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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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요 제국은 요루바족이 세운 강력한 제국으로, 1400년경에 건국되어 18세기에는 전성기를 누렸다. 오요 제국은 이페 왕국의 마지막 왕자 오라니얀이 건국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으며, 사하라 무역과 노예 무역을 통해 성장했다. 오요는 기병대를 중심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했고, 정치적으로는 알라아핀(왕)과 오요 메시(의회), 오그보니(비밀 결사)의 견제와 균형을 통해 통치되었다. 19세기에 소코토 제국의 침략과 이로린 왕국의 독립, 다호메이 왕국의 반란으로 쇠퇴하여 1830년경 멸망했으며, 1905년 영국령 남나이지리아 보호령에 병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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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요 제국 | |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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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오요 제국 |
일반 명칭 | 오요 제국 |
상태 | 제국 |
존속 기간 | 1600년경 – 1836년경 |
정치 체제 | 헌법에 따른 세습 군주제, 선거군주제적 특징 |
종교 | 요루바 종교, 이슬람교, 기독교 |
수도 | 오요-일레 (1600년~1835년) 이그보호 (1600년) |
공용어 | 요루바어 |
건국 시기 | 1400년 |
멸망 시기 | 1905년 |
통치자 | |
왕조 | 오라얀 가문 |
통치자 칭호 | 알라핀 |
초대 통치자 | 아데예미 1세 알로울루두 |
재위 기간 | ????–1896년 |
주요 가문 | 알로울루두 (오요) 아군로예 (오요) 올루요레 (이바단) 오나 아카 (오요) 아폰자 (일로린) |
주요 인물 | 아비오둔 올루요레 칸디도 다 폰세카 갈바오 |
기타 칭호 | 오요의 오바 오요의 오바 오비린 오요의 이바 바쇼룬 오요의 이바 아레 오나 카칸포 오요의 이바 오요의 오로예 오요의 오모바 오요의 올로오리 |
스타일 | 카비예시, 폐하, 황실 전하 |
모토 | "아키이 르'오바 핀 랄레데 오요, 오 야 에 제 아 로오 레 알라핀" (요루바어로 "오요, 알라핀의 후손") |
관련 왕가 | 이페 왕가 베닌 왕가 |
종교 | 이파, 기독교, 이슬람교 |
입법부 | 오요 메시와 오그보니 |
면적 | |
면적 측정 시기 | 1680년 |
면적 | 150,000 제곱킬로미터 |
역사적 변천 | |
건국 | 1400년 |
멸망 | 1905년 |
현재 국가 | |
현재 국가 | 요루발랜드 나이지리아 베냉 |
이전 국가 | |
이전 국가 | 이페 제국 |
후대 국가 | |
후대 국가 | 이바단 에그바 연합 정부 일로린 에미리트 |
2. 역사적 배경
오요 제국은 이페를 건국한 오두두와 왕의 막내 아들인 오라니얀 왕이 건국했다고 전해진다. 1400년경에는 이미 건국되어 있었으며, 하우사 제왕국과 송가이 제국에 인접한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사하라 무역에 참여하여 세력을 키웠다. 유럽인들이 등장하자 노예 무역으로 더욱 힘과 부를 축적했고, 그 부로 기병대를 만들어 군사력을 증강하여 16세기 말에는 이페를 능가하고 요르바 제국을 지배하게 되었다.[3][4]
요르바인의 왕국을 통일한 오요 왕국은 남쪽으로 세력을 더욱 확장하여 1728년에는 다호메 왕국을 복속시켰다. 이 무렵부터 1세기 동안은 오요 왕국의 황금기였다.
19세기에 들어서 북쪽의 하우사 제왕국을 멸망시킨 소코토 제국이 지하드를 선포하고 오요로 침공했으나 간신히 막아냈다. 그러나 북쪽의 이로린 왕국이 이 혼란을 이용하여 독립했고, 서쪽의 다호메 왕국이 종속 관계를 해제하고 오요 왕국을 공격하여 1830년에는 오요 왕국이 거의 멸망하고 주민들은 흩어졌다. 그 후에도 명맥을 유지했지만, 과거의 번영을 되찾지는 못하고 1905년에 영국령 남나이지리아 보호령에 병합되어 멸망했다.
2. 1. 전설과 기원
오라니얀(오라미얀으로도 알려짐)은 이페의 요루바 왕국의 마지막 왕자로, 오요 제국의 전설적인 기원으로 여겨진다. 구전 전통에 따르면, 오라니얀은 그의 아버지이자 최초의 이페의 오오니인 오두두와를 모욕한 북쪽 이웃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형제와 협정을 맺었다. 전투를 위해 이동하던 중, 형제들은 다투었고 군대는 분열되었다.[3] 오라니얀의 군대는 성공적인 공격을 하기에는 너무 적었기 때문에, 그는 니제르 강 남쪽 해안을 따라 부사에 도착할 때까지 방황했다. 그곳에서 지역 우두머리는 그를 환대하고 목에 마법 부적이 달린 큰 뱀을 제공했다.우두머리는 오라니얀에게 뱀이 7일 동안 멈춰서 땅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따라가라고 지시했다. 오라니얀은 조언을 따랐고, 뱀이 멈춘 곳에 오요를 세웠다. 그 장소는 아자카로 기억된다. 오라니얀은 오요를 그의 새로운 왕국으로 만들고 "오요의 알라아핀"이라는 칭호를 가진 최초의 "오바"(요루바어로 "왕" 또는 "통치자"를 의미)가 되었다 (알라아핀은 요루바어로 "궁전의 소유자"를 의미). 그는 그의 모든 보물을 이페에 남겨두고 다른 왕이 그곳에서 통치하도록 허락했다.[4]
한때, 오요-일레는 당시 건설 중이던 새로운 도시를 정복하려던 보르구의 바리바와 전쟁을 벌였다. 일라의 오랑군 아자군라(오라니얀의 형)가 그의 부하들과 함께 지원하러 왔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라니얀은 타파(누페족)의 토로시 공주와 아들 아주원 아자카를 낳았고, 훨씬 후에 아랍암비도 같은 여자에게서 태어났다. "상고"라는 이름은 외할아버지가 지어주었거나 천둥의 신을 가리키는 현지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여겨진다. 어느 쪽이든 왕실은 천둥(자쿠타)과 전쟁(오군)의 영들에게 헌신했다.
전설에 따르면 이페(Ifè)를 건국한 오두두와(Oduduwa) 왕의 막내 아들인 오라니얀(Oranyan) 왕이 1400년경 오요 제국을 건국했다고 전해진다.
