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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엄향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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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신은 전한 시대의 인물로, 동평왕 유운의 아들이다. 기원전 5년에 엄향후에 봉해졌으며, 왕망이 섭정을 하자 적의 등과 함께 왕망 타도를 위한 반란을 일으켜 천자로 추대되었다. 반란군은 왕망에게 진압되었고, 유신은 사망했으며 일족은 주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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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엄향후)
기본 정보
유신의 초상화
유신의 초상화
유(劉)
이름신(信)
시호절후(節侯)
작위엄향후(嚴鄉侯)
아버지유경(劉慶)
어머니정희(程姬)
형제유전(劉全), 유흥(劉興)
자녀유현(劉玄)
생애
출생불명
사망17년
시대신 (나라)
활동엄향(嚴鄉)
관직
관직엄향후(嚴鄉侯)
기타
관련 인물왕망(王莽)

2. 생애

전한 시대의 인물 유신은 건평 2년(기원전 5년)에 아버지 동평왕 유운에게서 영지를 받아 엄향후가 되었다. 전한 말 평제가 죽고 왕망이 섭황제가 되자, 동군태수 적의는 유신, 그의 동생 무평후 유황, 동군 도위 유우 등과 함께 왕망을 몰아낼 계획을 세웠다. 거섭 2년(7년) 9월, 이들은 군사를 일으켰고, 유신은 천자로 추대되었다.

유신은 적의를 대사마·주천대장군, 소융을 승상, 고단어사대부로 임명했다. 유신과 적의 등은 여러 군국에 격문을 보내 왕망이 평제를 독살했다고 주장했고, 적의의 군대는 산양군에 이르러 10만 명에 달했다. 삼보의 괴리(우부풍)에서는 조명, 곽홍 등이 봉기하여 장안으로 향했다.

왕망은 손건, 왕읍, 왕준 등 7명의 장군을 보내 이들을 진압하게 했다. 손건과 왕읍 등은 먼저 재(양군)에서 적의 군대를 격파하고 유황을 죽였다. 이어 어(진류군)를 포위하여 적의 군대를 섬멸했다. 적의와 유신은 포위망을 뚫고 도망쳤지만, 적의는 고시(여남군)에서 붙잡혀 처형되었다. 유신 또한 사망했으나, 자세한 경위와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1]

거섭 3년(8년) 2월, 삼보의 조명과 곽홍 등도 진압되면서 왕망에 대항한 세력은 모두 사라졌다.

2. 1. 초기 생애 및 엄향후 책봉

건평 2년(기원전 5년), 아버지 동평왕 유운에게 영지를 분여받아 엄향후(嚴鄕侯)에 봉해졌다.[2]

2. 2. 왕망에 대한 반란과 황제 추대

劉信|유신중국어전한 말의 인물로, 왕망이 섭황제가 되자 거섭 2년(7년) 동군태수 적의에게 천자로 추대되었다.[2] 동생 유황과 함께 거병하였으나 진압되어 일족이 주멸되었다.[2]

건평 2년(기원전 5년), 아버지 동평왕 유운에게 영지를 분여받아 엄향후가 되었다. 전한 말 평제가 붕어하고 왕망이 섭황제가 되자, 적의는 이를 미워하여 유신과 그의 동생 무평후 유황, 동군 도위 유우 등과 왕망 토벌을 획책했다. 거섭 2년(7년) 9월, 왕망 타도를 위해 거병하여 천자로 추대된 유신은 적의를 대사마·주천대장군, 소융을 승상, 고단어사대부로 각각 임명했다. 유신·적의 등은 각 군국에 격문을 발송하여 왕망이 독주로 평제를 살해했다고 규탄했고, 적의의 군은 산양군에 이르기까지 10여만 명의 세력이 되었다. 이에 호응하여 삼보의 괴리(우부풍)에서는 조명·곽홍 등이 봉기하여 각지를 겁략하면서 장안으로 향했다.

왕망은 손건·왕읍·왕준 등 7명의 장군을 유신·적의 토벌에 파견했다. 손건·왕읍 등은 먼저 재(양군)에서 적의 군을 격파하고 유황을 참수했다. 더 나아가 진군하여 어(진류군)를 포위하고, 적의 군을 섬멸했다. 적의와 유신은 포위를 벗어나 도주했지만, 적의는 고시(여남군)의 현 경계에서 왕망 군에게 붙잡혀 능지형에 처해졌다. 유신 또한 정확한 경과·시기는 불명확하지만, 역시 사망했다.[1]

2. 3. 반란 진압과 최후

거섭 2년(7년), 동군태수 적의가 반란을 일으켜 유신을 천자로 추대하였고, 유신은 동생 유황과 함께 이에 호응하여 거병하였다. 유신은 적의를 대사마·주천대장군, 소융을 승상, 고단어사대부로 각각 임명했다. 유신·적의 등은 각 군국에 격문을 발송하여 왕망이 평제를 독살했다고 규탄했고, 적의의 군대는 산양군에 이르기까지 10여만 명의 세력을 모았다. 또한 삼보의 괴리(우부풍)에서는 조명·곽홍 등이 봉기하여 각지를 약탈하며 장안으로 향했다.[2]

왕망은 손건, 왕읍, 왕준 등 7명의 장군을 보내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손건·왕읍 등은 먼저 재(양군)에서 적의 군을 격파하고 유황을 죽였다. 이들은 진군하여 어(진류군)를 포위하고 적의 군을 섬멸했다. 적의와 유신은 포위를 뚫고 도주했으나, 적의는 고시(여남군)의 현 경계에서 붙잡혀 처형되었다. 유신 또한 사망했으나, 정확한 시기와 경과는 불분명하다.[1]

다음 해 거섭 3년(8년) 2월에는 삼보의 조명·곽홍 등도 진압되어, 반 왕망 군은 수개월 만에 모두 진압되었다.

참조

[1] 서적 漢書
[2] 문서
[3] 문서
[4] 문서
[5] 서적 문헌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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