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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정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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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온정리 전투는 1950년 10월 24일부터 29일까지 한국 전쟁 중 중국 인민지원군(PVA)이 한국군 제6사단 제2연대를 공격하여 벌어진 전투이다. 유엔군의 북진에 대응하여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발생했으며, 온정리는 압록강으로 통하는 요충지였다. 전투 과정에서 한국군은 중공군의 매복 공격에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이 전투는 중공군의 한국 전쟁 개입을 공식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청천강 전투 등에서 유엔군이 고전하는 원인이 되었다. 중국은 이 전투가 벌어진 10월 25일을 항미원조 전쟁 기념일로 지정했다.

2. 배경

1950년 6월 25일, 북한 조선인민군(KPA)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초기 대한민국 국군유엔군은 북한군에 밀려 후퇴를 거듭했으나, 부산 교두보 전투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인천 상륙 작전과 낙동강 전선 돌파를 통해 전세를 역전시켰고, 1950년 10월에는 사실상 와해된 북한군을 몰아붙이며 38선을 넘어 북진을 시작했다.[4]

미국 제8군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조기에 종결시키기 위해 압록강 국경을 향해 빠르게 진격했다.[4] 이 과정에서 유재흥 소장이 지휘하는 대한민국 국군 제2군단은 제6보병사단, 제7보병사단, 제8보병사단으로 구성되어 선봉에서 북진을 이끌었다. 1950년 10월 23일, 제2군단은 온정리를 거쳐 압록강 방면으로 북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2]

특히 김종오 준장이 이끄는 제6사단은 덕천-구장동 진격 전투에서 승리한 후 진격 속도를 높여, 10월 26일에는 임부택 대령이 이끄는 제7연대가 초산 인근의 압록강 국경에 도달하기도 했다. 당시 북한군은 지휘체계가 무너지고 전투력을 대부분 상실하여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유엔군의 북진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개입을 유발했다. 중국 공산당 주석 마오쩌둥은 유엔군의 압록강 접근을 자국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중국인민지원군(PVA)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인민해방군 부대를 10월 19일 비밀리에 압록강 너머 한반도로 파병할 것을 명령했다.[5][8] 마오쩌둥은 PVA에게 제1차 공세를 통해 한반도 중부 태백산맥을 따라 진격하는 미 제8군의 우익이자 선봉 부대인 대한민국 제2군단을 우선적으로 격멸하라고 지시했다.[6] [7] 비밀리에 압록강을 건넌 중공군은 대한민국 국군 제2군단의 진격로 전방에 조용히 포진하며 예상치 못한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2. 1. 작전 계획

대한민국 육군 제2군단제6사단을 선봉으로 하여 압록강을 향해 진격할 계획을 세웠다.[2] 제6사단은 1950년 10월 24일 온정리를 점령했으며,[11] 사단장 김종오 준장의 지휘 아래 구체적인 진격 계획을 수립했다.

함병선 대령이 이끄는 제2연대는 온정리를 거쳐 북진하여 압록강 남안의 벽동까지 신속히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9] 이를 위해 송대후 소령의 제3대대를 기동대대로 편성하여 차량으로 선두에서 빠르게 진격하고, 석순천 소령의 제1대대와 이성훈 대리 대위의 제2대대는 도보로 후속하며 조선인민군 잔적을 소탕하면서 북진할 예정이었다. 한편, 제7연대는 초산 방면, 즉 온정리에서 북쪽 고장 방향으로 진격할 계획이었다.[10]

그러나 당시 유엔군조선인민군의 저항이 거의 없을 것으로 예상하여 부대 간 진격을 긴밀히 조율하지 않았다.[10] 이로 인해 제7연대는 새로운 위협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 채 별다른 저항 없이 북한군 지역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12]

