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우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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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군우리 전투는 1950년 11월, 한국 전쟁 중 중화인민공화국이 개입한 이후 유엔군과 중국인민지원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중국군의 공세로 유엔군의 우익이 붕괴되자, 미국 제9군단의 철수로를 확보하기 위해 튀르키예 여단이 투입되었다. 튀르키예 여단은 중국군과 전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었지만, 미 제8군은 이들의 희생을 기려 훈장을 수여했다. 그러나 튀르키예 여단의 역할과 전투 수행 능력에 대한 논란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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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우리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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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분쟁 | 와원 전투, 청천강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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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950년 11월 27일 – 29일 |
장소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북도 개천군 와원 (군우리 동쪽) |
결과 | 중국의 승리; 튀르키예군의 지연 작전 성공 |
교전 세력 | |
유엔군 | 튀르키예 미국 |
중국 인민지원군 | 중국 |
지휘관 | |
유엔군 | 타흐신 야즈즈 뤼트피 빌긴 (전사) |
중국 인민지원군 | 자이 중위 |
부대 | |
유엔군 | 튀르키예 여단 미국 제2보병사단 |
중국 인민지원군 | 중국 인민해방군 제114사단 |
사상자 규모 | |
유엔군 | 사망 218명 부상 455명 실종 94명 중국 측 추정: 약 1,000명 |
중국 인민지원군 | 3,000명 이상 사망 및 부상 |
2. 배경
1950년 중반 조선인민군의 궤멸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인민지원군을 파병하여 유엔군과 맞서 싸웠다.[47] 당시 유엔군은 한중 국경인 압록강에 거의 근접해 있었다.[48] 그러나 중국인민지원군은 기습 공격을 통해 대한민국 제2군단을 섬멸하고, 미국 제8군의 우익을 붕괴시켜 1950년 11월 4일 압록강 진격을 목표로 하던 유엔군의 공세를 지연시켰다.[48]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1950년 11월 24일 제8군에게 새로운 공세, 즉 '크리스마스 귀향 공세'를 개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49] 이 공세의 일환으로, 새로 도착한 튀르키예 여단은 미국 제9군단의 예비부대가 되었고, 제8군의 공격축 중심에 배치되었다.[50]
그러나 11월 25일 밤, 중국인민지원군은 대규모 반격을 감행했다.[51] 이전의 승리를 바탕으로 중국인민지원군은 다시 대한민국 제2군단을 공격하였고, 11월 26일 유엔군의 우익은 완전히 붕괴되었다.[53]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는 제38군에게 유엔군의 우익에서 서쪽으로 진격하여 군우리에서 미국 제9군단의 철수로를 차단할 것을 지시했다.[52] 이에 맞서 제9군단은 튀르키예 여단에게 11월 26일 군우리 동쪽으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53]
튀르키예 병사들은 영어와 한국어를 모두 이해할 수 없었고, 중국인민지원군 부대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에 전투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53][54] 튀르키예 여단은 제9군단의 지시를 잘못 이해하여 동쪽으로 진격하는 동안 장거리 행군을 해야 했다.[55] 1950년 11월 26일 덕천에서 도주하던 대한민국 제6보병사단과 제7보병사단은 와원에 처음 도착한 튀르키예 여단 2개 대대의 공격을 받았는데, 이는 튀르키예군이 대한민국 국군을 중국군으로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오인 사격으로 대한민국 국군 20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튀르키예군도 14명의 사망자와 6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56] 잘못된 정보로 인해, 튀르키예군은 중국군을 도로변에서 조우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57][58] 미국 및 유럽 언론들은 튀르키예군이 중공군을 상대로 승리했다고 보도했으나, 이후 정확한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미국 언론은 보도를 정정하지 않았다.[59][60]
11월 27일, 탈진한 튀르키예 여단은 군우리 동쪽의 와원에 입성했고, 여단장 타흐신 야즈즈는 튀르키예군에게 반원의 교두보를 동북쪽으로 설치하라고 지시했다.
