) 가문 및 알토비티 가문(House of Altoviti)의 로마 지파 간의 동맹을 굳혔다.[22]

1478년 파치 음모는 부활절 예배 중 로렌초와 그의 동생 줄리아노를 살해하여 메디치 가문을 축출하려는 시도였다. 이 암살 시도는 줄리아노의 죽음과 로렌초의 부상으로 끝났다. 이 음모에는 파치(Pazzi) 가문과 살비아티 가문(Salviati (bankers)) 가문뿐만 아니라 피사 대주교 심지어 어느 정도 시스투스 4세까지도 연루되어 있었다. 음모자들은 시스투스 4세의 승인을 얻기를 바랐지만, 교황은 공식적인 승인을 하지 않았다. 공식적인 승인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로렌초의 암살 시도 실패 후에도 교회를 위해 저지른 범죄에 대한 면죄부(Dispensation (Catholic Church))를 부여했다. 그 후 로렌초는 동생의 사생아인 줄리오 데 메디치(1478~1535년, 미래의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입양했다.[23]

로렌초의 아들 피에로 2세는 로렌초의 죽음 후 피렌체의 수장이 되었다. 메디치 가문은 피에로가 침략자 샤를 8세의 모든 요구를 받아들인 후 1494년부터 1512년까지 피렌체에서 추방되었다.[23]

2. 3. 1. 로렌초 데 메디치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는 도시를 이끌고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사후 “위대한 로렌초”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는 자녀들에게 많은 사랑과 관심을 쏟았으며, 자신의 성공적인 도시경영을 지속하기 위해 자녀들의 능력을 파악하고 미래와 직업을 설계하였다. 1478년 4월 26일 부활절피렌체 대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던 로렌초의 동생 줄리아노는 암살당한다. 로렌초는 죽은 줄리아노의 사생아 줄리오 데 메디치(1478-1535)를 자신의 아들로 입적한후 양육하였다. 줄리오는 훗날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된다.[23] 로렌초가 죽자 능력 없는 그의 아들 피에로 2세가 피렌체의 통치권을 물려받았는데, 피에로는 1494년에서 1512년 동안 메디치가 피렌체에서 추방당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위대한"이라는 별명을 가진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년)는 도시를 이끌고 통치하는 데 더 능숙했지만, 가문의 은행 사업을 방치하여 결국 몰락으로 이어졌다.[20] 로렌초는 가문의 성공을 지속하기 위해 자녀들의 미래 직업을 계획했다.[20] 그는 고집 센 피에로 2세를 그의 후계자로 키웠고; 조반니(미래의 교황 레오 10세)는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들어갔으며[21]; 그의 딸 마달레나에게는 정치적으로 유리한 결혼을 위해 호화로운 지참금을 제공하여 메디치 가문과 치보(Cybo) 가문 및 알토비티 가문(House of Altoviti)의 로마 지파 간의 동맹을 굳혔다.[22]

1478년파치 음모는 부활절 예배 중 로렌초와 그의 동생 줄리아노를 살해하여 메디치 가문을 축출하려는 시도였다. 이 암살 시도는 줄리아노의 죽음과 로렌초의 부상으로 끝났다. 이 음모에는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을 종식시키려는 경쟁 은행 가문인 파치(Pazzi) 가문과 살비아티 가문(Salviati (bankers)) 가문뿐만 아니라 예배당 예배를 집전한 사제인 피사 대주교 심지어 어느 정도 시스투스 4세까지도 연루되어 있었다. 음모자들은 메디치 가문과 오랜 라이벌 관계를 맺고 있던 시스투스 4세의 승인을 얻기를 바랐지만, 교황은 이 계획에 공식적인 승인을 하지 않았다. 공식적인 승인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로렌초의 암살 시도 실패 후에도 교회를 위해 저지른 범죄에 대한 면죄부를 부여했다. 그 후 로렌초는 동생의 사생아인 줄리오 데 메디치(1478~1535년, 미래의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입양했다.[23] 로렌초의 아들 피에로 2세는 로렌초의 죽음 후 피렌체의 수장이 되었다. 메디치 가문은 피에로가 침략자 샤를 8세의 모든 요구를 받아들인 후 1494년부터 1512년까지 피렌체에서 추방되었다.[23]

2. 3. 2. 파치 음모 사건

파치 음모는 파치 가문이 주도하여 피렌체의 통치자로 군림하던 메디치 가문을 전복시키고 정권을 잡기 위해 벌인 사건이다. 1478년 4월 26일 피렌체 대성당에서 미사를 들이고 있는 메디치 가문의 형제 2명에 대한 살해를 감행하였다. 형 로렌초는 부상을 입었지만 탈출에 성공하여 살아남았으나 동생 줄리아노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암살과 동시에 프렌체스코 살비아티페루자에서 데려온 용병들을 이용해 시뇨리아 궁으로 쳐들어가서 정부를 전복시키고 장악하려 했으나 이것마저 실패하고 말았다.[81]

정권탈취를 위한 쿠테타는 실패로 끝났고 파치가문의 프란체스코를 포함한 주동자 5명등 공모자들의 대부분은 곧 체포되어 성난 군중에 의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파치 가문의 수장인 야코포는 탈출에 성공했지만 곧 잡혀 송환된후 화형에 처해졌다. 파치 가문 일족들은 피렌체에서 추방당했고, 그들의 재산은 모두 몰수당하였다. 파치 가문의 명칭과 문장들은 영구적으로 사용금지 조치를 당했으며 가문 이름이 공공장소에서 지워졌다.[81]

