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보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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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보녕은 북제 후주 때 영주 자사를 지냈으며, 북제가 멸망한 후 고소의를 승상으로 보좌하며 요서 지역에서 세력을 유지했다. 이후 수나라에 저항했으나 패배하여 도주 중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1963년 묘비에서 안태라는 연호가 발견되었으나, 고보녕의 연호인지는 불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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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보녕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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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고보녕 |
원래 이름 | 高保寧 |
본명 | 고보녕(高保寧) |
시호 | 없음 |
묘호 | 없음 |
연호 | 안태(安太)(?) |
출생일 | 6세기 |
사망일 | 583년 |
재위 | 580년 ~ 583년 |
부친 | 고씨(高氏) |
모친 | 불명 |
전임자 | 고소의 |
관직 정보 | |
작위 | 북제의 영주자사 |
재위 기간 | ? ~ 577년 |
가문 | 발해 고씨 |
왕조 | 북제 |
관련 인물 | 북제 부흥군 수장 |
2. 생애
고보녕은 후주 말기에 영주자사(營州刺史)를 지냈다. 북제가 멸망한 후 고소의에게 승상으로 임명되었으나, 돌궐의 배신으로 고소의가 유배되자 요서에서 북제 부흥 운동을 이끌었다.
개황 2년 (582년) 5월, 고보녕은 수의 평주를 침공했다. 개황 3년 (583년) 4월, 수의 행군총관 음수에게 황룡에서 패했다. 음수가 철수하고 성도앙이 황룡에 남게 되자, 고보녕은 아들 고승가에게 황룡성 아래를 약탈하게 했다. 얼마 후 고보녕은 거란과 말갈 병사를 이끌고 황룡을 공격하여 성도앙을 곤경에 빠뜨렸다.
2. 1. 북제 멸망 이전
후주 말기에 영주자사(营州刺史)를 지낸 것 외에 부흥운동 이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무평 말년, 고보녕은 북제의 영주 자사가 되어 황룡(黃龍)에 주둔했다. 북주 군대가 북제 수도 업에 육박하자, 유주 행대 판자황이 황룡 병사를 소집했고, 고보녕은 거란·말갈 기병 1만 명을 이끌고 구원에 나섰다. 그러나 북평(北平)에 이르러 판자황이 이미 계를 출발했고, 업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영주로 귀환했다. 북주의 무제가 사자를 보내 초유했지만, 고보녕은 칙서를 받지 않았다.
2. 2. 북제 부흥 운동
후주 말기, 고보녕은 영주자사(营州刺史)를 지냈으나, 부흥운동 이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577년 북제가 멸망한 후, 고보녕은 고소의에게 승상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북주와 돌궐의 배신으로 고소의가 580년 촉으로 유배되자, 고보녕은 요서 지역에서 북제 부흥 운동을 이끌었다.
581년, 고보녕은 북평(北平)을 공격하며 세력을 확장하려 했다. 그러나 583년 수 문제의 명을 받은 유주총관(幽州總管) 음수(陰壽)에게 토벌당했다. 측근 조세모(趙世模)가 수나라 군대에 항복하자, 고보녕은 도주 중 부하들에게 살해당했다.
1963년 베이징 회유현(怀柔縣)에서 출토된 묘비에는 안태(安太)라는 연호가 있으나, 고보녕의 연호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무평 말년, 고보녕은 북제의 영주 자사가 되어 황룡에 주둔했다. 북주 군대가 북제 수도 업에 육박하자, 유주 행대 판자황이 황룡 병사를 소집했고, 고보녕은 거란·말갈 기병 1만 명을 이끌고 구원에 나섰다. 북평에서 판자황이 이미 계를 출발했고, 업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영주로 돌아왔다. 북주 무제가 사자를 보냈으나, 칙서를 받지 않았다. 범양왕 고소의가 돌궐 보호 아래 북제 황제를 칭하자, 고보녕은 승상에 임명되었다. 노창기가 범양성을 근거지로 기병하자, 고보녕은 고소의의 병사 수만 기병을 이끌고 구원에 나섰다. 노하에서 북주 장군 우문신거가 범양을 함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황룡으로 돌아가 북주에 벼슬하려 하지 않았다.
개황 2년 (582년) 5월, 고보녕은 수의 평주를 침공했다. 개황 3년 (583년) 4월, 수나라 행군총관 음수에게 황룡에서 패배하고 적북으로 도망쳤다. 음수가 철수하고 개부 성도앙이 황룡에 남게 되자, 고보녕은 아들 고승가에게 황룡성 아래를 약탈하게 했다. 얼마 후 고보녕은 거란과 말갈 병사를 이끌고 황룡을 공격하여 성도앙을 곤경에 빠뜨렸다. 음수는 부하 조세모와 왕위를 회유하여 항복시켰다. 고보녕은 거란으로 도망쳤고, 부하 조수라에게 살해되었다.
2. 3. 최후
581년 고보녕은 북평(北平)을 공격하는 등 세력 확장을 꾀했으나, 583년 수 문제의 명을 받은 유주총관(幽州總管) 음수(陰壽)의 군대에 의해 토벌당했다. 측근 조세모(趙世模)가 수나라 군대에 항복하자 고보녕은 거란으로 도주했고, 부하 조수라에게 살해되었다.3.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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