한편, 대한민국 국군압록강을 향해 진격하는 동안, 중국 인민지원군(PVA)은 유엔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다가올 제1차 공세를 위해 비밀리에 부대를 배치하고 있었다. PVA 사령관 펑더화이는 태유동에 새로운 지휘소를 설치하려 했으나, 대한민국 제2연대의 예상 진격로가 그의 위치를 위협하게 되었다.[13] 주변에 PVA의 존재를 숨겨줄 조선인민군 부대가 없었기 때문에, 펑더화이는 제1차 공세를 예정보다 일찍 시작하기로 결정하고 PVA 제40군에게 온정리 근처에서 대한민국 제2연대를 요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3] 10월 24일 밤, PVA 제40군 예하 제118사단은 지정된 차단 지점에 도착했으며, 온정리에서 북진군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내려다보이는 능선에 다수의 매복 진지를 구축하며 전투를 준비했다.[14]

3. 전투 과정

1950년 10월 24일, 압록강을 향해 빠르게 북진하던 대한민국 육군 제6보병사단 제2연대가 온정리에 도착하면서 전투가 시작됐다. 제2연대는 온정리 도착 직후 조선인민군 패잔병과의 교전 및 통신 감청을 통해 중국인민지원군의 출현 가능성을 처음 인지했다.[1]

다음 날인 10월 25일, 제2연대가 북진을 재개하자 온정리 북방 장동 부근에서 미리 매복하고 있던 중공군 제40군 예하 부대의 대규모 기습 포위 공격을 받았다.[9][11] 중공군은 도로 양측의 고지에 병력을 숨겨두고 국군 주력이 통과할 때를 노려 좌우에서 동시에 공격을 감행했다. 이 공격으로 선두에 있던 제3대대가 큰 피해를 입고 와해됐으며, 대부분의 차량과 중화기를 상실한 채 소수 병력만이 온정리로 후퇴했다.[11] 연대 주력 역시 큰 타격을 입고 고립될 위기에 처했다.[16]

중공군의 압도적인 병력과 포위 공격에 밀려 제2연대는 10월 26일 새벽, 중공군의 총공세 속에 온정리를 포기하고 분산 철수했다. 제1대대와 제3대대 일부는 태평 방면으로, 제2대대는 운산 방면으로 철수했다. 이후 제2연대를 구원하고 전선을 안정시키기 위해 예비대인 제19연대가 투입되어 중공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으나, 중공군의 계속된 증원과 공세, 특히 인해전술을 동반한 맹렬한 공격으로 인해 전황을 뒤집기는 어려웠다.

결국 10월 29일, 제19연대마저 고전하는 상황에서 제2연대는 재편성을 마치고 구장동 방면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온정리 전투는 중공군이 한국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여 유엔군국군의 북진을 저지한 대표적인 초기 전투로, 국군은 이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고 북진을 멈추게 됐다.

3. 1. 10월 24일

제6사단 제2연대는 함병선 대령의 지휘 아래 이날 08:00에 구장동을 출발하였다. 제1대대를 선두로 제3대대, 제2대대가 뒤따르며 태평을 거쳐 온정리로 향했다.

선두 제1대대는 18:00경 온정리 부근에 도착했을 때, 온정리 동북방 6km 지점인 559고지 일대에서 북한군 패잔병 2개 중대로부터 기습 사격을 받았다. 제1대대는 즉시 반격하여 이들을 격퇴하고 19:40에 온정리로 진입하여 숙영 준비를 갖추었다. 한편, 제3대대는 이보다 앞선 19:00에 온정리에 먼저 도착하여 북한군 잔당을 소탕하고 내무서를 점령하여 각종 서류를 확보하였다.

이 과정에서 국군의 진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북한군의 유선 통신망을 도청하여 처음으로 중공군의 출현에 대한 첩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제3대대는 이 사실을 즉시 상부에 보고하는 한편, 온정리 후사면의 326고지 일대를 점령하고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3. 2. 10월 25일

전날 온정리에 집결하여 숙영한 제2연대는 10월 25일 아침, 전열을 정비하고 북진을 재개했다.

