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다 유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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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카다 유키코는 일본의 아이돌 가수로, 1983년 오디션 프로그램 '스타 탄생!'에서 우승하며 데뷔했다. 1984년 싱글 'FIRST DATE'로 데뷔하여 신인상을 수상했고, '유코의 미소'라는 별명으로 사랑받으며 '입술 네트워크'로 오리콘 차트 1위를 기록하는 등 최정상의 인기를 누렸다. 1986년, 자택에서 가스 자살을 시도한 후 소속사 건물에서 투신하여 1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유키코 신드롬'이라는 모방 자살 현상을 야기하기도 했다. 사후에도 앨범과 싱글이 재발매되며 팬들의 추모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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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다 유키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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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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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사토 카요 () |
예명 | 오카다 유키코 () |
애칭 | 유코 Yukko |
출생 및 사망 | |
출생일 | 1967년 8월 22일 |
출생지 | 일본 아이치현 이치노미야시 (출생) 아이치현 나고야시 아쓰타구 (출신) |
사망일 | 1986년 4월 8일 |
사망지 | 일본 도쿄도 신주쿠구 요쓰야 |
사망 원인 | 투신자살 |
매장지 | 아이사이시, 아이치현 |
신체 정보 (1985년 기준) | |
혈액형 | O형 |
키 | 155cm |
몸무게 | 44kg |
가슴둘레 | 86cm |
허리둘레 | 58cm |
엉덩이둘레 | 84cm |
컵 사이즈 | E컵 |
눈 색깔 | 검은색 |
머리카락 색깔 | 검은색 |
학력 | |
학력 | 호리코시 고등학교 |
활동 정보 | |
직업 | 가수 아이돌 배우 |
활동 기간 | 1983년 - 1986년 |
데뷔 | 1984년 4월 21일 (가수) |
소속사 | Sun Music|ja|サンミュージックプロダクション}} (선 뮤직) |
음반사 | 캐년 레코드 (현재 포니 캐년) |
관련 활동 | 소설 집필 (사망으로 인해 중단) |
대표작 | 금지된 마리코 |
대표곡 | 퍼스트 데이트 입술 Network |
수상 경력 | |
수상 경력 | 제26회 일본 레코드 대상 최우수 신인상 제15회 일본 가요 대상 최우수 신인상 그 외 |
2. 생애
1967년 아이치현 이치노미야시에서 태어나 나고야시 아쓰타구에서 자랐다. 1983년 일본TV의 오디션 프로그램 《스타 탄생!》(スター誕生!|스타 탄조!일본어) 제46회 결전 대회에서 나카모리 아키나의 〈슬로우 모션〉을 불러 우승하며 연예계에 입문했다.[36]
1984년 4월 21일, 다케우치 마리야가 작사 및 작곡한 싱글 〈First Date〉로 데뷔했다.[1] 팬들은 그녀를 "유코"(ユッコ)라는 애칭으로 불렀으며, 그녀의 미소는 "유코의 미소"라는 별명을 얻었다.[5] 같은 해 일본 레코드 대상 최우수 신인상을 비롯한 여러 음악상의 신인상을 받았다.[3]
1986년 4월 8일 오전, 자택에서 가스를 이용해 자살을 시도했으나 이웃 주민의 신고로 발견되어 구조되었다.[120] 기타아오이야마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퇴원했으나, 3시간 후 도쿄 신주쿠구 요쓰야에 있는 소속사 선 뮤직 건물 옥상에서 투신하여 만 1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투신 직후 즉사했으며, 자살 동기는 실연을 비관한 것이라는 추측이 있었다.[12]
그녀의 죽음은 팬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일본 사회에 모방 자살을 유발하여 "유키코 증후군" 또는 "유코 증후군"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2][15][1]
2. 1. 어린 시절
