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키가하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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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키가하라 전투는 1600년 일본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투로, 일본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정권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 발생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무단파와 이료파의 갈등이 심화된 가운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을 강화하려 하자 이에 반발한 이시다 미쓰나리 등 서군 세력이 모리 데루모토를 중심으로 대항했다. 전투는 동군과 서군 간의 대결로 시작되었으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등 서군의 배신으로 동군이 승리하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실권을 장악했다. 이 전투의 결과는 일본 정치 지형을 크게 바꾸어, 도쿠가와 막부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조선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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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요토미 정권 내부 정쟁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 중심의 동군과 모리 데루모토 중심의 서군이 대립했다. 이 전역은 세키가하라 전투를 포함해 각지에서 벌어진 전투를 통칭한다.
일본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정권은 임진왜란에 참여한 무단파와 행정, 경제 등에서 활약한 이료파[249] 간의 대립이 있었다. 1591년 히데나가 사망과 임진왜란을 거치며 대립은 심화되었다. 히데요시는 오대로(五大老)와 오봉행(五奉行) 제도를 만들고 1598년 사망했다. 이후 대립이 표면화되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금지된 다이묘 간 결혼과 영토 분배로 영향력을 강화했다. 마에다 도시이에가 경고했으나, 서약서 교환으로 충돌을 피했다. 하지만 무단파 다이묘들이 도쿠가와 관저로 모여들면서, 도요토미 가문 내부는 분열되었다.
1599년 윤3월 도시이에 사망 후, 가토 기요마사 등 7명[250]이 이시다 미쓰나리를 습격했다. 미쓰나리는 봉행직에서 해임되고 사와야마 성으로 은거했다.[251] 이에야스는 후시미성에서 오사카성으로 들어가 정무를 지휘했다.
1600년,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가게카쓰에게 군비 증강을 비난하며 교토로 올라와 해명하라고 경고했다. 가게카쓰의 중신 나오에 가네쓰구는 나오에 장을 발표하여 이에야스의 심기를 건드렸고, 이에야스는 아이즈 정벌을 개시했다.[256]
실각한 이시다 미쓰나리는 서군을 조직하고 거병했다. 호소카와 다다오키의 아내 호소카와 가라샤는 인질을 거부하고 죽었다. 이에야스는 도리이 모토타다의 보고를 받고 행군을 중지, 다이묘들에게 동향을 물었다. 사나다 마사유키 등은 떠났지만 대부분은 이에야스를 따랐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탁을 배반한 것을 싫어하여 따르지 않았고, 이에야스가 불렀으나 복속하지 않았다.
이 전역의 결과, 도요토미 정권은 통일 정권의 지위를 상실했고,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권력을 장악하여 에도 막부 성립의 길을 열었다.
2. 1. 도요토미 정권의 권력 구조와 내부 갈등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요토미 정권은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오대로(도쿠가와 이에야스, 모리 데루모토, 우에스기 가게카쓰, 마에다 도시이에, 우키타 히데이에)와 오봉행(아사노 나가마사, 마에다 겐이, 이시다 미쓰나리, 마스다 나가모리, 나쓰카 마사이에)이 보좌하는 체제로 바뀌었다. 그러나 히데요시 사후 권력 다툼 과정에서 이 체제는 무너져갔고, 세키가하라 전투의 결과로 사라졌다.[77]정권 내부 갈등의 원인은 복잡했지만, 주요 원인은 다음과 같았다.
- 태합검지 실시와 도요토미 직할령 설치, 다이묘 내부 문제 개입을 통해 중앙 권력을 강화하려던 이시다 미쓰나리, 마스다 나가모리 등 강경파와 이에 반대한 아사노 나가마사 등 온건파의 대립.[82]
-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이시다 미쓰나리, 마스다 나가모리 등 봉행들과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등 무장들 사이에 작전과 군공을 둘러싼 갈등. 이는 문치파와 무단파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 도요토미 히데쓰구 할복 사건의 영향으로, 히데쓰구 숙청을 주도한 이시다 미쓰나리와 여러 다이묘들 사이의 갈등.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언에 따라 정권을 운영하려는 봉행들과, 이를 벗어나 주도권을 잡으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및 그 지지 세력 간의 대립.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테 마사무네 등 여러 다이묘와 사적인 혼인을 추진하고, 오사카성 니시노마루에 입성하는 등 히데요시의 유언을 어기고 권력을 강화했다. 이에 마에다 도시이에와 봉행들이 이에야스를 추궁하려 했으나, 맹세서 교환으로 일단락되었다.
1599년 윤3월, 마에다 도시이에가 사망하자 가토 기요마사 등 7명이 이시다 미쓰나리를 습격했다.(이시다 미쓰나리 습격 사건) 미쓰나리는 봉행직에서 물러나 사와야마 성에 은거했다.[251]
같은 해 9월 7일, 도쿠가와 이에야스 암살 계획이 발각되었다. 마에다 도시나가가 주모자로 지목되었으나, 호슌인을 인질로 보내는 것으로 해결되었다.[107]
이후 이에야스는 오사카 성에서 다이묘들에게 영지를 늘려주거나 옮기는 등 독단적인 결정을 내리며 세력을 키웠다.
2. 2.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부상과 반발
일본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정권은 임진왜란에 참여한 '무단파'와 행정, 경제 등에서 활약한 '이료파'[249] 사이의 대립이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의 동생 히데나가 덕분에 갈등이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1591년 히데나가가 죽고 임진왜란을 거치며 대립은 심화되었다.히데요시는 죽기 전 오대로(五大老)와 오봉행(五奉行) 제도를 만들어 여러 다이묘에게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도요토미 히데요리일본어)에게 복종할 것을 맹세시키고 1598년 8월 후시미성(伏見城)에서 사망했다. 이후 양 파벌의 대립은 표면화되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도쿠가와 이에야스일본어)는 금지된 다이묘 간 결혼과 영토 분배를 통해 영향력을 강화했다. 이에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가 경고했다.
후시미(도쿠가와군)와 오사카(마에다군) 사이의 갈등은 심각했지만, 서약서 교환으로 충돌은 피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무단파 다이묘들이 도쿠가와 관저로 모여들면서, 도요토미 가문 내부는 빠르게 분열되기 시작했다.
;도쿠가와 관저로 모여든 주요 다이묘[101]
1599년 윤달 3월 도시이에가 사망하자,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 7명[250]이 오봉행의 이시다 미쓰나리를 습격했다. 미쓰나리는 이에야스의 중재로 봉행직에서 해임되고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으로 은거했다.[251] 미쓰나리의 실각으로 이에야스의 대항 세력은 사라졌고, 이에야스는 후시미성에서 오사카성으로 들어가 정무(政務)를 지휘했다.
이에야스는 마에다 도시나가(前田利長|마에다 도시나가일본어)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암살 계획의 주모자임을 알고, 아사노 나가마사 등에게 칩거를 명령했다. 그리고 도시나가에게 모반 혐의를 씌워 정벌 계획을 세웠다. 도시나가는 친모 호슈인(芳春院|호슈인일본어)을 인질로 보내 복종했고, 마에다 가문의 지위는 보전되었다.
1600년에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가게카쓰에게 군비 증강을 비난하며 교토로 올라와 해명하라고 경고했다. 가게카쓰의 중신 나오에 가네쓰구는 나오에 장을 발표하여 이에야스의 심기를 건드렸고, 이에야스는 아이즈 정벌을 개시했다.
실각한 이시다 미쓰나리는 서군을 조직하고 여러 다이묘의 처자식을 인질로 삼아 거병했다. 호소카와 다다오키의 아내 호소카와 가라샤는 인질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죽었다.
이에야스는 도리이 모토타다(鳥居元忠)의 보고를 시모쓰케국(下野国|시모쓰케 국일본어) 오야마(小山)에서 받고 행군을 중지, 다이묘들에게 동향을 물었다. 사나다 마사유키 등은 이에야스 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이에야스를 따르기로 하고 서쪽으로 향했다.
이에야스의 아이즈 정벌은 이시다 미쓰나리를 거병시키기 위한 책략이라는 견해도 있다.
2. 3. 우에스기 가게카쓰의 거병과 아이즈 정벌
1600년(게이초 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가게카쓰에게 군비 증강을 비난하며 교토로 올라와 해명하라고 경고했다. 가게카쓰의 중신 나오에 가네쓰구는 나오에 장을 발표하여 이에야스의 심기를 건드렸고, 결국 이에야스는 아이즈 정벌을 개시하였다.[256]이에야스는 아이즈와의 교섭 결과가 나오지 않은 5월 3일 시점에서 이미 아이즈 정벌을 결정했고, 6월 2일에는 혼다 야스시게 등에게 7월 하순 "오슈 표"에 출진할 것을 전했다.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우에스기 영지로 침공하는 토벌군을 히타치의 사타케 요시노부와 연계하여 시라카와 구치에서 협격하는 "시라카와 결전"을 계획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라카와 결전" 계획의 실존을 부정하는 의견도 존재한다.
우에스기 가문의 거병은, 이에야스가 동쪽으로 향하는 틈을 타 기내에서 이시다 미쓰나리가 결기하여, 이에야스를 동서에서 협격한다는, 우에스기 가문 가로 나오에 가네쓰구와 미쓰나리 사이에서 사전부터 계획된 계획에 근거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에도 시대 성립의 군기물・일화집 등에 등장하는 설이며, 직접적인 증거가 되는 1차 사료는 없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탁을 배반한 것을 매우 싫어하여 따르지 않을 뜻을 보였고, 이에야스가 재삼 불렀으나 끝내 복속하지 않았다고 한다.
9월 9일, 모가미 요시아키는 우에스기 세력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요시아키는 오우 여러 장수들과 연합하여 우에스기 세력과 싸우려 했지만, 세키가하라 개전 소식을 듣자 여러 장수들은 자국 안정을 위해 물러났다. 요시아키는 적자를 인질로 하는 것을 조건으로 우에스기 세력에게 화의를 요청했지만, 성립되지 않았다. 같은 날, 나오에 가네쓰구가 지휘하는 군대가 모가미 영지에 쳐들어왔다.
다테 마사무네는 동군에 붙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했을 때, 마사무네의 구영 7군을 가증하여 백만 석의 영지를 준다는, 이에야스로부터 "백만 석의 어묵"(센다이시 박물관 소장)을 받았다. 다테 세력은 우에스기 영지의 시로이시성을 공격하여 점령했지만, 이를 반환하는 것을 조건으로 우에스기 세력과 화의를 맺었다.
9월 29일에 세키가하라의 상세한 정보가 양군 진영에 도달하여, 나오에 가네쓰구는 철퇴를 명령했다. 10월 4일에 요네자와성으로 귀환했지만, 모가미 영지 내부에 남겨진 우에스기 세력은 모가미 세력에게 패배하였다.