2. 1. 유엔군의 압록강 진격과 중공군의 개입
1950년 중반 조선인민군의 궤멸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인민지원군을 파병하여 유엔군과 맞서 싸웠다.[47] 당시 유엔군은 한중 국경인 압록강에 거의 근접해 있었다.[48] 그러나 중국인민지원군은 기습 공격을 통해 대한민국 제2군단을 섬멸하고, 미국 제8군의 우익을 붕괴시켜 1950년 11월 4일 압록강 진격을 목표로 하던 유엔군의 공세를 지연시켰다.[48]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1950년 11월 24일 제8군에게 새로운 공세를 개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49] 새로 도착한 튀르키예 여단은 이 공세의 일환으로 미국 제9군단의 예비부대가 되었고, 제8군의 공격축 중심에 배치되었다.[50]11월 25일 밤, 중국인민지원군은 대규모 반격을 감행했다.[51] 이전의 승리를 바탕으로 중국인민지원군은 다시 대한민국 제2군단을 공격하였고, 11월 26일 유엔군의 우익은 완전히 붕괴되었다.[53]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는 제38군에게 유엔군의 우익에서 서쪽으로 진격하여 군우리에서 미국 제9군단의 철수로를 차단할 것을 지시했다.[52] 이에 맞서 제9군단은 튀르키예 여단에게 11월 26일 군우리 동쪽으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53]
튀르키예 병사들은 영어와 한국어를 모두 이해할 수 없었고, 중국인민지원군 부대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에 전투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53][54] 튀르키예 여단은 제9군단의 지시를 잘못 이해하여 동쪽으로 진격하는 동안 장거리 행군을 해야 했다.[55] 1950년 11월 26일 덕천에서 도주하던 대한민국 제6보병사단과 제7보병사단은 와원에 처음 도착한 튀르키예 여단 2개 대대의 공격을 받았는데, 이는 튀르키예군이 대한민국 국군을 중국군으로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오인 사격으로 대한민국 국군 20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튀르키예군도 14명의 사망자와 6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56] 잘못된 정보로 인해, 튀르키예군은 중국군을 도로변에서 조우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57][58] 미국 및 유럽 언론들은 튀르키예군이 중공군을 상대로 승리했다고 보도했으나, 이후 정확한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미국 언론은 보도를 정정하지 않았다.[59][60] 11월 27일, 탈진한 튀르키예 여단은 군우리 동쪽의 와원에 입성했고, 여단장 타흐신 야즈즈는 튀르키예군에게 반원의 교두보를 동북쪽으로 설치하라고 지시했다.
2. 2.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공세'와 튀르키예 여단의 역할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1950년 11월 24일, 압록강으로의 진격을 재개하라는 '크리스마스 귀향 공세'를 명령했다.[49][12] 이 공세의 일환으로, 새로 도착한 튀르키예 여단은 미 제9군단의 예비대로 배정되어 제8군의 공격 축선 중앙에 배치되었다.[50][13]1950년 중반 조선인민군이 궤멸된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인민지원군을 파병하여 유엔군과 맞서 싸웠다.[47] 당시 유엔군은 한중 국경에 거의 근접해 있었으나, 중국인민지원군은 일련의 기습 공격을 통해 대한민국 제2군단을 섬멸하고 미국 제8군의 우익을 붕괴시켜 1950년 11월 4일 압록강 진격을 목표로 하던 유엔군의 공세를 지연시켰다.[48][11]
맥아더의 낙관에도 불구하고, 11월 25일 밤 중국인민지원군은 대규모 반격을 감행했다.[51] 제8군을 상대로 거두었던 이전의 승리를 바탕으로, 중국인민지원군은 다시 대한민국 2군단을 공격하였고, 11월 26일 유엔군의 우익은 완전히 붕괴되었다.[53] 펑더화이는 제38군에게 유엔군의 우익에서 서쪽으로 진격하여 군우리에서 미국 제9군단의 철수로를 차단할 것을 지시했다.[52] 이에 맞서 제9군단은 튀르키예 여단에게 11월 26일 군우리 동쪽으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53]