1967년 8월 22일, 아이치현 이치노미야시에서 태어나 나고야시 아쓰타구에서 성장했다. 본명은 사토 가요(佐藤佳代)였다.[25][26] 어릴 때부터 그림, 만화, 소설 등 예술 분야에 재능을 보였으며, 초등학교 3학년 때 쓴 작문에서는 장래 희망으로 "화가, 만화가, 소설가"를 꼽았다.[28]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수채화를 배우기 시작했고,[28] 초등학교 5학년 때 아사히 신문사 주최 사생 대회에서 입선, 6학년 때 아쓰타 신궁 사생 대회에서 1등상인 宮司賞을 수상할 정도로 그림에 재능을 보였다.[28] 중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유화, 일본화, 데생을 배우며 미술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다.[28]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과제로 카와이 나오코의 초상화를 유화로 그려 학교에서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29]
2. 2. 연예계 입문
오카다 유키코는 초등학생 때부터 연예인을 동경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합창부에 들어갔고, 초등학교 6학년 때는 고향의 텔레비전과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했다.[28] 또한, 초등학교 6학년 때 학예회의 음악극 『우라시마타로』에서 오토히메 역을 연기하기도 했다.[28]중학생이 되면서 호리프로 탤런트 스카우트 카라반이나 텔레비전 드라마 등 여러 오디션에 응모했다.[27] 1981년 8월에는 잡지 『고일 시대』(오우분샤)에 실린 오디션 ‘니콘 프레시 걸 콘테스트’에 응모하여 준 그랑프리를 수상하기도 했다.[27]
1983년 일본TV의 오디션 프로그램 《스타 탄생!》(スター誕生!|스타 탄조!일본어) 제46회 결전 대회에서 나카모리 아키나의 〈슬로우 모션〉을 불러 우승하며 연예계에 입문했다.[36]
처음에는 가족의 반대가 있었으나, 단식 투쟁까지 벌인 끝에[32] 연예계 입문 조건으로 “학급 테스트에서 1등 할 것”, “중부 통일 모의고사에서 학급 5위 이내에 들 것”, “제1지망인 나고야시립 향양고등학교에 합격할 것”을 어머니에게 제시받았다.[32][33] 엄격한 조건이었지만, 맹렬한 공부 끝에 모두 달성했다.[32] 또한, 지역 예선에 참관했던 연예 기획사 선뮤직 전무 후쿠다 토시오와 프로그램 프로듀서 카네야 이쿠오가 가족을 설득했기 때문에[35], 1983년 3월 결승 대회 출전을 허락받았다.[36]
1983년 4월, 나고야시립 향양고등학교에 입학함과 동시에[29], 《스타 탄생!》 결승 대회 합격이 전해졌다.[32] 연예 기획사는 선뮤직, 레코드 회사는 캐니언 레코드와 계약이 결정되었다. 같은 해 8월 25일, 상경하여[37] 선뮤직 사장인 아이자와 히데사다 자택에 하숙했다.[40] 9월 1일, 호리코시 고등학교에 편입하여 본격적인 연예 활동을 시작했다.[41]
2. 3. 아이돌 가수 데뷔
오카다는 1984년 4월 21일, 마리야 다케우치가 작사 및 작곡한 싱글 〈First Date〉로 데뷔했다.[1] 팬들은 그녀를 "유코"(ユッコ)라는 애칭으로 불렀으며, 그녀의 미소는 "유코의 미소"라는 별명을 얻었다.[5]데뷔와 동시에 여러 신인상을 받았으며,[3] 다케우치가 작사한 세 번째 싱글 〈-Dreaming Girl- Koi, Hajimemashite〉로 제26회 일본 레코드 대상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했다.[6][7] 1985년에는 드라마 《금지된 마리코》에 출연하며 배우로도 활동했다.[8] 1986년에는 마츠다 세이코가 작사하고 사카모토 류이치가 작곡한 싱글 〈입술 네트워크〉가 오리콘 차트 1위를 기록했다.[8]
가수 데뷔를 준비하면서, 캐니언 레코드의 음악 프로듀서 와타나베 유조는 오카다의 이미지를 '도쿄 6대학 야구 연맹 경기를 보러 가는 야마노테의 아가씨'로 정하고, 다케우치 마리야에게 데뷔곡 제작을 의뢰했다.[44] 다케우치는 '학원 연애 3부작'과 '10대 러브'를 테마로 한 총 6곡을 제공했고,[47] 1983년 12월 10일, 다케우치가 코러스로 참여한 가운데 첫 녹음이 이루어졌다. 데뷔 이후에도 다케우치는 오카다에게 작사만 포함하여 총 11곡을 제공했다.[49]
1984년은 휴일이 하루뿐인 바쁜 한 해였다.[50] 3월 11일, 도쿄 메이지 진구 그림 박물관 앞에서 열린 라디오 프로그램 이벤트에서 처음으로 무대에 섰고, 3월 20일부터 4월 8일까지 전국 7개 도시에서 팬 교류회를 개최했다. 3월 25일 음악 프로그램 '더 히트 스테이지', 4월 14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얀얀 우타우 스튜디오'와 음악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아이돌 펀치'에 출연하며 가수로서는 처음으로 TV에 출연했다.[43]
