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 다카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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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카 다카즈미는 일본 제국 해군의 군인으로, 해군 차관과 군무국장을 역임했다. 해군병학교와 해군대학을 졸업하고 잠수함 관련 보직을 주로 맡았으며, 해군대학 수석 졸업 후 군령부, 해군성 등 요직을 거쳤다. 군무국장 시절 육군에 대응하기 위해 국방 정책을 담당하는 부서를 신설하고 이시카와 신고를 임명한 것이 A급 전범으로 기소되는 원인이 되었다. 태평양 전쟁 후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가석방되었으며, 석방 후에는 공적인 활동 없이 독신으로 지내다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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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 다카즈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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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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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오카 다카즈미 |
일본어 이름 | 岡 敬純 |
로마자 표기 | Oka Takazumi |
출생 | 1890년 2월 11일 |
출생지 | 일본, 오사카부, 오사카시 |
사망 | 1973년 12월 4일 |
묘소 | 아오야마 묘지 1-로-2-8 |
군 경력 | |
소속 | 일본 제국 해군 |
복무 기간 | 1911년 - 1945년 |
최종 계급 | [[파일:Imperial Japan-Navy-OF-8-collar.svg|30px]] 해군 중장 |
주요 참전 | 태평양 전쟁 |
주요 보직 | |
보직 | 해군성 군무국장 해군 차관 진해경비부 사령관 |
2. 생애
일본 해군병학교와 일본 해군대학을 졸업한 오카 다카즈미는 중위 시절부터 주로 잠수함 관련 직책을 맡았다. 잠수함 함장과 잠수학교 교관을 거쳐 해군대학 졸업 후에는 군령부, 일본 해군성, 제네바 협정 관련 요직을 두루 거쳤다. 상관은 이노우에 시게요시였다.
1940년 군무국장 시절, 오카 다카즈미는 육군의 압력에 해군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상황을 비판하며 국방 정책을 담당하는 군무국 제2과를 신설했다. 이때 전쟁개전론자인 이시카와 신고 대좌를 과장으로 임명하여 해군 내 반발을 샀지만, 오카 다카즈미는 이를 밀어붙여 해군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로 인해 전후 A급 전범으로 기소되기도 했다.
도조 내각에서 해군 차관을 지냈으나, 고이소 내각 성립 후 요나이 미쓰마사 해군대신에 의해 경질되어 진해 경비부 사령관으로 좌천되었다. 1945년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태평양 전쟁 이후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54년 석방되었다. 이후 공적인 자리에 거의 나타나지 않았고, 독신으로 살다가 1973년 사망하였다.
2. 1. 초기 생애 및 해군 경력
일본 해군병학교와 일본 해군대학을 졸업하였다. 중위 시절부터 주로 잠수함 근무가 많았으며, 잠수함 함장, 잠수학교 교관 등을 역임했다. 해군대학 졸업 후에는 군령부 근무, 일본 해군성 임시 조사 과장, 제네바 협정 전권 수행원, 군무국 제1과장 등 중앙 요직을 두루 거쳤는데, 그의 상관은 이노우에 시게요시였다.1940년 군무국장에 오를 시 "육군이 정책을 내걸고 해군에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해군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왜 이렇게 육군에 대응하는 정책담당자를 만들지 않는가, 그렇담 일본이 아무렇게나 지탱해도 좋단 말인가"라고 비판하여 국방 정책을 담당하는 군무국 제2과가 신설되었다.[5]
이때 과장으로 임명된 인물이 전쟁개전론자였던 이시카와 신고 대좌였는데, 당시 화평론자가 대부분을 차지했던 일본 해군 내에서는 반대가 거셌으나, 오카 다카즈미가 그를 임명해 일본 해군의 정책이 이 두 인물 중심으로 흘러갔다. 이로 인해 전후 천황의 최측근 기도 고이치가 일본 해군 내에서 가장 대미 개전을 강경하게 주장한 인물이 오카라고 말해 A급 전범으로 기소되었다.
