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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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운산 전투는 1950년 10월, 한국 전쟁 당시 중국 인민지원군의 개입으로 인해 발생한 전투이다. 유엔군의 북진 과정에서 대한민국 제1보병사단이 운산을 점령했으나, 중공군의 기습적인 포위 공격으로 인해 미군 제8기병연대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는 중공군의 전술적 승리로 기록되었으며, 유엔군의 중공군 개입에 대한 과소평가를 초래하여 이후 청천강 전투와 장진호 전투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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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산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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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분쟁 | 한국 전쟁 |
전투명 | 운산 전투 |
로마자 표기 | Unsan jeontu |
한자 표기 | 雲山戰鬪 |
중국어 표기 | 간체: 云山战斗 병음: Yúnshān zhàndòu |
기간 | 1950년 10월 25일 – 1950년 11월 4일 |
위치 | 평안북도 운산군 |
결과 | 중국의 승리 |
관련 전투 | 한국 전쟁의 일부 |
교전 세력 | |
유엔군 | |
지휘관 | |
유엔군 | 프랭크 W. 밀번 호바트 R. 게이 레이먼드 D. 팔머 백선엽 |
중국 인민지원군 | 펑더화이 우신촨 원위청 |
부대 규모 | |
유엔군 | 1st Cavalry Division 5th Cavalry Regiment 8th Cavalry Regiment 1st Infantry Division 15th Infantry Regiment |
중국 인민지원군 | 39th Corps 115th Division 116th Division 117th Division 40th Corps 120th Division |
피해 규모 | |
유엔군 추정 중국군 피해 | 600+ |
유엔군 피해 | 미국: 449명 사망, 총 1,149명 사상자 발생 대한민국: 530명 사상자 발생 중국 추정: 2,000명 |
2. 배경
1950년 10월, 조선인민군은 후퇴하고 있었다. 9월에 부산 교두보를 돌파한 후, 유엔군(UNC)의 공세는 조선인민군(KPA)을 남한을 거쳐 북한으로 밀어내며 중·조 국경으로 향했다.[9] 미국 제1기병사단(1st Cavalry Division)은 10월 19일 평양에 진입했고,[10] 국군은 사방에서 압록강을 향해 진격했다.[11] 전쟁을 종식하기 위한 추수감사절 공세의 일환으로, 소장 프랭크 W. 밀번 미국 제1군단(I Corps) 사령관은 대한민국 육군 제1보병사단에게 운산을 거쳐 압록강의 수풍댐을 확보하라고 명령했다.[12]
급격한 KPA의 붕괴와 유엔군의 중국 국경 진격에 대응하여, 마오쩌둥 주석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동북변방군을 재편하여 한국전에 투입할 중국 인민지원군(PVA)으로 만들 것을 명령했다.[13] 마오는 북한의 항복을 막기로 결심했지만, 중국군은 보다 현대화된 미군과 싸울 수 있는 능력에 대해 회의적이었다.[14] 마오는 미군을 피하면서 한국군을 상대로 제한적인 공세를 펼치는 교두보 구축 작전인 제1차 공세로 절충했다.[8][15] 극비리에 PVA는 10월 19일 한국에 진입했다.[16]
2. 1. 유엔군의 북진
1950년 10월, 북한군은 후퇴하고 있었다. 9월에 부산 교두보를 돌파한 후, 유엔군(UNC)의 공세는 조선인민군(KPA)을 남한을 거쳐 북한으로 밀어내며 중·조 국경으로 향했다.[9] 미국 제1기병사단(1st Cavalry Division)은 10월 19일 평양에 진입했고,[10] 국군은 사방에서 압록강을 향해 진격했다.[11] 전쟁을 종식하기 위한 추수감사절 공세의 일환으로, 소장 프랭크 W. 밀번 미국 제1군단(I Corps) 사령관은 대한민국 육군 제1보병사단에게 운산을 거쳐 압록강의 수풍댐을 확보하라고 명령했다.[12]급격한 KPA의 붕괴와 유엔군의 중국 국경 진격에 대응하여, 마오쩌둥 주석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동북변방군을 재편하여 한국전에 투입할 중국 인민지원군(PVA)으로 만들 것을 명령했다.[13] 마오는 북한의 항복을 막기로 결심했지만, 중국군은 보다 현대화된 미군과 싸울 수 있는 능력에 대해 회의적이었다.[14] 마오는 미군을 피하면서 한국군을 상대로 제한적인 공세를 펼치는 교두보 구축 작전인 제1차 공세로 절충했다.[8][15] 극비리에 PVA는 10월 19일 한국에 진입했다.[16]
