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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이 미쓰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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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나이 미쓰마사(米内 光政, 1880-1948)는 이와테현 출신의 일본 제국 해군 군인으로, 해군대신,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다.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러일 전쟁에 참전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러시아 주재 무관으로 활동했다. 해군 내에서 온화한 성격으로 신망을 얻었으며, 해군대신으로서 삼국 동맹에 반대하며 친영·친미 노선을 유지했다. 1940년 총리대신에 취임했으나 육군의 반발로 사임했으며, 태평양 전쟁 중 해군대신으로 복귀하여 종전과 헌법 개정에 기여했다. 그는 훌륭한 인품으로 존경받았으나, 일부에서는 군정가로서의 능력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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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이 미쓰마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해군 대신 시대의 요나이
이름요나이 미쓰마사
원어 이름米内 光政
로마자 표기Yonai Mitsumasa
한자 표기米內 光政
출생일1880년 3월 2일
출생지일본 이와테현 모리오카시
사망일1948년 4월 20일
묻힌 곳모리오카 일본
서명YonaiM kao.png
정당무소속
소속일본 제국
군사일본 제국 해군
복무 기간1901년–1945년
계급[[파일:Imperial Japan-Navy-OF-9-collar.svg|30px]] 해군 대장
주요 지휘 경력가스가
이와테
후소
무쓰
제1원정함대
제3함대
연합함대
제1함대
훈장종2위
훈1등욱일대수장
[[파일:JPN Kinshi-kunsho blank BAR.svg|38px]] 공1급금치훈장
친족증손자 요나이 히로마사
배우자요나이 고마
정치 경력
직위내각총리대신
대수37대
내각요나이 내각
임기 시작1940년 1월 16일
임기 종료1940년 7월 22일
국왕쇼와 천황
전임아베 노부유키
후임고노에 후미마로
직위해군대신
대수19·24대
내각하야시 내각
제1차 고노에 내각
히라누마 내각
고이소 내각
스즈키 간타로 내각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
시데하라 내각
임기 시작1937년 2월 2일 - 1939년 8월 30일, 1944년 7월 22일
임기 종료1945년 12월 1일
전임나가노 오사미, 노무라 나오쿠니
후임요시다 젠고, (직위 폐지)
학력
학교해군병학교 (29기), 해군대학교 (12기)

2. 생애와 경력

요나이 미쓰마사는 1901년 해군병학교를 29기로 졸업하고, 1914년 해군대학을 거쳐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러시아 주재 무관으로 파견되었다. 이후 야전과 참모직을 두루 거치며 온화한 성격으로 해군 내에서 신망을 얻었다.[1]

중의원 본회의장에서 작성한 메모를 훑어보고 있는 요나이 총리(1940년 2월 2일)


1937년 하야시 내각에서 해군대신을 역임하였다. 이후 고노에, 히라누마 내각에서도 1939년 8월까지 같은 직책을 맡았다.[5] 해군 대신으로 재직하는 동안, 일본 제국 육군이 중국에서 고전하는 상황에서 일본과 영국, 미국 간의 긴장이 고조되는 것에 우려를 표했다. 그는 평화를 추구하여 극우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인기가 없었으며, 여러 차례 암살 시도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1940년 1월 6일, 쇼와 천황의 지지로 일본 총리에 임명되었다. 총리로 재직하는 동안 그는 강력한 친영, 친미 입장을 유지했으며,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와의 삼국 동맹 조약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육군 대신 하타 슌로쿠의 사임으로 인해 1940년 7월 21일 총리직을 사임하게 되었다.

1944년 7월 22일, 고이소 내각에서 다시 해군대신 겸 부총리직을 역임했으며, 스즈키 내각에서도 해군대신으로 남았다. 일본 항복 직전 몇 주 동안, 그는 포츠담 선언 수용 및 일본 항복을 지지했다.

