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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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에다 전투는 1585년과 1600년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전투로, 각각 제1차와 제2차로 구분된다. 제1차 우에다 전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사나다 마사유키 간의 대립으로, 사나다 마사유키가 적은 병력으로 도쿠가와 군을 격퇴하며 그의 지략을 널리 알린 사건이다. 제2차 우에다 전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이시다 미쓰나리의 세력 다툼인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초전으로, 사나다 마사유키와 그의 차남 사나다 노부시게(유키무라)는 서군에, 장남 사나다 노부유키는 동군에 가담하여 사나다 가문의 존속을 꾀했다. 이 전투에서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이끄는 동군은 우에다 성을 공격했으나, 세키가하라 전투 참전을 위해 공격을 중단했다. 두 전투 모두 사나다 가문의 전략적 판단과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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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다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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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분쟁 | 센고쿠 시대 |
시기 | 1600년 |
장소 | 시나노국우에다 성 |
좌표 | 36° 24′ 49″ N, 138° 15′ 15″ E |
결과 | 사나다 가문 수비군의 승리, 포위전 포기 |
교전 세력 | |
교전 1 | 도쿠가와 가문 |
교전 2 | 사나다 가문 |
지휘관 및 지도자 | |
도쿠가와 가문 | 도쿠가와 히데타다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혼다 마사노부 센고쿠 히데히사 오쿠다이라 노부마사 오쿠보 다다치카 고리키 다다후사 |
사나다 가문 | 사나다 마사유키 사나다 유키무라 |
병력 규모 | |
도쿠가와 가문 | 38,000명 |
사나다 가문 | 2,000명 |
2. 역사적 배경
우에다 전투는 16세기 말 일본 센고쿠 시대의 혼란기에 발생했으며, 제1차 우에다 전투와 제2차 우에다 전투로 나뉜다. 제1차 우에다 전투는 사나다 마사유키가 이끄는 사나다 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도쿠가와 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제1차 우에다 전투 당시 사나다 군의 주요 무장은 사나다 마사유키, 사나다 노부유키, 이케다 쓰나시게, 네즈 마사쓰나, 이타가키 슈리노스케, 오오쿠마 고로자에몬, 네즈 시마 등이었다. 우에스기 가문에서는 스다 미치치카가 원군으로 참전했다. 마루고성 전투에는 마루고 산자에몬이, 누마타성 전투에는 야자와 요리쓰나, 야자와 요리야스, 카네코 미노노카미 등이 참전했다.
도쿠가와 군은 토리이 모토타다, 오오쿠보 타다요시, 히라이와 친키치, 시바타 야스타다, 오오쿠보 타다나리, 오카베 나가시게, 스와 요리타다, 호시카 마사나오 등이 주요 무장이었다. 이이 나오마사, 오오스가 야스타카, 마쓰다이라 야스시게, 마키노 야스나리, 스가누마 사다마사 등은 도쿠가와 군의 원군으로 참전했다.
2. 1. 16세기 말 일본의 정세
1585년 당시 일본은 센고쿠 시대의 혼란기였다. 오다 노부나가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간의 권력 다툼이 격화되었다. 특히 다케다 가문 멸망 이후 시나노국 지역은 권력 공백 상태에 놓였고, 여러 세력들이 각축을 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쿠가와 가문과 호조 가문의 화의에 따른 누마타(沼田) 영지 귀속 문제가 발생했고, 이는 도쿠가와 가문과 사나다 가문 간의 분쟁으로 이어졌다.2. 2. 사나다 가문의 입장
사나다 마사유키는 다케다 가문의 가신이었으나, 시나노국의 독립 세력으로 성장하고자 했다. 158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호조 가문과의 화의에 따라 누마타 영지를 호조 가문에 넘기라고 요구하자, 사나다 마사유키는 이를 거절하고 도쿠가와 가문과 전투를 벌였다. 이는 영지 분쟁의 성격을 띠었으며, 사나다 가문은 적은 병력에도 불구하고 도쿠가와 군을 격퇴하여 도요토미 가문을 비롯한 유력 다이묘들에게 이름을 알렸다.3. 제1차 우에다 전투 (1585년)
1585년에 벌어진 제1차 우에다 전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호조 우지나오 간의 화의에 따른 누마타 영지 귀속 문제에서 발단되었다. 도쿠가와 가문은 호조 가문에 누마타를 넘기라고 요구했으나, 사나다 마사유키는 이를 거부하고 우에스기 가문과 동맹을 맺었다. 이는 사나다 가문이 다케다 가문의 가신에서 시나노의 독립 세력으로 발돋움하려는 중요한 시도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나다 마사유키를 토벌하기 위해 도리이 모토타다, 오쿠보 다다요, 히라이와 지카요시 등에게 약 7,000명의 병력을 주어 우에다 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맞선 사나다 군은 약 1,200명에 불과했지만, 노부유키는 토이시 성에서, 야자와 요리야스는 야자와 성에서 우에스기 지원군과 함께 농성하며 지리적 이점을 활용한 전술로 도쿠가와 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이 전투에서 사나다 마사유키는 뛰어난 지략을 발휘하여 도쿠가와 군을 격퇴하고, 사나다 가문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이후 사나다 가문은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 독립적인 다이묘로 성장하게 되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나다 가문을 회유하기 위해 혼다 다다카쓰의 딸 고마쓰히메를 노부유키와 혼인시키기도 했다.