2. 2. 중공군의 참전 결정
1950년 10월, 조선인민군이 붕괴되고 유엔군이 중국 국경으로 진격하자, 마오쩌둥 주석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동북변방군을 중국 인민지원군(PVA)으로 재편하여 한국전에 투입할 것을 명령했다.[13] 마오는 북한의 항복을 막기로 결심했지만, 중국군은 미군과의 전투 능력에 대해 회의적이었다.[14] 이에 마오는 미군을 피하면서 한국군을 상대로 제한적인 공세를 펼치는 제1차 공세로 절충했다.[8][15] 중국 인민지원군은 10월 19일 극비리에 한국에 진입했다.[16]소장 프랭크 W. 밀번 미국 제1군단(I Corps) 사령관은 대한민국 육군 제1보병사단에게 운산을 거쳐 압록강의 수풍댐을 확보하라고 명령했다.[12] 10월 24일, 대한민국 제1보병사단은 북쪽으로 진격하여 10월 25일 아침 운산을 점령했다.[18] 그러나 유엔군은 병력이 분산되어 대한민국 제1보병사단의 좌익이 보호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2]
유엔군의 취약한 전선을 간파한 중공군은 운산에서 한국군을 상대로 포위 공격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중국 인민지원군 제40군의 제120사단은 운산에서 대한민국 제1보병사단을 차단하고, 제40군 주력 부대는 운산 동쪽의 대한민국 제6사단과 제8보병사단을 공격하며, 제39군은 운산 서쪽의 틈새로 침투하여 대한민국 제1보병사단을 파괴할 예정이었다.[19] 제120사단은 유엔군 정보망에 탐지되지 않은 채 10월 24일 차단 위치에 도착했고,[20] 병력 이동을 은폐하기 위해 10월 말경부터 여러 차례 산불을 냈다.[2]
3. 전투 과정
3. 1. 10월 25일: 최초의 교전
10월 25일 10시 30분, 대한민국 육군 제1보병사단은 제12연대가 삼탄강 서쪽 둑에서 북쪽으로 공격을 시작했고, 제15연대는 동쪽 둑에 도달하려 했다.[18] 그러나 제15연대가 강을 건너려 할 때, 중국 인민지원군(PVA) 제120사단은 강력한 포격으로 한국군과 교전을 벌였다.[21] 한국군은 처음에는 이 저항이 조선인민군(KPA)의 마지막 잔당이라고 믿었지만, 전쟁에서 첫 중국인 포로를 잡으면서 인식이 곧 바뀌었다.[22] 포로는 운산 북쪽에서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 1만 명의 중국군이 대기하고 있다고 밝혔다.[22]압도적인 중국군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직면한 대한민국 육군 제1보병사단은 운산 주변의 언덕을 점령하여 방어선을 구축하려 했다.[23] 한국군은 곧 10월 25일 밤, PVA 제360연대와 시소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23][24] 다음 날, PVA 제39군단이 운산 서쪽에 도착하여, 운산과 용산동 사이의 도로를 차단하여[25] 대한민국 사단을 완전히 포위했다.[23] 공수 작전의 지원을 받은 미국 제6중전차대대와 미국 제10대공포병군은 10월 27일 도로를 다시 열었다.[2] 한국군의 북쪽 진격 시도는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했고,[2] 전투는 10월 28일까지 중단되었다.[26]
대한민국 육군 제1보병사단장 백선엽 준장의 경고에도 불구하고,[2] 전쟁의 결과에 대한 전반적인 낙관론으로 인해 경고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7] 운산에서 교착 상태에 이르자, 미국 육군 제8미국 육군의 월턴 워커 장군은 미국 제1기병사단의 미국 제8기병연대에게 대한민국 제12연대를 지원하여 북쪽으로 공격을 재개하라고 명령했다.[28] 10월 29일 미국 제8기병연대가 운산에 도착했을 때, 대한민국 제1보병사단 제11보병연대도 운산에서 철수하고 있었다.[2] 동시에 중국군은 운산 동쪽에서 대한민국 제6보병사단을 파괴했다.[29] 운산은 이제 미국 제8기병연대와 대한민국 제15보병연대만 포함된 유엔군의 북쪽 돌출부가 되었다.[2]
3. 2. 10월 26일 ~ 27일: 탐색전