2. 2. 제국 이전 시대 (13세기~1535년)
오요는 1300년에 건국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는 정확한 연대는 아니다. 전설에 따르면 오요는 이페를 건국한 오두두와 왕의 막내 아들인 오라니얀 왕이 건국했다고 한다. 1400년경에는 이미 건국되어 있었으며, 하우사 제왕국과 송가이 제국에 인접한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사하라 무역에 참여하여 세력을 키웠다. 유럽인들이 등장하자 노예 무역으로 더욱 힘과 부를 축적했다. 그 부로 기병대를 만들어 군사력을 증강하여 16세기 말에는 이페를 능가하고 요르바 제국을 지배하게 되었다.2. 2. 1. 누페의 점령 (1535년경)
오요의 초대 오바(왕) 오라니미얀의 뒤를 이어 아자카가 오요의 알라아핀이 되었다. 아자카는 요루바족의 군사적 미덕이 부족하고 부족장들에게 너무 많은 자치권을 허용했기 때문에 폐위되었다.[5] 그 후, 아자카의 동생인 상고(Shango)에게 지도자의 자리가 주어졌고, 그는 나중에 천둥과 번개의 신으로 신격화되었다. 상고가 죽은 후 아자카가 복위되었다. 아자카는 복위 후 전쟁에 훨씬 더 적극적으로 임했다. 그의 뒤를 이은 코리는 나중의 역사가들이 대도시 오요라고 부르게 되는 지역의 나머지 부분을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4]2. 3. 제국 시대 (1608년~1800년)
오요 제국은 전설에 따르면 이페(Ifè)를 건국한 오두두와(Oduduwa) 왕의 막내아들인 오라니얀(Oranyan) 왕이 건국했다고 전해진다. 1400년경에는 이미 건국되어 있었으며, 하우사 제왕국(Hausa kingdoms)과 송가이 제국(Songhai Empire)에 인접한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사하라 무역(Saharan trade)에 참여하여 세력을 키웠다. 유럽인(Europeans)이 등장하자 노예 무역으로 더욱 힘을 키우고 부를 축적했다. 그 부로 기병대를 만들어 군사력을 증강하여 16세기 말에는 이페를 능가하고 요르바 제국을 지배하게 되었다.19세기에 들어서 북쪽의 하우사 제왕국을 멸망시킨 소코토 제국(Sokoto Caliphate)이 지하드(Jihad)를 선포하고 오요로 침공했지만, 간신히 막아냈다. 그러나 북쪽의 이로린 왕국(Ilorin Kingdom)이 이 혼란을 이용하여 독립했고, 서쪽의 다호메 왕국(Dahomey Kingdom)이 종속 관계를 해제하고 오요 왕국을 공격하여 1830년에는 오요 왕국이 거의 멸망하고 주민들은 흩어졌다. 그 후에도 명맥을 유지했지만, 과거의 번영을 되찾지는 못하고 1905년에 영국령 남나이지리아 보호령(Southern Nigeria Protectorate)에 병합되어 멸망했다(오요주(Oyo State)).
2. 3. 1. 재정복과 확장
오요는 14세기 말까지 강력한 내륙 세력으로 성장했다. 1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요루바 왕국은 이웃 국가들을 희생시키며 확장했다. 오니그보기(Onigbogi) 통치 시대에 오요는 츠오에데(Tsoede)가 이끄는 누페(Nupe)에게 군사적으로 패했다.[7] 1535년경 누페는 오요를 점령하고 지배 왕조를 보르구(Borgu) 왕국으로 망명하게 만들었다.[8] 누페는 수도를 파괴하여 17세기 초까지 오요를 지역 강국으로서의 지위에서 몰락시켰다.[9]누페족에게 패배한 후, 오요 요루바족은 80년 동안 망명 왕조로서 혼란기를 겪었다. 그들은 이전보다 더 중앙집권적이고 광대한 오요를 재건했다. 이들은 광대한 영토에 걸쳐 권력을 확립한 정부를 수립했다.[8] 17세기 동안 오요는 장기간의 성장을 시작하여 주요 제국이 되었다.[9] 오요는 모든 요루바족을 아우르지는 않았지만, 요루바 역사상 가장 인구가 많은 왕국이었다.[10]
요루바족이 오요를 재건하는 데 중요한 요소는 강력한 군사력과 중앙집권적인 정부였다. 요루바족은 "타파(Tapa)"라고 부르던 누페족에게서 영감을 얻어 갑옷과 기병으로 재무장했다.[8] 오요의 알라아핀(Alaafin)인 오바 오핀란(Oba Ofinran)은 누페족으로부터 오요의 원래 영토를 되찾는 데 성공했다.[7] 새로운 수도인 오요-이그보호(Oyo-Igboho)가 건설되었고, 원래의 수도는 구 오요(Old Oyo)로 알려지게 되었다.[7] 다음 오바인 에구구조(Eguguojo)는 거의 모든 요루바 땅을 정복했다.[7] 그 후 오바 오롬포토(Orompoto)는 누페족을 완전히 멸망시키기 위한 공격을 이끌어 오요가 다시는 누페족의 위협을 받지 않도록 했다.[7] 오바 아지보예데(Ajiboyede) 치세 동안에는 왕국에 평화를 기념하는 베레(Bere) 축제가 처음으로 열렸다. 정기적으로 열린 이 축제는 오요가 멸망한 후에도 요루바족 사이에서 오랫동안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7]
그의 후계자인 아비파(Abipa) 치하에서 요루바족은 오요-일레(Oyo-Ile)에 다시 정착하고 원래의 수도를 재건했다.[7] 오요는 1578년에서 1608년 사이에 베닌 왕국(Kingdom of Benin)을 정복하려 했지만, 에키티(Ekiti)의 산악 지형 때문에 기병 부대의 베닌 공격이 막히면서 실패했다. 에키티의 몇몇 왕국이 오요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오툰 에키티(Otun Ekiti)는 오요와 베닌 사이의 완충 독립 도시 역할을 했다.[7] 그러나 오요는 계속 확장을 거듭했다. 오요는 오요 대도시 남동쪽의 비요루바 지역에 자치권을 허용했는데, 이 지역은 오요와 베닌 사이의 완충지대로 기능할 수 있었다.[11] 16세기 말까지 현 베냉 공화국의 에웨족(Ewe people)과 아자족(Aja people) 국가들은 오요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다.[12]
요루바인의 왕국을 통일한 오요 왕국은 남쪽으로 세력을 더욱 확장하여 1728년에는 다호메 왕국(Dahomey Kingdom)을 복속시켰다. 이 무렵부터 1세기 동안은 오요 왕국의 황금기였다.
