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오시오 헤이하치로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오시오 헤이하치로는 1793년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난 일본의 양명학자로, 오사카 마치부교소의 요리키(경찰)로 재직하며 부패에 맞서 싸웠다. 그는 1830년 사직 후 양명학을 연구하고 세심동이라는 사숙을 설립하여 제자들을 가르쳤다. 1837년 덴포 대기근으로 백성들이 고통받자, 그는 정부의 부패에 항거하여 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자결했다. 그의 사상은 유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며, '태극'과 '마코토'를 중시했다. 그의 저서로는 『세심동첩기』 등이 있으며, 덴포 대기근과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은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이마가와씨 - 이마가와 사다요
    이마가와 사다요는 무로마치 시대의 무장이자 시인, 수필가로, 규슈 단다이로 파견되어 규슈 평정에 공헌하고 남북조 시대 혼란 수습과 왜구 문제 해결에 힘썼으며, 만년에는 《난태평기》를 집필하는 등 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 이마가와씨 - 쓰키야마도노
    쓰키야마도노는 센고쿠 시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정실 부인으로, 정치적 격변 속에서 비극적인 삶을 살았으며, 그녀의 죽음에 대한 여러 설과 함께 후대에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 일본의 양명학자 - 오쿠보 도시미치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사쓰마 번 출신의 일본 정치가 오쿠보 도시미치는 사이고 다카모리, 기도 다카요시와 함께 막부 타도를 이끌고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근대화를 추진했으나, 강력한 권력과 정책 추진 방식으로 비판받았으며 사족에게 암살당했다.
  • 일본의 양명학자 - 구마자와 반잔
    에도 시대 유학자 구마자와 반잔은 양명학을 바탕으로 사회 현실과 민생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정치 개혁을 주장했으며, 저술 활동을 통해 사회 비판을 이어가 막말 존왕양이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오시오 헤이하치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오시오 헤이하치로
오시오 헤이하치로 초상 (기쿠치 요사이 작, 오사카성 천수각 소장)
본명오시오 추사이 (大塩 中斎)
통칭오시오 헤이하치로 (大塩 平八郎)
주사이 (中斎)
출생일1793년 3월 4일
사망일1837년 5월 1일
사망 장소오사카
사망 원인자살 (할복 후 화재)
국적일본
시대에도 시대
활동 지역오사카
학문양명학
주요 사상태극 (太極), 성실 (誠)
직업오사카 마치부교 (大坂町奉行) 소속 하급 관리
가족 관계
아버지오시오 헤이하치로 게이코 (大塩 平八郎 敬高)
배우자첩: 유우 (ゆう), 히로 (ひろ) (다야 다이코쿠야 와이치 딸)
양자오시오 가쿠노스케 (大塩 格之助)
기타 정보
개명마사타카 (正高) → 고소 (後素)
가명 (통칭)헤이하치로 (平八郎)

2. 생애

오시오 헤이하치로는 1793년 사무라이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5세 때 조상 중에 수감자들과 관리들에게 문서를 쓰는 수치스러운 일을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성리학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1] 24세에 중국 철학자 려곤(1536–1618)의 도덕과 계율에 관한 책을 읽었고, 이후 려곤의 스승인 왕양명에게 영감을 받았다.[1]

14세에 오사카 동마치 부교소(大坂東町奉行所)에 출사(出仕)하여 요리키(与力) 수습을 시작, 시바타 칸베에몬(柴田勘兵衛門)에게서 사분리류(佐分利流) 창술(槍術)을 배워 간사이 제일의 명성을 얻었으며, 나카지마류(中島流) 포술(砲術)도 배웠다.[9] 25세에 요리키가 되었다.[8] 13세부터 요리키(与力)로 일하며[2] 오사카의 경찰 검사 역할도 수행, 뇌물을 받지 않고 부패에 맞서 싸우며 청렴함을 보였다.

부교소 시절, 다른 부서 동료인 서마치 부교소(西町奉行所) 요리키 유게 신에몬(弓削新右衛門)의 부정부패(汚職)를 내부 고발하고, 잠입 기리시탄(隠れキリシタン)을 적발하고, 파계승(破戒僧)을 처단하는 등[7] 부정부패를 싫어하고 부정을 잇달아 폭로했다. 오시오를 꺼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상사인 동마치 부교(大坂町奉行) 다카이 지토쿠(高井実徳)는 오시오를 중용했다.[7] 오시오는 유게 신에몬(弓削新右衛門) 사건, 기리시탄(切支丹) 적발, 파계승(破戒僧) 적발을 "3대 공적"이라고 말했다.[10]

1830년, 새로운 법원 관리가 부패한 인물임을 알게 되어 사직하고 오미(近江)[3]로 순례를 떠나 정신적인 깨달음을 얻었다. 오사카로 돌아와 양명학(陽明學)에 대한 저술과 강의를 시작, 세심동(洗心洞)이라는 사숙을 설립했다. 오시오는 은퇴 후 남은 생애를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바쳤으며, 강의 원고들을 모아 세심동책기(洗心洞箚記)라는 책을 출판했다.

