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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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재흥은 일제강점기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고, 광복 후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전직하여 한국 전쟁에 참전한 군인이다. 그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군 대위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으며, 이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육군 대위로 임관했다. 한국 전쟁에서 제2군단장, 제3군단장 등을 역임했으나, 잦은 패전과 지휘 실패로 비판받았다. 특히 현리 전투에서의 패배는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이 미국으로 넘어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전후에는 국방부 장관, 주 태국 대사 등을 역임했으며, 2011년에 사망했다. 그는 친일 행적과 잦은 실언, 역사 왜곡 논란 등으로 비판받고 있으며, 잦은 패전에도 불구하고 훈장을 받은 점 역시 논란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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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흥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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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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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유재흥 |
한자 표기 | 劉載興 |
출생일 | 1921년 8월 3일 |
사망일 | 2011년 11월 26일 |
출생지 | 일본 아이치 현 나고야 |
사망지 | 서울특별시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제2묘역 187호 |
본관 | 강릉 |
호 | 국헌(菊軒), 자헌(自軒) |
종교 | 불교 → 개신교 |
배우자 | 윤의상 |
자녀 | 2남 3녀 (장녀 유인숙, 장남 유태종, 차녀 유영희, 차남 유형종, 삼녀 유미혜) |
형제 | 유한엽(형), 유대자(누이동생), 유광웅(남동생) |
부모 | 유승렬(부), 경주 정씨 부인(모) |
친인척 | 유정남(조카딸) |
군사 경력 | |
소속 | 일본 제국 육군 대한민국 육군 |
복무 기간 | 1941년 ~ 1945년 8월 15일 (일본군 육군) 1946년 ~ 1960년 8월 29일 (대한민국 육군) |
최종 계급 | 대위(일본 육군), 중장(대한민국 육군) |
주요 지휘 | 육군 제2군단장, 육군 제3군단장, 육군참모차장, 육군 제1군사령관, 연합참모총장 직무대리 |
참전 | 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 |
주요 전투 | 제주 봉기 낙동강 전투 평양 전투 청천강 전투 중공군 춘계 공세 |
수훈 | 태극무공훈장(1951년 1월 1일), 수교훈장(1968년 6월 1일) |
군 지휘 경력 | |
지휘 부대 | 제7보병사단 제2군단 제3군단 대한민국 육군 부참모장 |
정치 및 외교 경력 | |
정당 | 무소속 |
주요 직책 | 초대 타이 군주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1960년 8월 31일 ~ 1963년 8월 27일) 대한석유공사 사장 한국골프협회 고문 신민주공화당 상임고문(1987년) |
국방부 장관 | 국방부 장관(1971년 8월 26일 ~ 1973년 12월 3일) |
기타 정보 | |
웹사이트 | 두피디아: 유재흥 |
엠파스 인물정보 | 엠파스 인물정보: 유재흥 |
2. 생애
본관은 강릉(江陵)이며 호는 '''국헌'''(菊軒), '''자헌'''(自軒)이다. 1921년 8월 3일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에서 육군 장성 유승렬과 그의 일본인 아내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1] 본적은 충청남도 공주읍이다. 5세 때인 1925년 아버지를 따라 조선으로 돌아와 함경북도 경원군 등지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내고, 이후 충청남도 공주에서 주로 성장하였다.
평안북도 신의주에 있는 신의주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1937년 육군예과사관학교에 합격하여 1938년 입학했다. 예과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부대 근무를 거쳐 1940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교, 1941년 7월 제55기 보병과를 졸업했다. 태평양 전쟁 종전 당시에는 일본군 육군 대위[10]로 복무 중이었다.
광복 후 1946년 1월, 미군정 하의 군사영어학교를 1기로 졸업하고 대한민국 육군 대위로 임관(군번 10003번)하였다.