2. 3. 2. 조직
오요는 14세기 말까지 강력한 내륙 세력으로 성장했다. 1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요루바 왕국은 이웃 국가들을 희생시키며 확장했다. 오니그보기 통치 시대에 오요는 츠오에데가 이끄는 누페에게 군사적으로 패했다.[7] 1535년경 누페는 오요를 점령하고 지배 왕조를 보르구 왕국으로 망명하게 만들었다.[8] 누페는 수도를 파괴하여 17세기 초까지 오요를 지역 강국으로서의 지위에서 몰락시켰다.[9]누페족에게 패배한 후 오요 요루바족은 80년 동안 망명 왕조로서 혼란기를 겪었다. 그들은 이전보다 더 중앙집권적이고 광대한 오요를 재건했다. 이들은 광대한 영토에 걸쳐 권력을 확립한 정부를 수립했다.[8] 17세기 동안 오요는 장기간의 성장을 시작하여 주요 제국이 되었다.[9] 오요는 모든 요루바족을 아우르지는 않았지만, 요루바 역사상 가장 인구가 많은 왕국이었다.[10]
초기에는 사람들이 오요 대도시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제국의 확장과 함께 오요는 요루바족 내부와 외부의 광대한 영토를 더 잘 관리하기 위해 재편되었다. 제국 중심부와의 관계에 따라 정의된 네 개의 계층으로 나뉘었다.[22] 이 계층들은 오요 대도시 지역, 남부 요루바족 지역, 에그바도 회랑, 그리고 아자 지역이었다.
3. 정치 구조
오요 제국은 넓은 영토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정교한 정치 구조를 발전시켰다. 학자들은 누페족의 침략 이전에 이 구조가 얼마나 존재했는지 아직 밝혀내지 못했지만, 17세기 초 망명에서 돌아온 후 오요는 더욱 호전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오바(왕)에게 부과된 기준과 그의 측근들의 역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오요의 정치 체제는 최고 통치자인 알라아핀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지만, 그의 권력은 무제한이 아니었다. 왕의 권력은 오요 메시(Oyo Mesi)와 오그보니(Ogboni)라는 두 의회에 의해 견제되었다.[29] 오요 메시는 정치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했고, 오그보니는 종교적 권위를 바탕으로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했다.[28]
- 오요 메시: 7명의 주요 의원으로 구성된 의회로, 왕을 선출하고 법을 제정하는 권한을 가졌다. 바쇼룬이 의회를 이끌었으며, 독재를 방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 오그보니: 종교적 권위를 가진 비밀결사로, 민중의 여론을 대변하여 오요 메시를 견제했다.
이러한 정치 구조는 권력의 균형을 유지하고, 어느 누구도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였다.
3. 1. 오요의 알라아핀(Alaafin of Oyo)

오요의 알라아핀(Alaafin, 요루바어로 '궁궐의 주인')은 오요 제국의 수장이자 백성들의 최고 지배자였다.[25] 알라아핀은 속국을 외부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고, 하급 통치자들 사이의 분쟁을 중재하는 책임을 맡았다.[25] 또한 부하들에게 명예와 선물을 주어야 했다.[25]
모든 하급 통치자들은 알라아핀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매년 열리는 베레(Bere) 축제에서 충성을 갱신해야 했다.[23] 베레 축제 후 3년간 요루바 땅에 평화가 지속될 것으로 여겨졌다.[23]
알라아핀은 축출될 수는 없었지만, 백성들이 더 이상 원하지 않을 경우 자살을 강요받을 수 있었다. 이는 바쇼룬(총리)이 빈 조롱박이나 앵무새 알 접시를 보이며 ''아원 에니얀 쿠''(Awon Eniyan Koo, 백성이 당신을 거부하고, 세상이 당신을 거부하며, 신들 또한 당신을 거부한다)라는 거부 판결을 내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전통에 따라 알라아핀은 자결해야 했다.[26]
3. 1. 1. 바쇼룬
바쇼룬(Bashorun)은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오요 제국의 핵심 정치 직책으로, (흔히 총리 겸 국왕의 찬셀러에 비유됨) 이바리바(Ibariba) 가문이 장악했다. 오요 메시 의회의 최고위 7명의 비왕족 귀족들을 이끌었던 바쇼룬은 왕에게 조언하고 비왕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새 왕의 선출에서 그들의 권력은 막강했다. 1570년부터 1750년까지 여러 바쇼룬들은 이바리바 또는 요루바가 아닌 출신이었는데, 예를 들어 바쇼룬 마가지(Magaji), 보루다(Woruda), 비리(Biri), 얌바(Yamba), 잠부(Jambu), 가아(Gaa) 등이 있다.바쇼룬의 직무는 전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국가를 위한 군사 작전을 지휘했다. 그들의 지위는 알라아핀 다음으로 높았다.[45]
3. 1. 2. 알라아핀의 선출
요루바어로 '궁궐의 주인'이라는 뜻을 가진 오요의 알라아핀(Alaafin)은 제국의 수장이자 백성들의 최고 지배자였다.[25] 알라아핀은 속국을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키고, 하급 통치자들 사이의 내분을 해결하며, 하급 통치자들과 그들의 백성 사이를 중재하는 책임을 맡았다.[25] 또한 자신의 부하들에게 명예와 선물을 주어야 했다.[25]오요 제국은 순수한 세습 군주국도, 절대 군주국도 아니었다.[25] 오요 메시(Oyo Mesi)가 알라아핀을 선출했다. 알라아핀은 항상 전임자와 밀접한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었지만, 오두두와의 아들인 오라미얀의 후손이어야 했고, 오나 이소쿤(Ona Isokun) 구역(세 개의 왕족 구역 중 하나) 출신이어야 했다.[25] 오요 제국 초기에는 알라아핀의 장남이 보통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했다. 이는 때때로 아레모(Aremo)로 알려진 왕세자가 아버지의 죽음을 서두르게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일을 막기 위해, 왕세자는 아버지가 죽으면 의례적인 자살을 하도록 하는 전통이 생겼다. 계승과는 별개로, 아레모는 그 자체로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관습에 따라 알라아핀은 중요한 축제 기간을 제외하고는 궁궐을 떠나지 않았는데, 이는 실제로 그의 권력을 제한했다. 반대로 아레모는 종종 궁궐을 떠났다. 이에 대해 저명한 역사가 사무엘 존슨은 "아버지는 궁궐의 왕이고, 아들은 일반 대중을 위한 왕이다"라고 말했다.[27] 알라아핀의 권력을 견제했던 두 개의 의회는 강력한 통치자의 뒤를 이어 약한 알라아핀을 선출하여 그 직책이 너무 강력해지는 것을 막으려 했다.[28]
3. 2. 일라리(Ilari)
오요의 알라핀은 종교 및 정부 관리들을 임명했는데, 이들은 대개 내시였다.[29] 이 관리들은 머리의 절반을 깎고 마법적인 물질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바르는 관습 때문에 '일라리'(ilari) 또는 반쪽 머리로 알려졌다.[30] 수백 명의 일라리는 남녀 성별로 균등하게 나뉘었다.[30] 일라리의 하급 구성원들은 잡일을 했고, 상급 구성원들은 경비원으로 일하거나 때로는 제사를 통해 저승과 소통하는 사자 역할을 했다.[30] 그들의 직함은 '오바 롤루'(oba l'olu, "왕이 최고다") 또는 ''("그에게 반대하지 마라")와 같이 왕과 관련이 있었다.[30] 그들은 지위의 증표로 빨간색과 녹색 부채를 들고 다녔다.[30]오요의 모든 하급 법원에는 스파이이자 세금 징수원으로 활동하는 일라리가 있었다.[23] 오요는 이들을 다호메이와 에그바도 회랑을 방문하고 때로는 거주하여 세금을 징수하고 다호메이의 군사적 성공을 감시하여 오요의 알라핀이 그 몫을 얻도록 했다.[31]
3. 3. 의회
오요 제국은 넓은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복잡한 정치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학자들은 누페족의 침략 이전에 이 체제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 17세기 초 망명에서 돌아온 후, 오요는 더욱 호전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공격적인 요루바 문화의 영향은 오바(왕)에게 부과된 기준과 그의 측근들의 역할에서 잘 드러난다.오요의 알라아핀(Alaafin of Oyo)은 최고 통치자였지만, 그의 권력은 무제한이 아니었다. 오요 메시(Oyo Mesi)와 요루바족의 토착 신앙인 오그보니(Ogboni)가 오바(왕)의 권력을 견제했다.[29] 오요 메시는 정치인들의 목소리를, 오그보니는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종교적 권위를 바탕으로 힘을 행사했다.[28] 알라아핀이 오요 메시와 오그보니에 대해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지는 그의 인격과 정치적 능력에 달려 있었다.