마에다 토시나가는 우에스기씨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7월 26일 가나자와를 출발했다. 다이쇼지 성을 함락시키고 아오키 카즈노리의 키타노쇼 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오타니 요시쓰구가 후방 지원을 위해 온다는 허위 정보에 속아 가나자와로 되돌아가려 했다.
히타치의 다이묘였던 사타케 요시노부는 이시다 미쓰나리와 친교가 깊어 우에스기 가게카츠와 연계하여 아이즈 정벌에 나서는 도쿠가와 군을 협격하겠다는 밀약을 맺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아버지인 사타케 요시시게의 반대로 애매한 태도로 일관했다.
3. 세력 구도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요토미 정권 내부의 정쟁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하는 동군과 모리 데루모토를 중심으로 하는 서군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다. 이 전역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에 발생한 도요토미 정권 내부의 정쟁에서 비롯된 것으로, 양 진영은 세키가하라 전투를 포함해 각지에서 전투를 벌였다.
일본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정권 내부에는 임진왜란에 참여한 무장 세력인 '무단파'와 행정, 경제 등 전투 외 분야에서 활약한 '이료파'[249] 사이의 대립이 있었다. 1591년 히데나가가 죽고 임진왜란으로 양 파벌의 대립은 더 깊어졌다. 히데요시는 죽기 전 오대로(五大老) 및 오봉행(五奉行) 제도를 만들어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복종할 것을 맹세시키고 1598년 8월 후시미성에서 죽었다. 이후 양측의 대립은 표면화되었다.
다섯 다이로 중 한 명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금지된 다이묘 간의 결혼과 영토 분배를 통해 영향력을 강화했고, 마에다 도시이에가 이를 경고했다. 후시미(도쿠가와군)와 오사카(마에다군) 사이의 갈등은 충돌 직전까지 갔으나, 서약서 교환으로 충돌은 피했다. 이때부터 무단파 다이묘들이 도쿠가와 관저로 모여들면서 도요토미 가문 내부는 분열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가운데, 동군과 서군은 각각 다음과 같은 주요 다이묘들을 중심으로 결집하였다.
1599년 윤달 3월, 마에다 도시이에 사망 후, 무단파의 가토 기요마사 등 7명[250]이 이시다 미쓰나리를 습격하였다. 미쓰나리는 이에야스 중개로 봉행직 해임 후 사와야마 성으로 은거했다[251]. 이에야스는 후시미성에서 오사카성으로 들어가 정무를 지휘했다.
1600년(게이초 5년),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가게카쓰에게 군비 증강을 비난하며 교토로 올라와 해명하라고 경고하였다. 나오에 가네쓰구는 나오에 장을 발표하여 이에야스의 심기를 건드렸고, 이에야스는 아이즈 정벌을 개시하였다.
실각한 이시다 미쓰나리는 모리 데루모토를 옹립하여 서군을 조직하고 거병하였다. 호소카와 가라샤는 인질을 거부하고 자결했다. 이에야스는 도리이 모토타다의 보고를 받고 행군을 중지, 다이묘들에게 동향을 물었다. 대부분 이에야스를 따랐고, 군을 돌려 서쪽으로 향했다.
7월 11일 미쓰나리는 오타니 요시쓰구에게 ‘이에야스 타도’를 밝히고 자기 진영에 끌어들였다. 7월 17일 거병을 선언하고 후시미성을 공격, 8월 1일 함락시켰다(후시미성 전투). 동군은 도카이도를 따라 서진, 8월 22일 기소가와를 건너 서군을 격파하고 기후성을 함락했다.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나카센도를 따라 전진했으나, 우에다성 공략에 발목이 잡혀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하지 못했다. 이에야스는 9월 14일 아카사카에 본진을 세웠다. 9월 15일 양군은 세키가하라에 집결, 동군 82,000명, 서군 104,000명이 격돌했다.[260]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 여러 다이묘들이 다양한 태도를 보였다.
; 내응군
; 적극적 배신
; 소극적 배신
; 중립
- 기노시타 이에사다
- 고시마 겐가
; 기타
- 자금 원조・첩보 활동: 나베시마 나오시게, 하세가와 모리토모, 야규 무네노리
- 전선 이탈: 야마카와 아사노부, 기노시타 가쓰토시, 마쓰노 시게모토
- 병, 요양으로 불참: 나카무라 가즈우지, 호리오 요시하루, 이토 스케토모
- 기타 불참: 이코마 지카마사, 하치스카 이에마사, 히네노 히로나리
- 거취 불명: 오다 노부오
3. 1. 서군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요토미 정권 내부의 정쟁에서 비롯된 이 전역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총대장으로 하는 동군과 모리 데루모토를 총대장으로 우키타 히데이에, 이시다 미쓰나리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반(反) 도쿠가와 세력인 서군으로 나뉘어 전투를 벌였다.일본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정권 내부에는 임진왜란에 참여한 무장 세력인 '무단파'와 행정, 경제 등 전투 외 분야에서 활약한 '이료파'[249] 사이의 대립이 있었다. 1591년 히데나가가 죽고 임진왜란으로 양 파벌의 대립은 더 깊어졌다. 히데요시는 죽기 전 오대로(五大老) 및 오봉행(五奉行) 제도를 만들어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복종할 것을 맹세시키고 1598년 8월 후시미성에서 죽었다. 이후 양측의 대립은 표면화되었다.
다섯 다이로 중 한 명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금지된 다이묘 간의 결혼과 영토 분배를 통해 영향력을 강화했고, 마에다 도시이에가 이를 경고했다. 후시미(도쿠가와군)와 오사카(마에다군) 사이의 갈등은 충돌 직전까지 갔으나, 서약서 교환으로 충돌은 피했다. 이때부터 무단파 다이묘들이 도쿠가와 관저로 모여들면서 도요토미 가문 내부는 분열되기 시작했다.
; 마에다 관저에 모여든 주요 다이묘
-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일본어)
-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景勝일본어)
-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일본어)
- 오다 히데노부(織田秀信일본어)
- 오다 히데카쓰(織田秀雄일본어)
- 마시타 나가모리(増田長盛일본어)
- 나쓰카 마사이에(長束正家일본어)
- 마에다 겐이(前田玄以일본어)
- 사타케 요시노부(佐竹義宣일본어)
-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일본어)
- 조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일본어)
-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일본어)
-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일본어)
-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일본어)
- 마쓰라 시게노부(松浦鎮信일본어)
다음 해 윤달 3월 도시이에가 사망하자, 무단파의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 7명[250]이 관료파 우두머리인 오봉행 이시다 미쓰나리를 습격했다. 미쓰나리는 이에야스의 중개로 봉행직을 해임당하고 사와야마 성으로 은거했다[251]. 미쓰나리의 실각으로 이에야스의 대항 세력은 사라졌고, 이에야스는 후시미성에서 오사카성으로 들어가 정무를 지휘했다.
- 아래 표 안의 병력 수는 주로 『일본전사 세키가하라역』(日本戦史関ヶ原役)에 따른다.
- 안코쿠지 에케이, 고바야카와 히데카네 등 히데요시 징수들에 의한 모리계 다이묘는 모리 데루모토의 영지에 포함되지 않는다.
- 모리 히데모토의 병력은 모리 데루모토와 깃카와 히로이에의 병력의 합계이다.
- 시마즈 요시히로의 병력은 시마즈 도요히사대와의 합계이다.
- 우에스기 가게카쓰의 병력은 게이초 데와 전투에서 동원된 병력뿐이다.
1600년 이에야스는 우에스기씨의 옛 가신 후지다 노부요시의 출분[256]을 계기로 우에스기 가게카쓰를 비난하며 교토로 올라와 해명하라고 경고했다. 가게카쓰의 중신 나오에 가네쓰구는 나오에 장을 발표하여 이에야스의 심기를 건드렸다. 결국 이에야스를 총대장으로 도요토미 측 다이묘가 참가한 도요토미군은 아이즈 정벌을 개시했다.
실각한 이시다 미쓰나리는 오타니 요시쓰구 등과 모의하여 모리 데루모토를 옹립, 서군을 조직하고 여러 다이묘의 처자식을 인질로 삼아 거병했다. 호소카와 다다오키의 아내 호소카와 가라샤는 인질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가신의 창에 스스로 뛰어들어 죽었다.
이에야스는 도리이 모토타다의 보고를 시모쓰케국 오야마에서 접하고 행군을 중지, 다이묘들에게 동향을 물었다. 사나다 마사유키 등은 이에야스 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이에야스를 따르기로 하고 군을 돌려 서쪽으로 향했다.
이에야스의 아이즈 정벌은 이시다 미쓰나리를 거병시키기 위한 책략이라는 견해도 있다.
7월 1일 우키타 히데이에가 도요쿠니 신사에서 출정식을 치렀고, 기타노만도코로는 측근 히가시도노노 쓰보네를 대신 참석하게 했다.[257] 7월 11일 미쓰나리는 오타니 요시쓰구에게 '이에야스 타도'를 밝히고 자기 진영에 끌어들였다.
히데이에가 먼저 궐기하고, 미쓰나리는 이를 받아들이면서 거병을 결정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사나다 마사유키가 미쓰나리의 협력 요청에 "어째서 사전에 알려주지 않았는가!"라고 적은 편지가 전해진다.
7월 12일 사와야마성에서 미쓰나리는 모리 데루모토를 서군 총대장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같은 날 아이치가와에서 동군 참가 예정 장수들을 저지하기 위해 관소[258]를 설치, 조소카베 모리치카 등이 서군에 참가했다.
7월 17일 미쓰나리는 거병을 선언하고 도리이 모토타다가 지키던 후시미성에 진격했다. 7월 19일부터 시작된 공성전에서 우키다 히데이에 등의 맹공에 맞서 분전했으나 8월 1일 성을 잃었다(후시미성 전투). 그 후 단고국의 다나베성 등을 공략해 8월 안에 모두 함락시켰다. 미쓰나리는 8월 10일 오가키성으로 들어갔다.
9월 14일 밤, 이시다 미쓰나리는 세키가하라로 진격했다.
9월 15일 동서 양군은 세키가하라에 집결했다. 동군 82,000명, 서군 104,000명, 도합 18만이 넘는 병력이 집결했다고 한다.[260]
메이지 시대 군사고문 클레멘스 메켈 소령은 서군의 승리를 장담했다고 한다. 서군은 학익진을 형성, 지형적 이점을 차지하고 있었다. 동군은 골짜기에 갇혀 꼼짝 못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동군은 서군 다이묘들 간의 불화를 알고 있었다. 오타니 요시쓰구는 모리 데루모토를 총대장으로 옹립했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세키가하라는 아침부터 깊은 안개가 생겼다.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개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일본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이시다 미쓰나리와 가토 기요마사 등 7명의 전 토요토미 가문 장군들 사이에 파벌 다툼이 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미쓰나리의 반대에 맞서기 위해 기요마사와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미쓰나리는 토요토미 가문을 위해 싸운다고 주장했다. 다섯 원로 중 한 명인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군대를 증강, 이에야스는 교토에 가게카츠의 의심스러운 활동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나오에 가네츠구는 이에야스 자신의 히데요시 명령 위반을 강조하는 조롱 섞인 편지로 응답했다.