요나이 미쓰마사는 히가시쿠니 내각과 시데하라 기주로 내각에서도 해군대신으로 남아 대일본제국 해군의 해산을 주재했다.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는 히로히토 일왕이 기소되지 않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후, 요나이는 남은 생애를 일본 재건에 헌신했다.

요나이는 평생 고혈압을 앓았지만, 1948년 4월 20일 폐렴으로 6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묘는 고향인 모리오카시의 엔코지에 있다.

2. 1. 출생과 해군 입대

요나이 미쓰마사는 1880년 3월 2일 이와테현 미쓰와리에서 전직 사무라이였던 요나이 나가마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나가마사는 이전에 모리오카번난부씨를 섬겼다.[1][2]

1886년에 가지초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890년에는 모리오카 중학교(모리오카 제일 고등학교)에 입학했다.[3] 모리오카 중학교 졸업 후, 일본 제국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2]

1901년 제29기 일본 제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4] 海軍兵学校|해군병학교일본어에서는 "구즈마사"라는 별명이 붙었다. 졸업 후, 軍艦|군함일본어 金剛|금강일본어과 巡洋艦|순양함일본어 常磐|토키와일본어에서 소위 후보생으로 복무한 후, 1903년 1월 해군 소위로 임관했다.

2. 2. 해군 장교 시절

요나이 미쓰마사는 1901년 해군병학교를 29기로 졸업하고, 1914년 해군대학을 졸업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러시아 주재 무관으로 파견되기도 했다.[5] 온화한 성격으로 해군 내에서 신망을 얻었으며, 야전과 참모직을 두루 거쳤다.

1936년 연합함대 사령장관 시절


1936년 요나이와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도직책
1901년구축함 이나즈마와 순양함 이와테에서 해상 근무[5]
1906년방호순양함 니이타카, 전함 시키시마, 순양함 톤에서 주포 사령관[5]
1915년-1917년러시아 해군 무관 (해외 근무 중 해군 중좌로 승진)[5]
1920년해군 대좌로 승진
1921년-1922년폴란드 해군 무관
1922년-1923년순양함 카스가 함장
1923년-1924년순양함 이와테 함장
1924년전함 후소 함장
1924년-1925년전함 무쓰 함장[5]
1925년해군 소장 진급[5]
1926년해군 참모부 제3과장[5]
1928년중국 양쯔강 파견 제1원정함대 사령관[5]
1930년해군 중장 진급, 진해수비구 사령관
1932년제3함대 사령관
1933년사세보 해군구 사령관
1934년제2함대 사령관
1935년요코스카 해군구 사령관[5]
1936년연합함대 사령장관 겸 제1함대 사령관[5]



요나이는 진해 요항부 사령관 시절 현역에서 물러날 위기를 겪었으나, 주변의 도움으로 현역에 남게 되었다. 1932년 제3함대 사령장관 임명 당시에는 인플루엔자로 인한 흉막염으로 요양이 필요했으나, 해군 차관과 군령부 차장의 판단으로 조기 치료를 받고 복귀할 수 있었다.[17] 또한, 포함 니미가 양쯔강에서 암초에 걸린 사건으로 사직서를 제출하려 했으나, 막료였던 호시카 젠시로(保科善四郎)가 이를 묵살하여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17]

2. 3. 해군 대신

1937년 4월, 해군 대장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하야시 내각에서 해군대신에 취임하였다. 이후 고노에, 히라누마 내각에서도 1939년 8월까지 해군 대신 직을 계속 역임하였다.[5] 아베 총리가 된 후에도 최고전쟁회의에 남았다.

요나이 미쓰마사 제독, 1937년


1937년, 해군대신 요나이 미쓰마사와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 (제1차 고노에 내각)


1939년 예산위원회 회의에서 요나이 미쓰마사와 히라누마 내각(총리 히라누마 기이치로)의 육군대신 이타가키 세이시로의 대화


요나이는 야마모토 이소로쿠, 이노우에 시게요시와 함께 일본, 독일, 이탈리아의 삼국 동맹을 반대하였다. 그는 미국, 영국과의 협상을 선호했기 때문에 극단주의자들의 표적이 되어 여러 번 암살 시도를 겪기도 했다.