- 오요 메시: 오요 왕국의 7명의 주요 의원으로 구성된 의회로, 왕을 선출하고 법을 만드는 권한을 가졌다. 바쇼룬이 의회를 이끌었으며, 독재를 막는 역할을 했다.
- 오그보니: 종교적 권위를 가진 비밀결사로, 민중의 여론을 대변하여 오요 메시를 견제했다.
3. 3. 1. 오요 메시(Oyo Mesi)
오요 메시(Oyo Mesi)는 오요 왕국의 7명의 주요 의원으로 구성된 의회였다. 이들은 왕을 선출하는 위원회를 구성하고 법을 만드는 권한을 가졌다. 총리 역할을 한 바쇼룬이 오요 메시를 이끌었으며, 아가바킨(Agbaakin), 사무(Samu), 알라피니(Alapini), 라구나(Laguna), 아키니쿠(Akiniku), 아시파(Ashipa)가 구성원이었다. 이들은 국가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제국의 이익을 보호하는 중요한 책임을 맡았다. 알라아핀(오요의 왕)은 국가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문제가 있을 때마다 오요 메시와 상의해야 했다.[32] 각 의원은 매일 아침과 오후에 궁궐에서 수행해야 할 국가적 의무가 있었고, 부득이한 경우에는 대리인을 보낼 수 있었다.오요 메시는 알라아핀의 권력을 견제하여 독재를 막는 역할을 했으며, 17세기와 18세기에는 많은 알라아핀들이 오요 메시의 압력으로 자살하기도 했다.[32]
오요 메시 의회의 수장인 바쇼룬은 왕위 계승 전에 이파 신탁을 통해 신의 승인을 구했다. 따라서 오요의 새로운 알라아핀은 신에 의해 임명된 것으로 여겨졌으며, "신의 대리인"을 의미하는 ''에케지 오리사(Ekeji Orisa)''로 불렸다. 바쇼룬은 새로운 알라아핀 임명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가졌고, 그의 권력은 왕과 거의 동등했다. 예를 들어, 바쇼룬은 많은 종교 축제를 주관했으며, 군 최고 사령관으로서 상당한 종교적 권위를 가졌다.
바쇼룬의 주요 책임 중 하나는 매우 중요한 오룬(Orun) 축제였다. 매년 열리는 이 종교적 점복 의식에서 오요 메시 의원들은 알라아핀이 여전히 자신들의 신임을 받고 있는지 확인했다. 만약 의회가 알라아핀에 대한 불만을 결정하면, 바쇼룬은 알라아핀에게 빈 조롱박이나 앵무새 알을 건네 자살을 요구했다. 알라아핀은 법적으로 폐위될 수 없었기 때문에 이것이 알라아핀을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조롱박이나 앵무새 알을 받은 알라아핀, 그의 장남인 아레모(Aremo), 그리고 오요 메시 내 그의 개인 고문인 아사무(Asamu)[32]는 모두 자살하여 정부를 갱신해야 했다. 자살 의식은 오룬 축제 기간에 이루어졌다.
3. 3. 2. 오그보니(Ogboni)
오요 메시는 정치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했고, 오그보니는 민중을 대변하며 종교적 권위를 바탕으로 힘을 행사했다.[28] 알라핀의 오요 메시와 오그보니에 대한 영향력은 그의 인격과 정치적 수완에 달려 있었다.오요 메시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오고보니는 종교적 권위에 뒷받침된 대중 여론을 대표했고, 따라서 오요 메시의 견해는 오고보니에 의해 조절될 수 있었다. 알라핀과 오요 메시의 권력에는 견제와 균형이 존재했으며, 따라서 아무도 절대적인 권력을 독점하지 못했다. 오고보니는 나이, 지혜, 종교 및 정치적 사안에서의 중요성으로 유명한 귀족 자유민들로 구성된 매우 강력한 비밀결사였다.[29] 그 구성원들은 종교적 지위 때문에 일반 백성에 대한 막대한 권력을 누렸다. 이 기관이 얼마나 널리 퍼져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는 요루바 랜드 내 거의 모든 하급 법원에 오고보니 의회가 있었고(그리고 여전히 있다)는 사실이다.[29] 토지 숭배와 관련된 의무 외에도, 그들은 피를 흘린 사건을 다루는 모든 사건을 심판할 책임이 있었다.[29] 오고보니의 지도자인 올루우오(Oluwo)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든 오요의 알라핀에게 직접 접근할 수 있는 무제한적인 권리를 가졌다.[29]
4. 군사
오요 제국의 군대는 고도로 전문화되어 있었다.[33] 군사적 성공은 기병대뿐만 아니라 오요 장교와 전사들의 용맹함 덕분이었다.[33] 오요는 주요 지리적 중심지가 숲 북쪽에 있어 농업이 발달했고, 이는 인구 증가로 이어져 대규모 군대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33] 또한, 오요에는 승리가 필수이고 패배는 자살과 같다는 군사 문화가 깊이 뿌리내려 있었다.[28] 이러한 정책은 오요 장군들의 공격적인 군사 행동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28]
4. 1. 기병
오요 제국은 요루바 국가 중 유일하게 기병을 채택했는데, 이는 영토 대부분이 북쪽 사바나에 위치했기 때문이다.[15] 기병의 기원은 불분명하지만, 인접 지역의 누페족, 보르구 , 하우사족도 기병을 사용했으며, 동일한 역사적 기원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34] 오요는 북쪽에서 말을 구입하여 체체파리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오요 중심지에서 사육할 수 있었다.[35] 기병은 오요 제국의 강력한 무력이었다. 16세기 후반과 17세기의 원정대는 전적으로 기병으로 구성되었다.[15] 하지만 단점도 있었다. 오요는 남쪽에서는 기병 군대를 유지할 수 없었지만, 마음대로 남쪽을 급습할 수 있었다.[13][36]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오요는 10만 명에 달하는 기병을 보유하게 되어 서아프리카 전역의 많은 왕국과 제국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었다.[37]오요의 기병은 경기병과 중기병으로 나뉘었다.[15] 더 큰 수입마를 탄 중기병은 활과 화살로 무장했다.[15] 더 작은 토착 조랑말을 탄 경기병은 곤봉으로 무장했다.[38] 사슬갑옷은 북쪽에서 요루바 땅으로 수입되었으며, 오요 기병들이 착용했을 가능성이 있다.[39]
4. 2. 보병