1824년, 독학으로 양명학을 공부한 오시오는 자택에 세심동(洗心洞)을 열었다.[8] 1830년 고아이(高井)의 전근과 함께 요리키(与力)직을 사임하고[7], 양자인 오시오 가쿠노스케(大塩格之助)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8] 은거 후에는 학업에 전념하여 세심동에서 제자들을 지도했다. 에도의 양명학자인 사토 잇사이(佐藤一斎)와는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자주 서신을 교환했다. 오시오의 양명학은 ‘지행합일’을 중심 사상으로 삼은 ‘중사이(中斎) 학파’를 형성할 정도로 성장했다.[8] 간세이 이학의 금(寛政異学の禁)의 영향이 계속되었고, 주자학이 유행했기 때문에, 고고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오시오는 주자학자들과의 무의미한 논쟁을 피하기 위해 방문객과 거의 만나지 않았고, 서신에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2. 1. 가문 및 어린 시절

오시오 헤이하치로는 1793년 사무라이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5세 때 조상 중에 수감자들과 관리들에게 문서를 쓰는 수치스러운 일을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일은 그가 성리학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24세에 중국 철학자 려곤(1536–1618)의 도덕과 계율에 관한 책을 읽었고, 이후 려곤의 스승인 왕양명에게 영감을 받았다.[1]

2. 2. 오사카 마치부교소 요리키 시절

14세에 오사카 동마치 부교소(大坂東町奉行所)에 출사(出仕)하여 요리키(与力) 수습을 시작했다. 시바타 칸베에몬(柴田勘兵衛門) 밑에서 사분리류(佐分利流) 창술(槍術)을 배우고 간사이 제일의 명성을 얻었다. 그 외에 나카지마류(中島流) 포술(砲術)을 배웠다.[9] 25세에 요리키가 되었다.[8] 부교소 시절, 다른 부서 동료인 서마치 부교소(西町奉行所) 요리키 유게 신에몬(弓削新右衛門)의 부정부패(汚職)를 내부 고발하고, 잠입 기리시탄(隠れキリシタン)을 적발하고, 파계승(破戒僧)을 처단하는 등[7] 부정부패를 싫어하고 부정을 잇달아 폭로했다. 부교소 내에서 오시오를 꺼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상사인 동마치 부교(大坂町奉行) 다카이 지토쿠(高井実徳)는 오시오를 중용했다.[7] 유게 신에몬(弓削新右衛門) 사건, 기리시탄(切支丹) 적발, 파계승(破戒僧) 적발을 오시오는 "3대 공적"이라고 말했다.[10] 13세부터 오시오 헤이하치로는 요리키(与力)로 일하며[2] 오사카의 경찰 검사 역할도 수행했다. 그는 뇌물을 받지 않고 부패에 맞서 싸우며 청렴함을 보였다.

2. 3. 양명학자로서의 삶

오시오 헤이하치로는 1793년 사무라이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5세 때 수감자와 관리들과 함께 문서를 쓰는 일을 하는 수치스러운 조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이는 그가 성리학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24세에는 중국 철학자 려곤(1536–1618)의 도덕과 계율에 관한 책을 읽었고, 이후 려곤의 스승인 왕양명에게 영감을 받았다.[1]

13세부터 오시오 헤이하치로는 요리키(与力)[2]로 일했으며, 오사카의 경찰 검사였다. 그는 뇌물을 절대 받지 않고 부패에 맞서 싸움으로써 청렴함을 증명했다. 1830년, 새로운 법원 관리가 부패한 인물임을 알게 되어 사직했다. 그 후 오미(近江)[3]라는 곳으로 순례를 떠나 정신적인 깨달음을 얻었다.

오사카로 돌아온 그는 양명학(陽明學)에 대한 저술과 강의를 시작했고, 세심동(洗心洞)이라는 자신의 사숙을 설립했다. 오시오는 은퇴 후 남은 생애를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바쳤다. 후에 그는 자신의 강의에 사용된 원고들을 모아 세심동책기(洗心洞箚記)라는 책을 출판했다.

1824년, 독학으로 양명학을 공부한 오시오는 자택에 세심동(洗心洞)을 열었다.[8] 1830년 고아이(高井)의 전근과 함께 요리키(与力)직을 사임하고[7], 양자인 오시오 가쿠노스케(大塩格之助)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8] 은거 후에는 학업에 전념하여 세심동에서 제자들을 지도했다. 에도의 양명학자인 사토 잇사이(佐藤一斎)와는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자주 서신을 교환했다. 오시오의 양명학은 ‘지행합일’을 중심 사상으로 삼은 것으로, ‘중사이(中斎) 학파’라 불리는 학파를 형성할 정도로 성장했다.[8] 오시오가 생존했던 시기에는 간세이 이학의 금(寛政異学の禁)의 영향이 계속되었고, 주자학이 유행했기 때문에, 원래 고고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오시오는 주자학자들과의 무의미한 논쟁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방문객과는 거의 만나지 않았고, 받은 서신에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3. 사상

오시오 헤이하치로는 유교의 가르침과 타고난 지식을 배우는 것이 내적 평화, 지혜, 그리고 생사 초월로 이어질 수 있다는 해석을 기반으로 했다. 그의 형이상학[4]은 왕양명의 태극(太極, 절대 정신)과 誠|Makoto|성실중국어에 관한 이론에 근거했다.

그는 매우 엄격한 인품을 지녔으며, "친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상대에게 어떤 사악한 마음이라도 품고 있다면, 친하게 지내서는 안 된다"는 말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라이산요는 그의 학식을 칭찬하며 '소양명'이라 불렀지만, 동시에 "그대에게 기도하네. 칼을 닦고, 때로는 그것을 감추도록 하게"라며 그의 곧은 성격을 충고하기도 했다. 그는 급한 성격으로, 오사카 니시마치 부교 야베 사다타다의 집에서 식사 중 막부 정치의 부패에 분노하여 단단한 생선 머리를 깨물어 부순 일화도 있다. 콘도 주조는 그를 만나 "다다미 위에서는 죽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강의는 매우 엄격하여 제자들이 긴장한 나머지 오시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저녁에 취침하고 오전 2시에 기상하여 천체 관측, 몸을 깨끗이 하고 무예를 연마한 후 아침 식사, 오전 5시에 문하생들을 모아 강의를 하고 출근하는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8] 자신과 타인에게 모두 엄격했고, 신경이 곤두선 생활로 10일 이상 잠을 잘 수 없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3. 1. 태극(太極)

오시오 헤이하치로는 유교의 가르침과 타고난 지식을 배우는 것이 내적 평화, 지혜, 그리고 생사 초월로 이어질 수 있다는 해석을 기반으로 했다.[4] 그의 형이상학은 왕양명의 태극(太極, 절대 정신)과 誠|Makoto, 성실중국어에 관한 이론에 근거했다.