해군대신으로서 요나이는 일본 제국 육군이 중국에서 수렁에 빠져있는 상황에서 일본과 영국, 미국 간의 긴장이 고조되는 것에 우려를 표했다. 그의 평화 노력은 극우 민족주의자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과 마찬가지로) 여러 차례 암살 시도의 표적이 되었다. 그러나 요나이는 세계의 다른 두 해군 강국과의 군사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건조를 지지했다.

요나이는 러시아폴란드에서 군사 참관관으로 근무하고 유럽 각국을 여행했기에 다른 일본 고위 군부 관계자들보다 더 넓은 세계 정세에 대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1930년대 후반, 요나이는 이미 일본 제국 해군과 연합국의 해군 능력을 독일과 이탈리아의 해군 능력과 비교 분석하여 일본이 추축국과 동맹을 맺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1939년 8월 8일, 전쟁 계획을 세우기 위한 5개 부처 위원회에서 재무대신 이시와타는 요나이에게 "일본 제국 해군이 미국과 영국을 이길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했고, 요나이는 "아닙니다. 일본 제국 해군은 그들과 교전할 수 있도록 설계되지 않았습니다. 제3제국과 이탈리아 해군은 논외입니다."라고 답했다.[9][10]

2. 4. 내각총리대신

1940년 1월 6일, 요나이 미쓰마사는 쇼와 천황의 지지를 받아 예비역에서 물러나 총리에 취임하여 요나이 내각을 구성하였다. 그는 친미, 친영 정책을 취하였으나, 삼국 동맹을 선호하는 육군의 압박으로 그해 7월 사임하였다. 1940년 9월 27일에는 삼국동맹이 체결되었다.

1940년 1월 천황의 칙임 후 요나이


1940년 2월 일본 중의원 본회의 중 메모를 읽는 요나이


1940년 3월, 요나이가 중일전쟁에서 아버지를 잃은 이와테현 아이들을 총리 관저로 초청하여 격려하는 모습


총리로 재직하는 동안 요나이는 해군대신으로 재직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강력한 친영, 친미 입장을 유지했으며,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와의 삼국 동맹 조약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1940년 5월~6월의 서부전선에서 독일이 저지대 국가들과 프랑스를 점령한 후, 일본군은 요나이의 반독, 반이탈리아 정책에 불만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40년 7월 초, 육군대신 하타 슌로쿠가 총리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면서 이러한 불화가 명백해졌다.[6] 하타가 사임하자 요나이는 1940년 7월 21일 사임하게 되었다. 일본 헌법은 육군대신이 현역 장성이어야 했지만, 일본군의 친추축국 성향 때문에 다른 장성이 그 자리를 수락하지 않았다.[7]

수상으로 임명되었을 때 그는 요청받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는 해군의 영향력으로 내각 장관들을 통제하려 하지 않았다. 이는 장군이나 제독이 은퇴하면 영향력을 잃기 때문에 모든 장군과 제독들은 은퇴를 꺼리기 때문이었다. 그의 내각은 반년밖에 지속되지 않았지만, 1937년 사임 직후 내각 구성원들과 추종자들은 친목 모임을 결성했고, 이 모임은 헤이세 시대(1989~2019)까지 이어졌다. 이 모임은 요나이의 수상 임명과 사임이 모두 해당 달의 16일에 있었기 때문에 "일육회(一六會)"라고 불렸다.

2. 5. 태평양 전쟁과 항복

1944년 7월 고이소 내각이 출범한 이후 요나이는 현역으로 복귀하여 해군대신으로 기용되었고, 스즈키 내각이 출범한 후에도 그 자리에 머물렀다. 요나이는 해군대신으로서 스즈키 간타로,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와 함께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 선언의 수용을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시켰다.[8]

1945년 8월부터 요나이는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왕자 수상의 히가시쿠니 내각과 시데하라 기주로 수상의 시데하라 내각에서도 해군대신으로 남아 대일본제국 해군의 최종 해산을 주재했다.