10월 25일 제2연대 부대 이동 상황
시간부대지휘관이동 방식출발/도착 지점
09:00제2대대 (선두)이성훈 대위도보온정리 출발
11:00제1대대-도보온정리 출발
11:00제3대대 (기동)-차량화 (야포, 대전차포 증강)온정리 출발
12:00 경제3대대-차량화온정리 북방 7km 장동 부근 도착
12:00 경제2대대-도보490고지 하록 중흥동 도착
12:00 경제1대대-도보온정리 북방 3km 지점 개활지 도로 통과 중



정오 무렵, 제2연대의 주력이 장동 부근의 도로를 통과할 때, 지형을 이용하여 미리 매복하고 있던 중공군의 기습적인 포위 공격이 시작되었다. 중공군은 동림산(1165고지)을 배후로 도로변 능선에 주력을 숨겨두었고, 구룡강 건너편 도리산(841고지) 일대에도 연대 규모의 병력을 매복시켜 좌우에서 동시에 공격을 감행했다.

선두를 달리던 제3대대는 온정 서쪽 약 약 12.87km 지점에서 처음 공격을 받았다.[9] 처음에는 소규모 조선인민군(KPA) 부대로 오인하고 차량에서 내려 분산시키려 했으나,[9] 고지에서 대기하던 중국인민지원군(PVA) 2개 연대가 국군의 좌우측과 정면에 즉시 맹렬한 사격을 퍼부었다.[11][15] 제3대대는 순식간에 붕괴되었고, 대부분의 차량과 포병 장비를 버리고 흩어져 도주했다.[11] 약 400명의 생존자만이 포위망을 뚫고 온정리로 후퇴하는 데 성공했다.[11]

제3대대가 격렬한 공격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연대 본부는 제2대대를 지원하기 위해 전진시켰고, 제1대대는 온정리로 후퇴하도록 지시했다.[16] 그러나 제2대대 역시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더 나아가지 못하고 후퇴했다. 이 과정에서 국군은 중공군 포로 몇 명을 생포했고, 이들을 통해 도로 주변에 약 10,000명의 중공군 병력이 매복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정보를 얻게 되었다.[9][16]

연대장 함병선 대령은 각 대대에 계속 싸우도록 독려했지만, 중공군은 유리한 지형을 이용한 포위 공격과 병력 손실을 감수하는 반복적인 공격으로 국군을 계속 압박했고, 전황은 시시각각 불리해지고 있었다.

상황이 급변하자 사단에서는 제2연대에 온정리에서 진지를 계속 고수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예비대인 박광혁 대령이 이끄는 제19연대를 급히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중공군 지휘부는 제40군 예하 제120사단을 추가로 전투에 투입하라고 명령했고, 나머지 제40군 병력은 온정 주변의 도로를 차단하며 포위망을 좁히는 데 주력했다.[15] 자정 무렵에는 모든 차단선이 구축되면서 제2연대는 완전히 고립될 위기에 처했다.

3. 3. 10월 26일

국군 제2연대 제1대대는 전날에 이어 밤새 온정리를 지키고 있었고, 제3대대는 온정중학교에서 병력을 계속 집결시키는 동시에 일부 병력과 장비를 연대 직할대와 함께 온정리 후사면의 157고지로 이동시켜 주변 방어를 준비하고 있었다.

중공군은 우세한 병력을 바탕으로 그들이 자주 사용하는 우회 및 포위 전술을 실행하기 위해, 10월 25일 이른 저녁부터 구룡천을 몰래 건너 온정리 동남쪽 약 4km 지점인 535고지 좌측 전방으로 이동하여 온정리를 사방에서 포위했다. 그리고 10월 26일 새벽 4시, 중공군은 함성과 함께 일제히 맹렬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약 1:5의 병력 열세 속에서 국군과 중공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결국 157고지의 국군 진지 일부가 무너졌다. 동시에 온정중학교가 기습을 당하면서, 마침 집결 중이던 제3대대가 큰 혼란에 빠졌다. 중공군 후속 부대는 이 틈을 타 사방에서 온정리로 침공해 들어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제1대대 장병들은 총검과 단도로 육탄전을 벌이며 끝까지 싸웠으나, 수적으로 크게 불리하여 일부 병력이 흩어지게 되었다. 결국 연대본부와 제1대대 주력은 적의 추격을 저지하면서 내평의 향교동 방면으로 철수했고, 제3대대의 일부 병력은 희천 방면으로 이동했다.