미쓰나리는 오타니 요시쓰구 등과 만나 반 도쿠가와 군대를 일으키기 위해 공모, 모리 데루모토가 전체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연합은 서군으로 불리게 되었다. 데루모토는 즉시 진군하여 오사카 성을 점령했고, 도쿠가와 본군은 아직 가게카츠를 진압하러 가는 중이었다.
처음에 미쓰나리는 기후 성을 요충지로, 오가키 성을 이용하여 동군 진격을 막으려 했다.[6] 그러나 이 계획은 여러 사건으로 실패했다.
- 기후 성은 서군 주력이 도착하기 전에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이 이끄는 동군에 의해 함락되었다.[7][8][9]
- 10월 19일, 시마즈 요시히로의 부대는 미즈노 가쓰시게에게 패배했다.[10][11][12] 가쓰시게는 오가키 성 외곽 해자를 파괴, 요시히로를 이세 국으로 후퇴시켰다.[13]
- 미쓰나리는 도쿠가와 군대가 오사카 성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실패와 오사카 성에 대한 위협에 따라 미쓰나리는 계획을 변경, 세키가하라에서 야전 결전을 준비했다.[6]
그러나 전투 시작 하루 전, 서군 동맹인 모리 씨족 가신 깃카와 히로이에는 동군과 공모, 전투 중 모리 씨족이 편을 바꿀 것을 약속, 전쟁 후 사면 조건이었다. 구로다 요시타카와 구로다 나가마사가 히로이에와의 이 서신에서 동군 대표로 활동했다.[15] 히로이에와 그의 수석 가신 후쿠바라 히로토시는 도쿠가와 측에 협력 증거로 인질을 제시했다.
秀吉 사후, 도요토미 정권 정치 체제는 히데요시 독재에서 어린 후계자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오대로, 오봉행에 의해 지탱하는 체제로 이행한다. 그러나, 히데요시 사후 정치 항쟁 과정에서 이 체제는 서서히 붕괴, 전역 결과에 의해 소멸하게 된다.
정쟁 원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상정되고 있지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동서 대립 관계는 복잡, 각 다이묘 동향을 결정한 요인은 다방면에 걸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77]。또한, 지방에서의 전투는 주력 결전이 정치면을 포함해 결착된 게이초 5년 10월 이후에도 이루어졌으며, 반드시 정권 중앙에서의 정치 대립에 직결된 것은 아니다[78]。
태합검지 실시와 이에 따른 여러 다이묘 영내에 대한 도요토미 직할령 설치[79][80]나, 다이묘 내부에서 발생한 여러 문제에 대한 개입을 통해 도요토미 정권(중앙)에 의한 지방 다이묘에 대한 지배력 강화를 추진하려던 이시다 미쓰나리 등의 강경·집권파와, 이에 반대하는 아사노 나가마사 등의 유화·분권파의 대립[82]이 항쟁 배경에 있었다는 설이다.
한편, 토야 호다카는 유화·분권파로서 아사노 나가마사 이름이 거론되는 점에 대해, "그 논거는 전혀 제시되지 않았으며" 강경·집권파와의 "대립 구도 자체에도 재고 여지가 보인다"고 말하고 있다[83]。
경장·분로쿠의 역(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이시다 미쓰나리·마스다 나가모리를 중심으로 한 봉행들과 가토 기요마사 등을 중심으로 하는 도해군 제장 사이에 발생한 작전 방침·군공을 둘러싼 대립이, 세키가하라 전투 주요 원인이라는 설이다. 이 대립 관계는, 도요토미 정권에서 주로 정무 활동을 담당한 '문치파'와, 군사 활동에 종사한 '무단파'와의 대립을 포함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양 파벌 불화를 나타낸 일화에는, 1차 사료에 의한 확인이 불가능한 것과 창작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많고[87][88][89][90], 한편, 후에 동군에 속하는 무장 간에도 대립 관계가 존재하고 있다.
문록 4년(1595년) 6월에 발생한 도요토미 히데쓰구 할복 사건 영향으로 제후들과 도요토미 히데쓰구 숙청을 주도한 이시다 미쓰나리 사이 대립 관계가 항쟁 배경이었다는 설이 있다. 도요토미 히데쓰구 모반 계획 참여를 의심받은 제후들에 대한 처벌 중 일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중재로 경감되었다. 그 결과 양자는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고, 반면 제후들은 이시다 미쓰나리를 증오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시다 미쓰나리를 사건 주모자로 하는 설은 간에이 3년(1626년)에 집필되어 성립된 역사관이 담긴 "호안 태합기"라는 책 기술에 등장한 이후[95] 군기물 등에 수록된 일화를 근거로 하고 있으며, 사료로서 입증된 것은 아니다.
「태합님 오키메」(도요토미 히데요시 유언[96]이나 죽기 전후에 작성된 율령[97]·기청문군[98])에 따라 정권 운영을 진행하려는 도요토미 봉행중과, 그것을 벗어나 정권 내에서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및 그를 지지하는 일파와의 대립이 항쟁으로 이어진다는 설이다.
후술할 「내부 치카이노 조조」에서 봉행중은 이에야스가 다테 마사무네 등 여러 다이묘들과 진행한 사적인 혼인 계획을 시작으로, 히데요시 정실 기타노만도코로를 몰아내고 오사카성 서쪽 마루 입성, 오로도·봉행에 의한 합의로 이루어져야 할 다이묘에 대한 가증 단독 결정, 도요토미 정권 인질인 여러 다이묘 처자 무단 귀국 허가 등, 히데요시 사후 수많은 오키메 위반을 저질렀다고 주장,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이 이에야스를 토벌 대상으로 삼는 근거로 삼았다.
한편, 히데요시 죽음 직후인 게이초 3년 8월 27일, 마에다 겐이 등 네 명 봉행은 오로도인 모리 데루모토와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리에 대한 충성과 히데요시가 정한 오키메 준수를 다시 맹세하는 기청문을 작성, 그 입장은 이에야스 행동과는 상이한 것이었다. 다만, 이 행위는 히데요시 유언 중 하나인 "패거리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고의로 어긴 행위이기도 했다.
덧붙여, 처음으로 공공연하게 히데요시 유명을 어기려고 한 것은 고요제이 천황으로, 히데요시가 사망한 직후인 10월에 히데요시 유언인 료닌 친왕이 아닌, 동생인 도모히토 친왕에게 양위하기를 희망한다는 뜻을 전했다. 이에야스와 전 좌대신 고노에 노부타다는 고요제이 뜻을 존중하려 했지만, 전 관백 구조 가네타카를 비롯한 섭가는
3. 2. 동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총대장으로 하고, 후쿠시마 마사노리, 구로다 나가마사 등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도쿠가와 관저로 모여든 주요 다이묘
다음해 윤달 3월 마에다 도시이에가 사망하자, 무단파의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구로다 나가마사, 이케다 데루마사, 호소카와 다다오키, 가토 요시아키라, 아사노 요시나가 등 7명이 관료파의 우두머리격인 오봉행의 이시다 미쓰나리를 습격하였다.[250]
1600년(게이초 5년), 우에스기씨의 옛 가신 후지다 노부요시(藤田信吉)의 출분(出奔)[256]을 계기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가게카쓰에 대해 군비 증강을 비난하며 교토로 올라와 해명하라고 경고하였다. 나오에 가네쓰구는 이에야스의 경고를 무시하였고, 오히려 나오에 장을 발표하여 이에야스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고 결국 이에야스를 총대장으로 하여 도요토미 측 다이묘가 다수 참가한 도요토미군은 아이즈 정벌을 개시하였다.
이시다 미쓰나리는 오타니 요시쓰구등과 모의하여 서군을 조직하고 여러 다이묘의 처자식을 인질로 삼아 거병하였다. 인질 중에 호소카와 다다오키의 아내였던 호소카와 가라샤는 이시다 측의 인질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가신의 창에 스스로 뛰어들어 죽었다.
이에야스는 후시미성에 남겨둔 신하 도리이 모토타다(鳥居元忠)의 보고를 시모쓰케국(下野国일본어) 오야마(小山)에 이르러 접하고는 즉시 행군을 중지하고 따르던 다이묘들에게 이후의 동향을 물었다. 대부분은 그대로 이에야스를 따르기로 결정하고 군을 되돌려 서쪽으로 향하였다.
7월 11일 미쓰나리는 동군에 가담할 예정이던 친구 오타니 요시쓰구에게 ‘이에야스 타도’를 밝히고 신의 진영에 끌어들였다.
7월 17일 결국 미쓰나리는 거병을 선언하고 다음날 이에야스의 가신인 도리이 모토타다가 지키던 후시미성에 진격했다. 7월 19일부터 시작된 공성전에서 우키다 히데이에, 시마즈 요시히로 등의 맹공에 맞서 분전하였으나 결국 8월 1일 성을 잃고 말았다(후시미성 전투).
한편 동군은 에도에서 머물던 이에야스를 제외하고 도카이도(東海道)를 따라 서쪽으로 진군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 이케다 데루마사가 선봉에 선 동군은 8월 22일 기소가와(木曽川)를 건너 서군과 격돌, 이를 격파하고 진군을 계속해 다음날 기후성을 함락했다.
이에야스의 3남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약 3만 8천의 병력을 이끌고 나카센도(中山道)를 따라 전진했으나, 도중에 사나다 마사유키가 지키던 우에다성을 공략했다가 발목을 잡혀 세키가하라 전투에는 참전하지 못했다. 이에야스는 결전 전날인 9월 14일, 아카사카(赤坂)의 오카야마(岡山)에 본진을 세웠다.
9월 15일 동서 양군은 세키가하라에 집결했다. 동군 82,000명, 서군 104,000명, 도합 18만이 넘는 병력이 좁은 세키가하라의 분지에 집결했다고 한다.[260]
세키가하라 전투 참가자는 아래와 같으며, 예상 병력 규모(만 명 단위)를 나타낸다.
○ =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가한 주요 다이묘
아래는 세키가하라 전투로 이어지는 사건의 연대기이다.
- 6월 8일 – 이에야스는 동맹에게 우에스기를 벌하라고 요청한다.
- 7월 12일 – 이에야스는 오사카에서 호소카와 타다오키, 다테 마사무네, 모가미 요시아키, 사타케 요시노부, 난부 토시나오가 참석한 가운데 우에스기를 벌하는 계획을 세우기 위한 회의를 연다.
- 7월 26일 – 이에야스는 도리이 모토타다와 만난 후 후시미 성을 떠난다.
- 8월 29일 – 이에야스는 전략을 동맹들과 논의하기 위해 오야마에 본부를 둔다.
- 9월 10일 – 이에야스는 오야마에서 에도 성으로 돌아간다.
- 10월 7일 – 이에야스는 도카이도를 향해 30,000명의 병력과 함께 에도를 떠난다.