오요 제국 주변 지역의 보병은 무기와 장비가 모두 균일했다. 이 지역의 모든 보병은 방패, 검, 창 등의 무기를 휴대했다.[13] 방패는 높이 약 1.22m, 너비 약 0.61m였으며 코끼리나 소 가죽으로 만들어졌다.[40] 약 90cm 길이의 무거운 검이 근접 전투용 주요 무기였다.[40] 요루바족과 그 이웃들은 약 30보 거리에서 정확하게 던질 수 있는 세 갈래의 잔가지가 달린 투창을 사용했다.[13]4. 3. 구조
오요 제국은 영토 확장을 위해 지역 군대와 조공군을 모두 사용했다.[33] 제국 이전 오요 군대의 구조는 단순했고 수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14세기 오요가 중심지역만 통치했을 때는 이 정도로 충분했지만, 더 멀리 정복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구조에 여러 변화가 필요했다.[33]4. 3. 1. 수도군
오요 제국의 군대는 높은 수준의 전문성을 갖추고 있었다.[33] 군사적 성공은 기병대는 물론 오요 장교와 전사들의 지도력과 용기 덕분이었다.[33] 주요 지리적 중심지가 숲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오요는 농업이 용이하여 인구가 꾸준히 증가했다.[33] 이는 오요가 꾸준히 대규모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던 데 기여했다. 또한 오요에는 승리는 필수적이고 패배는 자살이라는 의무를 수반하는 깊이 뿌리내린 군사 문화가 있었다.[28] 이러한 필사적인 정책은 의심할 여지 없이 오요 장군들의 공격적인 군사 행동에 기여했다.[28]오요 제국은 이전의 많은 제국들처럼, 영토 확장을 위해 지역 군대와 조공군을 모두 사용했다. 제국 시대 이전 오요 군대의 구조는 단순했고 수도 오요의 중앙 정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14세기 오요가 중심지역만 통치했을 때는 이 정도로 충분했을 수 있지만, 더 멀리 정복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구조에 여러 변화가 필요했다.
오요는 ''에소(Eso)'', ''에쇼(Esho)'', 또는 공식적으로는 이코이 에소라 불리는 특수 기병대를 상비군 형태로 유지했다.[41] 이들은 오요 메시(Oyo Mesi)가 지명하고 오요의 알라아핀(Alaafin of Oyo)이 승인한 70명의 하급 전쟁 지도자들이었다.[41] 에소는 출신 배경에 관계없이 군사 기술을 바탕으로 임명되었지만, 사실상 에소의 가계가 존재하기도 했다. 에소는 아레-오나-카칸포(Aare-Ona-Kakanfo)[28]의 지휘를 받았으며, 라틴어 속담인 인프라 디그니타템(infra dignitatem)에 비견될 만한 무사 계율을 따르는 것으로 유명했다.
4. 3. 2. 조공군
오요 제국은 영토 확장을 위해 지역 군대와 조공군을 모두 사용했다. 제국 시대 이전 오요 군대의 구조는 단순했고 수도 오요의 중앙 정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14세기 오요가 중심 지역만 통치했을 때는 이 정도로 충분했을 수 있지만, 더 멀리 정복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구조에 여러 변화가 필요했다.오요가 망명에서 돌아온 후, 최고 군사 사령관인 아레-오나-카칸포 직책이 설립되었다.[42] 그는 적을 감시하고 왕위를 찬탈하는 것을 막기 위해 중요한 국경 지방에 거주해야 했다.[28] 오요 제국 시대 동안, 아레-오나-카칸포는 모든 원정에서 직접 군대를 지휘했다.[28]
5. 문화
오요 제국의 문화는 상업, 건축, 민족 다양성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 상업 ===
오요는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는 무역의 남쪽 중심지였다. 소금, 가죽, 말, 콜라 열매, 상아, 직물, 노예 등이 거래되었다.[35] 오요 중심부의 요루바인들은 공예와 철제품 제작에 능숙했다.[35] 제국 안팎으로 드나드는 무역 상품에 대한 세금 외에도, 속국에 부과된 세금으로 오요는 부를 축적했다. 다호메이 왕국에 부과된 세금만으로 연간 1400만달러에 달하는 수입을 올렸다.[33] 식민지 시대 이전에 에수수(Esusuyo)는 요루바인들 사이에서 일종의 회전식 저축 및 신용 협회였으며, 18세기 알라핀 아비오둔 통치 시대 오요에서 행해졌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44]
=== 건축 ===
오요 제국의 건축 양식은 정교함이 돋보였다. 오요-일레(Oyo-Ile)의 엘리트 주택들은 거주자의 지위를 나타내는 정교한 조각들로 장식되었다. 조각가들은 집과 울타리를 정교하게 조각된 나무 기둥과 낮은 부조 문으로 꾸몄는데, 이는 중요한 사건을 묘사하여 권력을 과시하고 거주자들의 경험을 기념하는 역할을 했다.[45]
가장 정교하고 뛰어난 건축 예술 작품은 신에게 봉헌된 사원이었다. 샹고 신전이 대표적인 예시인데, 각 변이 약 약 18.29m인 정사각형 구조물로, 광택이 나는 진한 빨간색으로 칠해진 바닥과 벽이 특징이다. 휴 클래퍼턴(Hugh Clapperton)은 이를 "아프리카 내륙에서 이와 유사한 종류 중 가장 크고 기발하게 장식된 것"이라고 평가했다.[45]
오요 제국의 주변 지방에는 샹고에게 봉헌된 작은 규모의 건축물들이 세워졌다. 예를 들어, 일라로(Ilaro)의 한 사원은 둥근 기둥으로 지지되는 큰 정사각형 건물이었고, 기둥에는 칼과 방패, 권총을 든 남자 조각상들이 놓여 있었다. 클래퍼턴은 장인들의 뛰어난 기술을 언급하며, 그들의 조각 작품 중 일부는 정교함 면에서 유럽의 작품들과 견줄 만하다고 말했다.[45]
오요 궁전의 지지 기둥은 놋쇠로 만들어졌으며 높이는 약 2m였다. 전성기 오요 궁전의 지붕은 긴 복도 앞에 약 100개의 놋쇠 기둥으로 지탱되었다고 한다. 이 궁전은 19세기에 일로린 토후국에 의해 침략당하고 약탈당했다. 이 기둥들은 15세기경 알라핀 아간주(Alaafin Aganju) 통치 시대에 처음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일부 자료에서는 1750년에서 1780년 사이에 주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46]
오요에서는 문 또한 정교하게 주조되고 제작되었다. 오요에서 약탈한 큰 철문은 토후들에 의해 보관되고 전해져 내려왔으며, 18세기의 한 알라핀은 "침실의 일곱 개 입구에 은으로 만든 문 일곱 개를 만들었다"고 한다.