태교(太極|Taikyō중국어)는 우주의 근본적인 창조력이자 모든 것의 근원이다. 거짓되고 관습적인 구분의 범주를 극복하려면 절대적인 정신으로 돌아서야 한다. 이 절대적인 정신과의 재통합은 삶을 더 쉽게 만든다. 진정한 본성, 진실된 행위, 그리고 죽음의 개념에 대한 무관심을 가져야 한다.

3. 2. 마코토(誠)

오시오 헤이하치로는 유교의 가르침과 타고난 지식을 배우는 것이 내적 평화, 지혜, 그리고 생사 초월로 이어질 수 있다는 해석을 기반으로 했다. 그의 형이상학[4]은 왕양명의 태극(太極, 절대 정신)과 마코토(誠, 성실)에 관한 이론에 근거했다.

마코토(誠)는 불교에서 뚜렷한 규칙과 기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시오 헤이하치로는 중국 철학자 왕양명으로부터 정직(성실)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일본식 해석을 부여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한 사무라이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러한 내면의 자질이 바로 정직(성실)이다. 이는 또한 오시오가 봉기 당시 취했던 행동 방침을 반영한다.

4. 덴포 대기근과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

오시오 헤이하치로가 이끈 봉기의 모습


1836년 가을, 가이 국(甲斐国)에서 발생한 덴포 소동(군내소동), 미카와 국 아가마 번(挙母藩)의 가모 일기 등 각지에서 큰 소동이 일어났다. 도호쿠 지방(奥羽地方)에서는 1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같은 해 9월, 오시오 헤이하치로는 「격문(檄文)」을 작성하여 비밀리에 인쇄했다.[8] 봉기가 발각되지 않도록 목판은 32개로 나뉘었다.[8] 기근으로 발생할 우치코와시 진압을 명분으로, 측근들에게 포술 중심의 군사 훈련을 시작했다.

1837년 2월, 무장 봉기로 부교 등을 토벌하고 거상들을 응징하는 것 외에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없다고 생각한 오시오는 3월 25일 측근, 민중들과 함께 봉기했다('''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7][12] 사전에 장서를 팔아 얻은 돈을 빈민들에게 나누어주고 봉기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다.[13] 그러나 히라야마 스케지로와 요시미 쿠로에몬의 밀고로 오사카 마치부교소에 봉기가 발각되었다.[8] 봉기는 실행되었지만, 당일에 진압되었다.[7][8][13] 난으로 인한 화재는 다음 날까지 계속되어 1만 호 이상이 불탔고, 오사카의 5분의 1이 소실되어 오시오야케(大塩焼け)라고 불렸다.[7][8]

사건 후 엄중한 수색으로 주모자들은 자수, 자살, 또는 체포되었지만, 오시오 부자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11] 오시오는 전장에서 벗어나 아토베 요스케 암살을 계획했는지, 요도가와에 배를 띄워 해 질 때까지 오사카 동초부교소 상황을 살폈다. 요츠바시 부근에서 장도를 강에 버리고, 카와치 국을 거쳐 야마토 국으로 도망쳤다. 며칠 후, 다시 오사카로 돌아와 시모센바의 우츠보 유가케초(油掛町) 상가 미키치야 고로베에 저택 뒷마당 은거지에 잠복했다.[8] 3월 27일,[7][11] 미키치야의 여종이 항상 2인분 식사가 남는 것을 의심하여 오사카 성대(시모우사 국 후루카와 번주) 토이 토시타다의 셋쓰 평야향(진야)에 밀고하여 막부 측에 잠복 장소가 발각되었다. 역관들에게 포위된 가운데, 양자 가쿠노스케와 함께 단도와 화약을 사용하여 자결하였다.[7][11] 향년 45세였다.

1976년 대염사건연구회는 대염 부자 최후의 장소 근처인 오사카시 니시구 우츠보혼마치 1정목 18번지 12호(텐리쿄 가시키부분교회 부지 내)에 추도비를 세웠다.[13][15] 비에는 "대염 평팔랑 최후의 장소"라고 새겨져 있으며, 크기는 가로 2.24m, 세로 1.13m이다.[15] 최후의 장소인 아부라가케초 미키치야 터는 이 비가 있는 도로 북쪽 길에 북쪽을 향해 있었다. 2021년 우츠보 공원으로 이전했다.[15]

모반자였던 평팔랑과 각노스케의 묘는 세워질 수 없었지만, 1890년 대염가의 보다이사인 오사카시 기타구 성정사에 세워졌다.[13] 오사카 대공습으로 파손된 묘는 1957년 복원되었다.[13] 1987년 묘 옆에 "대염의 난에 순절한 사람들의 비"가 건립되었다.[13] 매년 기일인 3월 29일에 위령법요가 거행된다.[13]