요나이는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전 수상 도조 히데키 등 주요 피고인들과 협력하여 증언을 조정함으로써 히로히토 일왕이 기소되지 않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 6. 전후

도쿄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쇼와 천황이 불기소되도록 노력하였다.[24] 그는 1948년 폐렴으로 사망하였다.[44]

총리대신을 사임한 직후, 도치기현닛코시를 방문했을 때에는 “보아도 좋고 들어도 좋고 세상은 말하지 않는 것이 꽃이고 원숭이는 말한다”라는 단가와 “흉내를 내어도 움직이는구나 고양이의 귀”라는 구(川柳)를 읊었다.

요나이가 내각총리대신을 사임한 후, 육군을 제외한 비서관들에 의해 요나이의 친목회인 "일육회"(いちろくかい)가 설립되었다. 육군 비서관도 초대를 받았지만, “우리는 요나이 씨에게 폐를 끼친 존재이므로 참가할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일육회"는 요나이 내각이 발족한 날과 사표를 제출한 날이 모두 16일이었던 것에서 유래되었으며, 헤이세이 시대에 들어서도 존속했다. 회원에는 우사미 타케시, 후쿠치 세이오, 이리에 츄나오 등이 있었다.[24] 쇼와 천황은 “일육회”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일육회” 날이 되면 “오늘은 ‘일육회’ 날이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총리대신을 사임한 후, 병원 통원에 도쿄 시덴을 이용했지만, 요나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채 국민들에게 사인을 요구받거나 말을 걸리는 일이 여러 곳에서 있었다. 일본에서는 총리 경험자는 자동차렌터카 등을 이용하여 통원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통원한 전전 총리는 요나이 정도였다'''고 한다. 해군에서 공용차가 파견되었지만, “예비역이므로”라고 거절했다.

1943년, 해군 가 사건에서 전사한 맹우 야마모토 이소로쿠국장 위원장을 맡았다.[25] 그러나 군인이 신격화되는 것을 싫어했던 야마모토를 잘 아는 요나이는, 후에 야마모토 신사 건립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이노우에 시게미와 함께 “야마모토가 싫어한다”고 말하며 이에 강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신사는 건립되지 않았다. 요나이는 『아사히 신문』에 추도문을 기고하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4월에 실로 분명한 꿈을 보았다.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잊었지만, 지금도 얼굴이 분명한 꿈을 보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고 그날 밤의 일을 회고하고 있다.[25]

3. 평가

요나이 미쓰마사는 러시아와 폴란드에서 군사 참관관으로 근무하고 유럽 각국을 여행하면서, 다른 일본 고위 군부 관계자들보다 넓은 국제 정세에 대한 시각을 갖게 되었다. 1930년대 후반, 요나이는 일본 제국 해군과 연합국의 해군 능력을 비교 분석하여 일본이 추축국과 동맹을 맺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9][10] 쓰시마 해전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해전의 실상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미·영 해군을 상대로 승리할 수 없다고 보았다.

총리 임명 전, 1936년 2월 26일 육군 장교들의 쿠데타 시도 때, 요나이는 즉시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사세보 해군구 장교들에게 반란군 연계를 중단하도록 지시하여 사세보 해군구를 안정시켰다.

수상 재임 중에는 요청받지 않았음에도 현역에서 은퇴, 해군 영향력으로 내각을 통제하려 하지 않았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결정으로, 그의 내각은 협력적이었으며, 헤이세 시대(1989~2019)까지 "일육회(一六會)"라는 친목 모임을 유지했다.