이 전투는 신카와 전투 또는 우에다·신카와 전투라고도 불린다. 우에다 시립 박물관에는 이 전투를 묘사한 합전도가 소장되어 있다.
3. 1. 전투의 발단: 누마타 영지 분쟁
158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호조 우지나오 간의 화의 조건에 따라 누마타 영지 귀속 문제가 발생하였다. 도쿠가와 가문은 호조 가문에 누마타를 넘기라고 요구했지만, 사나다 마사유키는 이를 거부했다. 이는 사나다 가문이 다케다 가문의 가신에서 시나노의 독립 세력으로 인정받기 위한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마사유키는 도쿠가와 가문의 요구에 끝까지 맞서며, 결국 도쿠가와 가문과의 전투를 선택했다. 이 과정에서 사나다 가문은 우에스기 가문과 연합하여 도쿠가와 가문에 대항했다.3. 2. 전투의 경과
1585년 윤8월 2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나다 마사유키를 토벌하기 위해 가신인 도리이 모토타다, 오쿠보 다다요, 히라이와 지카요시 등 약 7,000명의 병력을 노부유키의 본거지인 우에다 성으로 파견했다.[3] 이에 맞서 사나다 군은 약 1,200명으로, 마사유키는 우에다 성에서, 장남 노부유키는 토이시 성에서 농성했다. 또한 야자와 요리야스는 야자와 성에서 우에스기의 원군과 함께 농성했다.도쿠가와 군은 호쿠리쿠 가도를 따라 진군하여 우에다 분지의 신슈 국분사 부근에 병력을 배치했다. 우에다 성을 공격한 도쿠가와 군은 니노마루까지 진격했지만, 사나다 군의 반격에 격퇴당했다. 퇴각하는 과정에서 성 측의 추격을 받았고, 토이시 성의 노부유키도 측면 공격을 가해 도쿠가와 군은 붕괴되었다. 야자와 세력도 추격전에 가세하여 신카와에서 많은 병사들이 익사했다. 사나다 군은 지리적 이점을 활용한 전술로 도쿠가와 군에게 1,300명에 달하는 전사자를 안겨주었다.[3] 반면 사나다 군의 희생은 40명 정도에 불과했다.
다음 날, 도쿠가와 군은 인근의 소호족이자 사나다 씨를 지원하던 마루코 씨(후에 사나다 씨에게 복종)가 농성하는 마루코 성을 공격했지만, 이 역시 험준한 지형과 강력한 저항에 막혀 함락시키지 못하고 20일 정도 대치했다(마루코표 전투). 이 기간 동안 우에스기 씨의 원군과 소규모 접전이 벌어졌고, 더 많은 증원 소식이 전해지자 이에야스는 원군(이이 나오마사(일부 부대는 처음부터 참전), 오스가 야스타카, 마쓰다이라 야스시게의 5,000명)을 파견하는 동시에 철수를 명령했다. 이에 따라 도쿠가와 군은 8월 28일에 우에다에서 철수했다.
이후에도 오쿠보 다다요 등 여러 장수들은 고모로 성에 남아 사나다 군과 소규모 접전을 계속했지만, 11월에는 가문의 중신 이시카와 가즈마사가 도요토미 가로 출사하는 사태까지 벌어져 완전히 철수하게 된다.
이 전투는 사나다 가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적은 병력으로 도쿠가와 군을 격퇴함으로써 사나다 마사유키는 뛰어난 지략가로 평가받게 되었다. 또한, 이 전투를 통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나다 가문에 대한 평가를 높여, 혼다 다다카쓰의 딸 고마쓰히메를 노부유키에게 시집보내 회유하는 계기가 되었다.