메디치 가문과 적대관계에 있던 교황 식스토 4세(재위 1471~84)는 이번 반란을 간접적으로 지원하였다. 재위기간 내내 교황령과 자기 가문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는데 관심이 많았던 교황은 메디치 가문을 피렌체에서 몰아낸후 피렌체를 교황령에 포함시키려고 하였다. 주모자중에 한 사람인 프렌체스코 살비아티 추기경(피사 대주교)이 효수당하자 교황은 이에 격노하였고 피렌체 전체를 파문하고 피렌체와 1478년에서 1480년까지 2년간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81]

1478년의 파치 음모는 부활절 예배 중 로렌초와 그의 동생 줄리아노를 살해하여 메디치 가문을 축출하려는 시도였다. 이 암살 시도는 줄리아노의 죽음과 로렌초의 부상으로 끝났다. 이 음모에는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을 종식시키려는 경쟁 은행 가문인 파치(Pazzi) 가문과 살비아티 가문(Salviati (bankers)) 가문뿐만 아니라 예배당 예배를 집전한 사제인 피사 대주교 심지어 어느 정도 식스토 4세까지도 연루되어 있었다. 음모자들은 메디치 가문과 오랜 라이벌 관계를 맺고 있던 식스토 4세의 승인을 얻기를 바랐지만, 교황은 이 계획에 공식적인 승인을 하지 않았다. 공식적인 승인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로렌초의 암살 시도 실패 후에도 교회를 위해 저지른 범죄에 대한 면죄부(Dispensation (Catholic Church))를 부여했다. 그 후 로렌초는 동생의 사생아인 줄리오 데 메디치(Giulio de' Medici, 1478~1535년, 미래의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입양했다. 로렌초의 아들 피에로 2세는 로렌초의 죽음 후 피렌체의 수장이 되었다. 메디치 가문은 피에로가 침략자 샤를 8세의 모든 요구를 받아들인 후 1494년부터 1512년까지 피렌체에서 추방되었다.[23]

2. 3. 3. 메디치 은행의 몰락

로렌초 데 메디치는 뛰어난 외교관이자 정치인이었지만, 경영에는 무능했다. 그는 기업과 금융에 문외한이었고, 재무제표조차 이해하지 못했다.[84] 전문 경영인에게 운영을 위임하고,[85] 자신은 문화예술 후원과 정치 활동에 몰두하면서 사업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결과, 메디치 은행은 로렌초의 재임 기간 동안 급격히 쇠퇴했다. 1472년 런던 지점, 1478년 밀라노 지점, 1480년 브뤼제 지점, 1481년 베네치아 지점이 차례로 문을 닫았다.[86] 은행들이 계속 도산하는 상황에서도 로렌초는 이를 막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예술 분야에 막대한 금액을 계속해서 쏟아부었다.

1472년에 부도난 런던 지점은 잉글랜드 에드워드 4세에게 거액을 빌려주었다가 돌려받지 못해 파산했다.[88] 이는 '국왕이나 귀족에게 돈을 빌려줄 때는 주의하라'는 선대의 가르침을 어긴 결과였다.[88] 잉글랜드가 양모 수출을 금지하면서 가업인 모직물업이 어려워지자, 잉글랜드산 양모를 수입하기 위해 에드워드 4세에게 접근했고, 에드워드 4세는 양모 거래를 조건으로 대출을 요구했다. 메디치 은행은 이를 거절하지 못하고 응했다가 결국 돈을 떼이게 된 것이다.[89]

결국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가 창업한 메디치 은행은 유럽 전역에 16개의 지점을 가졌었지만, 로렌초 대에 이르러 15개가 도산하고, 1492년 그가 사망할 당시에는 피렌체 본점만 남게 되었다. 금고가 바닥나자 로렌초는 피렌체 정부의 공금에 손을 대기도 했다.[87] 마지막 남은 피렌체 본점마저도 로렌초 사후 2년 뒤인 1494년에 도산했다. 가업을 물려받은 지 25년 만에 완전히 파산한 것이다. 메디치 은행의 파산은 곧 피렌체의 르네상스 쇠퇴로 이어졌고, 예술가들은 하나둘씩 피렌체를 떠나기 시작했다.

2. 3. 4. 메디치 가문의 추방

1494년 프랑스 국왕 샤를 8세(1470~1498)가 나폴리 왕국 정복을 목적으로 이탈리아 원정을 실시했다. 프랑스군이 10월에 피렌체를 침공하자 피에로 데 메디치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이에 대해 사보나롤라가 시민들을 선동하여 봉기가 일어났고 메디치 가문을 국외로 추방하였다.[19] 메디치 가문의 일원들은 해외를 떠돌아 다니면서 18년간 망명생활을 하였다. 피에로는 베네치아우르비노 등지로 피신다니다가 사고로 익사하였고, 조반니는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등지를 떠돌아다니다가 1500년에 로마로 귀국하여 성직자로 복무하였다.

로렌초가 43세의 나이로 병사하자 장남인 피에로가 가문을 계승했지만, 1494년 샤를 8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의 침공에 대한 대응을 잘못하여(제1차 이탈리아 전쟁)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에서 추방되었고, 메디치 은행/Banco dei Mediciit도 파산했다. 이러한 실책으로 피에로는 "피에로 일 파투오"(어리석은 피에로)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피에로는 체사레 보르자의 군대와 함께 행동했지만, 1503년에 익사했다. 이 때문에 "피에로 로 스포르투나토"(불운한 피에로)라고도 불린다.

피에로의 죽음으로 메디치 가문의 당주는 그의 동생이자 추기경인 조반니(추기경)(로렌초의 차남)에게 계승되었다. 1512년, 조반니를 중심으로 한 메디치 가문은 합스부르크 가의 지원을 받아 스페인 군대와 함께 피렌체로 돌아와 지배권을 재확립했다. 1513년, 조반니는 교황 레오 10세로 즉위했고(재위: 1513년 - 1521년),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와 교황령을 지배하는 명문가가 되었다. 레오 10세는 예술을 사랑했고, 로마를 중심으로 르네상스 문화의 전성기를 가져왔지만, 막대한 낭비를 계속하여 교황청 재정을 압박했고, 산 피에트로 대성당 건설을 위한 명목으로 대규모 면죄부 판매를 허용함으로써 1517년 마르틴 루터종교 개혁 운동의 계기를 만들었다. 1516년 레오 10세가 우르비노 공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 델라 로베레를 파문한 것을 계기로 우르비노 전쟁이 발발했지만, 레오 10세가 발탁한 조반니 델레 반데 네레(후의 흑기병 조반니)에 의해 진압되었다.