가수 데뷔 후에는 마츠다 세이코와 비교되며 "제2의 마츠다 세이코", "포스트 세이코의 제1 후보"로 불렸지만, "나는 나니까, 마츠다 세이코의 모방이 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46] 5월 31일, 음악 프로그램 '더 베스트 텐'에 처음 출연했을 당시 가요 랭킹은 21위였다.[46] 7월 29일, 산뮤직 공설 팬클럽을 결성하고, 특별 열차를 타고 팬들과 함께 행사장에 이동하여 4,000명의 팬과 함께 결성식을 거행했다.[52] 9월 24일 오사카, 9월 30일 도쿄에서 첫 콘서트를 개최했다. 10월 8일부터 이듬해 10월 7일까지 라디오 프로그램 '오카다 유키코 쬐끔 기다려'가 방송되었는데, 이 프로그램은 오카다의 희망에 따라 코너 없이 오카다가 직접 선곡했다.[53] 10월에는 음악 프로그램 '더 톱 텐'에서 8위, '더 베스트 텐'에서 10위를 기록하며 "10위 이내 출연"이라는 목표를 달성했다.[42]
이 해에 기카와 코우지, 키쿠치 모모코, 오기노메 요코 등과 신인상을 경쟁하여, 일본 레코드 대상 최우수 신인상을 비롯한 여러 음악상의 신인상들을 휩쓸었다. '일본 가요 대상' 등 5개의 최우수 신인상은 기카와와 공동 수상했다.[54]
2. 4. 갑작스러운 죽음
1986년 4월 8일 오전, 오카다 유키코는 자택에서 가스를 이용해 자살을 시도했으나, 이웃 주민의 신고로 발견되어 구조되었다.[120] 이후 기타아오이야마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퇴원했으나, 3시간 후 도쿄 신주쿠 구 요츠야에 있는 소속사 선 뮤직 건물 옥상에서 투신하여 만 1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투신 직후 즉사했으며, 자살 동기는 실연을 비관한 것이라는 추측이 있었다. 소속사는 유서를 유족에게도 공개하지 않았고, 잠복해 있던 기자가 시신을 모자이크 없이 보도하기도 했다.당시 선 뮤직 전무 이사[10] 후쿠다 도키오(福田時雄)의 회고에 따르면, 선 뮤직 설립자 아이자와 히데요시(相澤秀義)의 전화를 받고 병원에서 오카다를 데려왔을 때, 그녀는 조용히 울고 있었다. 사무실로 가고 싶다는 오카다의 말에 따라 선 뮤직 빌딩 6층으로 데려갔고, 이후 아이자와의 전화를 받고 후쿠다가 밖으로 나간 사이, 오카다는 계단을 통해 7층 옥상으로 올라가 신발을 벗고 뛰어내렸다. 당시 시각은 오후 12시 15분(JST)이었다.[1][2]
자살 이유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오카다가 "불행한 연애 때문에 괴로워하고 우울해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12] 상대는 "자신의 아버지뻘"인[1] 영화 '금지된 마리코(禁じられたマリコ)'의 공동 출연자 미네기시 토오루(峰岸徹)로 알려졌다.[2][13] 미네기시는 "그녀를 여동생처럼 생각했다"고 말했다.[13] 후쿠다는 미네기시와의 관계가 원인인지 묻는 질문에 모르겠다며[2] 부정하거나, 오카다의 두 번째 자살 시도가 첫 번째 시도가 선 뮤직에 가져올 수치 때문이라고 추측했다.[2]
오카다의 유해는 화장되어,[1] 아이치현(愛知県) 이누야마시(犬山市)에 있는 조만사(浄満寺)에 안치되었다.[3]

그녀의 죽음은 팬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일본 사회에 모방 자살을 유발하여 "유키코 증후군" 또는 "유코 증후군"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2][15][1] 1986년 4월 26일까지, 오카다 사망 이후 36건의 청소년 자살 중 23건이 건물 투신이었다.[16] 일각에서는 오카다가 10일 전 옥상에서 투신자살한 아이돌 엔도 야스코(遠藤保)를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15][1]
3. 사후
1986년 4월 8일 오전, 오카다 유키코는 자택에서 가스 자살을 시도했으나 이웃 주민의 신고로 구조되었다.[120]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퇴원했지만, 3시간 뒤 도쿄 신주쿠구 요쓰야에 있던 선 뮤직 건물 옥상에서 투신하여 만 1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의 죽음은 베르테르 효과를 일으켜 청소년 자살률을 증가시키는 등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유서는 공개되지 않았고, 언론은 그녀의 시신을 모자이크 없이 보도하여 논란이 되었다.[68]
5월에 발매 예정이었던 싱글 '꽃의 이미지 (花のイマージュ)'는 1999년 3월 한정 박스셋에 포함되어 공개되었다. 법명은 유교인샤쿠니카호(侑樂院釋尼佳朋일본어)이다.