튀르키예 병사들은 영어와 한국어를 모두 이해할 수 없었고,[53][16] 튀르키예 여단의 파병 이후에도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으며, 중국인민지원군 부대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에 전투는 더욱 혼돈에 싸이게 되었다.[54][17] 튀르키예 여단은 제9군단의 지시를 잘못 이해하여 동쪽으로 진격하는 동안 시골에서 장거리 행군을 할 수 밖에 없었다.[55] 1950년 11월 26일 덕천에서 도주하던 대한민국 제6보병사단과 제7보병사단은 와원에 처음 도착한 튀르키예 여단 2개 대대의 공격을 받았는데, 이는 튀르키예군이 대한민국 국군을 중국군으로 착각한 것이 원인이었다. 이 오인 사격으로 대한민국 국군 20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튀르키예군도 14명의 사망자와 6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56]
잘못된 정보로 인해, 튀르키예군은 중국군을 도로변에서 조우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57][58][20][21] 미국 및 유럽 언론들은 튀르키예이 중공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고 보도했고, 뉴스가 발표된 이후 정확한 사실이 미국 언론에게 유출되었음에도 미국 언론은 보도를 정정하려고 들지 않았다.[59][60][22][23] 11월 27일, 탈진한 튀르키예 여단은 군우리 동쪽의 와원에 입성했다. 여단장 타흐신 야즈즈가 여단을 이끌었다. 타흐신 중령은 튀르키예군에게 반원의 교두보를 동북쪽으로 설치하라고 지시했다.[18]
2. 3. 오인 사격과 지휘 혼란
3. 전투 경과
11월 27일 밤, 자이중위가 지휘하는 중공군 제38군 예하 114사단 선두 부대가 튀르키예 여단 정찰 소대를 기습 공격하여 괴멸시켰다.[25][26] 이는 여단 전체에 경고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27] 중공군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감지한 튀르키예 여단 선봉 대대는 와원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방어 진지를 긴급히 설치했다.[28] 얼마 지나지 않아 튀르키예군은 중공군 114사단 342연대와 마주쳤고,[26] 중공군은 튀르키예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공격을 집중했다.[27] 튀르키예군의 강력한 사격으로 중공군의 진격을 저지했으나, 중공군은 수비대의 좌익으로 계속해서 병력을 전개했다. 11월 28일 해 질 무렵, 선봉 대대 전체가 중공군에 포위되었고, 칼과 총검을 이용한 백병전이 벌어져 400명의 튀르키예군 사상자가 발생했다.[27][29] 야즈즈는 와원이 중공군이 점령한 언덕으로 둘러싸인 것을 확인하고 튀르키예 여단에 5km 서쪽의 신임리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27]
튀르키예 여단이 밤에 철수하는 동안 중공군 342연대가 바짝 추격했다.[27] 신임리에 도착하자마자 중공군은 즉시 후방 포병 부대와 제3대대를 기습 공격하여 여단의 퇴로를 차단했다.[28] 이와 동시에 튀르키예 사령부와 대대 간의 통신이 두절되어 여단의 나머지 병력은 고립되었다.[27]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포위된 튀르키예군은 탄약이 소진될 때까지 완강히 저항했다.[30] 치열한 전투로 인해 중공군은 340연대를 투입하여 342연대를 지원하게 했다.[31] 격렬한 전투에도 불구하고, 튀르키예군은 11월 29일 아침이 되자 궤멸 직전에 놓였으며, 때마침 이루어진 공습만이 튀르키예군이 포위망에서 벗어날 수 있게 했다.[30] 전투 후, 튀르키예 여단은 대부분의 장비와 차량을 잃고 붕괴되었다.[32]
11월 28일 밤 미 제2보병사단이 군우리에 진입하면서,[33] 튀르키예 여단의 잔여 병력은 군우리로 후퇴하여 미군 제38보병연대와 합류했다.[27][34] 11월 29일, 신임리에서 쫓겨난 튀르키예군은 혼란 속에 후퇴했고,[35] 제38보병연대는 튀르키예군이 군우리로 간신히 들어오는 것을 발견했다.[29] 같은 날 오후, 중공군 114 사단은 제112사단과 합류하여 튀르키예 여단과 미 제38연대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고,[31][36] 개천 남쪽 둑을 따라 공격한 후 유엔군 후방 지역에서 강을 건너 튀르키예군을 포위했다.[37] 야즈즈는 철수를 명령했고,[37] 그 결과 제38보병연대의 우익은 완전히 노출되었다.[38] 봉명리에서 튀르키예군의 패배는 제38보병의 우익이 노출되었고, 혼란에 빠진 튀르키예군의 대열이 조지 B. 펩로 대령의 명령에 따라 노출된 측면을 방어하기 위해 제1대대가 제38보병의 측면에 자리를 잡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엄청난 혼란을 야기했다. 동시에, 중공군 제113사단은 군우리를 남쪽에서 차단하여 미 제2사단과 튀르키예 여단을 군우리에 완전히 포위했다.[31][39]