레오 10세는 1521년에 사망했지만, 2년 후 사촌인 율리오 추기경이 교황 클레멘스 7세(재위: 1523년 - 1534년)로 즉위한다. 클레멘스 7세는 당시 복잡한 정치 상황 속에서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152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스페인 왕 카를 5세의 보복을 받아 로마 약탈이라는 큰 재앙을 맞게 된다. 동시에 메디치 가문도 다시 피렌체에서 추방되었지만, 1530년 클레멘스 7세와 황제 카를 5세가 화해했기 때문에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로 돌아와 복권한다. 1532년, 클레멘스 7세의 사생아인 알레산드로가 피렌체 공이 되면서 메디치 가문은 마침내 정식으로 군주가 되었다.

2. 4. 16세기: 권력 회복과 토스카나 대공국

1508년 교황 율리오 2세가 주도한 캉브레 동맹 전쟁(1508~1516)이 장기화되면서, 전쟁 초기 목적이었던 베네치아의 세력 약화는 성공했지만, 동맹국인 프랑스의 영향력이 커졌다. 이에 교황은 1510년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몰아내려 했다. 프랑스는 성무정지 조치에 반발, 1511년 11월 피렌체피사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여 교황 폐위를 추진했다. 캉브레 동맹전쟁 중 중립을 지키던 피렌체가 이를 수용하자 교황은 분노했다.

조반니 데 메디치(추기경)(이하 조반니 추기경)은 교황군 특사로 임명되어 라벤나 전투(1512년 4월)에 참전했다. 승리하면 피렌체 통치권을 회복해도 좋다는 약속을 받은 후였다. 교황은 피렌체 공화국에 대한 복수를, 조반니 추기경은 메디치 가문의 통치권 회복이라는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그러나 연합군이 패배하며 조반니 추기경은 포로가 되었다. 다행히 프랑스 지휘관 가스통 드 푸아가 전사하며 프랑스군도 타격을 입었고, 이후 패배하여 북이탈리아에서 퇴각했다. 조반니 추기경은 탈출에 성공했다.

1512년 8월, 동맹국들은 만토바에서 피렌체 응징을 결의했다. 교황은 조반니 추기경을 교황군 특사로 임명, 라몬 데 카르도나가 이끄는 스페인 군과 함께 피렌체 정복을 명했다. 신성동맹군(교황령+스페인) 내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반니 추기경은 직접 대포와 식량을 보강하여 1512년 8월 하순 프라토에 도착했다. 프라토는 피렌체의 관문으로, 함락되면 반나절 만에 피렌체에 타격을 줄 수 있는 곳이었다.[90]

조반니 추기경의 항복 권고를 피렌체 종신 총리(總理) 피에르 소데리니는 거부했다. 마키아벨리가 양성한 9,000명의 국민군이 있었고, 요새도 보강했기에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8월 29일 전투에서, 경험 부족한 피렌체 국민군은 노련한 신성동맹군 용병들에게 상대가 되지 못했다.[91][92][93]

오후 6시경 프라토는 함락되었고, 스페인 용병들은 도시를 약탈, 파괴, 방화, 강간했다.[94] 조반니 추기경은 교회에 프라토 부녀자들을 도피시키고 교황군을 동원해 경비를 서야 할 정도였다.[95] 최소 3,000명에서 6,000명 정도의 시민들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스페인군은 21일 동안 약탈을 자행했는데,[94] 이는 피렌체 시민들에게 공포심을 안겨주기 위한 것이었다.

프라토 함락 소식에 피렌체는 공포에 휩싸였고, 시뇨리아 광장에서는 메디치 가(家) 지지자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조반니 추기경의 항복 종용 서신이 도착하자, 소데리니는 망명길에 올랐다. 9월 1일, 조반니 추기경은 1,500명의 군인을 이끌고 피렌체에 입성, 18년 만에 메디치 가문의 통치권을 회복했다.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1526년에 반 황제 방위동맹인 코냑동맹을 결성한후 황제 카를 5세의 세력을 이탈리아에서 축출하려고 코냑동맹전쟁을 일으켰다. 전쟁 초반에는 동맹군이 기세를 잡아나가는듯 했으나 이내 제국군의 반격에 맥을 못추게 되었다. 1527년 5월 6일에 신성 로마 제국의 군대에 의해 교황이 있는 로마가 정복당하자 교황은 즉시 항복하였다. 교황이 패배하자 피렌체에서는 반란이 일어나 메디치 가문이 15년만에 다시 추방을 당하였다. 가문의 구심점이 되어온 교황의 힘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1528년 나폴리 공성전에 프랑스가 패하며 전쟁은 황제의 승리로 끝났다. 교황은 1529년 바르셀로나에서 밀약을 체결하며 황제 카를 5세(1500~1558)에게 메디치 가문의 피렌체 통치권을 회복시켜 달라고 요청하였고 카를 5세가 이를 수용하였다. 1529년 10월부터 시작된 피렌체 공성전은 약 10개월간 진행되었고 승리한 제국군에 의해서 메디치 가문의 통치권은 회복되었다. 클레멘스 7세는 재종손자(再從孫子)[96]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를 그곳의 공작으로 임명하였다.