2. 1. 일본군 복무
일본의 항복 당시 일본군 대대장이었다.[1]2. 2. 대한민국 국군 창설과 초기 활동
미군정 시기에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국군 육군 대위(군번: 10003)로 임관하였다. 이후 육군사관학교 부교장을 지내다가 제주도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제주 4·3 사건 진압에 관여하였다.[22] 당시 그는 부대를 이끌고 제주도로 파견되었으며, 항복하는 이들을 기소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상황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1]1948년 6월에는 육군 제4여단장에 보임되었고, 이듬해인 1949년 5월 12일에는 육군 제6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23] 같은 해 1949년 8월에는 육군 제2사단장 겸 태백산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겨 북한군 게릴라 소탕 작전을 지휘하였다.[24]
3. 한국전쟁 참전과 논란
한국 전쟁 발발 당시 대한민국 육군 제7사단장이었던 유재흥은 전쟁 초반 북한군의 공세에 직면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 제1군단의 주력이 의정부 방면으로 남침하자[13], 제7사단은 동두천 등지에서 교전했으나 전력 차이와 지휘 혼선 등으로 6월 26일 의정부가 함락되었다. 6월 27일 밤에는 의정부 지역 전투 사령관으로서 제2사단과 제7사단을 지휘하여 미아리 선 방어를 시도했지만, 6월 28일 밤 방어선이 돌파되어 서울이 함락되었다(제1차 서울 전투). 이후 혼성 제7사단장으로 한강 방어를 지휘했다.
1950년 7월 12일 제2군단장으로 임명되어 북한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데 참여했다. 8월에는 대구 방면 방어에 투입되었고, 9월 영천 전투에서 북한군 제15사단을 격퇴한 공으로 소장 진급과 함께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2] 이 지역 방어 성공은 이후 기념비 건립으로 이어졌다.[1]
그러나 인천 상륙 작전 이후 북진 과정에서 1950년 10월 말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급변했다. 유재흥이 지휘하던 제2군단은 중공군의 제1차 공세(온정리 전투)와 11월 제2차 공세(청천강 전투)에서 중공군 제38군, 제40군, 제42군 등에게 연이어 큰 패배를 당했다. 특히 청천강 전투에서의 패배는 제2군단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고, 전선 중앙부에 공백을 초래하여 유엔군의 평양 방어 포기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결국 제2군단은 1950년 말 중공군의 제3차 공세(정월 공세) 이후 사실상 와해되어 해체되었다.
1951년 1월 참모차장을 거쳐 제3군단장[14]으로 임명되었으나, 5월 중공군의 5월 공세 중 벌어진 현리 전투에서 또다시 결정적인 패배를 겪었다. 중공군이 군단의 퇴로인 오마치 고개를 점령하여 포위된 상황에서, 유재흥은 지휘권을 예하 사단장에게 위임하고 경비행기를 이용해 후방으로 탈출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큰 논란을 빚었다.[15] 지휘관의 이탈로 지휘체계가 붕괴된 제3군단은 병력의 60% 이상과 다수의 중장비를 손실하는 참패를 당했다.[15] 이 사건은 당시 유엔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이 제3군단을 해체하고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사실상 회수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리 전투 패배 이후 육군참모차장으로 전보되었고, 1952년 1월 군사 휴전 회담 한국군 대표를 맡았다. 같은 해 7월 다시 제2군단장에 임명되었으며, 1953년 2월 참모차장을 거쳐 7월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3. 1. 주요 지휘