한편, 490고지에서 밤새 방어하고 있던 제2대대는 연대 주력이 태평으로 이동하면서 중공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고립되었다. 사방에서 중공군의 압박을 받아 위험한 상태에 놓이자, 제2대대는 새벽 5시에 진지를 돌파하여 구룡천을 건너 운산 방면으로 철수했다.

3. 4. 10월 27일

제2연대는 태평으로 이동하여 제1대대에게 사주경계를 맡겼고, 전날 희천 방면으로 이동했던 제3대대에는 신속히 태평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연대장 함병선 대령의 명령을 받은 제3대대는 희천에서 병력을 수습한 뒤 태평으로 진격하던 중 묘향산에서 야영하였다. 제2대대는 서쪽으로 약 30km 떨어진 운산 부근의 용전리에 18:00 도착하여 남은 병력을 모으고 있었다.

한편, 제19연대는 김준교 소령이 이끄는 제1대대를 양강동까지 진출시켜 제7연대의 배후를 노리는 중공군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김욱전 소령이 이끄는 제2대대는 07:00에 풍중리 일대를 점령하여 중공군 후속부대의 진격을 막았다. 박철 소령이 이끄는 제3대대는 07:30에 마주친 중공군을 격파하고 501고지에 도달했으나, 19:00경 1개 대대 규모의 중공군이 다시 공격해왔다. 치열한 전투 끝에 이들을 격퇴하고 고지를 계속 지키는 작전을 수행했다.

3. 5. 10월 28일

제2연대는 태평에서 계속 분산된 병력을 모으고 있었다. 묘향산에서 오전 6시에 출발한 제3대대의 주력이 낮 12시에 태평에 도착하자, 제1대대와 제3대대의 재편성을 마치고 주변 경계에 들어갔다. 제2대대는 이날 오후 1시에 용문을 출발하여 원리로 이동하고 있었다.

한편, 제19연대는 온정리를 되찾기 위해 준비했다. 제1대대를 양강동에서 동림산록의 용연동으로 보내 제2대대와 함께 공격할 준비를 하도록 했다. 제2대대는 풍중리에서 계속 방어하던 중, 저녁 6시에 약 1개 중대 규모의 중공군 공격을 물리치고 제1대대와 함께 온정리로 진격할 준비를 마쳤다.

이때 제19연대 제3대대는 계속 501고지에서 중공군의 진격을 막고 있었다. 온정리를 점령한 중공군은 병력을 늘려 희천을 공격할 목적으로 동쪽으로 이동을 서둘렀다. 이날 저녁 6시 30분에는 1개 대대 규모의 병력으로 야간 공격을 시도해왔다. 제3대대는 화력을 집중하여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중공군은 계속해서 병력을 투입하며 끈질기게 공격을 이어갔고, 대대를 포위하려 시도했다.

3. 6. 10월 29일

제2연대는 전방의 제19연대 상황이 불리해지자 재편성된 제1대대와 제3대대를 태평 남방 3km 지점의 346고지 부근으로 이동시켜 방어진을 형성했다. 그러나 18시에 사단으로부터 구장동으로 집결하라는 긴급 명령을 받고 이동을 시작했다. 한편, 제2대대는 새벽 3시에 원리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한 뒤, 오후 1시에 개천으로 향하였다.

제19연대는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새벽 2시에 제2대대가 중공군의 갑작스러운 기습 공격을 받아 혼란에 빠지자, 김준교 소령이 지휘하는 제1대대를 직동으로 급히 이동시켜 중공군의 측면과 후방에서 지원 공격을 하도록 했다.