16세기 메디치 일족 가운데 가장 우수한 풍채를 가진 사람은 코시모 1세였다. 그는 무젤로에서 시작하여 토스카나 전체를 지배하는 최고 권력자에 올랐다. 대부분의 피렌체 시민들이 싫어했던 맞수 시에나를 정복하고 토스카나 대공국을 창건하면서 토스카나 전 지역에 대한 패권을 잡게 된다.

알레산드로 대공 암살 후, 권력은 조반니 디 비치의 막내 아들인 로렌초 일 엘데르의 후손들인 메디치 가문의 "차손" 계열에게 넘어갔으며, 그의 증손자 코시모 1세 "대왕"(Cosimo I "the Great")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카트린 드 메디시, 파울로 3세와 그들의 동맹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여 피렌체의 숙적 시에나를 정복하고 토스카나 대공국을 건설했다. 코시모는 제노바 공화국으로부터 엘바 섬의 일부를 매입하여 그곳에 토스카나 해군 기지를 두었다. 그는 1574년에 사망했고, 장남이자 생존한 아들인 프란체스코 1세가 계승했다. 프란체스코는 남성 상속자가 없이 사망하여 1587년 그의 동생인 페르디난도 1세가 계승하게 되었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1519~89)는 로렌초 2세 데 메디치의 유일한 자녀로 태어나 메디치 가문의 합법적인 상속인이자 후계자가 된다.[97] 그러나 불행히도 출생 직후 부모님을 모두 잃었다.[98] 1527년 8살 되던해에 황제 카를 5세의 군대에 의해 로마가 점령당한후 이어진 피렌체 시민의 반란 그리고 피렌체 공성전등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 탓에 카트린은 여러 수녀원에서 난을 피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99] 피렌체가 안정을 되찾자 재종조부(再從祖父)인 교황 클레멘스 7세는 1533년 카트린을 프랑스 국왕의 둘째 아들 앙리 2세 왕자와 혼인을 성사시켰다. 왕세자 프랑수아가 사망하자 앙리 2세 왕자가 1547년 국왕에 즉위하였고 카트린은 프랑스 왕비에 오르게 된다.

피렌체 최고의 명문가에서 성장하면서 익힌 이탈리아의 예술적인 감각과 에티켓, 요리 등은 당시 프랑스 궁중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카트린과 함께 프랑스로 간 이탈리아 요리사들에 의해 프랑스인들의 식탁에는 맛있는 요리가 올라갔고 식사예법등이 새로운 식문화가 전달되었다. 당시에 프랑스는 포크를 사용하지 않았고 과자라는 것도 없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고급과자로 알려져 있는 마카롱도 이탈리아가 원조이며 16세기에 카트린과 함께 레시피가 프랑스로 전달되었다.

2. 4. 1. 프라토 약탈과 통치권 회복

1508년 교황 율리오 2세가 주도한 캉브레 동맹전쟁(1508~1516)이 장기화되면서, 전쟁 초기 목적이었던 베네치아의 세력 약화는 성공했지만, 동맹국인 프랑스의 영향력이 커졌다. 이에 교황은 1510년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몰아내려 했다. 프랑스는 성무정지 조치에 반발, 1511년 11월 피렌체의 피사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여 교황 폐위를 추진했다. 캉브레 동맹전쟁 중 중립을 지키던 피렌체가 이를 수용하자 교황은 분노했다.

조반니 데 메디치 추기경(이하 조반니 추기경)은 교황군 특사로 임명되어 라벤나 전투(1512년 4월)에 참전했다. 승리하면 피렌체 통치권을 회복해도 좋다는 약속을 받은 후였다. 교황은 피렌체 공화정에 대한 복수를, 조반니 추기경은 메디치 가문의 통치권 회복이라는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그러나 연합군이 패배하며 조반니 추기경은 포로가 되었다. 다행히 프랑스 지휘관 가스통 드 푸아가 전사하며 프랑스군도 타격을 입었고, 이후 패배하여 북이탈리아에서 퇴각했다. 조반니 추기경은 탈출에 성공했다.

1512년 8월, 동맹국들은 만토바에서 피렌체 응징을 결의했다. 교황은 조반니 추기경을 교황군 특사로 임명, 라몬 데 카르도나가 이끄는 스페인군과 함께 피렌체 정복을 명했다. 신성동맹군(교황령+스페인) 내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반니 추기경은 직접 대포와 식량을 보강하여 1512년 8월 하순 프라토에 도착했다. 프라토는 피렌체의 관문으로, 함락되면 반나절 만에 피렌체에 타격을 줄 수 있는 곳이었다.[90]

조반니 추기경의 항복 권고를 피렌체 종신 총리(總理) 피에르 소데리니는 거부했다. 마키아벨리가 양성한 9,000명의 국민군이 있었고, 요새도 보강했기에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8월 29일 전투에서, 경험 부족한 피렌체 국민군은 노련한 신성동맹군 용병들에게 상대가 되지 못했다.[91][92][93]

오후 6시경 프라토는 함락되었고, 스페인 용병들은 도시를 약탈, 파괴, 방화, 강간했다.[94] 조반니 추기경은 교회에 프라토 부녀자들을 도피시키고 교황군을 동원해 경비를 서야 할 정도였다.[95] 최소 3,000명에서 6,000명 정도의 시민들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스페인군은 21일 동안 약탈을 자행했는데,[94] 이는 피렌체 시민들에게 공포심을 안겨주기 위한 것이었다.

프라토 함락 소식에 피렌체는 공포에 휩싸였고, 시뇨리아 광장에서는 메디치 가(家) 지지자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조반니 추기경의 항복 종용 서신이 도착하자, 소데리니는 망명길에 올랐다. 9월 1일, 조반니 추기경은 1,500명의 군인을 이끌고 피렌체에 입성, 18년 만에 메디치 가문의 통치권을 회복했다.