2. 2. 군무국장 시절과 태평양 전쟁
1940년, 오카 다카즈미는 군무국장에 취임하면서 "육군이 정책을 내걸고 해군에 압력을 가해온다. 해군은 지금까지 그것에 대응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여기서, 육군에 대응하는 정책 담당자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이 어느 쪽으로 끌려갈지 알 수 없다"고 발언하며 군무국을 개편하여 제2과에 국방 정책을 담당하게 했다.[5] 이때 제2과장으로 임명된 인물은 이시카와 신고였다. 오카는 이시카와가 2·26 사건 당시 예비역 편입되는 것을 구제한 적이 있었다.[5]강경한 대영미 개전론자였던 이시카와를 군무국 제2과장으로 임명하는 인사에 대해, 친영미파가 많았던 해군 내부에서는 맹렬한 반대가 있었지만, 오카는 강경하게 밀어붙였다. 이때부터 오카와 이시카와 두 사람이 해군의 정책을 움직이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오카가 미일 개전파였으며 친독파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전후, 기도 고이치는 해군 내에서 가장 대미 개전을 강경하게 주장한 인물로 오카를 지목했고, 그 결과 오카는 A급 전범으로 지정되었다.
한편, 헐 노트를 받아들었을 때 오카는 "이러고는 결국 개전 외에는 없다. 지금까지의 고생도, 결국 물거품이다"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시마다 시게타로 해군 대신의 사임에 따라, 해군 차관을 사임한 사와모토 요리오의 후임으로 오카는 해군 차관에 취임했다. 그러나 도조 내각 총사퇴 후 성립된 고이소 내각의 해상에 취임한 요나이 미쓰마사는 "오카를 하룻밤 사이에 방출한다"고 하며 이노우에 시게미를 차관으로 임명했다. 오카는 진해 경비부 사령장관으로 좌천되었고, 이후 1945년 6월 20일에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태평양 전쟁 후,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오카는 종신 금고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그는 이른바 평화에 대한 죄인 A급 전범뿐만 아니라, 해군이 태평양 전쟁 중 해상이나 도서 지역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에 대해 중앙에서 방침 결정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관여가 의심되어 BC급 일반 전쟁 범죄의 죄도 추궁받았다. BC급 일반 전쟁 범죄에 해당하면 사형도 가능했지만, "증거는 몇 가지 있지만 형사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기준에 달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무죄가 되었다.[6] 도쿄 재판의 판결에서 네덜란드의 레링크 판사는 오카에 대해서는 사형이 되어야 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6]
1954년에 가석방되었지만, 그 후에는 사망할 때까지 공적인 장소에 나타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재판에서의 개인 판결문은, 오카에 대한 것이 가장 짧았다.
1958년 이후, 법무성에 의해 행해진 청취 조사에 응하여, 태평양 전쟁의 결과로 아시아의 식민지가 독립한 것을 자기 만족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7]
2. 3. 전범 재판과 말년
태평양 전쟁 이후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종신형 판결을 받고 복역하다가 1954년에 석방되었다.[6] 석방 후에는 공적인 장소에 거의 나타나지 않았으며,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다가 1973년 사망하였다.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오카 다카즈미는 이른바 평화에 대한 죄인(A급 전범)뿐만 아니라, 해군이 태평양 전쟁 중 해상이나 도서 지역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에 대해 중앙에서 방침 결정을 한 것인지에 대한 관여 혐의로 BC급 일반 전쟁 범죄 혐의도 받았다. BC급 일반 전쟁 범죄에 해당하면 사형도 가능했지만, "증거는 몇 가지 있지만 형사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기준에는 미치지 못한다"라며 무죄가 되었다.[6] 도쿄 재판 판결에서 네덜란드의 레링크 판사는 전반적으로 중간적인 입장을 취해 다수파에 대해 소수 의견을 썼지만, 오카에 대해서는 사형이 되어야 했다는 입장을 취했다.[6]
1958년 이후, 법무성에 의해 행해진 청취 조사에 응하여, 태평양 전쟁의 결과로 아시아의 식민지가 독립한 것을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7]
3. 인물
오카 다카즈미는 해군대학에서 은사조였지만, 수재 타입은 아니었고, 군인으로서는 몸이 허약하고 온후하고 소박한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교묘한 교섭술을 지니고 회의·교섭의 정리에 능숙했던 것으로 알려져, 전장 등 제1선에는 그다지 나가지 않고 해군성 등 중앙부에 머물면서 승진을 계속해온 것도 전술한 바와 같은 성격·체질·소질에 기인한다는 설도 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4. 연보
- 1911년 7월 18일 - 일본 해군병학교 졸업(39기). 동기로는 이토 세이이치, 다카기 다케오가 있다.
