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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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역은 북위 효문제의 아들로, 총명하고 문재가 뛰어나 효문제의 총애를 받았다. 청하왕에 봉해진 후 선무제, 효명제 대에 걸쳐 요직을 두루 거치며 보정대신으로 효명제를 보좌했다. 영태후의 신임을 받았으나, 환관 유등과 결탁한 원차에 의해 모반 혐의로 처형당했다. 이후 복권되어 태위공으로 추증되었으며, 손자에 의해 문헌제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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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역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작위 | 동위 추존 황제 |
재위 | (추존) |
후임 | 문선제 |
작위2 | 북위의 청하왕 |
재위2 | 497년 ~ 520년 |
즉위식2 | 497년 |
군주2 | 효문제 ~ 효명제 |
후임2 | 청하문선왕 |
휘 | 원역(元懌) |
별호 | 해당사항 없음 |
연호 | 해당사항 없음 |
묘호 | 없음 |
존호 | 해당사항 없음 |
시호 | 문헌제(文獻帝) |
출생일 | 487년 |
출생지 | 해당사항 없음 |
사망일 | 520년 |
사망지 | 해당사항 없음 |
능묘 | 해당사항 없음 |
아버지 | 북위 효문제 |
어머니 | 나부인 |
배우자 | 청하왕비 나씨, 남양 장씨 |
자녀 | 문선제 |
2. 생애
원역은 효문제와 나부인의 아들로,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효문제의 총애를 받았다. 경서와 사서에 능통하고 문재가 뛰어났으며, 담론에도 능했다. 497년 청하왕에 봉해졌고, 선무제 즉위 후 시중, 상서복야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
512년 사공이 되었으며, 515년 효명제가 즉위하자 보정대신(輔政大臣)으로 임명되어 효명제를 가까이서 보좌했다. 당시 섭정을 하던 영태후의 신임을 받았으나, 영태후의 매부인 원차와 갈등을 빚었다. 원차의 교만함을 지적했다가 문하성에 투옥되기도 했으나, 무고함이 밝혀져 석방되었다.
520년, 원차는 환관 유등과 협력하여 원역에게 모반 혐의를 씌워 처형했다. 525년 원차가 모반 혐의로 사사당한 후, 원역은 태위공(太尉公)으로 추증되고 복권되었으며, 문헌(文獻)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534년에는 손자인 효정제에 의해 문헌제(文獻帝)로 추존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효문제와 나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마음이 착하며 용모가 아름다웠기 때문에 효문제는 특히 원역을 총애했다. 경서와 사서를 널리 섭렵하고 문재가 있었으며 담론을 잘했고, 관대하고 너그러워서 희로애락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497년(태화 21년) 8월, 청하왕에 봉해졌다. 선무제 초년에 시중 벼슬을 받았고, 상서복야로 전임되었다.이 무렵 사공인 고조가 선무제의 외척으로서 권세를 휘둘렀고, 여러 번 원역과 경조왕 원유 등을 무고했다. 508년(영평 원년), 원유는 분노에 휩싸여 기주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패사했다. 한편 원역은 고조를 왕망의 고사를 끌어들여 의견을 제시했고, 설령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선무제에게 정면으로 간했다. 512년(연창 원년) 1월, 사공에 올랐다.
2. 2. 고조와의 갈등
497년(태화 21년) 8월, 청하왕에 봉해졌다. 선무제 초년에 시중의 벼슬을 받았고, 상서복야로 전임되었다. 이 무렵 사공인 고조가 선무제의 외척으로서 권세를 휘둘렀고, 여러 번 원역과 경조왕 원유 등을 무고했다. 508년 (영평 원년), 원유는 분노에 휩싸여 기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사했다. 한편 원역은 고조를 왕망의 고사를 끌어들여 의견을 제시했고, 비록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선무제에게 정면으로 간했다.2. 3. 보정대신과 영태후의 신임
515년 효명제가 즉위하자 원역은 효명제를 가까이서 보좌하는 보정대신(輔政大臣)에 임명되었다. 당시 효명제는 영태후가 섭정을 하였는데, 원역은 영태후의 신임을 받았다.2. 4. 원차와의 갈등과 죽음
515년 (연창 4년) 효명제가 즉위하자 원역은 효명제를 가까이서 보좌하는 보정대신(輔政大臣)에 임명되었다. 당시 효명제 대에는 영태후가 어린 황제를 대신해 섭정을 하였는데, 원역은 영태후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영태후의 매부인 원차는 총애를 믿고 교만한 행동이 많았다. 원역은 원차를 법으로 다스리려 했고, 그 전횡을 억제하려 했기 때문에 원차에게 미움을 받았다. 원차는 동료 통직랑 송유희에게 원역의 반란 계획을 고발하게 했고, 원역을 문하성에 감금시키고 그 측근과 조정의 귀족들을 신문했다. 조정은 원역의 반역 의사를 믿지 않았고, 원역은 억울함이 풀려 석방되었다.520년 (정광 원년) 7월, 원차와 유등은 현양전에서 효명제를 협박하고, 영태후를 후궁에 유폐시켰으며, 원역을 문하성에 체포하여 죄상을 무고하고 살해했다. 이때 원역의 향년 34세였다. 525년 (효창 원년) 11월, 영태후가 복귀했고, 원역은 사지절·가황월·태사·승상·대장군·도독중외제군사·록상서사·시중·태위공의 벼슬을 추증받았다.
2. 5. 사후 복권과 추존
520년 (정광 원년) 7월, 원차와 유등은 현양전에서 효명제를 협박하고, 영태후를 후궁에 유폐시킨 뒤 원역을 문하성에 체포하여 죄상을 무고하고 살해했다. 이때 원역의 나이는 34세였다.525년 (효창 원년) 11월, 영태후가 복귀하면서 원역은 사지절·가황월·태사·승상·대장군·도독중외제군사·록상서사·시중·태위공의 벼슬을 추증받았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며, 작위는 아들 원단이 이었다.
534년 손자 효정제에 의해 문헌제(文獻帝)로 추존되었다.
3. 가족 관계
4. 평가
원역에 대한 평가는 주로 그의 묘지명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묘지명은 "위고사지절시중가황월태사승상대장군도독중외제군사록상서사태위공청하문헌왕지지명(魏故使持節侍中假黃鉞太師丞相大將軍都督中外諸軍事錄尙書事太尉公淸河文獻王之誌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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