2. 4. 2. 두 번째 통치권 상실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1526년에 반 황제 방위동맹인 코냑동맹을 결성한후 황제 카를 5세의 세력을 이탈리아에서 축출하려고 코냑동맹전쟁을 일으켰다. 전쟁 초반에는 동맹군이 기세를 잡아나가는듯 했으나 이내 제국군의 반격에 맥을 못추게 되었다. 1527년 5월 6일에 신성로마제국의 군대에 의해 교황이 있는 로마가 정복당하자 교황은 즉시 항복하였다. 교황이 패배하자 피렌체에서는 반란이 일어나 메디치 가문이 15년만에 다시 추방을 당하였다. 가문의 구심점이 되어온 교황의 힘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1528년 나폴리 공성전에 프랑스가 패하며 전쟁은 황제의 승리로 끝났다. 교황은 1529년 바르셀로나에서 밀약을 체결하며 황제 카를 5세(1500~1558)에게 메디치 가문의 피렌체 통치권을 회복시켜 달라고 요청하였고 카를 5세가 이를 수용하였다. 1529년 10월부터 시작된 피렌체 공성전은 약 10개월간 진행되었고 승리한 제국군에 의해서 메디치 가문의 통치권은 회복되었다. 클레멘스 7세는 재종손자(再從孫子)[96]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를 그곳의 공작으로 임명하였다.

2. 4. 3. 코시모 1세

16세기 메디치 일족 가운데 가장 우수한 풍채를 가진 사람은 코시모 1세였다. 그는 무젤로에서 시작하여 토스카나 전체를 지배하는 최고 권력자에 올랐다. 대부분의 피렌체 시민들이 싫어했던 맞수 시에나를 정복하고 토스카나 대공국을 창건하면서 토스카나 전 지역에 대한 패권을 잡게 된다.

알레산드로 대공 암살 후, 권력은 조반니 디 비치(Giovanni di Bicci)의 막내 아들인 로렌초 일 엘데르의 후손들인 메디치 가문의 "차손" 계열에게 넘어갔으며, 그의 증손자 코시모 1세 "대왕"(Cosimo I "the Great")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카트린 드 메디시, 파울로 3세와 그들의 동맹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여 피렌체의 숙적 시에나를 정복하고 토스카나 대공국을 건설했다. 코시모는 제노바 공화국으로부터 엘바 섬의 일부를 매입하여 그곳에 토스카나 해군 기지를 두었다. 그는 1574년에 사망했고, 장남이자 생존한 아들인 프란체스코 1세가 계승했다. 프란체스코는 남성 상속자가 없이 사망하여 1587년 그의 동생인 페르디난도 1세가 계승하게 되었다.

2. 4. 4. 메디치 가문 출신의 프랑스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1519~89)는 로렌초 2세 데 메디치의 유일한 자녀로 태어나 메디치 가문의 합법적인 상속인이자 후계자가 된다.[97] 그러나 불행히도 출생 직후 부모님을 모두 잃었다.[98] 1527년 8살 되던해에 황제 카를 5세의 군대에 의해 로마가 점령당한후 이어진 피렌체 시민의 반란 그리고 피렌체 공성전등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 탓에 카트린은 여러 수녀원에서 난을 피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99] 피렌체가 안정을 되찾자 재종조부(再從祖父)인 교황 클레멘스 7세는 1533년 카트린을 프랑스 국왕의 둘째 아들 앙리 2세 왕자와 혼인을 성사시켰다. 왕세자 프랑수아가 사망하자 앙리 2세 왕자가 1547년 국왕에 즉위하였고 카트린은 프랑스 왕비에 오르게 된다.

피렌체 최고의 명문가에서 성장하면서 익힌 이탈리아의 예술적인 감각과 에티켓, 요리 등은 당시 프랑스 궁중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카트린과 함께 프랑스로 간 이탈리아 요리사들에 의해 프랑스인들의 식탁에는 맛있는 요리가 올라갔고 식사예법등이 새로운 식문화가 전달되었다. 당시에 프랑스는 포크를 사용하지 않았고 과자라는 것도 없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고급과자로 알려져 있는 마카롱도 이탈리아가 원조이며 16세기에 카트린과 함께 레시피가 프랑스로 전달되었다.

2. 5. 17, 18세기: 가문의 쇠퇴와 몰락

페르디난도 1세 데 메디치는 더 이상 추기경이 아니었지만, 연이은 콘클라베에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1605년 그의 지지자인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를 교황 레오 11세로 선출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레오 11세는 같은 달 사망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인 교황 바오로 5세 또한 메디치 가문을 지지했다.[30] 그러나 페르디난도의 친교황 외교 정책에는 토스카나에 수많은 수도회가 넘쳐났고, 그들 모두가 세금을 납부할 의무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단점이 있었다. 페르디난도는 1609년 부유한 영토를 남기고 사망했지만, 그의 국제 정세에 대한 무관심은 장기적인 결과를 가져왔다.[30]

프랑스에서는 마리 드 메디치가 그녀의 아들 루이 13세의 섭정으로 활동했지만, 루이 13세는 1617년 그녀의 친합스부르크 정책을 거부했고, 마리 드 메디치는 남은 생애를 어떠한 정치적 영향력 없이 살았다.