동군은 도카이도・기나이 이서의 도요토미 은고 다이묘와, 군감(눈치)으로서 이이 나오마사, 혼다 타다카츠가 선발대로서 도카이도를 올라오고 있었다. 이이 나오마사는 3,600 정도의 군세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출진 전에 병으로 쓰러져, 혼다 타다카츠가 임시로 그를 대신했기 때문에, 타다카츠대는 코쇼(시동)・아시가루 등 500 정도의 군세였다 (후방 지원이나 병량 등의 문제로 임시로 조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남겨진 혼다가의 본대 2,500의 군세는 나중에 타다마사와 함께 히데타다대에 배속되었다. 또한, 병이 나은 나오마사도 뒤를 쫓고 있다). 도쿠가와 가문의 다이묘급은 거의, 나카센도 방면군이 된 히데타다대에 배속되어, 훗날, 도카이도를 올라온 이에야스 본대 38,000의 군세의 구성은 하타모토가 많이 차지했다.
; 도카이도 본대 (이에야스대)
; 도카이도 별동대 (오가키성 포위・주변 성채 공략)
; 도카이도 수비대
; 나카센도대 (히데타다대)
도쿠가와 가문의 다이묘 클래스의 대부분 (이것은 히데타다대가 당초에는 우에스기, 후에 나카센도 제압을 임무로 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과 시나노의 다이묘가 이 대에 속해 있다.
; 대 우에스기・사타케 수비대
; 야마가타성 수비대
; 에도성 류스이
; 후시미성 수비대
; 오쓰성 수비대
- '''교고쿠 타카쓰구'''
; 재국
- 오우: 다테 마사무네, 난부 토시나오, 아키타 사키, 토자와 마사모리, 로쿠고 마사노리, 니카호 아게토모
- 에치고: 미조구치 히데카쓰, 무라카미 요시아키, 호리 히데하루, 호리 치카요시, 호리 나오요리, 시바타 캇젠, 콘도 시게카쓰
- 호쿠리쿠: 마에다 토시나가, 히지카타 오쿠히사
- 시나노: 모리 타다마사, 교고쿠 타카히로, 이시카와 야스나가
- 이세: 구키 모리타카, 토미타 노부타카, 후쿠시마 마사요리, 야마오카 카게토모, 후루타 시게카쓰, 와케베 미쓰요시
- 기나이: 기노시타 노부토시, 쿠와야마 시게하루
- 산인: 호소카와 유사이
- 규슈: 구로다 나가마사, 가토 기요마사, 아리마 하루노부, 이토 스케치카, 마쓰우라 시게노부, 오무라 요시사키
- 히타치: 사타케 요시시게, 사타케 요시히사
'''6월 18일''', 후시미를 출발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7월 1일''' 에 에도에 도착했으며, '''7월 7일''' 에는 모가미 요시아키·아키타 사네스에 등 도호쿠의 여러 다이묘들에게 아이즈 공격에 관한 지시를 내림과 동시에, 7월 21일 (히데타다는 19일)에 출진할 것을 알렸다.
3. 3. 배신 및 중립 세력
도요토미 정권 내부에는 임진왜란에 참여한 '무단파'와 행정, 경제 등 전투 외 분야에서 활약한 '이료파'[249]의 대립이 있었다. 1591년 히데나가가 사망하고, 임진왜란으로 양 파벌의 대립은 심화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대로와 오봉행 제도를 만들어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복종할 것을 맹세시켰으나, 1598년 사망 이후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이묘 간 결혼과 영토 분배로 영향력을 강화했고, 마에다 도시이에가 경고했다.후시미(도쿠가와군)와 오사카(마에다군) 간 갈등은 서약서 교환으로 충돌을 피했지만, 도요토미 가문 내부는 분열되기 시작했다.
;도쿠가와 관저로 모여든 주요 다이묘
- 가토 기요마사
- 후쿠시마 마사노리
- 구로다 요시타카와 나가마사 부자
- 이케다 데루마사
- 호소카와 다다오키
- 하치스카 이에마사
- 가토 요시아키라
- 도도 다카토라
- 아사노 나가마사와 요시나가 부자
- 야마우치 가즈토요
- 아리마 노리요리와 도요우지 부자
- 교고쿠 다카쓰구와 다카토모 형제
- 와키자카 야스하루
- 다테 마사무네
- 신조 나오요리와 신조 나오타다 형제
- 오타니 요시쓰구
- 모리 다다마사
- 호리 히데하루
- 가나모리 나가치카
- 모가미 요시아키
- 다나카 요시마사 등.
;마에다 관저에 모여든 주요 다이묘
- 모리 데루모토
- 우에스기 가게카쓰
- 우키타 히데이에
- 오다 히데노부
- 오다 히데카쓰
- 마시타 나가모리
- 나쓰카 마사이에
- 마에다 겐이
- 사타케 요시노부
- 고니시 유키나가
- 조소카베 모리치카
- 다치바나 무네시게
- 나베시마 나오시게
- 아리마 하루노부
- 마쓰라 시게노부
다음해 윤달 3월 도시이에 사망 후, 가토 기요마사 등 7명[250]이 이시다 미쓰나리를 습격했다. 미쓰나리는 이에야스 중개로 봉행직 해임 후 사와야마 성으로 은거했다[251]. 이에야스는 후시미성에서 오사카성으로 들어가 정무를 지휘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 여러 다이묘들이 동군과 서군 사이에서 중립, 배신, 내응 등 다양한 태도를 보였다.
; 내응군
본전 개전 시에는 서군에 속했지만, 사전에 동군과 내통하여 서군의 행동을 방해한 무장.
; 적극적 반응군
본전 개전 시에는 서군에 속했지만, 사전에 동군과 내통하여 적극적으로 싸움에 참가한 무장.
-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 * 오쿠다이라 사다하루 (이에야스에 의해 히데아키의 군감으로 붙어 있었다.)
- * 히라오카 요리카츠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가신)
- * 이나바 마사나리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가신)
- 와키자카 야스하루
; 소극적 반응군 (고바야카와・와키자카의 움직임에 연쇄하여 반응)
본전 개전 시에는 서군에 속했지만, 사전에 동군과 내통하고 있던 자의 동향에 호응하는 형태로 동군에 붙어 적극적으로 싸움에 참가한 무장.
;중립 세력
;기타
- 자금 원조・첩보 활동 등
- * 나베시마 나오시게 (아들인 가쓰시게는 당초 서군에 속했으나, 동군의 승리를 예견하고 오와리 방면의 곡물을 사들여 위로금 명목으로 이에야스 군에 제공)
- * 하세가와 모리토모 (서군에 속해 사와야마 성을 경호. 내통설도 있으며 본 전투 후의 사와야마성 전투에서는 성을 공격해 온 고바야카와 군에 전향)
- * 야규 무네노리 (동군에 가담. 야마토에서 첩보 활동)
- 전선 이탈
- * 야마카와 아사노부 (당초 동군에 소속. 나카센도대에 참가했으나 사타케 요시시게의 움직임에 호응하여 무단으로 이탈하여 거성으로 돌아감. 전후 개역)
- * 기노시타 가쓰토시 (당초 동군에 소속. 후시미 성 수비대를 맡았으나 도망. 전후 개역)
- * 마쓰노 시게모토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가신. 서군에 소속. 히데아키의 동군에 대한 반항 방침에 반발하여 전선 이탈)
- 병, 요양으로 불참
- * 나카무라 가즈우지 (산추로, 슨푸에서 병상에 있어 결전 직전에 병사. 동생인 이치에이와 아들인 가즈타다는 동군에 참가)
- * 호리오 요시하루 (산추로, 결전 직전에 미카와지류슈쿠에서 가카이 시게모치에게 습격당해 부상당하여 요양 중. 아들인 다다우지는 동군에 참가)
- * 이토 스케토모 (오사카에서 병상에 있어 요양 중. 아들인 스케요시는 동군에 참가)
- 기타 불참
- * 이코마 지카마사 (산추로, 병을 핑계로 본 전투에 불참. 아들인 가즈마사는 동군에 참가)
- * 하치스카 이에마사 (가신을 오사카에 파견하고 자신은 삭발하여 고야산에 오름. 아들인 시게자네는 동군에 참가)
- * 히네노 히로나리 (본 전투 중에는 움직임이 없었으나 후에 서군 내통 혐의를 받음. 전후 감봉)
- 거취 불명
- * 오다 노부오 (서군에 속했다는 설과 중립설이 있음)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 이유는, 히데아키 자신이 진상을 말하지 않고 전투 2년 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명확하지 않다. 여러 설 중 하나는, 어린 히데아키의 친부모 역할을 했던 히데요시의 정실 기타노만도코로가 동군 지지였던 반면, 기타노만도코로와 대립했던 히데요시의 측실 요도도노가 서군 지지였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동군으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기타노만도코로의 동향이 반드시 동군 지지라고 할 수 없으며, 요도도노와의 대립도 확증된 설은 아니다.
또한, 이시다 미쓰나리에 대한 반감을 원인으로 하는 설도 있다. 게이초의 역 말기에 이루어진 울산성 전투 당시, 부산에서 울산으로 달려가 전투에 참여한 히데아키의 행동을, 미쓰나리가 히데요시에게 참언했다. 그 결과 히데아키는 벌로 에치젠으로 전봉될 뻔했으나, 이에야스의 중재로 면하게 된다. 이후 히데아키는 미쓰나리를 증오하는 한편 이에야스에게 마음을 기울이게 되었고, 그것이 배신으로 이어졌다는 설이다. 이 설은 1672년에 성립된 "조선 이야기"에 실린 일화를 전거로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히데아키의 울산 전투 참가를 뒷받침하는 1차 사료는 확인되지 않으며, 또한 에치젠 전봉도 실행되었던 등 일화의 내용은 사실과 크게 다르다.
어쨌든, 히데아키에 대한 동군 측의 권유는 8월 28일 이전부터 행해졌음이 판명되었으며, 그러한 공작의 결과, 고바야카와 가문 내에서는 전투 시작 전부터 배신이 결정되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4. 전투의 진행
1600년(게이초 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요토미 정권 내부의 정쟁이 격화되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하는 동군과 이시다 미쓰나리를 중심으로 하는 서군이 대립하게 되었다. 이 전역은 세키가하라 전투를 포함하여 각지에서 벌어진 전투를 통칭한다.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가게카쓰의 군비 증강을 빌미로 아이즈 정벌을 시작했고, 동시에 마에다 도시나가의 모반 혐의를 들어 정벌하려 했다. 이에 도시나가는 어머니 호슈인을 인질로 바쳐 복종 의사를 표명했다. 한편, 실각한 이시다 미쓰나리는 오타니 요시쓰구 등과 함께 모리 데루모토를 옹립하여 서군을 결성하고 거병했다.