4. 1. 덴포 대기근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가문에도 시대 막부를 세우면서, 기후와 함께 백성들의 고통이 커졌다. 농민과 하급 무사 모두 막부의 정책으로 고통받았다. 1833년과 1836년 흉작으로 농업과 식량 생산에 위기가 닥쳤고, 정부는 일반 시민들에게 높은 세율을 요구했다. 항상 번영했던 간사이 지방에서는 이러한 위기가 매우 드문 일이었고, 불안이 대도시로 확산되었다. 쌀값 급등에 항의하며 인플레이션에 연루된 것으로 여겨지는 자들의 주택을 파괴하는 '우치코와시'(内粉破)에 참여하는 저항 행위가 일어났고, 이로 인해 오사카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이러한 소요는 도쿠가와 막부를 놀라게 했고, 당시 요리키로 일하고 있던 오시오 헤이하치로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1837년 오시오는 오사카의 관리와 부유한 상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의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당시 일반 시민의 권리를 위한 운동은 없었기에, 오시오는 민중의 분노가 조직적인 봉기로 이어지도록 했다. 그는 일본 엘리트 계층의 일원이자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정부의 부패에 맞서 싸우도록 도왔다. 기근과 높은 쌀값을 유발한 흉작과 악화되는 재정 문제, 그리고 외국과의 문제(아편전쟁)는 덴포 기근(1830~1844)으로 불린다. 이것이 오시오 헤이하치로가 이끈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덴포 기근은 전국적으로 덴포 4년(1833년) 가을부터 5년(1834년) 여름까지, 그리고 덴포 7년(1836년) 가을부터 8년(1837년) 여름까지가 특히 심각했다.

오사카 니시마치 부교(西町奉行) 야베 사다타다(矢部定謙)는 오시오를 고문처럼 대우했고, 야베의 부하에는 우치야마 히코지로(内山彦次郎)와 같은 경제 전문가들이 있었기 때문에 덴포 4년의 기근은 무사히 극복했다.

그러나 덴포 7년의 기근의 경우, 야베는 간정부교(勘定奉行)로 승진했고, 후임 오사카 히가시마치 부교(東町奉行) 아토베 요스케(跡部良弼)는 막부의 쇼군 선하 의식 비용을 위해 오사카에서 에도로의 쌀 수송을 강행했다.[11] 아토베는 요력(与力)인 우치야마 히코지로를 효고에 보내 쌀을 사들이게 하고, 그 쌀을 에도로 보내는 등의 폭정을 저질렀다.[11] 이와 함께, 거상들이 쌀을 매점매석했기 때문에 쌀값이 폭등했다.[7][11] 아토베는 에도로의 쌀 수송을 철저히 하기 위해, 교토에서 5 1 정도의 쌀을 사러 가는 사람까지 체포할 정도였기 때문에, 교토는 굶주림으로 죽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자연스럽게 유민들이 오사카로 몰려들었고, 오사카 시내의 치안은 악화되었다.

오시오는 오사카 백성들이 기근으로 고통받는 것을 가슴 아파하며, 아토베에게 창미(幕府가 세금으로 거둬들여 보관하는 현금화되지 않은 쌀)를 백성에게 나눠주고, 거상들에게 매점매석을 중단시키는 등 쌀값 안정을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을 제시했지만,[7] 그 제안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7] 오시오는 거상 고노이케 코우지(鴻池幸実)에게 “가난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쌀을 사주기 위해, 자신과 문하생의 록미(禄米)를 담보로 10000냥을 빌려달라”고 부탁했지만, 코우지가 아토베에게 상담한 결과 “거절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이것도 실현되지 못했다고 한다.

4. 2. 봉기의 배경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가문이 건설하고 영향을 미친 에도 시대 막부는 기후와 함께 백성들의 고통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농민과 하급 무사 모두 막부의 정책으로 고통받았다. 1833년1836년 흉작으로 농업과 식량 생산에 위기가 닥쳤고, 정부는 일반 시민들에게 높은 세율을 요구했다. 항상 번영했던 간사이 지방에서 이러한 위기는 매우 드문 일이었고, 불안이 대도시로 확산되었다. 인구는 쌀값 급등에 항의하며, 인플레이션에 연루된 것으로 여겨지는 자들의 주택을 파괴하는 '우치코와시'(内粉破)에 참여하는 저항 행위를 시작했다. 이로 인해 오사카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이러한 소요는 도쿠가와 막부를 놀라게 했고, 동시에 당시 요리키로 일하고 있던 오시오 헤이하치로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1837년 오시오는 오사카의 관리와 부유한 상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의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당시 일반 시민의 권리를 위한 운동은 없었기에, 오시오는 민중의 분노가 조직적인 봉기로 이어지도록 했다. 그는 일본 엘리트 계층의 일원이자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정부의 부패에 맞서 싸우도록 도왔다. 기근과 높은 쌀값을 유발한 흉작과 악화되는 재정 문제, 그리고 외국과의 문제(아편전쟁)는 덴포 기근(1830~1844)으로 불린다. 이것이 오시오 헤이하치로가 이끈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덴포 기근은 전국적으로 1833년(덴포 4년) 가을부터 1834년(덴포 5년) 여름까지, 그리고 1836년(덴포 7년) 가을부터 1837년(덴포 8년) 여름까지가 특히 심각했다.

전자의 경우, 오사카 니시마치 부교(西町奉行) 야베 사다타다(矢部定謙)가 오시오를 고문처럼 대우했고, 야베의 부하에는 우치야마 히코지로(内山彦次郎)와 같은 경제 전문가들이 있었기 때문에 무사히 극복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야베는 간정부교(勘定奉行)로 승진했고, 후임 오사카 히가시마치 부교(東町奉行) 아토베 요스케(跡部良弼)는 막부의 쇼군 선하 의식 비용을 위해 오사카에서 에도로의 쌀 수송을 강행했다.[11] 아토베는 요력(与力)인 우치야마 히코지로를 효고(兵庫)에 보내 쌀을 사들이게 하고, 그 쌀을 에도로 보내는 등의 폭정을 저질렀다.[11] 이와 함께, 거상들이 쌀을 매점매석했기 때문에 쌀값이 폭등했다.[7][11] 아토베는 에도로의 쌀 수송을 철저히 하기 위해, 교토에서 5 1 정도의 쌀을 사러 가는 사람까지 체포할 정도였기 때문에, 교토는 굶주림으로 죽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자연스럽게 유민들이 오사카로 몰려들었고, 오사카 시내의 치안은 악화되었다.