페르디난도의 후계자인 코시모 2세는 12년도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통치했다. 그는 마리아 마달레나와 결혼하여 마르게리타 데 메디치(Margherita de' Medici), 페르디난도 2세 데 메디치, 안나 데 메디치를 포함한 여덟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는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의 후원자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갈릴레이의 1610년 논문 천체의 전령(Sidereus Nuncius)은 그에게 헌정되었다.[31] 코시모는 1621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32]

왼쪽부터: 마리아 마달레나 대공비, 코시모 2세 대공, 그리고 그들의 장남이자 미래의 페르디난도 2세 대공


코시모의 장남 페르디난도는 아직 법적 성년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마리아 마달레나와 그의 할머니인 크리스티나 드 로렌이 "투르티치(Turtici)"라는 공동 섭정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토스카나를 교황청과 연합시키고, 토스카나 성직자들을 두 배로 늘렸으며, 이단(heresy) 재판에서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재판을 허용했다.[33] 또한 마지막 우르비노 공작 사후, 공작령을 주장하는 대신 우르바노 8세에게 합병되도록 허용했다. 1626년에는 토스카나의 어떤 신민도 대공국 외부에서 교육받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는데, 이 법은 나중에 폐지되었지만 코시모 3세에 의해 부활되었다.[34] 영국계 이탈리아 역사가인 해럴드 액턴(Harold Acton)은 토스카나의 쇠퇴를 "투르티치" 섭정에 돌렸다.[34]

페르디난도 대공은 새로운 기술에 집착했고, 피티 궁(Palazzo Pitti)에 다양한 습도계, 기압계, 온도계, 망원경을 설치했다.[35] 1657년 페르디난도 대공의 막내 동생인 레오폴도 데 메디치(Leopoldo de' Medici)는 실험 아카데미아(Accademia del Cimento)를 설립했다.[36] 토스카나는 카스트로 전쟁(Wars of Castro)에 참전하여 1643년 교황 우르반 8세의 군대를 패배시켰지만,[37] 전쟁은 막대한 비용을 초래하여 국고가 텅 비었고, 경제는 쇠퇴하여 시골 시장에서는 물물교환(barter trade)이 만연했다.[37] 페르디난도는 1670년 뇌졸중과 수종으로 사망하여 산 로렌초 성당에 안치되었다.[39] 그가 사망했을 당시 대공국의 인구는 730,594명이었고, 피사(Pisa)의 거리는 풀로 뒤덮였고 건물들은 붕괴 직전이었다.[40]

페르디난도와 비토리아 델라 로베레 사이에는 코시모 3세 데 메디치(Cosimo III de' Medici, Grand Duke of Tuscany)와 프란체스코 마리아 데 메디치(Francesco Maria de' Medici, Duke of Rovere and Montefeltro) 두 명의 자녀가 있었다. 비토리아가 1694년 사망하자 그녀의 자유 소유권 재산인 로베레 공국과 몬테펠트로(Montefeltro) 공국은 차남에게 상속되었다.

메디치 가문의 대공 코시모 3세, 대공 복장


코시모 3세는 프랑스의 앙리 4세와 마리 드 메디치의 손녀인 마르게리타 루이자 도를레앙과 결혼했지만, 매우 불행한 결합으로, 이 부부는 세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특히 안나 마리아 루이자 데 메디치, 팔츠 선제후비와 토스카나의 마지막 메디치 대공인 잔 가스토네 데 메디치가 있다.

안나 마리아 루이자 데 메디치, 메디치 가문 대공 계보의 마지막 인물, 안토니오 벨루치의 그림 ''미네르바, 메르쿠리우스, 그리고 플루토가 선제후 안나 마리아 루이자 데 메디치에게 경의를 표하다'' (Minerva, Mercury and Pluto pay homage to the Electress Anna Maria Luisa de' Medici영어)에서


안나 마리아 루이자의 배우자 요한 빌헬름, 팔츠 선제후는 1691년 대공과 그의 가족을 위해 "왕실 전하"의 칭호를 성공적으로 얻었다.[41] 코시모는 그의 명목상의 봉건적 종주인 신성 로마 황제에게 터무니없이 많은 세금을 자주 지불했고,[42] 비엔나 전투 중에는 황제에게 군수품을 보냈다.

메디치 가문은 남자 상속인이 부족했고, 1705년까지 대공의 국고는 사실상 파산 상태였다. 17세기와 비교하여 피렌체 인구는 50% 감소했고, 대공국 전체 인구는 약 40% 감소했다.[43] 코시모는 유럽 열강들과 협상을 시도했지만, 토스카나의 법적 지위는 매우 복잡했다. 그의 첫째 아들이 죽자 코시모는 안나 마리아 루이사의 죽음 이후 또는 그가 그녀보다 먼저 죽을 경우 피렌체 공화국을 복원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유럽은 코시모의 계획을 대체로 무시했다. 영국과 네덜란드 공화국만이 이에 약간의 신빙성을 부여했고, 이 계획은 1723년 코시모 3세의 죽음과 함께 결국 사라졌다.[44]

1718년,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공화국(나중에 오스트리아도)은 엘리사베타 파르네세와 스페인의 필리페 5세의 장남인 스페인의 돈 카를로스를 토스카나의 상속자로 선택했다. 1722년까지 선제후비는 상속녀로 인정받지 못했고, 코시모는 토스카나의 미래를 위한 회의에서 구경꾼으로 전락했다.[45] 1723년 10월 25일, 사망 6일 전에 대공 코시모는 토스카나가 독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최종 선언을 발표했지만, 그의 선언은 완전히 무시되었고, 그는 며칠 후 사망했다.

잔 가스토네는 그의 비참한 작센-라우엔부르크의 안나 마리아 프란치스카와의 결혼을 주선한 선제후비를 혐오했고, 그녀는 그의 자유주의적 정책을 혐오했다. 그는 아버지의 모든 반유대주의 법령을 폐지했다. 잔 가스토네는 그녀를 괴롭히는 것을 즐겼다.[46] 1731년 10월 25일, 스페인 부대가 돈 카를로스를 대신하여 피렌체를 점령했고, 그는 같은 해 12월 토스카나에 상륙했다. 잔 가스토네의 쇠약해진 측근인 "루스판티"는 선제후비를 혐오했고, 그녀도 그들을 혐오했다. 잔 가스토네의 시누이인 바이에른의 비올란테 공녀는 연회를 주최하여 대공을 루스판티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했지만, 연회에서 그의 행동은 왕족답지 않았다.[47] 1731년 발목을 삐끗한 후, 그는 생애의 남은 기간 동안 침대에 누워 지냈다. 종종 분뇨 냄새가 나는 침대는 비올란테가 가끔 청소했다.