이에야스는 시모쓰케국 오야마에서 도리이 모토타다의 보고를 받고 진군을 멈췄고, 대부분의 다이묘들은 이에야스를 따르기로 결정하고 서쪽으로 향했다.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나카센도 방면으로 진군했으나, 우에다성에서 사나다 마사유키에게 발목이 잡혀 본 전투에는 참전하지 못했다.
7월, 미쓰나리는 거병을 선언하고 후시미성을 공격했다. 도리이 모토타다는 분전했으나 결국 성은 함락되었다(후시미성 전투). 이후 서군은 단고국의 다나베성, 이세국의 아노쓰성 등을 공략했다. 동군은 도카이도를 따라 서쪽으로 진군하여 기소가와를 건너 서군을 격파하고 기후성을 함락시켰다.
9월 14일 밤, 이시다 미쓰나리는 세키가하라로 진격했고, 9월 15일 동서 양군은 세키가하라에 집결했다.
4. 1. 전초전
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군비를 증강하는 것을 비난하며 교토로 올라와 해명하라고 경고했다. 가게카쓰의 중신 나오에 가네쓰구는 나오에 장을 발표하여 이에야스의 경고를 무시했고, 이에 도요토미군은 아이즈 정벌을 시작했다.[256]이에야스는 마에다 도시나가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암살 계획의 주모자로 지목된 것을 알고, 아사노 나가마사 등에게 칩거를 명령하고 도시나가에게 모반 혐의를 씌워 정벌 계획을 세웠다. 도시나가는 호슈인을 인질로 바쳐 복종 의사를 표명하여 마에다 가문의 지위를 보전했다.
실각한 이시다 미쓰나리는 오타니 요시쓰구, 마시다 나가모리, 안코쿠지 에케이 등과 모의하여 모리 데루모토를 옹립하고 서군을 조직하여 거병했다. 호소카와 다다오키의 아내 호소카와 가라샤는 인질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죽음을 택했다.
이에야스는 도리이 모토타다의 보고를 시모쓰케국 오야마에서 받고 행군을 중지하고 다이묘들에게 동향을 물었다. 사나다 마사유키 등은 이에야스 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이에야스를 따르기로 하고 서쪽으로 향했다.
이에야스의 아이즈 정벌은 이시다 미쓰나리를 거병시키기 위한 책략이라는 견해도 있다. 도리이 모토타다는 미쓰나리를 공격하기 위한 구실을 만들기 위해 죽음을 맞이하는 임무를 맡았다는 것이다.
7월 1일 우키타 히데이에가 도요쿠니 신사에서 출정식을 치렀고, 기타노만도코로는 히가시도노노 쓰보네를 대신 참석하게 했다.[257] 7월 11일 미쓰나리는 오타니 요시쓰구에게 '이에야스 타도'를 밝히고 서군에 끌어들였다.
사나다 마사유키가 미쓰나리의 협력 요청에 대해 "어째서 사전에 알려주지 않았는가!"라고 적은 편지로 보아, 미쓰나리는 히데이에의 궐기에 이끌려 전투 준비가 졸속적으로 이루어졌고, 사타케 요시노부, 쓰가루 다메노부 등은 서군에 참가하지 못했다.
7월 12일 미쓰나리는 사와야마성에서 오타니 요시쓰구, 마시다 나가모리, 안코쿠지 에케이와 비밀 회동을 갖고 모리 데루모토를 서군 총대장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같은 날 아이치가와에 관소[258]를 설치하여 조소카베 모리치카, 나베시마 가쓰시게 등이 서군에 참가할 수밖에 없었다.
7월 17일 미쓰나리는 거병을 선언하고 7월 19일부터 후시미성을 공격했다. 우키다 히데이에, 시마즈 요시히로 등의 맹공에 도리이 모토타다는 분전했으나 8월 1일 성을 잃었다(후시미성 전투). 이후 단고국의 다나베성, 이세국의 아노쓰성, 마쓰자카성 등을 공략하여 8월 안에 함락시켰다. 미쓰나리는 8월 10일 오가키성으로 들어갔다.
동군은 도카이도를 따라 서쪽으로 진군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 이케다 데루마사가 선봉에 선 동군은 8월 22일 기소가와를 건너 서군과 격돌하여 격파하고, 8월 23일 오다 히데노부가 성주로 있던 기후성을 함락했다. 이에야스는 도도 다카토라, 구로다 나가마사 등을 사자로 삼아 서군을 내부로부터 무너뜨리려 하였다.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나카센도를 따라 전진했으나, 사나다 마사유키가 지키던 우에다성을 공략하다 발목을 잡혀 세키가하라 전투에는 참전하지 못했다. 이에야스는 9월 14일 아카사카 오카야마에 본진을 세웠다. 미쓰나리는 시마 기요오키의 진언에 따라 구이세가와 전투에서 동군의 일부를 격파했다.
9월 14일 밤, 이시다 미쓰나리는 세키가하라로 진격했다.
4. 2. 세키가하라 본전 (1600년 10월 21일)
9월 15일, 동군과 서군은 세키가하라에 집결했다. 동군은 82,000명, 서군은 104,000명으로, 총 18만 명이 넘는 병력이 좁은 분지에 모였다.[260]메이지 시대에 군사 고문으로 일본을 방문했던 독일의 클레멘스 메켈 소령은 세키가하라에서 양군의 배치를 보고 서군의 승리를 예상했다. 서군은 이시다 미쓰나리가 있던 사사오 산, 우키타 히데이에가 있던 덴만 산,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있던 마쓰오 산, 모리 히데모토가 있던 난구 산을 연결하는 전선으로 동군을 둘러싼 학익진을 펼쳐 지형적 이점을 확보하고 있었다. 반면 동군은 골짜기에 갇혀 움직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서군은 승리를 자신했다. 하지만 동군 역시 서군 다이묘들 간의 불화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승리를 장담했다. 오타니 요시쓰구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이시다 미쓰나리 대신 모리 데루모토를 총대장으로 옹립하려 했으나, 결과적으로 큰 효과는 없었다.
세키가하라는 이른 아침부터 짙은 안개가 끼어 주변 아군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선봉 약속을 받고 개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짙은 안개 속에서 양군은 2시간 정도 대치했다. 안개가 걷힐 무렵, 마쓰다이라 타다요시의 소부대와 이이 나오마사가 후쿠시마 부대 옆을 지나갔다.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이들을 저지하고 이유를 묻자, "정찰"이라고 답하며 후쿠시마 부대 앞으로 나아갔다. 마쓰다이라 타다요시의 소부대는 갑자기 서군의 주력인 우키타 히데이에 부대를 향해 발포했고, 세키가하라 전투가 시작되었다.
우키타 히데이에 부대는 즉시 반격했고, 세키가하라는 순식간에 격전지가 되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 부대 6,000명과 우키타 히데이에 부대 17,000명은 치열하게 싸웠고, 구로다 나가마사 부대 5,400명, 호소카와 다다오키 부대 5,100명 등은 일제히 이시다 미쓰나리를 공격했다. 이시다 미쓰나리 부대도 시마 기요오키와 가모 사토이에의 분전으로 적을 격퇴했다. 서군의 오타니 요시쓰구는 동군의 도도 다카토라와 맞붙었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등에게 배신을 약속받았고, 서군 다이묘들 간의 불화, 특히 이시다 미쓰나리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에 계속되는 패배에도 승리를 확신했다.
이시다 미쓰나리는 전투 시작 2시간 후, 아직 참전하지 않은 무장들에게 전투 참여를 촉구하는 봉화를 올렸다. 시마즈 요시히로 부대에도 지원 요청을 보냈다. 당시 서군 총병력 중 전투를 벌이던 병력은 35,000명에 불과했기에, 마쓰오 산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부대와 난구 산의 모리 히데모토 부대가 동군의 측면과 배후를 공격한다면 서군의 승리는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시마즈 요시히로는 지원 요청을 거부했다. 모리 히데모토는 깃카와 히로이에에게 막혀 참전하지 못했다. 깃카와 히로이에는 모리 가문의 영지 보장을 조건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내통하고 있었다. 정오가 지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부대가 움직이지 않자 마쓰오 산을 향해 위협 사격을 명령했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독촉을 받고 마쓰오 산을 내려갔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부대는 오타니 요시쓰구 부대 우익을 공격했다. 오타니 요시쓰구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을 예측하고 직속 부대 500명으로 맞서 싸워 15,600명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군을 300미터 정도 후퇴시켰다. 이때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군 무장 마쓰노 시게모토는 방관했다. 도도 다카토라 등의 배신으로 와키자카 야스하루, 오가와 스게타다, 아카자 나오야스, 구쓰키 모토쓰나 등 서군 부대도 동군으로 돌아섰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행주 대첩에서 이시다 미쓰나리의 무능함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신뢰할 수 없었다. 예측하지 못했던 4개 부대의 배신으로 전투는 동군의 압도적인 우세로 변했다. 서군은 학익진을 펼치고 동군을 가두었지만, 날개 부분의 무장들이 배신하거나 방관하여 전투는 서군 내분과 동군의 공격으로 역전되었고, 시마즈 요시히로와 모리 데루모토 등 중요 역할을 해야 할 다이묘들이 엉뚱한 행동을 하여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서군이 자멸하는 가운데 시마즈 요시히로 부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본진을 통과하며 철수하는 "전진철수"[261]를 시작했다. 이이 나오마사와 마쓰다이라 다다요시는 저격당해 부상당했고, 혼다 다다카쓰는 말이 총에 맞아 낙마했다. 시마즈 요시히로 부대는 시마즈 도요히사와 아다 모리아쓰[262]의 희생으로 약 80기 정도만 살아남아 철수했다. 아다 모리아쓰는 시마즈 요시히로 대신 진바오리[263]를 입고 "효고두[264], 무운이 다하여 여기서 최후를 맞이하겠다"라며 할복했다고 전해진다. 다른 서군 부대는 괴멸하여 패주했다.
5. 전투의 결과 및 영향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요토미 정권 내부의 정쟁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한 동군과 모리 데루모토를 중심으로 한 서군 간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세키가하라 전투를 포함한 각지에서 전투를 벌였다.
전투 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강력한 권력을 획득했고, 히데요시 사후 도요토미 정권을 구성하던 오대로・고부교 체제는 붕괴되었다. 이에야스의 권력 장악은 도쿠가와 씨를 중심으로 하는 에도 막부의 성립으로 이어졌고, 막번 체제 확립의 길이 열렸다.
세키가하라 전투 당일, 동군의 대승으로 전투가 끝난 후, 이에야스는 오타니 요시쓰구의 진이 있던 야마나카무라로 진을 옮겨 휴식을 취했다. 다음 날인 9월 16일에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 배신자들에게 이시다 미쓰나리의 본거지인 '''사와야마성 공략'''의 선봉을 명령했다. 다나카 요시마사와 군감 이이 나오마사를 더해 2만 명이 넘는 대군으로 오우미 토리이모토로 진군했다. 이에야스는 히라타산에 진을 쳐 공격을 명령했다.