오래된 오요의 토기 파편 포장은 13세기에서 14세기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47]
=== 오요의 민족 다양성 ===
누페 위기 이후 오요는 더욱 다양한 인구 구성을 갖게 되었다. 재건된 제국에서는 요루바족이 여전히 주요 인구 집단이었다. 그 다음으로 영향력이 컸던 것은 이바리바족이었으며, 이 다민족 국가에는 누페족, 송하이족, 모시족이 합류했다. 오요 인구 중 이바리바족, 송하이족, 모시족의 얼굴 상처(scarification)는 1570년 이후 오요 정체성 형성에 있어 이러한 다민족적이고 다문화적인 통합을 보여주는 증거이다.[45]
5. 1. 상업
오요는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는 무역의 남쪽 중심지였다. 소금, 가죽, 말, 콜라 열매, 상아, 직물, 그리고 노예가 거래되었다.[35] 오요 중심부의 요루바인들은 공예와 철제품 제작에도 매우 능숙했다.[35]제국 안팎으로 드나드는 무역 상품에 대한 세금 외에도, 오요는 속국에 부과된 세금으로 부유해졌다. 다호메이 왕국에 부과된 세금만으로 연간 1400만달러에 달하는 수입을 올렸다.[33]
식민지 시대 이전에 에수수(Esusuyo)는 요루바인들 사이에서 일종의 회전식 저축 및 신용 협회였다. 에수수는 18세기 알라핀 아비오둔 통치 시대 오요에서 행해졌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44]
5. 2. 건축
오요 제국의 건축 양식은 정교함이 돋보였다. 오요-일레(Oyo-Ile)의 엘리트 주택들은 거주자의 지위를 나타내는 정교한 조각들로 장식되었다. 조각가들은 집과 울타리를 정교하게 조각된 나무 기둥과 낮은 부조 문으로 꾸몄는데, 이는 중요한 사건을 묘사하여 권력을 과시하고 거주자들의 경험을 기념하는 역할을 했다.[45]가장 정교하고 뛰어난 건축 예술 작품은 신에게 봉헌된 사원이었다. 샹고(Sango) 신전이 대표적인 예시인데, 각 변이 약 약 18.29m인 정사각형 구조물로, 광택이 나는 진한 빨간색으로 칠해진 바닥과 벽이 특징이다. 휴 클래퍼턴(Hugh Clapperton)은 이를 "아프리카 내륙에서 이와 유사한 종류 중 가장 크고 기발하게 장식된 것"이라고 평가했다.[45]
오요 제국의 주변 지방에는 샹고에게 봉헌된 작은 규모의 건축물들이 세워졌다. 예를 들어, 일라로(Ilaro)의 한 사원은 둥근 기둥으로 지지되는 큰 정사각형 건물이었고, 기둥에는 칼과 방패, 권총을 든 남자 조각상들이 놓여 있었다. 클래퍼턴은 장인들의 뛰어난 기술을 언급하며, 그들의 조각 작품 중 일부는 정교함 면에서 유럽의 작품들과 견줄 만하다고 말했다.[45]
오요 궁전의 지지 기둥은 놋쇠로 만들어졌으며 높이는 약 2m였다. 전성기 오요 궁전의 지붕은 긴 복도 앞에 약 100개의 놋쇠 기둥으로 지탱되었다고 한다. 이 궁전은 19세기에 일로린(Ilorin) 토후국에 의해 침략당하고 약탈당했다. 이 기둥들은 15세기경 알라핀 아간주(Alaafin Aganju) 통치 시대에 처음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일부 자료에서는 1750년에서 1780년 사이에 주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46]
오요에서는 문 또한 정교하게 주조되고 제작되었다. 오요에서 약탈한 큰 철문은 토후들에 의해 보관되고 전해져 내려왔으며, 18세기의 한 알라핀은 "침실의 일곱 개 입구에 은으로 만든 문 일곱 개를 만들었다"고 한다.
오래된 오요의 토기 파편 포장은 13세기에서 14세기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47]
5. 3. 오요의 민족 다양성
누페 위기 이후 오요는 더욱 다양한 인구 구성을 갖게 되었다. 재건된 제국에서는 요루바족이 여전히 주요 인구 집단이었다. 그 다음으로 영향력이 컸던 것은 이바리바족이었으며, 이 다민족 국가에는 누페족, 송하이족, 모시족이 합류했다. 오요 인구 중 이바리바족, 송하이족, 모시족의 얼굴 상처(scarification)는 1570년 이후 오요 정체성 형성에 있어 이러한 다민족적이고 다문화적인 통합을 보여주는 증거이다.[45]6. 절정
1680년경, 오요 제국은 150000km2가 넘는 영토를 지배했으며,[48] 18세기에 최전성기를 맞았다.[12] 폭력적인 건국 과정에도 불구하고, 상호 이익에 기반하여 유지되었다.[25] 정부는 지역 자치와 제국 권력을 결합하여 광대한 지역에 통합을 제공할 수 있었다.[33]
오요 제국은 이페의 계승 국가이기 때문에 사바나 제국들과는 달리, 제국 내에 이슬람의 영향은 거의 또는 전혀 없었다.[22] 수도 오요에는 적어도 일부 무슬림 관리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49] 1787년 프랑스 상인들의 보고에 따르면 아랍어로 읽고 쓰고 계산할 줄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49] 19세기까지 제국 전역의 여러 도시에 무슬림 공동체가 존재했다.[50]
7. 쇠퇴
오요 제국의 쇠퇴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나타났다.
- 내부 권력 투쟁: 1754년, 오요의 총리 가하는 왕조 내부 갈등과 궁정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오요 메시, 오그보니와 공모하여 알라아핀들을 압박해 자살하게 만들었다.[51] 이는 오요 제국 내 정치적 불안정을 야기했다. 아비오둔 알라아핀은 1783년 보르구[52], 1789년 누페[53] 원정에 실패하면서 많은 병력을 잃었다. 이후 아비오둔은 아들 아워레에게 살해되었고, 아워레가 왕위를 이었다.
- 일로린의 반란: 1793년, 일로린에서 아폰자가 반란을 일으켰다. 아폰자는 아워레의 명령을 거부하고, 1795년에는 아워레에게 퇴위를 요구하며 수도로 진군했다. 아워레는 결국 자살했다.[54] 아워레 사후, 권력 공백과 혼란이 발생했고, 1817년 아폰자는 일로린을 오요에서 분리 독립시켰다. 1823년 아폰자가 살해된 후, 일로린은 소코토 칼리파트의 일부가 되었다.[56] 일로린은 오요의 마을들을 공격하고 약탈했으며, 1835년에는 수도 오요-일레를 파괴했다.[54]
- 다호메이의 독립: 1823년, 다호메이 왕국은 오요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선언하고 오요를 공격했다.[57] 오요 군대는 패배했고, 다호메이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했다.[58]
- 수도 이전과 멸망: 수도 오요-일레가 파괴된 후, 오요는 남쪽의 아고 도요(Ago d'Oyo)로 수도를 옮겼다. 오바 아티바는 이바단, 이자예 등에게 오요의 잔존 세력을 보존하도록 요청했다.[59] 그러나 오요는 이전의 명성을 회복하지 못했고, 결국 1905년 영국령 남나이지리아 보호령에 병합되어 멸망했다.