1950년 3월 육군 제7사단장으로 임명되었고, 3개월 뒤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제7사단은 의정부 축선 방어를 담당했으나, 북한군 제3사단, 제4사단, 제105전차여단의 집중 공격을 받아 전력 차이로 인해 덕정-의정부-창동으로 후퇴하며 지연전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6월 27일 밤에는 의정부 지역 전투 사령관으로서 제2사단과 제7사단을 지휘하여 미아리 선 방어를 시도했으나, 6월 28일 밤 방어선이 돌파되어 서울이 함락되었다(제1차 서울 전투). 서울 함락 후에는 혼성 제7사단장으로서 한강 방어를 지휘했다.1950년 7월 3일 제1군단 부군단장을 거쳐, 7월 12일 경상북도 함창에서 창설된 육군 제2군단의 초대 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예하 제6사단과 제8사단을 지휘하며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켰다. 8월에는 백선엽 준장이 이끄는 제1사단과 제6사단을 지휘하여 낙동강 방어선 전투 중 대구 방면에 투입된 북한군 여러 사단을 성공적으로 저지했다. 9월에는 영천 전투에서 북한군 제15사단을 격퇴한 공로로 소장으로 진급하고,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으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2] 이 시기 제2군단은 하양 지역에서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했으며, 북한군의 공세가 거세지자 유재흥은 예하 6사단과 8사단에 각각 1개 연대씩 차출하여 영천 탈환을 명령했다. 미군의 장갑차 지원이 항상 원활하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영천을 두 차례 빼앗기고 되찾는 과정을 거치며 방어에 성공했다.[2] 이후 이곳에는 그의 공적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1]
인천 상륙 작전 성공 후 시작된 반격 작전에도 참여하여 제6, 7, 8사단을 지휘하며 북진했다. 10월 중부 전선에서 철원까지 진격했으나, 당시 육군참모총장 정일권의 한국군 부대가 먼저 평양에 입성하기를 바라는 의지에 따라 평양 점령을 위한 연대를 파견했다.[3]
1950년 10월 말, 중공군의 제1차 공세가 시작되어 제2군단은 중공군 제40군과 제38군의 공격을 받고 온정리 전투에서 패퇴했다. 이 시기 유재흥은 육군참모차장으로 승진하여 서울로 이동했고, 후임 군단장은 백선엽 준장이 맡았다.[2] 11월에는 제2군단이 크리스마스 공세에 참가했으나 중공군의 제2차 공세와 맞닥뜨려 청천강 전투에서 제38군과 제42군에게 큰 피해를 입고 다시 패퇴했다. 이 패배로 제2군단은 계획대로 후퇴하지 못했고, 전선 중앙부에 생긴 공백은 중공군에게 이용되어 유엔군의 평양 방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결국 1950년 말 시작된 중공군의 제3차 공세(정월 공세) 과정에서 제2군단은 해체되었다.
1951년 1월 9일 육군 제3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3] (일부 자료에서는 3월 전임으로 기록[14]) 5월에는 육군본부 전방지휘소장을 겸임했다. 같은 해 5월, 중공군의 5월 공세(제2차 춘계 공세) 당시 현리 전투에서 제3군단은 예하 제3사단과 제9사단이 중공군 제3병단과 제9병단 등의 주공에 밀려 큰 타격을 입었다. 5월 17일 심야, 중공군이 오마치 고개를 점령하여 군단의 후퇴로가 차단되자, 군단장 유재흥은 제3사단장에게 지휘권을 대리로 위임한 뒤 경비행기를 타고 포위망 밖으로 단독 탈출했다.[15] 군단장의 이탈로 지휘 체계가 완전히 붕괴된 제3군단은 와해 상태에 빠졌고, 사단장들을 포함한 지휘관들마저 계급장을 떼고 무질서하게 도피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제3군단은 병력의 30% (다른 기록에는 60% 이상)와 중장비의 70%를 손실하는 참패를 당했다.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밴 플리트 장군은 제3군단을 해체하는 결정을 내렸다.
현리 전투에서의 참패와 군단장의 지휘 포기 및 단독 탈출 사건은 미군 지휘관들이 한국군 장교의 작전 능력을 극도로 불신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밴 플리트 미8군 사령관은 한국군 제1군단을 제외한 모든 군단 사령부를 해체하고, 모든 작전 지휘권을 미군 장성에게만 부여했다. 제1군단마저도 육군본부의 지휘선상에서 제외하고 미8군 사령부의 직접 지휘를 받도록 조치함으로써, 이 시점부터 사실상 모든 한국군의 작전권이 미군에게 넘어가게 되었다.[30]
현리 전투 직후 밴 플리트 사령관과 유재흥의 대화는 당시 상황의 심각성을 잘 보여준다.
- 밴 플리트 : "유 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 있소?"
- 유재흥 :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 밴 플리트 : "당신의 예하 사단은 어디 있소? 모든 포와 수송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
- 유재흥 : "그런 것 같습니다."
- 밴 플리트 :"유 장군, 당신의 군단을 해체하겠소. 정(일권) 장군에게 다른 보직을 상의하시오!"