3. 3.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사나다 가문은 이 전투를 통해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 독립적인 다이묘로 인정받게 되었다.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사나다 가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도요토미 가문을 비롯한 유력 다이묘들에게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1]또한, 이 전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사나다 가문을 회유하기 위해 혼인 정책을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나다 마사유키의 뛰어난 지략을 높이 평가하여, 자신의 가신인 혼다 다다카쓰의 딸 고마쓰히메를 사나다 마사유키의 장남 사나다 노부유키에게 시집보냈다.[3]
4. 제2차 우에다 전투 (1600년)
1600년에 벌어진 제2차 우에다 전투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초전 중 하나로, 사나다 마사유키와 사나다 노부시게(유키무라) 부자가 서군에 가담하여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이끄는 동군과 맞붙은 전투이다.
마사유키의 장남 사나다 노부유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인 고마쓰히메(혼다 다다카쓰의 딸)를 부인으로 맞아 동군에 가담, 도쿠가와 히데타다 군세에 속하여 우에다 성을 공격하였다. 이는 다이묘 가문으로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으로, 서군과 동군 양쪽으로 나뉘어 가담한 것이었다.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지휘하는 3만 8천 명의 군세는 우쓰노미야에 머물러 우에스기에게 대비한 후, 시나노국 평정을 위해 추산도를 따라 우에다 성으로 향했다.[4]
9월 2일 히데타다는 코모로 성에 도착했고, 다음 날 마사유키는 사나다 노부유키를 통해 항복을 요청했다. 그러나 4일 마사유키는 태도를 바꾸어 도발적인 태도를 취했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9월 5일 히데타다군은 우에다 성에 접근, 사나다 유키무라가 지키는 우에다 성의 지성인 토이시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9월 6일 마키노 야스나리가 이끄는 부대가 우에다 성 아래에서 벼 베기를 시작하자, 사나다 측 군사 수백 명이 성에서 나왔지만 패배하고 우에다 성으로 도주했다. 히데타다군은 우에다 성의 오테몬 앞까지 진격했지만, 히데타다의 철수 명령으로 물러났다.
9월 8일,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참전 명령을 받은 히데타다는 우에다에 병력을 남기고 세키가하라 전투로 향했다. 히데타다는 우에다 성의 견고함에 놀라 일단 전군을 코모로 성으로 철수했고, 이후 이에야스의 참전 명령에 따라 우에다 성 공격을 중단했다.
일반적으로 제2차 우에다 전투는 히데타다 군이 대패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 늦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당시 사료는 부족하다. 히데타다는 우에다 성 공격에 전념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작전 변경에 따른 긴급한 참전 명령 때문에 우에다 성 공격을 중단한 것이다.
결국 히데타다는 세키가하라 전투 본전에 늦게 도착하게 되었는데, 이는 우에다 성에서의 지연뿐만 아니라 도중의 악천후도 영향을 미쳤다. 마쓰시로 성에 있던 모리 타다마사가 전투 후에도 가즈오 성에 병사를 두고 우에다 성을 감시한 것으로 보아, 유키무라의 야습 등으로 작은 충돌이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 차례의 전투를 통해 사나다 마사유키는 "전투에 능한 자"로서 전국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4. 1. 전투의 발단: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초전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이시다 미쓰나리를 중심으로 권력 다툼이 격화되었다. 1600년, 이시다 미쓰나리는 모리 데루모토를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거병하여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했다. 당시 정세는 도요토미 정권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보수 진영)와 이에 대항하는 이시다 미쓰나리(진보 진영)의 대립으로 볼 수 있다.[4]이러한 상황에서 사나다 마사유키와 그의 차남 사나다 노부시게(유키무라)는 서군(이시다 미쓰나리 측)에 가담했다. 마사유키의 다섯째 딸이 이시다 미쓰나리의 처가인 우다 가문(宇田氏)에 시집갔고, 노부시게는 미쓰나리의 친우 오타니 요시쓰구의 딸과 결혼하는 등 인척 관계가 크게 작용했다. 반면, 마사유키의 장남 사나다 노부유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 고마쓰히메(혼다 다다카쓰의 딸)와 결혼하여 동군(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에 가담했다. 이는 사나다 가문이 어느 쪽이 승리하더라도 가문을 존속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해석된다.
시모쓰케국 이누부시에서 사나다 부자는 동군에서 이탈하여 우에다로 돌아가 서군에 합류했다. 한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서군의 거병 소식을 듣고 시모쓰케국고야마에서 군을 돌려 서쪽으로 진군했다. 이때,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이끄는 3만 8천의 군세는 나카센도를 따라 시나노국 평정을 위해 우에다 성으로 향했다.