7. 0. 1. 일로린의 상실
많은 사람들은 오요 제국의 쇠퇴가 1754년 초, 오요 총리 가하가 후원한 왕조 내부 갈등과 궁정 쿠데타로 시작되었다고 믿는다. 절대 권력을 추구한 가하는 오요 메시와 어느 정도 오그보니와 공모하여, 상징적인 앵무새 알을 받은 네 명의 연속적인 알라아핀들이 의식적인 자살을 하도록 강요했다. 1754년 6월과 10월 사이에만 두 명의 알라아핀이 가하에 의해 자살을 강요당했다.[51] 이 때문에 아원비오주 알라아핀은 130일, 라비시 알라아핀은 17일 동안만 왕위에 있었다. 가하의 배신은 그가 섬긴 다섯 번째 알라아핀인 아비오둔의 통치 기간인 1774년까지 끝나지 않았다. 가하는 이후 아비오둔에 의해 처형되었지만, 이러한 음모로 인해 발생한 불안정은 오요를 더욱 약화시켰다.아비오둔 알라아핀은 재위 기간 동안 1783년 보르구[52]와 1789년 누페[53]에 대한 실패한 원정을 수행했으며, 각각 11명과 13명에 해당하는 장군과 그들의 부하들을 잃었다. 아비오둔은 그 후 그의 아들 아워레에게 살해되었고, 아워레는 이후 아버지의 왕위에 올랐다.
일로린의 분리로 이어진 사건들은 1793년에 시작되었다. 일로린은 아레-오나 카칸포 아폰자가 이끄는 전쟁 캠프였다. 아폰자는 아워레가 후자에게 아비오둔 알라아핀의 외가인 이웨레-일레를 공격하라고 명령했을 때 아워레와 함께했다. 아폰자는 맹세에 묶여 있었고, 이전 알라아핀이 이웨레-일레(그의 친가)를 공격하는 모든 아레 오나 카칸포는 비참하게 죽을 것이라는 맹세를 어기지 않으려는 욕망 때문에 순종하기를 거부했다. 1795년에 또 다른 원인이 생겼는데, 아워레가 아폰자에게 일레-이페의 일부인 아포무 시장 마을을 공격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이페가 요루바인의 정신적인 고향이라는 요루바 신앙 때문에 모든 알라아핀은 이전에 이페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다.[54] 아폰자는 아워레의 명령을 수행하고 아포무를 해고했지만, 원정에서 돌아오는 군대가 수도 오요-일레(그 자체로 금기였다)로 행군하여 아워레가 퇴위할 것을 요구했다.[55] 아워레는 결국 의식적인 자살을 했다.[54]
아워레 사후, 수많은 경쟁자들이 왕위를 차지하려고 싸웠다. 각 파벌이 후보자에게 동의할 수 없었던 거의 20년간의 혼란기가 있었다.[54] 이 권력 공백은 아데군(오니코이), 솔라게베루(오툰 아레-오나 카칸포)와 같은 강력한 군사 및 지역 사령관의 부상으로 이어졌다. 오요에서 증가하는 무슬림 인구의 지도자인 풀라니족 수장 셰후 알리미도 이때 권력을 잡았다. 이러한 새로운 세력들은 당시 다양한 정치적 다툼과 중앙 권력의 부재로 인해 알라아핀의 직책에 대한 존경심을 잃었고, 이러한 상황은 결국 1817년 아폰자가 오요 무슬림의 도움으로 일로린을 오요에서 분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823년, 아폰자가 이전 동맹이었던 셰후 알리미와 솔라게베루(그는 나중에 알리미의 아들에게 살해되었다)에 의해 살해된 후, 일로린은 소코토 칼리파트의 일부가 되었다.[56]
그 후 일로린은 오파를 포위 공격하고 오요의 마을을 습격, 방화, 약탈하기 시작하여 결국 1835년 수도 오요-일레를 파괴했다.[54]
7. 0. 2. 에그바도 회랑의 상실
1793년, 일로린에서 아레-오나 카칸포 아폰자가 이끄는 전쟁 캠프가 시작되었다. 아폰자는 아워레 알라아핀의 명령으로 그의 외가인 이웨레-일레를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맹세를 어길 수 없어 거부했다. 1795년, 아워레는 아폰자에게 일레-이페의 일부인 아포무 시장 마을을 공격하라고 다시 명령했다. 모든 알라아핀은 이페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기에, 아폰자는 명령을 수행했지만, 돌아오는 길에 수도 오요-일레로 진군하여 아워레에게 퇴위를 요구했다. 아워레는 결국 의식적인 자살을 했다.[54]아워레 사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혼란기가 20년 가까이 이어졌다.[54] 이 권력 공백기에 아데군, 솔라게베루, 풀라니족 수장 셰후 알리미 등 강력한 군사 및 지역 사령관들이 부상했다. 이들은 중앙 권력의 부재로 인해 알라아핀에 대한 존경심을 잃었고, 1817년 아폰자는 오요 무슬림의 도움으로 일로린을 오요에서 분리시켰다. 1823년, 아폰자가 셰후 알리미와 솔라게베루에게 살해된 후, 일로린은 소코토 칼리파트의 일부가 되었다.[56]
1825년, 휴 클래퍼턴 선장이 오요-일레를 방문했을 때 제국은 이미 쇠퇴하고 있었다. 클래퍼턴 일행은 일로린의 풀라니족이 불태운 오요 마을들을 지나갔고, 마조투 알라아핀은 일로린 반란 진압을 위해 영국과 베닌의 도움을 요청했다. 클래퍼턴은 오요의 기병대가 훌륭했지만, 말이 부족하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아폰자와 알리미의 후계자 휘하에 일로린에 주둔했기 때문일 수 있다.[56]
일로린은 오파를 포위하고 오요 마을들을 습격, 방화, 약탈하여 1835년 수도 오요-일레를 파괴했다.[54] 오요가 정치적 음모로 붕괴되자, 에그바족은 리샤비의 지휘 아래 독립을 쟁취했다.[11]
7. 0. 3. 다호메이의 반란
1823년, 다호메이가 오요의 보호를 받는 마을들을 습격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오요는 즉시 허락 없이 침입한 것에 대해 게조 왕에게 거액의 공물을 요구했고, 게조는 그의 브라질 총독인 차차 프란시스코 펠릭스 드 소우사를 오요의 알라핀에게 보내 평화를 협상했다. 평화 협상은 결국 결렬되었고, 오요는 이후 다호메이를 공격했다.[57] 오요 군대는 결정적으로 패배하여, 오요의 다호메이에 대한 패권이 끝났다.[58] 독립을 얻은 후, 다호메이는 해당 지역을 습격하기 시작했다.[14]7. 0. 4. 아고 도요(Ago d'Oyo)