제1대대는 직동에 도착하여 아침 6시부터 공격을 개시했다. 동림산록의 405고지 일대에서 약 1개 대대 규모의 중공군이 완강하게 저항했다. 이에 제2중대는 정면에서 적을 견제하는 임무를 맡았고, 제1중대는 온정리로 통하는 도로 양측의 중공군을 추격한 뒤 제2대대를 지원했다. 제3중대는 제4중대의 지원을 받으며 장동 뒷산의 중공군을 공격토록 하였으나, 중공군은 끈질기게 저항했을 뿐만 아니라 계속 병력을 증원하여 오전 11시경에는 인해전술을 펼치며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양측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중공군은 독전대의 감시 아래 맹렬하게 공격해왔다. 결국 제1대대마저 어려운 상황 속에서 분전하게 되었다.

4. 결과 및 영향

10월 24일부터 10월 30일까지 7일간 초산온정리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대한민국 국군 제6사단은 약 4대 1의 병력 열세 속에서 싸웠으나, 갑작스러운 중공군의 공세로 인해 큰 피해를 입고 국경 지역에서 물러서야 했다. 특히 제7연대는 부연대장 최영수 중령, 제2대대장 김종수 중령, 제3대대장 조한섭 소령이 포로가 되고 중대장 12명 중 5명이 전사하는 등 피해가 컸다.

10월 25일 반격을 시작한 중공군은 10월 26일 온정리를 다시 점령하고, 제7연대가 초산 및 고장에서 후퇴하자 계속 남진했다. 중공군 제40군은 희천 방향으로 진격하는 동시에 주력 부대는 청천강 방어선으로 향했다. 중공군 제38군과 제39군 역시 각각 희천과 운산 방면으로 진격하며 평양으로 향하는 길목인 청천강 방어선을 돌파하려 했다.

이 전투의 결과로 국군 제2군단은 사실상 궤멸되어 조직적인 전투력을 상실했다.[29] 이는 미 제8군의 우측 방어선이 중공군에게 완전히 노출되었음을 의미했고, 중공군은 이 기회를 이용해 남쪽으로 진격을 계속했다.[30] 노출된 미 제8군 중앙에 대한 추가 공격으로 운산 전투에서 국군 제15보병연대와 미 제8기병연대가 큰 손실을 입었다.[30] 중공군이 유엔군 후방으로 밀려들면서 미 제8군은 청천강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31] 11월 4일, 미 제5연대 전투단과 국군 제7사단군우리 방어전이 중공군의 진격을 저지하여 제8군의 완전한 붕괴를 막았다.[32][33] 그러나 중공군은 병참 문제로 11월 5일 제1차 공세를 중단해야 했다.[34][35]

온정리 전투는 중공군에게 국군 제2군단의 취약점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36] 중공군 사령관 펑더화이는 중공군 제2차 공세 계획 시 이 약점을 다시 공략했고,[36] 이는 청천강 전투에서 유엔군의 큰 패배로 이어졌다.[37] 중국에서는 이 전투를 한국 전쟁에 대한 공식적인 참전으로 기념하며, 전투가 시작된 10월 25일을 항미원조 전쟁 기념일로 지정하고 있다.[38]

참조

[1] 서적
[2] 서적
[3] 문서
[4] 웹사이트 Korean War http://www.britannic[...] Encyclopædia Britannica 2009-02-04
[5] 서적
[6]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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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서적
[9] 서적
[10]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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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15] 서적
[16] 서적
[17] 서적
[18] 서적
[19] 서적
[20] 서적
[21] 서적
[22] 서적
[23] 서적
[24] 서적
[25] 서적
[26] 서적
[27] 서적
[28] 서적
[29] 서적
[30] 서적
[31] 서적
[32] 서적
[33] 서적
[34] 서적
[3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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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서적
[38] 웹사이트 War to Resist America and Aid Korea First Phase Campaign (抗美援朝战争第一次战役) http://www.cass.net.[...] Chinese Academy of Social Science 2009-11-13
[39] 서적 한국전쟁사 국방부, 전쟁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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