중공군이 개입한 지 이틀째가 되던 10월 26일 전선에 변화가 오기 시작하였다. 조재미 대령이 이끄는 제15연대는 삼탄천 북쪽 고지의 중공군을 공격하였는데, 중공군의 역습을 받아 약간 뒤로 물러난 상태에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존 S. 그로우든(John S. Growden) 중령이 이끄는 미 제6전차대대는 탄약과 연료 부족으로 이의 재보급을 위해 제15연대를 지원하던 중 D중대를 남쪽으로 이동시켜야 했다.제12연대는 선전하여 운산의 서쪽 고지를 확보하고 있었으나, 그 사이에 1개 연대 규모의 중공군이 운산 북방 10 km 일대까지 남하하여 진지를 구축 중에 있었고, 그 일부는 남면천까지 진출함으로써 운산-용산동간의 사단 주보급로가 차단되었다. 이에 사단예비대로 운산 남쪽에 있던 제11연대가 일부 병력으로 이들 중공군을 공격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날 중공군은 서서히 운산을 포위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10월 27일 사단은 10대의 미 공군 수송기(C-119)에 의한 공수보급을 받음으로써 공격을 계속할 수 있었다. 새로이 탄약을 보급 받은 제15연대는 262고지-199고지-212고지를 연하는 북위 40도선까지 진격하였고, 김점곤 대령이 이끄는 제12연대도 남면천 방향으로 경계를 강화하여 부대를 재배치하였다. 한편 운산 남쪽에서는 김동무 대령이 이끄는 제11연대가 이날 오후 운산-용산동간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있는 중공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다.
3. 3. 10월 28일: 중공군 개입 확인
10월 28일, 운산국민학교 전방지휘소에서 중공군 상황을 직접 파악한 백선엽 준장은 사단 정면의 중공군이 정규군 1개 사단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밀번 군단장에게 보고했다. 이날 운산 전황은 소강상태였고, 각 연대는 진지 강화와 수색 활동을 전개했으며, 중공군도 다음 전투를 대비하는 듯했다. 제12연대는 중공군 포로 2명을 생포했는데, 이들도 중공군 대부대가 침입했다는 내용을 진술하여 10월 25일 최초 포로 진술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미 제1군단 정보보고서는 “중공군 출현은 사실이나, 정규군이 아닌 개인 지원 의용군으로 보인다”고 기술하여, 미군 측이 중공군 정규군 개입을 믿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한편, 국군 제2군단은 이날 중공군의 포위작전으로 위기에 직면했다. 초산까지 진격한 제6사단 각 연대가 중공군 제40군 포위공격으로 혼란에 빠졌고, 구봉산(九峰山)에서는 제2연대 2대대가 포위되었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 월턴 워커 장군은 운산 정면의 부진을 타개하기 위해 평양 경비 중인 미 제1기갑사단 허버트 R. 게이 소장에게 국군 제1사단을 초월, 압록강으로 진격하도록 명령했다.
3. 4. 10월 29일 ~ 30일: 유엔군 증원
10월 30일 한국군 제15연대는 중공군에게 압박을 당하고, 제11연대 또한 병력 열세로 동남쪽으로 1km 정도 후퇴하였다.한편, 이날 아침 미군 제1기갑사단 주력이 용산동에 집결 완료하였다. 사단장은 제8기갑연대를 운산으로 진출시키고 제5기갑연대로 후방을 엄호하도록 하였다. 이들의 임무는 국군 제1사단을 넘어 삭주 방면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운산 서남방에 중공군이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고, 미 제8군 정보참모 및 윌리엄 H. 헨닉 대령이 제8기갑연대에 경고하였으나, 연대는 이를 귀담아 듣지 않고 운산에 도착했다.
3. 5. 10월 31일: 임무 교대
10월 31일 오전부터 사단은 미 제 1기갑사단과 교대를 시작하면서 중공군과의 공방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미 제1기갑연대의 제3대대는 한국군 제11연대와 남면천변에서, 그리고 제2대대는 운산 서측방의 국군 제1연대의 좌측 대대와 교대를 오전 중에 완료하였다. 그러나 전날 밤부터 중공군은 국군 제15연대 정면에 강력한 압력을 가하는 동시에 제12연대의 우측 제2대대도 계속 공격을 가해 왔다. 따라서 동 대대와 교대하기로 되어 있던 미 제1대대는 우선 그 후방의 진지를 점령한 후 한국군을 지원할 태세를 갖추었다.한편 한국군 제 1사단의 최초 계획에 의하면 제11연대는 미군과 교대하고 난 다음 위기에 처해 있는 제15연대를 증원할 예정이었으나, 이때 사단의 우측 배후를 엄호해주고 있는 한국군 제8사단 16연대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는 긴급히 구룡강(九龍江) 동안으로 이동하여 동 연대와 연결하고 이곳 방어에 임함으로써 사단의 우측 배후를 방비하게 되었다. 그런데 중공군은 제39군 주력이 운산 부근을 향하여 남하하고 있었으며, 이때 그들은 주위의 여러 곳에 산불을 질러 그 연기로 유엔군의 공중관측을 차단하고 그들의 부대이동을 은폐하려 하였다.