3. 1. 추모와 기억
오카다 유키코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일본 사회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41][74] 특히 젊은 층에게 큰 영향을 미쳐, 그녀의 죽음 이후 '유키코 신드롬'[2] 또는 '유코 신드롬'[15][1]이라 불리는 청소년 모방 자살 현상이 나타났다. 1986년 4월 26일까지, 오카다 사망 이후 발생한 36건의 청소년 자살 중 23건이 건물에서 투신한 사례였다.[16]언론은 오카다의 시신을 모자이크 처리 없이 보도하여 대중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68] 이는 베르테르 효과를 더욱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오카다의 죽음은 국회에서도 다루어졌는데,[86][87] 1986년 4월 25일 중의원 문교위원회와 참의원 특별위원회에서 '청소년 문제'로 상정되어 청소년 자살 예방 대책을 심의하게 되었다.[86][87]
오카다 유키코는 사후에도 '영원한 아이돌'로 기억되고 있다. 그녀의 법명은 유교인샤쿠니카호(侑樂院釋尼佳朋일본어)이며, 묘소는 아이치현(愛知県) 이누야마시(犬山市)에 있는 조만사(浄満寺)이다.[3] 매년 4월 8일, 팬들은 그녀의 묘소를 찾아 추모하고 있다. 1987년 7월, 묘소에는 오카다의 자필 시와 예명, 수상 경력, 산뮤직 그룹 사장 아자와 히데사다의 애도의 뜻이 새겨진 비석이 세워졌다.
2017년 7월 29일에는 나고야(名古屋)의 도카이 라디오 본사(東海ラジオ放送)에서 오카다 유키코의 50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팬 미팅이 열리기도 했다.
3. 2. 음반 및 작품 재발매
1986년 4월 14일에 발매될 예정이었던 9번째 싱글 '하나노 이마쥬'는 추가 자살 우려로 연기되었다.[1] 이 싱글은 1999년 3월 'Memorial Album'에 수록되어 발매되었다. 같은 해 5월 14일에 발매 예정이었던 싱글 '하나노 이마쥬'와 콘서트 모습을 담은 비디오는 산뮤직 프로덕션 측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캐니언 레코드 측의 반대로 상품화가 중지되었다.[40] 이후 '하나노 이마쥬'는 13년 뒤인 1999년 CD 앨범 『메모리얼 박스』에 수록되었지만, 콘서트 영상은 2023년 현재까지도 상품화되지 않고 있다.타케우치 마리아(竹内まりや)는 그녀의 40주년 기념 앨범 ''Turntable''에서 오카다를 위해 작곡한 노래 3곡을 커버했다. 타케우치 마리야가 오카다를 위해 작곡한 11곡을 모두 담은 편집 앨범 ''Yukiko Okada Mariya's Songbook''은 2019년에 발매되었으며,[2] 2019년 10월 28일 오리콘 주간 앨범 차트 13위에 올랐다.[17]
4. 논란과 비판
1986년 4월 8일 오카다 유키코가 자택에서 가스 자살을 시도했다가 구조된 후, 병원 치료를 받고 퇴원했으나 3시간 만에 선 뮤직 건물 옥상에서 투신자살한 사건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120]
소속사 선 뮤직은 유키코의 가족에게조차 유서를 공개하지 않았고,[120] 잠복해 있던 기자가 유키코의 시신을 모자이크 처리 없이 보도하는 등 선정적인 언론 보도가 이어졌다.[120]
2016년 아사히 주간 기사에 따르면, 선 뮤직의 전무 이사 후쿠다 도키오는 선 뮤직 설립자 아이자와 히데요시가 병원에서 오카다를 데려오라고 지시했으며, 오카다를 만났을 때 그녀는 조용히 울고 있었다고 회상했다.[10] 오카다는 사무실로 가기를 원했고, 선 뮤직 빌딩 6층으로 옮겨졌다. 이후 아이자와의 전화를 받고 후쿠다가 자리를 비운 사이, 오카다는 7층 옥상으로 올라가 투신했다.[2][11]
오카다의 자살 이유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불행한 연애 때문에 괴로워하고 우울해했다"는 보도가 있었다.[12] "아버지뻘"로 묘사된 상대 배우는 미네기시 토오루였으며,[1][2][13] 미네기시는 "그녀를 여동생처럼 생각했다"고 말했다.[13]
이 사건은 소속사의 안일한 대응과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로 인해 더욱 큰 비극으로 이어졌으며, 베르테르 효과로 청소년 자살률이 증가하는 사회적 문제까지 야기했다.[120]
5. 음반 목록
오카다 유키코는 생전에 정규 음반 4장, 베스트 음반 3장, 싱글 10장, 홈 비디오 2편을 발매했다.[19] 1986년 4월 사망 이후에는 여러 베스트 앨범과 박스 세트가 발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