오시오는 오사카 백성들이 기근으로 고통받는 것을 가슴 아파하며, 아토베에게 창미(幕府가 세금으로 거둬들여 보관하는 현금화되지 않은 쌀)를 백성에게 나눠주고, 거상들에게 매점매석을 중단시키는 등 쌀값 안정을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을 제시했지만,[7] 그 제안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7] 오시오는 거상 고노이케 코우지(鴻池幸実)에게 “가난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쌀을 사주기 위해, 자신과 문하생의 록미(禄米)를 담보로 1만 냥을 빌려달라”고 부탁했지만, 코우지가 아토베에게 상담한 결과 “거절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이것도 실현되지 못했다고 한다.

4. 3.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



쓰키오카 요시토시가 그린 오시오 헤이하치로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막부가 지배하던 에도 시대에는 기후와 함께 백성들의 고통이 컸다. 농민과 하급 무사 모두 막부의 정책으로 고통받았으며, 특히 1833년1836년 흉작으로 농업과 식량 생산에 위기가 닥치자, 정부는 일반 시민들에게 높은 세율을 요구했다.[11] 번영했던 간사이 지방에서 이러한 위기는 매우 드문 일이었고, 불안은 대도시로 확산되었다. 인구는 쌀값 급등에 항의하며, 인플레이션에 연루된 것으로 여겨지는 자들의 주택을 파괴하는 '우치코와시'(内粉破)를 행하며 저항했다. 이로 인해 오사카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이러한 소요는 도쿠가와 막부를 놀라게 했고, 당시 요리키로 일하고 있던 오시오 헤이하치로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1837년 오시오는 오사카의 관리와 부유한 상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의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당시 일반 시민의 권리를 위한 운동은 없었기에, 오시오는 민중의 분노가 조직적인 봉기로 이어지도록 했다. 그는 일본 엘리트 계층의 일원이자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정부의 부패에 맞서 싸우도록 도왔다. 기근과 높은 쌀값, 악화되는 재정 문제, 그리고 외국과의 문제(아편전쟁)는 덴포 기근(1830~1844)으로 불리며, 이는 오시오 헤이하치로가 이끈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오시오와 그의 동맹 세력은 배신자의 밀고로 인해 예정보다 일찍 봉기를 시작해야만 했다.[8] 1837년 2월 19일, 오시오는 오사카의 자택에 불을 지름으로써 추종자들에게 막부군이 진압할 기회를 주기 전에 봉기를 시작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는 농민들에게 세금 기록을 불태우라고 명령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부자들의 창고를 털어 굶주린 백성에게 쌀을 재분배하라고 명령했다. 자세히 계획되었지만, 봉기는 참패로 끝났다.[7][12][13] 반란군은 무기 사용과 전투 기술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막부군 또한 부족했다. 결국 정부군은 봉기를 진압했고, 오시오는 아들과 함께 산으로 도망쳤다. 그는 추격을 받았지만, 막부군이 체포하기 전에 자신의 은신처에 불을 질렀다. 그는 자신과 아들과 함께 불에 타 죽었다.

덴포 기근은 전국적으로 1833년 가을부터 1834년 여름까지, 그리고 1836년 가을부터 1837년 여름까지가 특히 심각했다. 전자의 경우, 오사카 니시마치 부교(西町奉行) 야베 사다타다(矢部定謙)가 오시오를 고문처럼 대우했고, 야베의 부하에는 우치야마 히코지로(内山彦次郎)와 같은 경제 전문가들이 있었기 때문에 무사히 극복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야베는 간정부교(勘定奉行)로 승진했고, 후임 오사카 히가시마치 부교(東町奉行) 아토베 요스케(跡部良弼)는 막부의 쇼군 선하 의식 비용을 위해 오사카에서 에도로의 쌀 수송을 강행했다.[11] 아토베는 요력(与力)인 우치야마 히코지로를 효고(兵庫)에 보내 쌀을 사들이게 하고, 그 쌀을 에도로 보내는 등의 폭정을 저질렀다.[11] 이와 함께, 거상들이 쌀을 매점매석했기 때문에 쌀값이 폭등했다.[7][11] 아토베는 에도로의 쌀 수송을 철저히 하기 위해, 교토에서 5 1 정도의 쌀을 사러 가는 사람까지 체포할 정도였기 때문에, 교토는 굶주림으로 죽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자연스럽게 유민들이 오사카로 몰려들었고, 오사카 시내의 치안은 악화되었다.

오시오는 오사카 백성들이 기근으로 고통받는 것을 가슴 아파하며, 아토베에게 창미(幕府가 세금으로 거둬들여 보관하는 현금화되지 않은 쌀)를 백성에게 나눠주고, 거상들에게 매점매석을 중단시키는 등 쌀값 안정을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을 제시했지만,[7] 그 제안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7] 오시오는 거상 고노이케 코우지(鴻池幸実)에게 “가난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쌀을 사주기 위해, 자신과 문하생의 록미(禄米)를 담보로 1만 냥을 빌려달라”고 부탁했지만, 코우지가 아토베에게 상담한 결과 “거절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이것도 실현되지 못했다고 한다.