이 무렵 미 제8군의 맨 좌측방은 순조롭게 진격하고 있었는데 즉 미 제24사단은 서해안 도로를 따라 신속히 진격, 제21연대는 곽산을 거쳐 선천을 통과하였고, 제5연대는 구성을 점령한 후 수풍을 향해 북진하고 있었으며, 정주에 있던 제10연대도 구성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동 사단은 압록강을 향해 계속 진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청천강 계곡으로부터 위급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미 제8군은 국군 제7사단과 제8사단을 구장동의 동서로 연한 방어선에 배치하고자 하였으나 그 전에 돌파를 당하였다. 따라서 중공군의 대군이 곧 청천평야에 출현할 것을 예상하면, 국군 제2군단이 이용가능한 진지는 원리(院里) 일대밖에 없는 셈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미 제8군사령부에는 전황이 미 제1기갑사단은 운산으로 증원하여 전세의 호전을 기대했던 전날과는 다른 국면으로 변화되고 있음을 간파한 듯 지금까지의 작관적인 분위기가 사라졌다. 워커 장군은 밀번 미 제1군단장에게 운산의 전황을 주시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병력을 과소평가하는 미 제8군의 종전의 입장에는 변화가 없었다.
3. 6. 11월 1일 ~ 6일: 중공군의 대반격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는 제1보병사단이 운산에 묶여 있다고 판단, 11월 1일에 39군에게 운산 수비대를 격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30] 이에 따라 중국군은 제117사단은 북동쪽, 제116사단은 북서쪽, 제115사단은 남서쪽에서 공격하는 계획을 세웠다.[30]
한편, 미국 제8기병연대는 운산 주변에 배치되어 제1대대가 삼탄강을 따라 운산 북쪽을, 제2대대와 제3대대는 남면강을 따라 운산 서쪽 지역을 방어했다.[31] 그러나 병력 부족으로 제1대대와 제2대대 사이에 1,600m의 간격이 발생했다.[2] 대한민국 육군 제15보병연대는 미국 제1대대 건너편 운산 북동쪽에 참호를 구축했다.[28]
11월 1일 오후, 미국 제5기병연대의 전투 초계대가 버글 힐에서 제115사단 제343연대에 의해 저지되었다.[30][2] 함정이 발각되자 중국군은 즉시 17시에 공격을 개시,[32][2] 로켓 포병의 지원을 받으며[32][2] 제117사단은 제15보병연대를, 제116사단 4개 대대는 미국 제8기병연대 제1대대와 제2대대 사이 틈을 공격했다.[2][32] 23시까지 격렬한 전투로 대한민국 육군 제15보병연대는 궤멸되었고, 미국 제8기병연대 제1, 2대대는 탄약이 고갈되었다.[2] 윌턴 밀번은 대한민국 육군 제6보병사단 궤멸 소식을 듣고 철수 명령을 내렸다.[2]
철수가 이루어지기 전, 제116사단 제347연대가 미국 대대 사이 틈으로 운산에 진입, 장애물이 미국 제8기병연대 제1, 2대대 뒤에 나타났다.[32][2] 제116사단 제348연대는 운산 남쪽으로 진격, 02:30까지 교차로에서 유엔군을 매복했다.[33][2] 모든 도로가 봉쇄되면서 미국 제8기병연대 제1, 2대대는 소규모 그룹으로 중국군 진지를 뚫고 탈출해야 했고, 대부분의 차량과 중화기를 버렸다.[34][2] 생존자들은 11월 2일까지 유엔군 진지에 도착했다.[2]
미국 제8기병연대 제1, 2대대가 공격받는 동안 제3대대는 밤 대부분 홀로 남았지만,[2] 03:00까지 제116사단 특공대가 대한민국 육군 군인으로 위장, 대대 지휘소에 침투했다.[35][2] 기습 공격으로 많은 차량에 불이 붙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35][2] 혼란스러운 전투 끝에 제3대대는 제115사단 제345연대에 의해 180m 폭 방어선으로 좁혀졌다.[33][2] 미국 제5기병연대는 버글 힐에서 제115사단 제343연대를 공격, 제3대대를 구출하려 했지만,[7] 350명 사상자를 내고 미국 제1기병사단 사령관 호바트 게이 소장 명령에 따라 철수했다.[2] 갇힌 제3대대는 며칠 동안 공격을 견뎌냈고, 생존자들은 11월 4일까지 탈출했다.[2] 전투가 끝날 무렵, 제3대대에서 200명 미만이 유엔군 진지에 도착했다.[2]
4. 결과 및 영향
