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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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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온회는 위나라의 인물로, 호족 출신으로 효렴에 천거되어 관직을 시작했다. 지방관을 역임하며 조조의 인정을 받아 승상 주부가 되었고, 유복 사후 양주 자사로 부임했다. 손권의 합비 침공 당시 관우의 형주 공격을 예측하여 배잠에게 조언했으며, 조비 시대에 시중과 위군 태수를 거쳐 량주 자사로 부임했지만, 45세에 사망했다. 그의 아들이 일찍 죽어 가계가 끊어졌으나, 동생 온공이 관내후에 봉해져 가문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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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회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온회
본관병주태원군기현
만기 (曼基)
관직
소속 국가
최종 관직지절
호강교위 (護羌校尉)
양주자사 (揚州刺史)
양주 (涼州刺史)
생애
출생생년 미상
사망병사, 향년 45세 (추정)
아버지온수 (溫序)
자녀온성 (溫盛)
온공 (溫恭)
경력
조조 휘하승상 주부 (丞相主簿)
조비 시대위군 태수 (魏郡太守, 220년 ~ 223년)
호강교위 (護羌校尉, 223년)
양주 자사 (涼州刺史, 223년)

2. 생애

온회는 호족 가문 출신으로, 어린 시절 효행으로 향거리선에 따라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중이 되었다. 이후 늠구현령, 언릉현령, 광천현령, 팽성상, 노국상 등 여러 지방관을 역임하며 좋은 치적을 쌓아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조조에게 발탁되어 중앙으로 소환, 승상부 주부를 지냈다.

208년에는 유복의 뒤를 이어 양주 자사로 임명되어 다시 지방으로 부임했다. 조조는 그에게 단양태수였던 장제를 보좌로 붙여주고, 합비를 수비하던 장료, 악진과 상의하여 일을 처리하도록 당부했다. 219년 손권이 합비를 침공했을 때, 온회는 연주 자사 배잠에게 양주 방면보다 관우가 있는 형주 방면을 더 경계해야 한다고 조언하며 관우의 북진과 번성의 위기를 정확히 예측하는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220년 조비(문제)가 즉위하자 다시 중앙으로 소환되어 시중으로 승진했고, 이어서 위군 태수로 임명되었다. 몇 년 후, 지절·호강교위·량주 자사로 임명되어 부임지로 향하던 중 병을 얻어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 그의 적자가 관내후에 봉해졌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 가계가 잠시 끊겼고, 이후 동생인 온공이 관내후에 봉해져 형의 뒤를 이었다.

2. 1. 어린 시절과 효의 실천

호족 집안 출신이었으나, 15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는 아버지의 관을 직접 지키며 고향으로 돌아가는 등 예를 다했다. 당시 집안이 부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난세에는 재산을 가지고 있어도 소용없을 수 있다며 아버지께서 남긴 재산을 친족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높이 평가받아 향거리선 제도에 따라 효렴으로 천거되었고, 이후 낭중 벼슬을 받게 되었다.

2. 2. 지방관 시절의 선정

호족 집안 출신이었으나 15세에 아버지를 잃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부유했지만 난세를 이유로 친족에게 부친의 재산을 모두 나누어 주었으며, 이 일이 높이 평가받아 향거리선으로 효렴에 천거되어 낭중이 되었다. 곧 늠구현령으로 부임하여 좋은 치적을 올렸고, 이후 언릉현령, 광천현령, 팽성상(相), 노국상(相) 등 여러 지방관을 역임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조조에게 발탁되어 중앙으로 소환, 승상부 주부에 임명되었다.

208년, 유복이 사망하자 그의 후임으로 양주 자사가 되어 다시 지방으로 나갔다. 조조는 단양태수였던 양주 출신의 장제를 보좌로 붙여주고, 합비를 지키는 장료, 악진 등과 상의하여 일을 처리하도록 당부했다.

219년, 손권이 군대를 이끌고 합비를 침공했을 때, 온회는 뛰어난 통찰력을 발휘했다. 그는 당시 연주 자사였던 배잠에게 양주 방면보다 관우가 있는 형주 방면을 더 경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온회는 "강물이 불어나고 있는데, 조인은 성 안에 고립되어 위험에 대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용맹한 관우가 기회를 틈타 공격해오면 재난을 일으킬 것입니다"라고 정확히 예측했다. 실제로 관우조인이 지키는 번성을 공격하여 우금을 포로로 잡았다. 또한, 배잠예주 자사 여공에게 원군으로 갈 것을 명하는 조칙이 내려졌지만, 온회는 곧 양양 방면으로의 출병 명령이 있을 것이니 그쪽에 대비해야 한다고 다시 한번 정확히 예측하여 배잠이 곤경에 처하는 것을 막았다.