사와야마성에는 이시다 마사즈미를 주장으로 이시다 마사츠구, 이시다 시게이에, 하세가와 모리토모 등 2,800명의 병사가 수비하고 있었다. 6배 이상의 병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츠다 세이유 등의 분전으로 히데아키 등의 공격을 막아냈다. 마사즈미는 이에야스의 옛 신하였던 세이유를 통해 굴복 교섭을 시작했고, 마사즈미의 자결과 개성(開城) 조건으로 일족, 성병, 부녀자를 살려준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9월 17일, 하세가와 모리토모가 배신하여 동군 병사를 끌어들여 삼의 문이 함락되자, 다음 날인 18일 이른 아침에 다나카 요시마사대가 천수각으로 쳐들어가 함락시켰다. 마사즈미 등 미쓰나리의 일족은 자결하여 멸망했다. 세이유는 이에야스에게 위약(違約)을 추궁하여 미쓰나리의 셋째 아들 사키치를 비롯한 생존자들을 살려주었다. 아카마츠 노리히데는 도망 후 후쿠시마 마사노리에게 투항했지만, 후에 할복을 명받았다. 시게에는 탈출하여 교토 묘신사에 들어가 후에 살려져 출가했다.
세키가하라 본전 직전까지 서군의 전선 사령부였던 '''오가키성'''에는 후쿠하라 나가타카, 카키미 카즈나오, 쿠마가이 나오모리, 키무라 요시노부・토요노리 부자 등이 수비 책임을 맡고 있었다. 동군은 마쓰다이라 야스나가, 호리오 타다우지, 나카무라 가즈타다, 미즈노 가쓰나리, 쓰가루 다메노부 등이 포위하고 있었다. 서군 패배 소식에 성 안에는 동요가 퍼졌지만, 사가라 요리후사는 이누도 요리이에의 조언으로 아키즈키 타네나가・다카하시 모토타네와 상담 후, 이이 나오마사를 통해 이에야스에게 내응(內應)을 연락했다. 이에야스는 즉시 오가키성 개성을 요리후사 등에게 명령했지만, 나가타카 등은 높은 전의를 보였다. 요리후사・타네나가・모토타네는 9월 17일경 군의(軍議)를 가장하여 농성 중인 장수들을 불러내어 카키미・쿠마가이・키무라 부자를 암살하고 이의 문을 제압했다. 나가타카는 본성에서 요리후사 등을 요격했지만, 니시오 미츠노리의 설득으로 9월 23일 성을 넘겨주고 이세 아사쿠마 산으로 은거했다. 이에야스는 나가타카에게 할복을 명했고, 나가타카는 9월 28일 자결했다. 내응한 세 장수는 영지를 안도받았다.
'''이세'''・'''시마・이가・도키슈''' 방면에서도 서군 패배 소식에 많은 성주가 항복・개성(開城)했다.
9월 16일, 이세 가메야마성이 개성(開城)했고, 성주 오카모토 료쇼는 자결을 명받았다. 적자・시게요시도 오우미 미나쿠치에서 자결했다. '''구와나성'''도 같은 날 개성(開城)했고, 우지이에 유키히로・유키쓰구 형제는 야마오카 도아미에게 성을 넘겨주고 개역되었다. '''나가시마성'''을 포위하고 있던 하라 나가요리는 도주했지만 체포되었다. 이세 '''미노코마노성''' 성에 농성하고 있던 이케다 히데우지와, '''이가 우에노성'''을 점거하고 있던 신조 나오라・나오사다는 성을 포기하고 퇴각했다.
8월 하순의 아노쓰성 공격에 참가했던 나베시마 가쓰시게는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명으로 서군을 이탈하여 이세・미노 국경 부근에서 방관했지만, 서군 패주 소식을 접하자 오사카로 퇴각, 후 후시미성으로 가서 이에야스에게 사죄했다.
시마도바성주 구키 모리타카는 이에야스를 따라 종군했지만, 구키 요시타카가 성을 탈취, 수군을 이끌고 이세만 해상 봉쇄를 하여 동군 원군을 막아 서군의 초반 우위에 기여했다. 요시타카는 히데요시의 구신(舊臣)이었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소식이 도착하자, 이세 도바시마로 도주했다. 모리타카는 아버지의 목숨을 살려줄 것을 간청했고, 이에야스는 이세 남부 5군을 반납하는 조건으로 허락했다. 그러나 요시타카는 소식이 도착하기 직전에 자결했다.
호리우치 우지요시는 기이신구성에 농성했지만, 10월에는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
이에야스는 서군의 주모자로서 도망친 이시다 미쓰나리, 우키타 히데이에, 시마즈 요시히로 등의 체포를 엄명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구로다 나가마사에게 모리 데루모토와의 개성 교섭을 명했다. 이에야스는 오미하치만의 히무레 하치만궁에서 승전을 기원한 후, 9월 20일에 교고쿠 다카쓰구의 거성인 오쓰성에 입성하여 잠시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마에다 도시나가가 서군에 속했던 니와 나가시게와 아오키 가즈노리의 적자 아오키 도시키를 데리고 합류했다. 이에야스는 두 사람의 간청을 물리치고 개역 처분했다.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합류했지만, 사나다 마사유키가 농성하는 우에다성 공격 도중 상락하라는 명령을 받아 본전에 참가하지 못하고 군열이 흐트러진 것을 이에야스는 질책했다.
9월 19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다케나카 시게카도의 병사들에게 붙잡혀 이에야스 본진으로 호송되었다. 9월 21일, 이시다 미쓰나리가 오미국 이카군 고하시 촌(후의 다카토키 촌)에서 다나카 요시마사의 병사들에게 체포되었다. 체포된 장소는 미쓰나리의 영내였으며, 농민들이 처벌을 각오하고 은신시켰다. 미쓰나리는 발각된 것을 알고 요시마사의 병사들에게 신분을 밝히고 체포되었다. 9월 22일, 오쓰로 보내져 동군 제장들과 재회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미쓰나리에게 욕설을 퍼부었고, 구로다 나가마사와 아사노 유키나가는 위로의 말을 건넸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미쓰나리에게 배신을 심하게 추궁당했다고 전해진다. 9월 23일, 안코쿠지 에케이가 오쿠다이라 노부마사의 병사에게 붙잡혀 오쓰로 호송되었다. 세 명은 9월 26일에 이에야스가 오쓰성에서 요도성으로 이동할 때 오사카로 호송되었다. 나가쓰카 마사이에는 이케다 데루마사, 나가요시 형제와 이나바 사다미치에게 공격받아 9월 30일에 개성했다. 호소카와 다다오키는 오노기 시게카쓰가 거점으로 삼고 있는 단바 후쿠치야마성 공격으로 향했다. 단바 가메야마성에서 아버지와 재회하고, 타니 모리토모, 벳쇼 요시하루 등을 거느리고 9월 23일부터 공격을 시작했다. 시게카쓰는 철저 항전했지만, 이이 나오마사와 야마오카 가게요리의 설득으로 개성, 성 아래의 절로 근신했다.
이에야스는 요도성을 거쳐 9월 27일에 오사카성에 입성.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요도도노와 회견한 후, 모리 데루모토 퇴거 후의 오사카성 니시노마루로 들어가, 이이 나오마사, 혼다 다다카쓰,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등에게 논공행상 조사를 시작한다. 9월 30일, 우에스기 가게카쓰 아래로 서군 패전 소식이 전해져, 나가사도성에 있던 나오에 가네쓰구는 철수를 시작했다.
10월 15일 이후, 논공행상이 발표되었다. 유키 히데야스의 을 필두로, 도요토미 은고의 다이묘들은 높은 녹봉으로 가증되었다. 그러나 모두 서국을 중심으로 원국으로 전봉되었으며, 교토, 오사카 및 도카이도는 이에야스의 아들들과 도쿠가와 후다이 다이묘로 채워졌다. 자세한 내용은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후 처리를 참조할 것.
도요토미 씨의 구라이지가 폐지되어, 각각의 다이묘 영지로 편입된 것으로, 도요토미 직할령은 개전 전의 에서 셋쓰, 가와치, 이즈미 여 석으로 사실상 감봉되었다. 이에야스는 자신의 영지를 에서 으로 증가시켰으며, 교토, 사카이, 나가사키를 비롯한 대도시와 사도 금산, 이와미 은산, 이쿠노 은산과 같은 도요토미 가문의 재정 기반을 영지로 삼았다. 도요토미 은고의 다이묘가 이에야스의 논공행상에 의해 가증된 것은, 그들이 도요토미 가문의 직신에서 떨어져 나가 독립한 다이묘 가문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이로 인해 도쿠가와 가문에 의한 권력 장악이 확고해지고, 도쿠가와와 도요토미의 세력이 역전된다.
다만, 과거에는 이 논공행상으로 도요토미 가문이 일개 다이묘의 지위로 몰락했다고 하는 학설이 일반적이었지만, 도요토미 가문이 여전히 특별한 지위를 유지하고, 도쿠가와의 지배하에는 편입되지 않았다고 하는 설[206][207]이 현재에는 일반적이다.
10월 1일, 이시다 미쓰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안코쿠지 에케이 3명 및 하라 나가요리[208]는 교토 로쿠조가와라에서 참수되었다. 목은 산조 대교에 내걸렸다. 10월 3일에는 나가쓰카 마사이에와 동생 나오요시가 할복하고, 산조 대교에 목을 내걸었다. 오노기 시게카쓰는 호소카와 다다오키의 주장으로 10월 18일에 단바 후쿠치야마 조도지에서 자결했다. 아카마쓰 노리에, 가키야 쓰네후사 등이 이 10월에 자결을 명받았다. 마스다 나가모리와 마에다 겐이에 대해서는, 나가모리는 사형에서 감형되어 무사시 이와쓰키에 유배, 겐이는 소령의 단바 가메야마를 안도받는 처분이 내려졌다. 우키타 히데이에는 사쓰마국으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모리 데루모토는 깃카와 히로이에 등 모리 일족, 후쿠하라 히로토시 등 모리 가신단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군 총대장으로 취임했지만, 세키가하라 전투 패배 후에도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옹립하여 오사카성에 있었다. 모리 히데모토나 다치바나 무네시게, 시마즈 요시히로 등은 철저 항전을 주장했고, 히데요리의 명을 칭하여 농성 항전이 이루어질 가능성도 남아 있었다.
오사카에는 무사히 귀환한 모리 세력이나, 본전에 참가하지 않은 군세도 다수 존재했다. 이에야스는 데루모토가 히데요리를 받들어 저항을 계속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데루모토를 성에서 퇴거시킬 필요에 놓였다.
이에야스는 데루모토에게 9월 17일에 양자의 좋은 관계를 바란다는 서신을 보내 퇴거를 촉구했다. 오노 하루나가를 오사카 성에 보내, 히데요리와 요도도노가 이번 싸움과 관계가 없다고 설득했다. 요도도노는 답례 편지를 보냈다.