1736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이후 돈 카를로스는 토스카나에서 축출되었고, 로렌의 프란츠 3세가 그의 대신 상속자가 되었다.[48] 1737년 1월, 스페인군은 토스카나에서 철수했고, 오스트리아군이 그들을 대신했다.

잔 가스토네는 1737년 7월 9일 사망했다. 안나 마리아 루이사는 새로운 대공이 토스카나로 올 때까지 섭정을 제안받았지만 거절했다.[49] 그의 죽음 후, 그녀는 메디치 가문의 모든 자가 소유 재산을 상속받았다.

안나 마리아 루이사는 1737년 10월 31일 "파토 디 파밀리아"("가족 협약")에 서명했다. 신성 로마 황제이자 대공인 로렌의 프란츠와 협력하여 그녀는 메디치 가문의 모든 개인 재산을 토스카나 국가에 유증했으며, 피렌체에서 어떤 것도 제거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았다.[50]

"로렌 사람들"이라고 불리는 점령군은 대중적으로 혐오받았지만, 섭정인 크라옹 공자는 선제후비가 피티 궁전에서 방해받지 않고 살도록 허락했다. 그녀는 1604년 페르디난도 1세가 시작한 산 로렌초 성당의 건설 자금 조달 및 감독에 전념했으며, 국가 예산에서 주당 1,000 크라운을 사용했다.[51] 선제후비는 그녀의 재산의 상당 부분을 자선 단체에 기부했다: 한 달에 4,000파운드.[52] 1743년 2월 19일, 그녀가 죽었고, 메디치 가문의 대공 계보는 그녀와 함께 멸망했다. 피렌체 사람들은 그녀를 애도했고,[53] 그녀는 그녀가 완성하는 데 도움을 준 산 로렌초 지하 묘지에 매장되었다.

주요 메디치 가문의 멸망과 1737년 프란츠 슈테판의 즉위는 토스카나가 오스트리아 왕관의 영토에 일시적으로 포함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오타야노 공작 계보는 유럽 주요 강대국의 개입이 없었다면 메디치 군주로서 계속되었을 수 있지만, 그들은 피렌체의 주권을 다른 곳에 할당했다.

결과적으로 대공국은 멸망했고, 그 영토는 합스부르크-로렌 가문의 차남 계승이 되었다. 새로운 왕조의 첫 번째 대공인 프란츠 1세는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의 증조손이었기 때문에, 그는 여성 계보를 통해 토스카나 왕좌에서 메디치 왕조를 계속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801년 부르봉-파르마 가문에게 쫓겨났지만, 나중에 빈 회의에서 복위되었다. 토스카나는 1861년 이탈리아 왕국에 속주가 되었다. 그러나 오타야노 공작, 메디치 토르나킨치,[54] 카프라라의 베로나 메디치 백작과 가바르도[55]를 포함하여 메디치 가문의 여러 현존하는 분가가 남아 있다. (메디치 가계도 참조)

3. 메디치 가문의 유산

메디치 가문의 가장 큰 업적은 예술과 건축, 특히 초기 르네상스와 고르네상스 예술과 건축에 대한 후원이었다. 메디치 가문은 통치 기간 동안 피렌체에서 만들어진 주요 예술 작품의 상당 부분을 책임졌다.[56] 가문 최초의 예술 후원자인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마사초를 지원하고 1419년 산 로렌초 성당(Basilica of San Lorenzo, Florence) 재건을 위해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에게 의뢰했다. 코시모 1세의 주목할 만한 예술적 동료로는 도나텔로프라 안젤리코가 있었다. 후대에 메디치 가문의 가장 중요한 피보호자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였는데, 그는 로렌초 데 메디치를 시작으로 여러 가족 구성원을 위해 작품을 제작했다.[56] 로렌초 데 메디치는 또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7년 동안 후원했다.

산드로 보티첼리가 그린 「수태고지(Madonna del Magnificat)」(약 1483년~1485년)에 묘사된 피에로 데 메디치 가족


베노초 고초리의 프레스코화(약 1459년)에 등장하는 동방박사 세 사람(Three Wise Men)의 수행원으로서 비유적으로 배치된 메디치 가족 구성원들


로렌초 사후, 금욕적인 도미니크 수도사인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두각을 나타내며 피렌체 시민들에게 과도한 사치를 경계하라고 경고했다. 1497년 2월 7일 많은 걸작들이 「허영의 화형식」에서 "자발적으로" 파괴되었다. 1498년 5월 23일, 사보나롤라와 두 명의 젊은 지지자들은 시뇨리아 광장에서 화형을 당했다. 메디치 가문은 예술과 건축에 대한 의뢰 외에도 열렬한 수집가였으며, 오늘날 그들의 소장품은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의 핵심을 이룬다. 건축 분야에서 메디치 가문은 우피치 미술관, 보볼리 정원, 벨베데레, 메디치 예배당,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 등 피렌체의 주목할 만한 건축물들을 책임졌다.[57]

후에 로마에서 메디치 가문 출신 교황들은 로마의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가문의 전통을 이어갔다. 레오 10세는 주로 라파엘로에게 작품을 의뢰했고, 클레멘스 7세는 1534년 서거 직전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 제단 벽화를 그리도록 의뢰했다.[58] 코시모 1세의 아내인 엘레오노라 토레도는 1550년 피티 궁전을 매입했다. 코시모는 1560년 우피치 미술관을 건립하고 1563년 아카데미아 델레 아르티 델 디세뇨(Accademia delle Arti del Disegno)를 설립한 조르조 바사리를 후원했다.[59] 프랑스의 앙리 4세의 미망인이자 루이 13세의 어머니인 마리 드 메디치는 궁정 화가 페터 파울 루벤스가 1622년~1623년 룩셈부르크 궁전을 위해 그린 마리 드 메디시스 연작의 주제가 되었다.