3. 1. 와원 전투 (11월 27일 ~ 28일)
11월 27일 밤, 자이중위가 지휘하는 중공군 제38군 예하 114사단 선두 부대가 튀르키예 여단 정찰 소대를 기습 공격하여 괴멸시켰다.[25][26] 이는 여단 전체에 경고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27] 중공군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감지한 튀르키예 여단 선봉 대대는 와원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방어 진지를 긴급히 설치했다.[28] 얼마 지나지 않아 튀르키예군은 중공군 114사단 342연대와 마주쳤고,[26] 중공군은 튀르키예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공격을 집중했다.[27] 튀르키예군의 강력한 사격으로 중공군의 진격을 저지했으나, 중공군은 수비대의 좌익으로 계속해서 병력을 전개했다. 11월 28일 해 질 무렵, 선봉 대대 전체가 중공군에 포위되었고, 칼과 총검을 이용한 백병전이 벌어져 400명의 튀르키예군 사상자가 발생했다.[27][29] 야즈즈는 와원이 중공군이 점령한 언덕으로 둘러싸인 것을 확인하고 튀르키예 여단에 5km 서쪽의 신임리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27]
튀르키예 여단이 밤에 철수하는 동안 중공군 342연대가 바짝 추격했다.[27] 신임리에 도착하자마자 중공군은 즉시 후방 포병 부대와 제3대대를 기습 공격하여 여단의 퇴로를 차단했다.[28] 이와 동시에 튀르키예 사령부와 대대 간의 통신이 두절되어 여단의 나머지 병력은 고립되었다.[27]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포위된 튀르키예군은 탄약이 소진될 때까지 완강히 저항했다.[30] 치열한 전투로 인해 중공군은 340연대를 투입하여 342연대를 지원하게 했다.[31] 격렬한 전투에도 불구하고, 튀르키예군은 11월 29일 아침이 되자 궤멸 직전에 놓였으며, 때마침 이루어진 공습만이 튀르키예군이 포위망에서 벗어날 수 있게 했다.[30] 전투 후, 튀르키예 여단은 대부분의 장비와 차량을 잃고 붕괴되었다.[32]
3. 2. 군우리 철수 및 포위 (11월 28일 ~ 29일)
11월 27일 밤, 자이중위가 지휘하는 중공군 제114사단의 선두 부대가 튀르키예 여단의 정찰 소대를 매복 공격하여 괴멸시켰다.[25][26] 중공군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알게 된 여단 선봉 대대는 와원으로 가는 길에 방어 위치를 잡았다.[28] 얼마 지나지 않아 중공군 342 연대와 마주쳤고,[26] 튀르키예군의 맹렬한 사격으로 중공군의 진격을 막았지만, 공격해 오는 중공군 연대는 수비대의 좌익으로 계속 확산되었다. 11월 28일 해 질 무렵, 선봉 대대 전체가 중공군에 포위되었고, 백병전이 벌어져 400명의 튀르키예군 사상자가 발생했다.[27][29] 타흐신 야즈즈 준장은 와원이 중공군이 점령한 언덕으로 둘러싸인 것을 보고 튀르키예 여단에게 신임리 마을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27]튀르키예 여단이 밤에 철수하자 중공군 342 연대가 뒤쫓았다.[27] 신임리에서 중공군은 후방 포병 부대와 제3대대에 기습 공격을 가하여 여단을 차단했고,[28] 튀르키예 사령부와 대대 간의 통신이 두절되었다.[27] 포위된 튀르키예군은 탄약이 떨어질 때까지 완강하게 반격했다.[30] 격렬한 전투에도 불구하고, 튀르키예군은 11월 29일 아침이 되자 궤멸 직전에 놓였고, 때마침 이루어진 공습만이 튀르키예군이 포위망에서 벗어날 수 있게 했다.[30] 전투 후, 튀르키예 여단은 대부분의 장비와 차량을 잃었다.[32]