세키가하라 전투 본전에서 공이 있는 깃카와 히로이에가 "데루모토의 서군 총대장 취임은 본인의 관여 없는 일이다"라고 설득하여, 이에야스는 그 설명에 납득했다고 답변한다. 데루모토는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구로다 나가마사의 개성 요구에 응한다. 후쿠시마 · 구로다에 더해, 이에야스의 가신인 혼다 다다카쓰와 이이 나오마사가 영지 안도의 의향을 보장하는 기청문을 데루모토에게 전달하고, 9월 25일에 데루모토는 오사카성 서쪽의 마루를 퇴거했다. 퇴거 후, 데루모토가 교토 부근의 기즈 저택에 틀어박혀 있었을 무렵, "데루모토라고 이름은 있지만, 비가 내려 모리(털이)가 썩어 안(安)에서 벗어나 버렸다."라고 조롱하는 낙수가 적힌 고찰이 세워졌다고 한다.
9월 27일, 이에야스는 오사카 성에 입성하여 히데요리를 배알하고, 서쪽의 마루를 되찾아 히데타다를 니노마루에 들였다. 10월 2일, 이에야스는 구로다 나가마사를 통해 히로이에에게, 실제로는 데루모토가 서군 총대장으로서 활동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발각되었기 때문에, 히로이에의 설명은 사실이 아니었음이 분명해졌고, "모리씨는 개역하고, 영지는 모두 몰수한다"라고 통고했다. 히로이에에게 스오국과 나가토국을 주어 서국의 억제를 맡기고 싶다는 뜻을 동시에 전했다.
깃카와 히로이에는 진퇴양난의 상황이 되었다. 자신에게 가증 예정인 스오 · 나가토(현재의 야마구치현)를 데루모토에게 주도록 간청하고, 모리 본가를 버리는 것보다는 자신도 동죄로 해달라, 데루모토가 불충한 마음을 품는다면 자신이 데루모토의 목을 쳐서 바치겠다, 라는 기청문까지 제출했다. 이에야스는 규슈 · 시코쿠 정세 등 불확실한 요소가 있는 이상 모리를 완전히 몰아붙이는 것은 득책이 아니므로, 깃카와 히로이에의 간청을 받아들여, 모리씨 본가 개역 결정을 철회하고, 스오 · 나가토 (현재의 야마구치현)으로의 감봉으로 하는 결정을 10월 10일에 내렸다(보초 감봉).
데루모토는 출가하여, 가독을 모리 히데나리에게 물려주고 은거했다. 데루모토는 "요즘 세상은 만사가 거꾸로 되어, 주군이 가신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꼴사나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라고 자신의 무능함을 한탄했다고 한다.
모리 영지가 아키 외 산요 · 산인 8개국()에서 보초 2개국(, 후에 고오시로 )까지 줄어든 것으로부터, 모리 본가는 깃카와씨에 대해, 남겨진 모리 영지에서 (이와쿠니령, 후에 고오시하여 )을 떼어주었지만, 제후 대우의 추거를 막부에 하지 않는 처사를 했다. 그러나, 깃카와 히로이에의 공적을 아는 막부는, 깃카와씨를 제후에 준하는 대우로 하고, 당주는 대대로 쇼군에게 배알이 허락된다는 특권을 주어, 깃카와 히로이에의 공에 보답했다.
모리씨는 막부에 본거지를 스오야마구치로 신청했지만, 막부로부터는 나가토하기로 하도록 명령받았다.
게이초 4년 (1599년) 윤3월 21일에 이에야스와 데루모토는 기청문으로, 이에야스를 형, 데루모토를 아우로 하는 의형제의 의를 맺었지만, 그것을 서군 결기로 데루모토에 의해 파기되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다치바나 무네시게와 함께 해로로 도주하여 가고시마에 도착했다. 요시히로는 사쿠라지마에서 스스로 근신했지만, 시마즈 요시히사 등 시마즈 씨 수뇌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공격을 예측하고 영내 방위 체제를 강화했다. 이에야스는 사가라 요리후사, 아키즈키 타네나가, 다카하시 모토타네에게 시마즈 정벌 준비를 하도록 명령했으며, 무력 토벌 방침을 굳혔다.
규슈에서는 세키가하라 전투가 종료된 시점에도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10월 6일에는 구로다 조스이가 부젠 고쿠라성을 공격하여 모리 가쓰노부를 항복시켰다. 가토 기요마사는 마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루노부, 오무라 요시마에와 함께 고니시 유키나가의 거성인 우토성을 공격했지만, 서군 패전 소식이 전해지면서 10월 12일에 성장 고니시 유키카게가 자결하고 개성했다. 사쓰마에서 히고로 쳐들어간 시마즈 군은 가토 시게쓰구가 지키는 사시키 성에 막혀 철수했다.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가쓰시게 부자는 지쿠고 평정을 명령받았고, 고바야카와 히데카네의 구루메성을 개성시키고, 다치바나 무네시게가 농성하는 야나가와 성을 10월 19일부터 포위했다. 나베시마 군과 다치바나 군 사이에서 격전이 벌어졌지만, 조스이, 기요마사의 설득으로 10월 25일에 무네시게는 개성, 항복한다.
무네시게 항복 후, 이에야스는 시마즈 요시히사 토벌을 규슈의 모든 다이묘에게 명령했다. 규슈 연합군은 구로다, 다치바나, 나베시마, 가토였다.
11월 22일, 요시히로가 이에야스에게 사죄 사자를 보냈기 때문에 시마즈 정벌은 중지되었고, 규슈 연합군은 철수했다. 이후 이에야스와 시마즈 씨 사이에 교섭이 이루어졌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이이 나오마사에게 중재를 의뢰했고, 나오마사는 이 요청을 수락하여 도쿠가와 측 창구로서 시마즈 요시히사, 다다쓰네와 강화 교섭을 했다. 이에야스는 요시히로의 상경 및 사죄를 요구했지만, 요시히사, 다다쓰네는 본령 안도의 확약 없이는 상경에 응할 수 없다고 거부하여 교섭은 장기화되었다. 시마즈 측은 이에야스에게, 요시히로가 후시미 성 수비를 하려 했지만, 도리이 모토타다에게 거절당했기 때문에 서군에 가담한 것이며, 적극적인 가담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2년에 걸쳐 교섭이 계속되었지만, 이에야스가 굴복하는 형태로 친필 기청문을 쓰고, 게이초 7년(1602년) 3월에 사쓰마, 오스미, 휴가 모로카타 군 여의 본령 안도가 결정되었다. 다다쓰네가 12월에 상경하여 사죄와 본령 안도의 답례를 이에야스에게 전했고, 시마즈 씨도 도쿠가와 씨의 통제 하에 들어갔다. 끈기 있는 외교로 시마즈 가는 감지되는 일 없이 본령 안도를 얻을 수 있었다. 사쓰마라는 오사카에서 멀리 떨어진 지리적 이점은 컸지만, 빠른 단계에서 이에야스에게 전면적인 항복을 한 모리 씨, 우에스기 씨가 대폭 감봉된 것과 비교하면 대조적인 결과가 되었다.
우키타 히데이에는 이에야스에게 인도되었고, 마에다 도시나가와 다다쓰네에 의한 구명 탄원에 의해 사형을 면하고 게이초 11년(1606년)에 하치조섬으로 유배되었다.
10월에 모리 씨의 처분이 결정되고, 11월에는 시마즈 씨가 사죄하면서 서군에 가담한 다이묘 중 처분이 미결정된 것은 우에스기 가게카쓰와 사타케 요시노부 2명이었다.
가게카쓰는 모가미 군과 나가사도성을 중심으로 전투를 벌였으나, 9월 30일에 서군 패주 소식이 전해지자 철수했다. 모가미 요시아키는 오우라 성 주인 시모 히데히사를 귀순시키고 쇼나이 지방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다테 마사무네도 10월 6일부터 고오리로의 침공을 시작했다. 가게카쓰는 방어전을 펼치는 한편, 가신들에게 향후 대응을 협의했다. 나오에 가네쓰구와 아마카스 가게쓰구, 다케마타 도시쓰나 등은 도쿠가와와의 항전을 주장했지만, 혼조 시게나가와 센자카 가게치카 등은 화해를 주장했다. 10월 23일에 화해 방침이 결정되었고, 가네쓰구는 주전파의 "에도로 남하해야 한다"는 의견을 물리쳤다. 교섭에는 혼다 마사노부와 친교가 깊은 센자카 가게치카와 화해를 주장한 혼조 시게나가 임명되었고, 마사노부를 비롯하여 동군의 대 우에스기 방위군 총대장인 유키 히데야스, 혼다 다다카쓰,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등에게 중재를 의뢰했다. 그들의 중재로, 처음에는 영지 몰수를 예정했던 이에야스도, 차츰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해를 넘겨 게이초 6년 (1601년) 봄, 모가미 요시야스는 사카타성의 시다 요시히데를 공격하여 항복시키고, 모가미 씨는 쇼나이 지방 일원을 탈취했다. 다테 마사무네도 후쿠시마 성을 여러 차례 공격했지만 우에스기의 수비에 막혔다.
7월 1일, 센자카·혼조 양명의 보고 등을 통해 화해가 가능하게 되자 가게카쓰는 가네쓰구와 함께 상경하여 히데요리에게 알현한 후, 8월 8일 유키 히데야스에 동반되어 후시미 성의 이에야스를 방문하여 사죄했다 (『우에스기 가문 연보』). 우에스기 씨에 대한 처분은 1개월 정도 지난 8월 16일에 내려졌고, 무쓰 아이즈 에서 75% 감봉된 데와 요네자와 (데와 오키타마 1 군 및 무쓰 다테·시노부 2 군)으로 감봉되었다. 11월 28일에 요네자와로 이동했다.
사타케 요시노부 자신은 이시다 미쓰나리와의 친교로 서군에 가담하기로 결정하고, 우에스기 가게카쓰와 밀약을 맺어, 우에스기 영내로 들어온 도쿠가와 군을 협격하는 방침을 취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우에스기 정벌에는 움직이지 않았고, 이와키 사다타카, 소마 요시타네, 다가야 시게쓰네도 이에 동조했다. 그러나 사타케 가신 중에서는 아버지인 사타케 요시시게, 동생 아시나 요시히로, 사타케 씨 가신 필두인 사타케 요시히사가 동군 도쿠가와 측에 가담할 것을 주장했다. 요시시게는 동군에 가담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요시노부는 사타케 요시히사를 나카센도 진군 중인 도쿠가와 히데타다 군에게 병사 300명과 함께 파견하는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이에야스는 마쓰다이라 노부카즈나 미즈타니 가쓰토시 등을 사타케 감시 부대로 국경에 배치했다. 히데타다도 요시히사 등 파견 부대에 대해 사절했다.