운산-영변의 전투 결과, 국군은 일시적으로 중공군을 공격하여 전진하였으나, 이는 곧 있을 대대적인 중공군의 공격으로 이어졌다. 국군은 물자 부족과 북부 산악 지방의 추위 속에서 악전고투해야 했다.[36] 일선 지휘관들의 제언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의 개입을 과소평가한 지휘부의 오판으로 많은 손실을 보았으며, 이후 동부전선의 국군은 흥남을 통하여 해상철수를 하게 된다.
운산 전투의 성공 직후, 나머지 중국군은 미군 방어선을 넘어 진격하여 미군을 청천강 너머 평양으로 몰아내려 했다.[36] 그러나 식량과 탄약 부족으로 인해 중국군은 11월 5일에 교전을 중단해야 했고, 이로써 중국군의 제1차 공세는 막을 내렸다.[36] 운산에서의 승리 외에도, 중국군의 제1차 공세는 온정 전투에서 대한민국 제6보병사단과 제8보병사단의 한 개 연대를 격멸했다.[29][37] 그 대가로 중국군은 제1차 공세가 끝날 무렵 10,700명의 사상자를 냈다.[38] 운산 전투는 한국 전쟁에서 미군이 겪은 가장 치명적인 패배 중 하나로 여겨진다.[39]
운산에서의 중국군 승리는 유엔군뿐만 아니라 중국 지도부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다.[40] 운산에서 중국군과 미군의 우연한 조우는 중국 지도부가 한국 전쟁에 개입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완화시켰고,[41] 중국 지휘관들은 미 제1기병사단의 작전을 면밀히 연구했다.[8] 반면, 유엔군은 운산에서 미 제8군이 입은 막대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못한 중국군의 철수로 인해 중국이 한국 전쟁에 대규모로 개입하지 않았다고 믿게 되었다.[42]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는 곧 있을 제2차 공세를 위해 운산 전투의 교훈을 활용했고,[43]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한국에 약한 중국군만 주둔하고 있다는 가정 하에 크리스마스 공세를 시작했다.[44] 그 결과, 그해 말에 청천강 전투와 장진호 전투에서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졌다.[45]
5. 논란과 비판
5. 1. 미군 지휘부의 오판
운산 전투의 성공 직후, 나머지 중국군은 미군 방어선을 넘어 진격하여 미군을 청천강 너머 평양으로 몰아내려 했다.[36] 그러나 식량과 탄약 부족으로 인해 중국군은 11월 5일에 교전을 중단해야 했고, 이로써 중국군의 제1차 공세는 막을 내렸다.[36] 운산에서의 승리 외에도, 중국군의 제1차 공세는 온정 전투에서 대한민국 제6보병사단과 제8보병사단의 한 개 연대를 격멸했다.[29][37]운산에서의 중국군 승리는 유엔군에게 예상치 못한 결과였던 만큼, 중국 지도부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다.[40] 운산에서 중국군과 미군의 우연한 조우는 중국 지도부가 한국 전쟁에 개입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완화시켰고,[41] 중국 지휘관들은 미 제1기병사단의 작전을 면밀히 연구했다.[8] 반면, 유엔군은 운산에서 미 제8군이 입은 막대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못한 중국군의 철수로 인해 중국이 한국 전쟁에 대규모로 개입하지 않았다고 믿게 되었다.[42]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한국에 약한 중국군만 주둔하고 있다는 가정 하에 크리스마스 공세를 시작했다.[44]
5. 2. 대한민국 국군 지휘 책임 문제
6. 운산 전투에 대한 평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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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Center of Military History, United States Ar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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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전쟁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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