220년, 조비(문제)가 즉위하자 다시 중앙으로 소환되어 시중으로 승진했고, 이어서 위군 태수로 임명되었다. 몇 년 후, 지절(持節)·호강교위(護羌校尉)·량주 자사로 임명되어 부임하던 중 병을 얻어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3. 중앙 관료와 양주자사 부임

호족 집안 출신이었으나 15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부친의 상을 치른 후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당시 난세였으므로 재산을 가지고 있어도 소용없다고 판단하여 부친이 남긴 재산을 친족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이 일이 높이 평가받아 향거리선으로 효렴에 천거되었고, 낭중으로 임명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름구현령으로 부임하여 좋은 치적을 올렸으며, 이후 언릉현령, 광천현령, 팽성상, 노국상 등 여러 지방관을 역임했다. 그의 능력을 인정한 조조에 의해 중앙으로 소환되어 승상 주부가 되었다.

208년에 유복이 사망하자, 그의 후임으로 양주자사로 임명되어 다시 지방관으로 부임했다. 조조는 양주 출신인 단양태수 장제를 온회의 보좌관으로 붙여주고, 합비를 수비하던 장료, 악진과 긴밀히 협력하여 업무를 처리하도록 지시했다.

219년, 손권이 군대를 이끌고 합비를 침공했다. 이때 온회는 연주 자사 배잠에게 양주 방면보다는 관우가 주둔하고 있는 형주 방면을 더욱 경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강물이 불어나고 있는데, 조인은 성 안에 고립되어 위험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용맹한 관우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격해 온다면 큰 재앙이 닥칠 것입니다"라고 경고했다. 실제로 이후 관우는 조인이 지키던 번성을 공격하여 우금을 사로잡는 큰 전과를 올렸다. 당시 배잠과 예주 자사 여공에게 조인을 구원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나, 온회는 "곧 양양 방면으로 출병하라는 명령이 있을 것이니, 그쪽에 대비해야 합니다"라고 다시 조언했다. 배잠이 온회의 조언에 따라 치중(무거운 군수물자)을 남겨두고 가벼운 무장의 병력으로 출발하려던 차에, 실제로 양양 방면 출병 명령이 내려와 온회의 예측이 맞아떨어졌다.

2. 4. 관우의 형주 공략과 온회의 혜안

219년, 손권이 이끄는 군대가 합비를 침공했다.[1] 당시 양주 자사였던 온회는 연주 자사 배잠에게 양주 방면보다는 관우가 주둔하고 있는 형주 방면을 더욱 경계해야 한다고 충고했다.[1] 그는 "강물이 불어나고 있는데, 조인은 성 안에 고립되어 위험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용맹한 관우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격해 온다면 큰 재난이 닥칠 것입니다"라고 구체적인 이유를 들어 설명했다.[1]

온회의 예측대로, 관우는 조인이 수비하던 번성을 공격하여 우금을 사로잡는 큰 전과를 올렸다.[1] 이에 조정에서는 배잠과 예주 자사 여공에게 즉시 원군으로 출동하라는 조칙을 내렸다. 그러나 온회는 다시 한번 배잠에게 "곧 양양 방면으로 출병하라는 명령이 있을 것이니, 그쪽에 대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1] 배잠은 처음에는 보급물자를 후방에 두고 경무장한 병력만으로 신속히 출발하려 했으나, 온회의 예상대로 양양 방면 출병 명령이 내려오면서 그의 조언 덕분에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다.[1] 이는 급변하는 전황 속에서 온회가 보여준 뛰어난 정세 판단 능력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2. 5. 조비 시대와 죽음

220년, 조비의 황제(문제)로 즉위하자 온회는 다시 중앙으로 소환되어 시중으로 승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위군 태수로 임명되었다.

몇 년 후, 지절(持節)·호강교위(護羌校尉)·량주 자사(涼州刺史)로 임명되어 부임지로 향하던 도중 병을 얻어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온회가 죽은 후 그의 적자가 관내후에 봉해졌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 가계가 한때 끊어졌다. 훗날 온회의 동생인 온공(溫恭)이 관내후에 봉해져 형의 뒤를 이었다.

2. 6. 사후

220년, 조비 시대가 되자 다시 소환되어 시중으로 승진했고, 이어서 위군 태수에 임명되었다. 몇 년 후, 지절·호강교위·량주 자사로 임명되었으나, 임지로 부임하던 도중 병을 얻어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 그의 적자가 관내후에 봉해졌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 가계가 잠시 끊겼다. 이후 동생인 온공이 관내후에 봉해져 형의 뒤를 이었다.

3. 가계

온회의 자녀로는 온생과 온공이 있었다. 이 중 온생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1]

손자로는 온공의 아들인 온선, 온담 등이 있으며, 현손으로는 온교의 아들인 온방지, 온식지 등이 있다.

3. 1. 자녀


  • 온생 (요절)
  • 온공

3. 2. 손자

온회의 손자는 온공의 아들들이다.

  • 온선
  • 온담
  • 그 외 세 명의 아들

3. 3. 증손

(내용 없음)

3. 4. 현손

온교의 아들들이 온회의 현손에 해당한다.

  • 온방지( 溫放之|온방지중국어 ): 자는 弘祖|홍조중국어. 使持節|사지절중국어·輔國將軍|보국장군중국어·交州刺史|교주자사중국어를 역임하고 始安公|시안공중국어에 봉해졌다.
  • 온식지( 溫式之|온식지중국어 ): 자는 穆祖|목조중국어. 散騎常侍|산기상시중국어를 지냈다.
  • 溫瞻|온첨중국어
  • 溫光|온광중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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