현리 전투 패배 이후 1951년 5월 25일 육군참모차장으로 전임되었고, 7월부터 시작된 정전회담에 남한 측 옵서버로 참관했으나, 부친 유승렬에 의해 어릴 때부터 일본 군인 교육을 받아 한국어 구사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기록이 있다.[25] 1952년 1월에는 군사 휴전 회담 한국군 대표를 맡았고, 같은 해 7월에는 제2군단장에 다시 임명되어 1953년 3월까지 재직했다. 1953년 2월 참모차장을 거쳐 7월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3. 2. 잦은 패전과 작전통제권 상실
한국 전쟁 기간 동안 유재흥이 지휘한 부대는 여러 차례 심각한 패배를 겪었으며, 이는 작전통제권 상실이라는 결과를 낳았다.'''육군 제7사단의 초기 패배'''
1950년 3월 육군 제7사단장으로 임명된 지 3개월 만인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제7사단이 방어하던 의정부 축선으로 북한군은 보병 제3사단, 제4사단, 제105전차여단을 투입하여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13] 수적으로 열세였던 제7사단은 지연전을 펼치며 덕정-의정부-창동으로 순차적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동두천에서 초반 선전했으나, 북한군의 압도적인 전력과 육군본부의 미숙한 지휘로 인해 6월 26일 의정부가 함락되었다. 6월 27일 밤, 의정부 지역 전투 사령관으로서 제2사단과 제7사단을 지휘하여 미아리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28일 밤 방어선이 돌파되어 서울이 함락되었다(제1차 서울 전투).
'''육군 제2군단의 괴멸'''
1950년 7월 경상북도 함창에서 육군 제2군단이 창설될 때 초대 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인천 상륙 작전 이후 반격 작전에 참여하여 제6사단, 제7사단, 제8사단을 지휘하며 북진했으나, 1950년 10월 중공군의 제1차 공세(온정리 전투)와 11월 제2차 공세(청천강 전투)에 연이어 패퇴했다. 특히 덕천 전투에서는 지휘 실수로 중공군 제38군과 제42군에게 포위를 허용하여 제2군단 예하 제6사단, 제7사단, 제8사단이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 패배로 제2군단은 큰 손실을 입고 전선 중앙부에 큰 공백을 초래했으며, 결국 1950년 말 해체되었다.
'''육군 제3군단의 해체와 현리 전투 패배'''
이후 1951년 3월에 육군 제3군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1951년 5월, 중공군의 5월 공세 중 벌어진 현리 전투에서 또다시 결정적인 패배를 겪었다. 중공군이 강원도 인제군 현리의 오마치 고개를 점령하여 제3군단의 퇴로를 차단하자, 군단 전체가 포위된 상황에서 유재흥은 제3보병사단장을 군단장 대리로 지정한 뒤 경비행기를 타고 포위망 밖으로 탈출했다.[15] 군단장의 이탈로 제3군단은 지휘 체계가 완전히 붕괴되었고, 예하 제3사단과 제9사단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지휘관들마저 계급장을 떼고 무질서하게 도피하면서 군단 병력의 30%(다른 기록에는 60% 이상[15])와 포, 박격포 등 중장비의 70%를 손실했다. 이 패배로 인해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밴 플리트 미8군 사령관은 제3군단을 해체하는 조치를 취했다.
'''작전통제권 상실'''
현리 전투에서의 참패는 미군 지휘부가 한국군 장교들의 작전 수행 능력을 완전히 불신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밴 플리트 사령관은 한국군 제1군단을 제외한 모든 군단 사령부를 해체하고,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박탈하여 모든 작전권을 미군 장성들에게 부여했다. 유일하게 존치된 제1군단마저도 육군본부의 지휘선상에서 제외하고 미8군 사령부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도록 함으로써, 사실상 이 시점부터 한국군은 작전통제권을 상실하게 되었다.[30]
현리 전투 직후 밴 플리트 사령관과 유재흥 군단장 간의 대화는 당시 한국군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로 알려져 있다.[30]
- '''밴 플리트''': "유 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 있소?"
- '''유재흥''':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 '''밴 플리트''': "당신의 예하 사단들은 어디 있소? 모든 포와 수송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
- '''유재흥''': "그런 것 같습니다."
- '''밴 플리트''': "유 장군, 당신의 군단을 해체하겠소. 정(일권) 장군에게 다른 보직을 상의하시오!"