쇼와 천황(히로히토)은 요나이의 도덕성을 신뢰했다. 1944년 7월, 제2차 세계 대전 상황이 불리해지자, 일본 해군은 요나이를 해군대신으로 임명했다. 천황은 스에쓰구 노부마사 대신 요나이를 선택, 일본 해군 역사상 유일하게 은퇴 후 해군대신으로 복귀했다. 종전 후, 천황은 붓과 벼루를 선물하며 감사를 표했다.[11][9]

그러나 포츠담 선언 묵살 성명 발표에 요나이가 애매한 태도를 취한 것은 비판받는다. 아난 미키 등 강경파에게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30] 종전 직후 아난은 "요나이를 베어라"라며 자결, 두 사람의 갈등이 극심했음을 보여준다.

1944년 도조 내각 붕괴 후, 요나이는 코이소 내각에서 해군대신으로 복귀했다.[26] 고이소 구니아키와 함께 "부총리격"으로 "코이소·요나이 연립내각"으로 불렸다.[27] 오카 케이준을 경질하고, 이노우에 시게요시를 중앙으로 불렀다.

1945년 스즈키 간타로 내각에서도 해상 유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을 위해 노력했다. 독일 항복 직후 소련 원조를 주장했지만, 도고 시게노리에게 거절당했다. 그러나 스즈키 내각은 소련에 평화 중재를 요청했다.

포츠담 선언 발표 후, 원폭 투하와 소련의 대일 참전 속에서, 요나이는 선언 수락을 통한 종전을 강력 주장했다. 본토 결전을 주장하는 아난과 논쟁했지만, 천황의 결단으로 종전이 결정되었다.

요나이는 전범으로 예상됐지만, GHQ는 높이 평가하여 지명하지 않았다. 히가시쿠니 공 내각·시데하라 내각에서 해상 유임, 일본 해군 해체를 담당했다.

요나이는 원폭 투하와 소련 참전을 "천우"라며, 국내 안정 위해 종전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해군 해체 후, Y 위원회를 통해 해상자위대 창설에 영향을 주었다.

3. 1. 긍정적 평가

요나이 미쓰마사는 러시아와 폴란드에서 군사 참관관으로 근무하고 유럽 각국을 여행하면서, 다른 일본 고위 군부 관계자들보다 넓은 국제 정세에 대한 시각을 갖게 되었다. 1930년대 후반, 요나이는 일본 제국 해군과 연합국의 해군 능력을 독일, 이탈리아 해군과 비교 분석하여 일본이 추축국과 동맹을 맺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9][10] 쓰시마 해전에 참전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해전의 실상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일본 제국 해군이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승리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총리로 임명되기 전, 요나이는 위기 상황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1936년 2월 26일, 일본 제국 육군 장교들이 쿠데타를 시도했을 때, 요나이는 즉시 그들을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사세보 해군구의 해군 장교들에게 반란군과의 연계를 중단하도록 지시했다. 이러한 신속한 조치는 사세보 해군구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수상 재임 중, 요나이는 요청받지 않았음에도 현역에서 은퇴하여 해군의 영향력으로 내각을 통제하려 하지 않았다. 이는 장군이나 제독이 은퇴하면 영향력을 잃기 때문에 매우 이례적인 결정이었다. 요나이의 은퇴 덕분에 그의 내각은 협력적이었으며, 이는 내각 구성원들과 추종자들이 헤이세 시대(1989~2019)까지 친목 모임 "일육회(一六會)"를 결성하여 유지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쇼와 천황(히로히토)은 요나이의 강한 도덕성을 신뢰했다. 1944년 7월, 제2차 세계 대전 상황이 일본에 불리하게 전개되자, 일본 해군은 요나이를 해군대신으로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천황은 스에츠구 노부마사 대신 요나이를 선택했으며, 이는 일본 해군 역사상 은퇴 후 최고직인 해군대신으로 복귀한 유일한 사례이다. 종전 후, 천황은 요나이를 궁궐로 초대하여 함께 점심을 먹고, 붓과 벼루를 선물하며 감사를 표했다. 이는 천황의 소지품을 받는 것이 최고의 영예이자 친밀함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11][9]