1836년 가을, 쌀값 폭등 등의 영향으로 가이 국(甲斐国)에서 발생한 「덴포 소동(天保騒動)(군내소동)」, 미카와 국(三河国)아가마 번(挙母藩)의 「가모 일기(加茂一揆)」 등의 큰 소동이 각지에서 발생하고, 오우 지방(奥羽地方)에서 1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가운데, 같은 해 9월, 오시오 헤이하치로는 「격문(檄文)」을 작성하여 비밀리에 인쇄하였다.[8] 봉기가 들키지 않도록, 목판은 32개로 나뉘어져 있었다고 한다.[8] 이윽고, 기근에 따라 발생할 우치코와시(打ちこわし)의 진압을 명분으로, 그는 측근들에게 포술을 중심으로 한 군사 훈련을 시작했다.

1837년 2월, 더 이상 무장 봉기로 부교 등을 토벌하고, 거상들을 불태워 응징하는 것 이외에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없다고 생각하여, 3월 25일에 측근, 민중들과 함께 봉기하였다('''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大塩平八郎の乱)''').[7][12] 오시오는 사전에 장서를 팔아 얻은 돈을 빈민들에게 나누어주고, 봉기에 참여하도록 독려하였다.[13] 그러나, 히라야마 스케지로와 요시미 쿠로에몬의 밀고로 오사카 마치부교소에 봉기가 발각되었다.[8] 봉기는 실행되었지만, 당일에 진압되었다.[7][8][13] 난에 의한 화재는 다음 날까지 계속되어, 1만 호 이상이 불타 없어졌다.[7] 이 화재로 오사카의 5분의 1이 불타, 속칭 오시오야케(大塩焼け)라고 불렸다.[8]

사건 후의 엄중한 수색으로 주모자들은 속속 자수, 자살, 또는 체포되었지만, 오시오 부자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11] 오시오는 전장에서 벗어난 후, 아토베의 암살을 계획했는지, 요도가와(淀川)에 배를 띄워 해가 질 때까지 오사카 동초부교소의 상황을 살폈다. 그 후, 요츠바시(四ツ橋) 부근에서 장도를 강에 버리고, 카와치 국(河内国)을 거쳐 야마토 국(大和国)으로 도망쳤다. 며칠 후, 다시 오사카로 돌아와 시모센바(下船場)의 우츠보(靱) 유가케초(油掛町)의 상가 미키치야 고로베에 저택 뒷마당의 은거지에 잠복했다.[8] 3월 27일,[7][11] 미키치야의 여종이 항상 2인분의 식사가 남는 것을 의심하여, 오사카 성대(시모우사 국(下総国)후루카와 번(古河藩)주) 토이 토시타다(土井利位)의 셋쓰 평야향(진야(陣屋))에 밀고함으로써 막부 측에 잠복 장소가 발각되었다. 역관들에게 포위된 가운데, 양자인 카쿠노스케와 함께 단도와 화약을 사용하여 자결하였다.[7][11] 향년 45세.

1976년 대염사건연구회에 의해 대염 부자의 최후의 장소 근처인 오사카시 니시구 우츠보혼마치 1정목 18번지 12호(텐리쿄 가시키부분교회 부지 내)에 추도비가 세워졌다.[13][15] 비에는 "대염 평팔랑 최후의 장소"라고 새겨져 있으며, 크기는 가로 2.24m, 세로 1.13m이다.[15] 최후의 장소인 아부라가케초의 미키치야 터는 이 비가 있는 도로의 북쪽 길에 북쪽을 향해 있었다. 2021년, 우츠보 공원으로 이전했다.[15]

모반자였던 평팔랑과 각노스케의 묘는 세워질 수 없었지만, 1890년에 대염가의 보디사인 오사카시 키타구의 성정사에 세워졌다.[13] 전재로 파손된 묘를 1957년에 복원한 것이다.[13] 1987년, 묘 옆에 "대염의 난에 순절한 사람들의 비"가 건립되었다.[13] 매년, 기일인 3월 29일에 위령법요가 거행된다.[13]

대염 평팔랑 최후의 장소 비
(오사카시니시구)

4. 4. 봉기 이후

1837년 2월 19일, 오시오는 오사카의 자택에 불을 지르는 것으로 봉기를 시작했다. 농민들에게는 세금 기록을 불태우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부자들의 창고를 털어 쌀을 재분배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봉기는 실패로 끝났다. 반란군은 무기 사용과 전투 기술이 부족했고, 막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오시오는 아들과 함께 산으로 도망쳤으나, 체포되기 전에 자신의 은신처에 불을 질러 자결했다.[5]

이러한 과감한 행동으로 3,000채가 넘는 가옥이 불타고 3만~4만 섬의 쌀이 파괴되었다.[5] 그의 추종자 대부분은 자결했고, 체포된 29명의 폭도 중 5명만이 심문을 견뎌 살아남아 소금에 절여져 십자가형을 당했다.[6]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정치적 프로그램과 전략은 불분명하지만, 유교 이념에 따라 백성을 돕고자 했을 가능성이 있다. 긍정적인 결과로는 국제 정치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사건 후, 주모자들은 속속 자수, 자살, 또는 체포되었지만, 오시오 부자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11] 오시오는 요도가와(淀川)에 배를 띄워 오사카 동초부교소의 상황을 살피고, 카와치 국(河内国)을 거쳐 야마토 국(大和国)으로 도망쳤다. 며칠 후, 다시 오사카로 돌아와 시모센바(下船場)의 우츠보(靱) 유가케초(油掛町)의 상가 미키치야 고로베에 저택 뒷마당의 은거지에 잠복했다.[8] 3월 27일,[7][11] 막부 측에 잠복 장소가 발각되었고, 역관들에게 포위된 가운데 양자인 가쿠노스케와 함께 단도와 화약을 사용하여 자결하였다.[7][11] 향년 45세였다.