서군 패배 후, 요시시게는 즉시 이에야스에게 전승을 축하하는 사자를 보내고, 상경하여 이에야스에게 불참을 사죄했다. 그러나 요시노부는 거성인 미토성을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2년이 경과했다. 우에스기 씨, 시마즈 씨의 처분도 결정되었고, 처분이 끝나지 않은 것은 사타케 요시노부뿐이었다. 요시노부는 움직이지 않았다. 요시시게의 설득으로 게이초 7년 (1602년) 4월에 상경하여 이에야스에게 사죄했다. 이에야스는 요시노부의 관망에 대해 『간세이 중수 제씨보』에서 "우에스기 가게카쓰보다 혐오스러운 행위이다"라고 비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형은 면했지만, 히타치 1국 등 사타케 씨 세력의 은 몰수되어, 데와구보타로 으로 감전봉되었다. 이와키, 소마, 아시나, 다가야의 각 다이묘도 개역되었다. 요시노부는 약간의 가신을 데리고 구보타로 이동했지만, 전봉에 반대하여 구루마 스케타다 등이 일어났다. 사타케 씨의 석고가 확정되는 것은 2대 번주 사타케 요시타카 대에 이르러서였다.
오다 노부나가의 유복자인 오다 히데노부는 개역되어 고야산으로 추방되었다. 오다 노부카쓰도 개역되었으나 후에 용서받아 야마토국에서 다이묘가 되었다. 오다 노부카네는 서군에 속했지만, 그대로 영지를 안도받았다.
사타케 씨의 감봉이 결정되면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논공행상과 서군 제 다이묘에 대한 처벌은 종료되었다.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2위에 임명되어 에도 막부를 열었으며, 다치바나 무네시게, 니와 나가시게, 다키가와 가쓰토시 등 3명이 다이묘로 복귀했다. 소마 요시타네 등 수명이 다이묘로 복귀하는 등 다이묘가는 조금씩 복귀해 갔다. 서군에 가담한 다이묘 중에는 메이지 유신까지 존속한 곳도 많았으며, 시마즈 씨의 사쓰마 번과 모리 씨의 조슈 번은 막부 타도에 활약했다.
그러나 영지를 몰수당한 서군 가담 다이묘 및 그 가신의 대부분은 낭인이 되었다. 초소카베 모리치카, 모리 가쓰나가, 사나다 노부시게,
5. 1. 전후 처리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후 서군 측 다이묘에 대한 처벌과 동군 측 다이묘에 대한 포상을 실시했다.- 9월 21일 이시다 미쓰나리는 옛 친구였던 다나카 요시마사 부대에 체포되었다. 9월 19일에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9월 23일에는 안코쿠지 에케이가 각각 체포되었다. 이들은 이후 오사카, 사카이로 끌려다니다가 로쿠조가와라에서 참수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석고를 강제로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겼다. 이시다 미쓰나리의 아들들은 승려가 되어 평생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종교 활동만 하는 조건으로 목숨을 건졌으며, 장남 이시다 시게이에(1583 ~ 1686)는 103세까지 장수했다.
- 우키타 히데이에는 세키가하라 전투 후 사쓰마로 도망쳤다가 1603년 말 시마즈 다다쓰네가 이에야스에게 넘겼다. 다다쓰네와 아내의 친가인 마에다 도시나가의 구명 탄원으로 목숨은 건졌으나, 스루가 구능산에 유폐된 후 하치조시마로 유배되어 사망할 때까지 50년 동안 섬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4대 쇼군 이에쓰나의 치세까지 살았고, 그의 자손은 마에다가의 지원을 받아 메이지 유신 때까지 가문을 지켰다.
- 나쓰카 마사이에는 오우미 미즈구치 성으로 도망쳤으나, 동군 이케다 데루마사 부대의 추격을 받고 10월 3일 자결했다. 오타니 요시쓰구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으로 공격받던 중 포위당해 자결했다.
- 시마즈 요시히로에 대한 처벌은 여러 차례의 회유 끝에 1602년 4월 이에야스가 "요시히로의 행동은 당주가 인정한 것으로 나쁘지 않다"라며 요시히로의 형 시마즈 요시히사의 영지를 인정하고, 가문을 시마즈 다다쓰네에게 물려주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는 시마즈 가문에서 시마즈 요시히로를 정신병자로 몰아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서군에 가담한 것은 '''시마즈 요시히로가 미쳐서 그런 것'''이니 용서해 달라"고 탄원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다이묘가 시마즈 요시히로에서 시마즈 요시히사로 바뀌는 선에서 마무리되었고, 석고 삭감은 없었다.
- 모리 데루모토가 서군의 총대장으로 오사카성에 있었기 때문에, 깃카와 히로이에에게 약속했던 영지 보전은 파기되었고, 모리 가문의 영지는 몰수되었다. 대신 히로이에에게는 스오와 나가토 2개 구니가 주어졌다. 이에 히로이에는 자신의 영지를 모리 가문의 것으로 해달라고 요청했고, 이는 받아들여졌으나 결과적으로 많은 영지를 잃게 되어 히로이에는 모리 가문으로부터 본가를 팔았다는 비난을 받았다.
- 다치바나 무네시게와 마에다 도시나가를 격파했던 니와 나가시게는 영지를 몰수당했으나, 이후 무네시게와 시게나가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계획에 따라 다이묘로 복귀했고, 무네시게는 옛 영지까지 돌려받았다. 특히 무네시게는 시마바라의 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서군에 섰던 과거를 완전히 씻어냈다.
- 조소카베 모리치카는 사죄했으나, 오해와 가신의 참언으로 형 쓰노 지카타다를 살해한 일 때문에 이에야스의 분노를 사 영지를 몰수당했다.
-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아이즈 120만 석에서 나오에 가네쓰구의 영지였던 요네자와 30만 석으로 크게 삭감되었다. 요네자와는 아이즈의 일부이며, 아이즈 최북단에 위치한다.
- 사타케 요시노부는 히타치 미토 54만 석에서 데와 아키다 18만 석으로 크게 삭감되었다.
- 서군을 배신하고 동군으로 돌아선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지쿠젠 나지마 36만 석에서 비젠 오카야마 57만 석으로 영지가 늘었다. 그러나 히데아키는 1602년에 21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고, 후사가 없어 가문은 단절되었다.
- 히데아키의 배신에 호응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구쓰키 모토쓰나는 영지를 그대로 인정받았으나, 오가와 스케타다와 아카자 나오야스는 영지를 몰수당했다. 히데아키, 야스하루, 모토쓰나를 제외한 배신자들에 대해 이에야스는 엄격히 처벌했다. 스게타다는 배신한 전력이 많았고, 아들이 미쓰나리와 친했던 점이 문제가 되었다. 나오야스는 "총성에 놀라 배신했다"는 이유로 처벌받았다. 스게타다는 전투 후 이듬해에 사망했고, 나오야스는 마에다 도시나가를 섬기다가 1606년 엣추에서 익사했다.
- 소 요시토시는 서군에 가담했고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였으나, 평소 임진왜란을 강력히 반대했고, 세키가하라 전투 직후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 마리아와 이혼하고 이에야스에게 항복했다. 특히 요시토시는 쓰시마 후추 번 소속이라 조선과의 외교 문제 때문에 이에야스에게 꼭 필요한 인물이었으므로, 처벌 없이 쓰시마 후추 번주 지위를 유지했고 석고 삭감도 없었다. 대신 요시토시는 1607년까지 조선과의 관계 회복에 힘써 국교를 정상화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한 사쓰마번의 시마즈 가문과 조슈번의 모리 가문은 도쿠가와 가문에 대한 원한을 품고 250년 후 막부 말기에 막부 타도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들은 조선 침략 및 복속의 중심이 되었다.
동군 다이묘들은 대폭적인 영지 증감이 있었다.
- 호소카와 다다오키: 단고 미야쓰 18만 석 → 부젠 오구라 40만 석
- 다나카 요시마사: 미카와 오카자키 10만 석 → 지쿠고 야나가와 32만 5천 석
- 구로다 나가마사: 부젠 나카쓰 18만 석 → 지쿠젠 나지마 53만 석
- 가토 요시아키라: 이요 마쓰마에 10만 석 → 이요 마쓰야마 20만 석
- 도도 다카토라: 이요 사카시마 8만 석 → 이요 이마바루 20만 석
- 데라자와 히로타카: 히젠 가라쓰 8만 3천 석 → 12만 3천 석
- 야마우치 가쓰토요: 도토미 가쓰가와 7만 석 → 도사 우라토 24만 석
- 후쿠시마 마사노리: 오와리 기요스 20만 석 → 아키-빈고 히로시마 49만 8천 석
- 이코마 가즈마사: 사누키 다카마쓰 6만 5천 석 → 17만 1천 석
- 이케다 데루마사: 미카와 요시다 15만 2천 석 → 하리마 히메지 52만 석
- 아사노 요시나가: 가이 부추 22만 석 → 기이 와카야마 37만 6천 석
- 가토 기요마사: 히고 구마모토 19만 5천 석 → 51만 5천 석 (단, 고니시 유키나가의 몰수 영지 24만 석 포함)
- 모가미 요시아키: 데와 야마가타 24만 석 → 57만 석
- 다테 마사무네: 무쓰 이와테야마 57만 석 → 62만 석
도요토미 측과 인연이 있던 다이묘들은 영지가 늘었지만, 서쪽 지역으로 이동되었다.
- 쓰가루 다메노부는 동군에 가담했으나, 맏아들 쓰가루 노부타케가 오사카성에서 도요토미 가문을 섬겼고, 전쟁 후에는 노부타케와 함께 온 이시다 미쓰나리의 아들을 보호하는 등 양쪽에 모두 발을 담그는 듯한 모습을 보여 별다른 포상을 받지 못했다. 다만, 다메노부와 셋째 아들 쓰가루 노부히라의 참전을 고려하여 고즈케국의 2천 석 영지가 은상으로 주어졌다.
- 이에야스는 직할령을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 250만 석에서 400만 석으로 크게 늘려 전국 최대 영지를 가진 다이묘가 되었다. 이는 일본 전체 1380만 석의 30%에 달하는 비율로, 도쿠가와의 절대 권력을 과시하여 다른 다이묘들을 복종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도쿠가와는 다른 다이묘들보다 최소 4~6배 이상의 석고를 보유하여 막강한 힘을 가졌다.[266]
- 도요토미 씨의 영지는 히데요시 시대 222만 석에서 65만 석으로 크게 줄었다. 도요토미 씨의 재정을 지탱하던 사카이와 나가사키의 교역항도 도쿠가와 씨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로써 도쿠가와 씨와 도요토미 씨의 입장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 훗날 도쿠가와 막부는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오사카 전투로 멸망시킨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직접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를 끊고 영지를 모두 몰수, 영지 개발을 통해 500만 석을 채웠다. 도쿠가와 히데타다 치세에는 시마바라의 난을 진압하고 도쿠가와 직할령과 나머지 영지의 총합이 대등한 수준에 도달하여, 모든 다이묘가 힘을 합쳐야 도쿠가와 가문과 맞설 수 있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