3. 2. 부정적 평가

요나이 미쓰마사는 일본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해군 대신 등을 역임했다. 그는 전쟁 종결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몇 가지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포츠담 선언 발표 이후 스즈키 간타로 총리가 선언을 묵살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데에 요나이가 애매한 태도를 취한 것이 원인 중 하나였다는 비판이 있다. 요나이는 연합국의 포츠담 선언 발표부터 스즈키의 묵살 성명까지 포츠담 선언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고, 이는 아난 미키 등 강경파에게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초래했다.[30]

또한, 종전 직후 아난 미키는 "요나이를 베어라"라는 말을 남기고 자결했는데, 이는 요나이와 아난 사이의 갈등이 극심했음을 보여준다. 두 사람은 종전 방식을 두고 격렬하게 대립했으며, 아난은 요나이를 껄끄러워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3. 종합

요나이 미쓰마사는 1944년 도조 내각이 붕괴된 후 예비역에서 현역으로 복귀하여 코이소 내각에서 다시 해군대신이 되었다.[26] 군부대신 현역무관제에 따라 예비역 해군대장이었던 요나이가 해군대신이 되려면 "소집"이 아닌 "현역 복귀"가 필요했고, 이는 "천황의 특지"가 필요한 매우 드문 일이었다. 고이소 구니아키와 함께 조각의 대명을 받은 요나이는 "부총리격"으로 여겨졌으며, "코이소·요나이 연립내각"이라고도 불렸다.[27]

요나이는 해군차관 오카 케이준을 경질하고, 요코스카 진수부에서 함께 일했던 이노우에 시게요시를 중앙으로 불러들였다. 요나이의 현역 복귀를 모색한 오카다 게이스케는 요나이와 스에쓰구 노부마사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지만, 스에쓰구의 군령부 총장 복귀는 천황의 반대 등으로 무산되었다.

1945년 스즈키 간타로 내각에서도 해상으로 유임한 요나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을 위해 노력했다. 독일 항복 직후 최고전쟁지도회의에서 소련의 원조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에게 거절당했다. 그러나 스즈키 내각은 소련에 대한 평화 중재를 요청하는 방침을 결정하고 협상을 시작했다.

5월 말 회의에서 육군대신 아난 미키가 일전 후 종전을 주장한 데 대해, 요나이는 조기 강화를 주장했다. 6월 9일 스즈키의 천벌 발언 사건으로 의회가 혼란에 빠지자 요나이는 사의를 표명했지만, 아난의 설득으로 이를 철회했다.

포츠담 선언 발표 후, 요나이는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의 대일 참전이라는 사태 속에서 포츠담 선언 수락을 통한 전쟁 종결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본토 결전을 주장하는 아난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지만, 결국 천황의 결단으로 종전이 결정되었다.

요나이는 종전 후 전범으로 구속될 것을 예상했지만, GHQ는 요나이의 이전 행동을 높이 평가하여 전범으로 지명하지 않았다. 히가시쿠니 공 내각·시데하라 내각에서도 해상으로 유임하여 일본 해군의 해체 과정을 담당했다.

요나이는 원폭 투하와 소련 참전을 "천우"라고 표현하며, 국내 정세의 안정을 위해 종전이 불가피했다고 말했다. 해군 해체 후, 요나이는 해군 재건과 기술 활용을 Y 위원회를 통해 해상자위대 창설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쇼와 천황은 요나이를 "아까운 사람"이라고 회상하며 그리워했고, 요나이 사후 모리오카시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4. 대중 문화


  • 2011년 영화 이소로쿠에서 요나이 미쓰마사는 배우 에모토 아키라가 연기했다.[15]
  • 2015년 영화 8월의 황제에서 요나이 미쓰마사는 배우 나카무라 이쿠지가 연기했다.[15]