메디치 가문은 여러 세대의 메디치 자녀들을 가르치고 후원자들의 권력 추구에 중요한 인물이었던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후원한 것으로 유명하다. 갈릴레오의 후원은 로마 종교 재판이 갈릴레오를 이단으로 고발했을 때 페르디난도 2세 데 메디치에 의해 결국 중단되었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은 갈릴레오에게 수년간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했다.

4. 주요 인물

메디치 가문은 살베스트로 데 메디치가 치옴피의 난을 진압하여 피렌체의 절대 권력자로 등극한 것을 시작으로,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가 메디치 은행을 창업하여 가문의 경제적 기반을 다졌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메디치 왕조를 개창하였으며, 그의 손자 로렌초 데 메디치르네상스 황금기 동안 피렌체를 통치했다.

메디치 가문은 교황 레오 10세교황 클레멘스 7세를 배출하여 서구 기독교의 지도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레오 10세는 예술을 후원했지만,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바티칸의 재정이 파산하고 부채가 늘었다. 클레멘스 7세는 1527년 로마 약탈 등 정치적 위기를 겪었으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동맹을 맺고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를 피렌체 공작으로 임명했다.

조반니 달레 반데 네레는 용병대장으로 활약했으며, 그의 아들 코시모 1세 데 메디치토스카나 대공국을 건설하여 메디치 가문의 재도약을 이끌었다.[100] 카트린 드 메디시스프랑스 앙리 2세의 왕비가 되었고, 마리 드 메디시스프랑스의 왕비이자 섭정으로 활동했다. 교황 레오 11세도 메디치 가문 출신이다.

페르디난도 1세는 토스카나의 경제 발전을 위해 노력했으며, 리보르노의 무역을 장려했다.[25] 그러나 17세기 초 피렌체의 인구는 다른 이탈리아 도시에 비해 적었으며, 메디치 가문과 토스카나 국가 재산 간의 경계가 모호하여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28][29]

메디치 가문의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인물설명
살베스트로 데 메디치 (1331–1388)치옴피의 난을 진압하여 피렌체의 절대 권력자로 등극.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 (1360–1429)메디치 은행의 창업주로 메디치 가문의 경제적 부흥을 이룸.
코시모 데 메디치 (1389–1464)메디치 왕조의 개조.
로렌초 데 메디치 (1449–1492)르네상스 황금기 동안의 피렌체 군주.
조반니 데 메디치 (1475–1523)교황 레오 10세.
줄리오 데 메디치 (1478–1534)교황 클레멘스 7세.
조반니 델레 반데 네레 (1498–1526)용병대장,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1세의 아버지.
코시모 1세 데 메디치 (1519–1574)토스카나 대공, 메디치 가문의 재도약을 선도함.
카테리나 데 메디치 (1519–1589)프랑스 앙리 2세의 왕비.
알레산드로 오타비아노 데 메디치 (1535–1605)교황 레오 11세.
마리 드 메디시스 (1575–1642)프랑스의 왕비이자 섭정.
안나 마리아 루이자 데 메디치 (1667–1743)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일족.


5.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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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가문은 살베스트로 데 메디치 (1290년 출생)로부터 시작된다. 그의 아들 아베라르도 데 메디치 (1320년 출생)를 거쳐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 (1360-1429)에 이르러 가문이 번성하기 시작했다. 조반니 디 비치의 아들 코시모 데 메디치 (1389-1464)는 피에로 디 코시모 데 메디치 (1416-1469)를 낳았고, 피에로는 다시 로렌초 데 메디치 (1449-1492)와 줄리아노 데 메디치 (1453-1478)를 낳았다. 로렌초 데 메디치는 피에로 데 메디치 (1471-1503)와 교황 레오 10세 (1475-1521) 등을 낳았으며, 피에로 데 메디치는 로렌초 2세 데 메디치 (1492-1519)를 낳았다. 로렌초 2세는 카테리나 데 메디치 (1519-1589)와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 (1510-1537)를 낳았다.

조반니 디 비치의 또 다른 아들 로렌초 일 베키오 (1395년 경 -1440)는 피에르프란체스코 데 메디치 일 베키오 (1430-1476)를 낳았고, 피에르프란체스코는 로렌초 일 포폴라노 (1463-1503)와 조반니 일 포폴라노 (1467-1498)를 낳았다. 조반니 일 포폴라노는 조반니 달레 반데 네레 (1498-1526)를 낳았고, 조반니 달레 반데 네레는 코시모 1세 데 메디치 (1519-1574)를 낳았다. 코시모 1세는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 (1541-1587), 페르디난도 1세 데 메디치 (1549-1609) 등을 낳았으며, 페르디난도 1세는 코시모 2세 데 메디치 (1590-1621)를 낳았다. 코시모 2세는 페르디난도 2세 데 메디치 (1610-1670)를 낳았고, 페르디난도 2세는 코시모 3세 데 메디치 (1642-1723)를 낳았다. 코시모 3세는 잔 가스토네 데 메디치 (1671-1737)를 마지막으로 대가 끊겼다.

아래는 메디치 가문의 기원을 보여주는 표이다.

메디코 디 포트로네
*1046 ? †1102
보노
*1069 ? †1123
베르나르도
*1099 ? †1147
잠부오노 데 메디치
*1131 ? †1192
키아리스시모
*1167 ? †1210
필립포
*? †?
키아리스시모
fl. 1253
필립포[60]
아리고[6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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