4. 2. 전투의 경과
1600년,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이끄는 3만 8천 명의 동군은 시나노국 우에다 성으로 향했다.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권력을 강화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항하여 이시다 미쓰나리를 중심으로 한 서군이 결성되면서, 세키가하라 전투가 불가피해진 상황이었다.사나다 마사유키와 그의 차남 사나다 노부시게(사나다 유키무라)는 서군에 가담했는데, 이는 마사유키의 딸이 이시다 미쓰나리의 인척 관계였고, 노부시게 또한 미쓰나리의 친우 오타니 요시쓰구의 딸과 결혼한 관계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반면, 마사유키의 장남 사나다 노부유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인 혼다 다다카쓰의 딸 고마쓰히메와 결혼하여 동군에 가담, 도쿠가와 히데타다 군세에 속해 우에다 성 공격에 참여했다. 이는 가문의 존속을 위한 선택으로 여겨진다.
9월 2일, 히데타다는 코모로 성에 도착했고, 다음 날 마사유키는 사나다 노부유키를 통해 항복 의사를 전달했다. 그러나 4일, 마사유키는 태도를 바꾸어 도발적인 자세를 취했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9월 5일, 히데타다군은 우에다 성에 접근, 사나다 유키무라가 지키는 토이시 성을 공격했다. 사나다 노부유키 군의 공격에 유키무라군은 철수했고, 노부유키군은 무혈입성했다.
9월 6일, 마키노 야스나리 부대가 우에다 성 아래에서 벼 베기를 시작하자, 사나다 군이 저지하려 했으나 패배했다. 히데타다군은 우에다 성 오테몬 앞까지 진격했지만, 히데타다의 철수 명령으로 물러났다. 9월 8일, 이에야스로부터 참전 명령을 받은 히데타다는 우에다 성에 병력을 남기고 세키가하라 전투로 향했다.
당시 기록에는 히데타다군이 대패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 늦었다고 되어 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사료는 부족하다. 히데타다는 우에다 성의 견고함에 놀라 철수했지만, 이에야스의 참전 명령으로 우에다 성 공격을 중단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히데타다는 우에다 성 공략에 실패하고, 세키가하라 전투 본전에 지각 참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당시 보수 진영이었던 도쿠가와 가문에게는 전략적 실책으로 평가될 수 있다.
4. 3.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제2차 우에다 전투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일부로, 사나다 마사유키와 그의 아들 노부시게(유키무라)가 서군에 가담하면서 발생했다. 대부분의 시나노 다이묘들이 동군에 가담한 상황에서, 마사유키와 노부시게는 서군 총수 이시다 미쓰나리와의 인척 관계 등으로 인해 서군을 선택했다. 반면, 마사유키의 장남 사나다 노부유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 고마쓰히메와 결혼하여 동군에 가담했다. 이러한 가족의 분열은 가문의 존속을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가문의 이름을 알리기 위한 제1차 전투와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이끄는 3만 8천 명의 동군은 추산도를 따라 우에다 성으로 향했다. 히데타다는 처음에 사나다 노부유키를 통해 마사유키에게 항복을 권유했으나, 마사유키가 태도를 바꾸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히데타다군은 사나다 유키무라가 지키는 토이시 성을 함락하고 우에다 성으로 진격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참전 명령으로 인해 공격을 중단하고 세키가하라 전투 본진으로 향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제2차 우에다 전투는 히데타다 군의 대패와 세키가하라 전투 지참의 원인으로 알려져 왔지만, 당시 사료는 이를 뒷받침하지 않는다. 히데타다가 우에다 성 공격을 포기한 것은 이에야스의 작전 변경에 따른 긴급한 참전 명령 때문이었으며, 우에다 성 공략에 전념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4]
결과적으로 히데타다는 세키가하라 전투 본전에 늦게 도착했지만, 이는 우에다 성에서의 지연뿐만 아니라 악천후도 영향을 미쳤다. 전투 후에도 마쓰시로 성의 모리 타다마사가 우에다 성을 감시하는 등 작은 충돌이 계속되었다.
두 차례의 전투를 통해 사나다 마사유키는 "전투에 능한 자"로서 전국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5.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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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문서
沼田領の替地として与えられた箕輪の土地
[2]
논문
〈越中国切〉をめぐる政治過程
[3]
문서
真田信幸書状
[4]
문서
使者の到着遅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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