11월 28일 밤 미 제2보병사단이 군우리에 진입하면서,[33] 튀르키예 여단의 잔여 병력은 군우리로 후퇴하여 미군 제38보병연대와 합류했다.[27][34] 11월 29일, 신임리에서 쫓겨난 튀르키예군은 혼란 속에 후퇴했고,[35] 제38보병연대는 튀르키예군이 군우리로 간신히 들어오는 것을 발견했다.[29] 같은 날 오후, 중공군 114 사단은 제112사단과 합류하여 튀르키예 여단과 미 제38연대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고,[31][36] 개천 남쪽 둑을 따라 공격한 후 유엔군 후방 지역에서 강을 건너 튀르키예군을 포위했다.[37] 야즈즈 준장은 철수를 명령했고,[37] 그 결과 제38보병연대의 우익은 완전히 노출되었다.[38] 봉명리에서 튀르키예군의 패배는 제38보병의 우익이 노출되었고, 혼란에 빠진 튀르키예군의 대열이 조지 B. 펩로 대령의 명령에 따라 노출된 측면을 방어하기 위해 제1대대가 제38보병의 측면에 자리를 잡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엄청난 혼란을 야기했다. 동시에, 중공군 제113사단은 군우리를 남쪽에서 차단하여 미 제2사단과 튀르키예 여단을 군우리에 완전히 포위했다.[31][39]
4. 전투 결과 및 영향
튀르키예 여단은 군우리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었지만, 미국 제8군은 튀르키예 여단의 희생을 기렸다.[63] 1950년 12월 13일 미국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는 튀르키예 여단이 중국군에 맞서 보여준 행동을 기려 15개의 은성훈장과 동성훈장을 수여했다.[63]
막대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터키 여단의 희생은 미 제8군에 의해 잊히지 않았다. 1950년 12월 13일, 미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장군은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용감한 활약을 펼친 터키 여단에게 15개의 은성 무공훈장과 동성 무공훈장을 수여했으며, 이 사건은 한국 주둔 터키 군인들에게 자랑스러운 기억으로 남았다.[41]
4. 1. 튀르키예 여단의 피해
튀르키예 여단은 군우리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63] 병력의 20%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고 장비와 차량 대부분을 손실하는 등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튀르키예 여단의 희생은 미국 제8군에 의해 기려졌다. 1950년 12월 13일, 미국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는 튀르키예 여단이 중국군에 맞서 보여준 용감한 행동을 기려 15개의 은성 무공훈장과 동성 무공훈장을 수여했다.[63][41] 이 사건은 한국 주둔 튀르키예 군인들에게 자랑스러운 기억으로 남았다.[41]4. 2. 미 제8군의 철수 엄호
튀르키예 여단은 군우리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었지만, 이들의 희생은 미 제8군에 의해 잊히지 않았다. 1950년 12월 13일, 미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장군은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용감한 활약을 펼친 튀르키예 여단에게 15개의 은성 무공훈장과 동성 무공훈장을 수여했다.[63][41] 이는 한국 주둔 튀르키예 군인들에게 자랑스러운 기억으로 남았다.[41]4. 3. 대한민국 국군과의 오인 사격 피해
5. 논란
클레이 블레어는 튀르키예 여단이 "과대평가된 미숙한 부대"로 "망가지고 문제투성이"였다고 평가하며, 미 제8군의 우익을 지켜주지 않은 것에 대해 비난했다.[61][40] 폴 L. 프리먼 주니어 대령 또한 터키 여단이 "과대평가되었고 지휘가 엉망인 미숙한 부대"이며 "붕괴되어 도망쳤다"고 주장하며, 미 제8군 우익을 보호하지 못한 책임을 물었다.[40]
반면, 역사학자 베빈 알렉산더는 와원과 군우리 사이에 있던 유일한 유엔군 부대가 튀르키예 여단이었고, 중국군이 미 제2보병사단이 철수하기 전에 군우리를 점령할 수 없었다는 것은 튀르키예 여단이 그들의 원래 목표를 달성하고 미 제9군단의 철수를 엄호했음을 의미한다고 밝혔다.[62][1]
타흐신 야즈즈 준장은 미군 지휘관으로부터 미군의 철수에 대한 정보를 받지 못했으며, 철수 과정에서 자신의 부대를 지원하던 미군 전차 지휘관들이 여러 차례 적을 공격하는 것을 거부했다고 회고했다. 따라서 그의 부대는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백병전을 감행해야 했고, 이로 인해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야즈즈는 회고록에서 자신이 감사하는 유일한 미군 부대는 미군 전투 의무대였다고 밝혔다.