이처럼 유재흥은 한국전쟁 중 지휘한 주요 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했으며, 특히 현리 전투에서의 패배와 지휘관으로서의 책임 회피 논란은 한국군 전체의 작전통제권 상실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후 1951년 5월 25일 육군참모차장으로 전임되었다.
3. 3. 전후 활동과 평가
1953년 3월부터 1954년 3월까지 육군참모차장을 지냈고, 이후 1957년 5월 17일까지 세 번째로 육군 제3군단장을 역임했다. 1957년 5월부터 1959년 2월 26일까지 합동참모의장으로 재직했다. 이후 육군 제1야전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960년 5월 31일부터는 합동참모의장 직무대리도 겸했다. 그러나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뒤, 정군 대상으로 지목되어 1960년 8월 29일 대한민국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5·16 군사 정변 이후 박정희 정권 하의 제3공화국에서 다시 등용되었다. 1960년 8월부터 1963년 8월까지 주 태국 대사로 재직했으며, 1962년 9월에는 친선사절단으로 버마를 방문하기도 했다.[26] 1963년 8월부터 1967년 9월까지는 주 스웨덴 대사,[27] 1967년 11월부터 1971년 2월까지는 주 이탈리아 대사를 역임했다.[28][5] 1970년 9월에는 대통령 안보담당·국방담당 특별보좌관에 임명되었고, 1971년 8월부터 1973년 12월까지 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국방부 장관 퇴임 후에는 1974년부터 6년간 대한석유공사 사장을 맡았다. 1978년에는 석유화학공업협회 회장으로 선임되었고, 1983년에는 한스칸디나비아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또한, 예비역 장성 모임인 성우회 부회장을 거쳐 1991년 12월에는 제2대 성우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97년에는 한국참전단체총연합회 회장을 역임했다.
2011년 11월 26일 향년 91세로 서울에서 사망했으며,[5] 11월 29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고별식을 거행한 후 장군 제2묘역에 안치되었다.
'''주요 경력'''
연도 | 내용 |
---|---|
1953년 3월 | 육군참모차장 |
1954년 3월 | 육군 제3군단장 |
1954년 7월 | 교육총장 |
1956년 9월 | 육군참모차장 |
1957년 5월 | 합동참모의장 |
1959년 2월 | 제1야전군사령관 |
1960년 7월 | 예비역 편입 (육군 중장) |
1960년 8월 | 주 태국 대사 |
1963년 8월 | 주 스웨덴 대사 |
1967년 11월 | 주 이탈리아 대사 |
1970년 9월 | 대통령 특별보좌관 (안보·국방 담당) |
1971년 8월 | 국방부 장관 |
1974년 | 대한석유공사 사장 |
1978년 | 석유화학공업협회 회장 |
1983년 | 한스칸디나비아재단 이사장 |
1991년 12월 | 성우회 회장 (제2대) |
1997년 | 한국참전단체총연합회 회장 |
4. 논란과 비판
유재흥은 그의 경력과 행적을 둘러싸고 여러 논란과 비판에 직면해 있다. 주요 비판점으로는 일본군 장교 복무 경력에서 비롯된 친일 논란, 한국 전쟁 당시의 지휘 능력 및 대한민국 육군본부의 전시 작전통제권이 미국으로 넘어가는 데 사실상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했다는 평가[33], 그리고 전후 보수적인 정치적 행보와 발언 등이 거론된다.[31] 이러한 논란들은 그의 군 경력과 이후 활동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4. 1. 친일 행적
유재흥은 대표적인 친일파 정치 군인으로 분류된다. 그는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으며, 8.15 광복 이후 미군정 시기에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이는 당시 안재홍 민정장관, 존 리드 하지 미군 사령관 등 미군정 책임자들이 김규식 과도입법의장 등의 협조를 받아, 행정 및 군사 분야의 경험자를 그대로 기용하려는 안일하고 편의적인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일본군 출신이었던 유재흥 역시 국군에 합류하게 되었다.4. 2. 독선적 성격과 잦은 실언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8.15 광복 이후 안재홍 민정장관과 존 리드 하지 사령관 등 미군정이 행정 및 군사 분야 경험자를 그대로 기용하는 정책을 펴면서 대한민국 국군 장교가 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대표적인 친일파 정치 군인이라는 비판을 받는다.대한민국 육군본부의 전시 작전통제권이 미국으로 넘어가는 데 사실상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했다는 평가와 함께, 최악의 패전 군인이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33]
1990년대 이후 전시 작전통제권 회수 등 국방 관련 현안에 대해 친미 성향의 보수 세력과 정치적 행보를 같이하며, 대한민국 국군의 작전통제권을 미군에게 계속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여 비판을 샀다. 2004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미군으로부터 전시작전권을 회수하겠다고 발표하자, 예비역 군 장성들의 반대 성명을 주도하기도 했다.