- 1912년 12월 1일 - 해군 소위 임관.
- 1914년 12월 1일 - 해군 중위 진급.
- 1917년 12월 1일 - 해군 대위 진급. 일본 해군대학 을종 학생.
- 1921년 12월 1일 - 일본 해군대학 갑종 학생
- 1923년
- * 10월 15일 - 일본 해군대학 졸업(21기 수석).
- * 12월 1일 - 해군 소령 진급.
- 1924년 5월 20일 - 프랑스 주재.
- 1928년 12월 10일 - 해군 중좌 진급.
- 1932년 10월 25일 - 제네바 회의 전권 수행원.
- 1933년 11월 15일 - 해군 대좌 진급.
- 1936년 12월 1일 - 잠수모함 진경 함장.
- 1938년 1월 15일 - 일본 해군성 군무국 제1과장.
- 1939년
- * 10월 10일 - 일본 군령부 제3부장.
- * 11월 15일 - 해군 소장 진급.
- 1940년 10월 15일 - 일본 해군성 군무국장.
- 1942년 11월 1일 - 해군 중장 진급.
- 1944년
- * 7월 18일 - 일본 해군 차관(-8월 4일).
- * 9월 9일 - 진해 경비부 사령장관.
- 1945년 6월 20일 - 예비역 편입.
5. 서훈
수여 날짜 | 훈장 종류 |
---|---|
1915년 11월 7일 | 훈6등 서보장[8] |
1919년 12월 25일 | 훈5등 서보장[8] |
1920년 11월 1일 | 훈4등 서보장[8] |
1929년 11월 28일 | 훈3등 서보장[8] |
1931년 10월 31일 | 은배 1개[8] |
1934년 4월 29일 | 욱일중수장[8] |
1940년 4월 29일 | 훈2등 서보장, 공4급 금계훈장[8] |
5. 1. 외국 훈장
오카 다카즈미de는 나치 독일로부터 독일 독수리 훈장 1등 공로 십자장(1940년 2월 9일)[9]과 독일 독수리 훈장 공로 십자성장(1943년 9월 11일)[11]을, 왕징웨이 정권으로부터 특급 동광훈장(1943년 6월 2일)을,[10] 만주국으로부터 국세 조사 기념장(1944년 6월 23일)을 받았다.[12]참조
[1]
웹사이트
https://www.trumanli[...]
[2]
웹사이트
https://trove.nla.go[...]
[3]
웹사이트
https://trove.nla.go[...]
[4]
웹사이트
https://web.archive.[...]
[5]
문서
海軍参謀』「石川信吾」
[6]
서적
秘録大東亜戦史 東京裁判篇
富士書苑
[7]
뉴스
日本経済新聞
2010-08-18
[8]
문서
法廷証第120号: [岡敬純關スル人事局履歴書]
https://dl.ndl.go.jp[...]
[9]
간행물
『官報』第3931号
https://dl.ndl.go.jp[...]
1940-02-15
[10]
간행물
『官報』第4917号
https://dl.ndl.go.jp[...]
1943-06-05
[11]
문서
沢本頼外五名
https://www.jacar.ar[...]
[12]
문서
赤堀鉄吉外十四名外国勲章記章受領佩用の件
https://www.jacar.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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