; 영화

제목연도제작사배우비고
黎明八月十五日1952년森野五郎극중 역할은 해군대신
太平洋の鷲1953년도호(東宝)柳永二郎
日本敗れず1954년신도호(新東宝)柳永二郎극중 역할은 요네다 해군대신(米田海軍大臣)
軍神山本元帥と連合艦隊1956년신도호(新東宝)阿部九州男
大東亜戦争と国際裁判1959년신도호(新東宝)坂東好太郎
皇室と戦争とわが民族1960년신도호(新東宝)近衛敏明
八月十五日の動乱1962년神田隆
日本のいちばん長い日1967년도호(東宝)山村聡
激動の昭和史 軍閥1970년도호(東宝)山村聡
連合艦隊司令長官 山本五十六1968년도호(東宝)八代目松本幸四郎
あゝ決戦航空隊1974년도에이(東映)池部良
太陽2005년러시아 영화西沢利明
聯合艦隊司令長官 山本五十六2011년도에이(東映)柄本明
日本のいちばん長い日2015년쇼치쿠(松竹)中村育二



; 텔레비전 드라마

제목연도방송사배우
激浪1961년TBS早川雪洲
NHK特集 日本の戦後 제1편 일본 분할 알려지지 않은 점령 계획1977년NHK増田順司
大いなる朝1979년TV아사히(テレビ朝日)児玉清
歴史の涙1980년TBS神田隆
海にかける虹〜山本五十六と日本海軍1983년TV도쿄(テレビ東京) 新春ワイド時代劇渡辺文雄
山河燃ゆ1984년NHK 대하드라마村上幹夫
そして戦争が終った1985년TBS渥美国泰
日本の夏1987년TV 니시닛폰(テレビ西日本)平幹二朗
海の夕映え 最後の海軍大将井上成美1992년닛폰TV(日本テレビ)村井国夫
ザ・ラストUボート1993년NHK児玉清
命なりけり 悲劇の外相・東郷茂徳1994년TBS滝田裕介
ヒロシマ 原爆投下までの4か月1996년NHK神山繁
聖断2005년TV도쿄(テレビ東京)原田大二郎
大いなる楯 米内光政2020년IBC岩手放送村上弘明



;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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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간행물 官報 第6355号「叙任及辞令」 官報 1904-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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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간행물 官報 第8552号「叙任及辞令」 官報 1911-12-21
[50] 간행물 官報 第1324号「叙任及辞令」 官報 1916-12-29
[51] 간행물 官報 第2539号「叙任及辞令」 官報 1921-01-21
[52] 간행물 官報 第4066号「叙任及辞令」 官報 1926-03-17
[53] 간행물 官報 第1212号「叙任及辞令」 官報 1931-01-16
[54] 간행물 官報 第1827号「叙任及辞令」 官報 1933-02-03
[55] 간행물 官報 第2740号「叙任及辞令」 官報 1936-02-22
[56] 간행물 官報 第3357号「叙任及辞令」 官報 1938-03-15
[57] 간행물 官報 第4072号「叙任及辞令」 官報 1940-08-02
[58] 간행물 官報 第8679号「叙任及辞令」 官報 1912-05-27
[59] 간행물 官報 第91号「叙任及辞令」 官報 1907-07-21
[60] 간행물 官報 第1815号「叙任及辞令」 官報 1933-01-20
[61] 간행물 官報 第4438号・付録「辞令二」 官報 1941-10-23
[62] 간행물 官報 第4570号「宮廷録事 勲章親授式」 官報 1942-04-07
[63] 간행물 官報 1907年7月1日「叙任及辞令」 官報 1907-07-01
[64] 간행물 官報 1916年6月22日「叙任及辞令」 官報 1916-06-22
[65] 간행물 官報 1938年11月8日「叙任及辞令」 官報 1938-11-08
[66] 간행물 官報 1939年11月27日「叙任及辞令」 官報 1939-11-27
[67] 간행물 官報 1940年3月4日「叙任及辞令」 官報 1940-03-04
[68] 간행물 官報 1942年2月12日「叙任及辞令」 官報 1942-02-12
[69] 서적 豪閥 地方豪族のネットワーク 立風書房 2001
[70] 웹사이트 米内紘正オフィシャルサイト https://yonai.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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