오요 일레(Oyo-Ile)가 파괴된 후, 수도는 남쪽으로 더 이동하여 아고 도요(Ago d'Oyo)가 되었다. 오바 아티바는 북쪽과 북동쪽의 일로린으로부터 수도를 보호하는 임무를 이바단에 부여하고, 서쪽에서 다호메이인들로부터 오요를 보호하기 위해 이자예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오요의 잔존 세력을 보존하려고 했다.[59] 요루바 세력의 중심지는 1830년 오요 지휘관들에 의해 정착된 요루바 전쟁 수용소인 이바단으로 더 남쪽으로 이동했다.[15]
7. 0. 5. 최후
많은 사람들은 오요 제국의 쇠퇴가 1754년 초, 오요 총리 가하가 후원한 왕조 내부 갈등과 궁정 쿠데타로 시작되었다고 믿는다. 절대 권력을 추구한 가하는 오요 메시와 어느 정도 오그보니와 공모하여, 상징적인 앵무새 알을 받은 네 명의 연속적인 알라아핀들이 의식적인 자살을 하도록 강요했다. 1754년 6월과 10월 사이에만 두 명의 알라아핀이 가하에 의해 자살을 강요당했다.[51] 이 때문에 아원비오주 알라아핀은 130일 동안, 라비시 알라아핀은 17일 동안만 왕위에 있었다. 가하의 배신은 그가 섬긴 다섯 번째 알라아핀인 아비오둔의 통치 기간인 1774년까지 끝나지 않았다. 가하는 이후 아비오둔에 의해 처형되었지만, 이러한 음모로 인해 발생한 불안정은 오요를 더욱 약화시켰다.아비오둔 알라아핀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1783년 보르구[52]와 1789년 누페[53]에 대한 실패한 원정을 수행했으며, 각각 11명과 13명에 해당하는 장군과 그들의 부하들을 잃었다. 아비오둔은 그 후 그의 아들 아워레에게 살해되었고, 아워레는 이후 아버지의 왕위에 올랐다.
일로린의 분리로 이어진 사건들은 1793년에 시작되었다. 일로린은 아레-오나 카칸포 아폰자가 이끄는 전쟁 캠프였다. 아폰자는 아워레가 후자에게 아비오둔 알라아핀의 외가인 이웨레-일레를 공격하라고 명령했을 때 아워레와 함께했다. 아폰자는 맹세에 묶여 있었고, 이전 알라아핀이 이웨레-일레(그의 친가)를 공격하는 모든 아레 오나 카칸포는 비참하게 죽을 것이라는 맹세를 어기지 않으려는 욕망 때문에 순종하기를 거부했다. 1795년에 또 다른 원인이 생겼는데, 아워레가 아폰자에게 일레-이페의 일부인 아포무 시장 마을을 공격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이페가 요루바인의 정신적인 고향이라는 요루바 신앙 때문에 모든 알라아핀은 이전에 이페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다.[54] 아폰자는 아워레의 명령을 수행하고 아포무를 해고했지만, 원정에서 돌아오는 군대가 수도 오요-일레(그 자체로 금기였다)로 행군하여 아워레가 퇴위할 것을 요구했다.[55] 아워레는 결국 의식적인 자살을 했다.[54]
아워레 사후, 수많은 경쟁자들이 왕위를 차지하려고 싸웠다. 일부는 왕위에 6개월도 채 있지 못했다고 보고되었고, 각 파벌이 후보자에게 동의할 수 없었던 거의 20년간의 혼란기가 있었다.[54] 이 권력 공백은 아데군(오니코이), 솔라게베루(오툰 아레-오나 카칸포)와 같은 강력한 군사 및 지역 사령관의 부상으로 이어졌다. 오요에서 증가하는 무슬림 인구의 지도자인 풀라니족 수장 셰후 알리미도 이때 권력을 잡았다. 이러한 새로운 세력들은 당시 다양한 정치적 다툼과 중앙 권력의 부재로 인해 알라아핀의 직책에 대한 존경심을 잃었고, 이러한 상황은 결국 1817년 아폰자가 오요 무슬림의 도움으로 일로린을 오요에서 분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823년, 아폰자가 이전 동맹이었던 셰후 알리미와 솔라게베루(그는 나중에 알리미의 아들에게 살해되었다)에 의해 살해된 후, 일로린은 소코토 칼리파트의 일부가 되었다.[56] 1825년 알라아핀 마조투의 통치 기간 동안 휴 클래퍼턴 선장이 오요-일레를 방문했을 때 제국은 이미 쇠퇴하고 있었다. 클래퍼턴 일행은 일로린의 풀라니족이 불태운 수많은 오요 마을을 지나가는 것을 기록했으며, 마조투는 일로린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영국 국왕과 베닌 오바의 도움을 구했다. 클래퍼턴은 또한 오요가 훌륭한 기병대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는데, 이는 제국의 대부분의 군인과 따라서 기병이 아폰자(그리고 나중에 알리미의 후계자)의 지휘하에 일로린에 주둔했기 때문일 수 있다.[56]
그 후 일로린은 오파를 포위 공격하고 오요의 마을을 습격, 방화, 약탈하기 시작하여 결국 1835년 수도 오요-일레를 파괴했다.[54] 아티바의 책략은 실패했고, 오요는 그 지역에서 다시는 옛 명성을 되찾지 못했다. 아티바 아토바텔레(Atiba Atobatele)로 불리는 오바는 1859년에 사망했다. 그의 장남 아델루 알라오 아군로예가 뒤를 이어 알라핀이 되어 1859년부터 1876년까지 통치했고, 그 뒤를 이어 그의 넷째 아들 알로울로두 아데예미 1세가 현재 오요에서 세 번째로 알라핀으로 통치했으며, 그는 1905년에 사망했다. 아데예미 1세 이후 통치한 다른 사람들은 라와니 아고고 이자, 라디골루 1세, 아데예미 2세, 그바데게신, 그리고 2022년에 사망한 라미디 아데예미이다.
19세기 북쪽의 하우사 제왕국을 멸망시킨 소코토 제국이 지하드를 선포하고 오요로 침공했다. 이는 간신히 막아냈다. 그러나 북쪽의 일로린 왕국이 이 혼란을 이용하여 독립했고, 서쪽의 다호메 왕국이 종속 관계를 해제하고 오요 왕국을 공격하여 1830년에는 오요 왕국이 거의 멸망하고 주민들은 흩어졌다. 그 후에도 명맥을 유지했지만, 과거의 번영을 되찾지는 못하고 1905년에 영국령 남나이지리아 보호령에 병합되어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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