1976년 텐리쿄 가시키부분교회 부지 내에 "대염 평팔랑 최후의 장소" 추도비가 세워졌다.[13][15] 2021년에는 우쓰보 공원으로 이전되었다.[15]

1890년에는 오사카시 기타구의 성정사에 평팔랑과 각노스케의 묘가 세워졌다.[13] 1957년에 복원되었고, 1987년에는 "대염의 난에 순절한 사람들의 비"가 건립되었다.[13] 매년 3월 29일에 위령법요가 거행된다.[13]

5. 평가 및 영향

결론적으로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과감한 행동은 실패로 끝났다. 3,000채가 넘는 가옥이 불타고 3만~4만 석의 쌀이 파괴되었다.[5] 그의 추종자 대부분은 자결했고, 체포된 29명의 폭도 중 5명만이 심문을 견뎌 살아남았다. 생존자들은 소금에 절여져 십자가에 못 박혔다.[6]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정치적 프로그램과 전략이 무엇이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유교 이념에 따라 백성을 돕고자 했을 가능성이 있다. 긍정적인 결과로는 국제 정치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976년(쇼와 51년) 대염사건연구회는 오사카시 니시구 우츠보혼마치 1정목 18번지 12호(텐리쿄 가시키부분교회 부지 내)에 오시오 부자의 최후를 기리는 추도비를 세웠다.[13][15] 비에는 "대염 평팔랑 최후의 장소"라고 새겨져 있으며, 크기는 가로 2.24m, 세로 1.13m이다.[15] 이 비는 원래 최후의 장소인 아부라가케초의 미키치야 터가 있던 도로의 북쪽 길에 북쪽을 향해 있었으나, 2021년 우츠보 공원으로 이전되었다.[15]

전재로 파손되었던 오시오 헤이하치로와 그의 아들 가쿠노스케의 묘는 1890년(메이지 30년)에 오사카시 키타구의 성정사에 세워졌으며, 1957년에 복원되었다.[13] 1987년(쇼와 62년)에는 묘 옆에 "대염의 난에 순절한 사람들의 비"가 건립되었다.[13] 매년 3월 29일에는 위령법요가 거행된다.[13]

(오사카시니시구)

오시오 헤이하치로는 여러 인물들과 교류하며 영향을 주고받았다.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인물관계 및 내용
시노자키 산토유학자, 시노자키 쇼치쿠의 양부.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초독(初讀) 스승.
시바타 간베에(柴田勘兵衛)오사카 다마즈쿠리구(玉造口) 정번여력(定番与力). 오시오의 사분리류(佐分利流) 창술(槍術) 스승.
라이 산요오시오와 교우하며 한시를 남김. 오시오의 난 5년 전에 사망.
시노자키 쇼치쿠라이 산요의 절친. 오사카의 사숙 매화사숙(梅花社塾)을 계승한 유학자. 오시오와 친밀하게 교류.
하야시 주쓰사이막부 유관(幕府儒官), 대학두(大学頭). 오시오는 막정(幕政) 개혁 건의서의 수신인을 주쓰사이(述斎)로 함.
사토 잇사이덴포(天保) 연간 무렵 오시오와 함께 소수의 양명학자(陽明学者). 서신으로 교류.
곤도 주조에조지(蝦夷地) 탐험가. 오시오와 교류. 아들 곤도 도미조는 오시오의 중개로 창술(槍術)을 배움.
오카다 한코화가, 오카다 베이산진의 아들. 오시오, 라이 산요와 친교. 오시오의 난으로 투옥.
오쿠라 나가쓰네분고국(豊後国) 히타(日田) 출신 농학자. 오시오와 교류.
이카이 게이쇼교토(京)의 절충학(折衷学) 파 노유학자(老儒者). 라이 산요와 친밀. 오시오와는 관계 악화.
아이다 시게아타천문학자, 란학자(蘭学者). 오시오에게 천체 관측 기술을 가르침.
사카모토 겐노스케(坂本鉉之助)오사카 다마즈쿠리구(玉造口) 정번여력(定番与力). 오시오의 난 진압 주역.
혼다 다이스케(本多為助)오사카 다마즈쿠리구(玉造口) 정번여력(定番与力). 오시오의 난 진압에 공헌.
아시카이 히로쿠니이세 게궁(伊勢外宮) 곤네기(権禰宜), 국학자(国学者). 오시오와 교류.
오카모토 가테이에도(江戸)의 간정방(勘定方) 역인. 오시오와 교류.
사이토 세쓰도이세국(伊勢国) 쓰번(津藩) 시. 주자학자(朱子学者).
히라마쓰 라쿠사이이세국(伊勢国) 쓰번(津藩) 시. 유학자. 오시오와 친밀하게 교류.
무토 규에몬(武藤休右衛門)오사카 니시마치부교(大坂西町奉行) 신미 마사미치(新見正路)의 노신(老臣). 오시오와 친밀.
구와바라 기타로미토번(水戸藩) 시, 후지타 도코의 매부. 오시오와 교류.


6. 저서

오시오 헤이하치로는 은거 후 학업에 전념하여 세심동에서 제자들을 지도했다. 에도의 양명학자인 사토 이치사이와는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자주 서신을 교환했다.[8] 오시오의 양명학은 ‘지행합일’을 중심 사상으로 삼았으며, ‘중사이(中斎) 학파’라 불리는 학파를 형성할 정도로 성장했다.[8]

7. 참고 문헌

이전 출력에서 "참고 문헌" 섹션은 주어진 원본 소스의 내용과 부합하지 않아 출력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이는 잘못된 판단입니다. 원본 소스는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에 관련된 인물 목록을 제공하고 있으며, 이는 '참고 문헌' 섹션보다는 '관련 인물' 섹션에 더 적합합니다. 그러나 '관련 인물' 섹션이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참고 문헌' 섹션에 해당 인물 목록을 표 형태로 제시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다음은 수정된 출력입니다:

(참고: 아래 내용은 '참고 문헌' 섹션에 포함될 내용입니다. 섹션 제목 자체는 출력하지 않습니다.)