5. 1. 튀르키예 여단에 대한 평가 논란
클레이 블레어는 튀르키예 여단이 "과대평가된 미숙한 부대"로 "망가지고 문제투성이"였다고 평가하며, 미 제8군의 우익을 지켜주지 않은 것에 대해 비난했다.[61][40] 폴 L. 프리먼 주니어 대령 또한 터키 여단이 "과대평가되었고 지휘가 엉망인 미숙한 부대"이며 "붕괴되어 도망쳤다"고 주장하며, 미 제8군 우익을 보호하지 못한 책임을 물었다.[40]반면, 역사학자 베빈 알렉산더는 와원과 군우리 사이에 있던 유일한 유엔군 부대가 튀르키예 여단이었고, 중국군이 미 제2보병사단이 철수하기 전에 군우리를 점령할 수 없었다는 것은 튀르키예 여단이 그들의 원래 목표를 달성하고 미 제9군단의 철수를 엄호했음을 의미한다고 밝혔다.[62][1]
타흐신 야즈즈 준장은 미군 지휘관으로부터 미군의 철수에 대한 정보를 받지 못했으며, 철수 과정에서 자신의 부대를 지원하던 미군 전차 지휘관들이 여러 차례 적을 공격하는 것을 거부했다고 회고했다. 따라서 그의 부대는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백병전을 감행해야 했고, 이로 인해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야즈즈는 회고록에서 자신이 감사하는 유일한 미군 부대는 미군 전투 의무대였다고 밝혔다.
5. 2. 오인 사격 사건 보도 문제
클레이 블레어와 폴 L. 프리먼 주니어 대령은 튀르키예 여단이 "과대평가되었고 지휘가 엉망인 미숙한 부대"이며 "붕괴되어 도망쳤다"고 믿었고, 미 제8군 우익을 보호하지 못한 책임을 물었다.[40] 하지만 역사학자 베빈 알렉산더는 튀르키예 여단이 와원과 군우리 사이에 배치된 유일한 유엔군이었고, 중공군이 미 제2보병사단보다 먼저 군우리를 점령하지 못한 점을 들어 튀르키예군이 원래 임무를 완수했고 미 제9군단의 철수를 엄호했다고 지적했다.[1]타흐신 야즈즈 준장은 미군 지휘관으로부터 미군의 철수에 대한 정보를 받지 못했으며, 철수 과정에서 자신의 부대를 지원하던 미군 전차 지휘관들이 여러 차례 적을 공격하는 것을 거부했다고 보고했다.
6. 전후
월턴 워커 미 제8군 사령관은 1950년 12월 13일 군우리 전투에서 튀르키예 여단이 중국군에 맞서 보여준 용맹함과 희생을 기려 15개의 은성 훈장과 동성 훈장을 수여했다.[63][41] 이 훈장 수여는 한국 주둔 튀르키예 군인들에게 자랑스러운 기억으로 남았다.[41]
6. 1. 훈장 수여
월턴 워커 미 제8군 사령관은 1950년 12월 13일 군우리 전투에서 튀르키예 여단이 중국군에 맞서 보여준 용맹함과 희생을 기려 15개의 은성훈장과 동성훈장을 수여했다.[63][41] 이 훈장 수여는 한국 주둔 튀르키예 군인들에게 자랑스러운 기억으로 남았다.[41]7. 관련 작품
- 아일라
- 아일라: 전쟁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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