4. 3. 역사 왜곡 논란
1990년대 이후 전시 작전통제권 회수와 같은 국방 현안에 대해 친미 성향의 보수 세력과 정치적 행보를 같이하며, 대한민국 국군의 작전통제권을 미군에게 계속 맡겨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31]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전시작전권 회수를 추진하자, 유재흥은 예비역 군 장성들의 반대 성명을 주도하며 대표자로 나섰다.이러한 배경 속에서, 1994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탈출한 국군포로 출신 조창호 소위가 유재흥과의 면담을 원했으나 유재흥이 이를 거부했다는 주장이 인터넷 상에 퍼지기도 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른 왜곡된 정보로 알려져 있다.[31]
5. 상훈
한국 전쟁 당시 잘못된 상황 판단으로 인해 자신이 지휘하던 1개 사단과 2개 군단이 패주 후 해체되는 결과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훈장을 받았다. 1951년 1월 1일에는 태극무공훈장을 받았고, 1968년 6월 1일에는 수교훈장을 받는 등 다수의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러한 점 때문에 잦은 패전에도 불구하고 훈장을 받은 것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주요 수훈 내역은 다음과 같다.
수여 연도/날짜 | 훈장명 | 수여 기관 및 사유 |
---|---|---|
1950년 | 미국 공훈훈장 (Legion of Merit, Officer) | 미국 정부 (1950년 6월 25일부터 8월 31일까지의 공로)[6] |
1951년 1월 1일 | 태극무공훈장 | 대한민국 정부 |
1951년 2월 7일 | 레지옹 도뇌르 훈장 | 프랑스 정부[16] |
1951년 10월 31일 | 은성태극무공훈장 | 대한민국 정부[17] |
1953년 | 미국 공훈훈장 (Legion of Merit, 청동 참나무 잎) | 미국 정부 (1952년 1월 28일부터 5월 8일까지, 그리고 1952년 7월 23일부터 1953년 2월 1일까지의 공로, 2차 수여 대신 수여)[6] |
1953년 9월 23일 | 레지옹 도뇌르 훈장 | 프랑스 정부[16] |
1968년 6월 1일 | 수교훈장 | 대한민국 정부 |
6. 가족 관계
wikitext
관계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아버지 | 유승렬(劉升烈) | 1893년 ~ 1958년 | |
어머니 | 정열(鄭列) | 1899년 ~ 1983년 | [34] |
형 | 유한엽(劉漢燁) | 1917년 ~ 1948년 | [35] |
형수 | 청주 정씨 부인(淸州 鄭氏 夫人) | 1918년 ~ 1996년 | |
조카 | 유동재 | 형 유한엽의 맏아들 | |
조카 | 유정남 | 형 유한엽의 막내딸 | |
본인 | 유재흥(劉載興) | 1921년 ~ 2011년 | |
부인 | 윤의상(尹義相) | ||
장녀 | 유인숙 | [36][37] | |
차녀 | 유영희 | [36][37] | |
3녀 | 유미혜 | [36][37] | |
장남 | 유태종 | [36][37] | |
차남 | 유형종 | [36][37] | |
여동생 | 유대자(劉代子) | 1928년 ~ 2006년 | [38] |
남동생 | 유광웅(劉廣雄) | 1935년 ~ 2016년 | [39]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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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순 두산 고문 모친상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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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 출생일, 사망일 정보를 포함한 개인의 이력 정보이므로 간행물로 분류
2006-04-12 # 사망일을 date 필드로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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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 출생일, 사망일 정보를 포함한 개인의 이력 정보이므로 간행물로 분류
2016-06-24 # 사망일을 date 필드로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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