이름직책주요 활동 및 최후
세다 스미노스케
(瀬田済之助)
오사카 동정봉행(東町奉行)조 유력(与力)동(東)조 유력(与力) 테라니시케(寺西家) 출신. 난(亂)에서는 본대(本隊) 및 총군(総軍)의 장(將)을 맡음. 난(亂) 후 주민(村民)에게 몰려 교살(縊死). 사후 참형(磔刑).
고이즈미 후치지로
(小泉淵次郎)
오사카 동정봉행(東町奉行)조 유력(与力)야마토 군산번(大和郡山藩)사 아오키씨(青木氏) 출신. 난(亂) 당일 봉행(奉行)의 수세(手勢)에 의해 참살(斬殺). 사후 참형(磔刑).
오이 쇼이치로
(大井正一郎)
오사카 타마즈쿠리구치(玉造口) 정번(定番) 유력(与力) 오이 덴자베에(大井伝次兵衛)의 적남(嫡男)난(亂)에서 선봉(先鋒)에 참여. 난(亂) 후 체포되어 병사(病死). 사후 참형(磔刑). 부모에게 파문(勘當)당한 것으로 처리.
타케가미 만타로
(竹上万太郎)
오사카 유봉행(弓奉行)조 동심(同心)오시오의 최고참 문인(門人) 중 한 명. 난(亂) 당일 도망. 유일하게 생존하여 참형(磔刑).
와타나베 요자에몬
(渡辺与左衛門)
오사카 동정봉행(東町奉行)조 동심(同心)난(亂)에 참가. 오시오 부자(父子)를 따른 마지막 한 사람. 할복(切腹). 사후 참형(磔刑).
쇼지 기자에몬
(庄司儀左衛門)
오사카 동정봉행(東町奉行)조 동심(同心)난(亂)에 참가. 부상 후 체포. 옥사(獄死). 사후 참형(磔刑).
곤도 카지고로
(近藤鎰五郎)
오사카 동정봉행(東町奉行)조 동심(同心)난(亂)에 참가. 자택(自宅) 폐허(焼け跡)에서 할복(切腹). 사후 참형(磔刑).
히라야마 스케지로
(平山助次郎)
오사카 동정봉행(東町奉行)조 동심(同心)일통(一統) 가맹(加盟) 후 이탈(離反). 난(亂) 전날 에도(江戸)로 출발. 자살. 재판(裁定)에서 참형(磔刑) 판결.
요시미 쿠로에몬
(吉見九郎右衛門)
오사카 동정봉행(東町奉行)조 동심(同心)일통(一統) 가맹(加盟) 후 이탈(離反). 밀고(密訴). 재판(裁定)에서 참형(磔刑) 판결.
요시미 에이타로
(吉見英太郎)
요시미 쿠로에몬(吉見九郎右衛門)의 아들센신도(洗心洞) 기숙. 격문(檄文) 인쇄. 난(亂) 당일 탈출하여 고발, 포상(褒賞).
카와이 고자에몬
(河合郷左衛門)
오사카 동정봉행(東町奉行)조 동심(同心) 수습(見習)일통(一統) 가맹(加盟) 후 도주(出奔). 행방불명.
카와이 야소지로
(河合八十次郎)
카와이 고자에몬(河合郷左衛門)의 아들센신도(洗心洞) 기숙. 요시미 에이타로(吉見英太郎)와 함께 탈출, 고발, 포상(褒賞).
야스다 도쇼
(安田東 প্রকৃতপক্ষে)
이세 게궁(伊勢外宮) 온시(御師)센신도(洗心洞) 입문. 난(亂)에 종군(従軍) 후 도망, 체포. 병사(病死).


참조

[1] 문서 Lü Kun and Wang Yangming's theories
[2] 문서 Yoriki in Feudal Japan
[3] 문서 Ōmi Province and Shiga Prefecture
[4] 문서 Metaphysics
[5] 문서 Koku (石 高) in Japan
[6] 문서 Crucifixion in Ancient Japan
[7] 웹사이트 吹田市立博物館博物館だよりNo.79 令和元年度(2019年度)秋季特別展 大塩平八郎展 四海困窮いたし候はば・・・ http://www2.suita.ed[...] 吹田市立博物館 2021-11
[8] 웹사이트 なにわ大坂をつくった100人 第20話 大塩平八郎 https://www.osaka21.[...] 公益財団法人 関西・大阪21世紀協会 2021-11-06
[9] 간행물 『日本教育家文庫』第34巻 https://dl.ndl.go.jp[...] 北海出版社 1937-00-00 # 昭12 (Showa 12) is 1937. Unable to determine exact date.
[10] 문서 切支丹の摘発と腐敗役人糾弾
[11] 웹사이트 大塩平八郎の乱|日本大百科全書・国史大辞典|ジャパンナレッジ https://japanknowled[...] 2021-11-06
[12] 뉴스 19世紀後半、黒船、地震、台風、疫病などの災禍をくぐり抜け、明治維新に向かう(福和伸夫) https://news.yahoo.c[...] 2020-08-24
[13] 웹사이트 大塩平八郎の乱|日本大百科全書・国史大辞典|ジャパンナレッジ https://japanknowled[...] 2021-11-06
[14] 웹사이트 大阪歴史博物館 特集展示「天保の光と陰」を開催します https://www.city.osa[...] 2021-11-06
[15] 웹사이트 「大塩平八郎終焉の地」石碑が靱公園に 移設費用募る:朝日新聞デジタル https://www.asahi.co[...] 2021-11-06
[16] 논문 大塩平八郎物実録の展開とその受容 https://doi.org/10.2[...] 日本近世文学会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