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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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손건은 북해군 출신으로, 유비 휘하에서 종사, 외교관, 책사 등으로 활약한 촉한의 정치가이다. 유비가 서주 자사가 되었을 때 정현의 추천으로 종사가 되었고, 이후 유비를 따라 조조, 원소, 유표 등에게 의탁하며 외교적 역할을 수행했다. 유비의 익주 평정 후에는 종사중랑과 병충장군을 역임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 삼형제의 재회에 기여하고, 유비의 책사로서 다양한 활약을 펼치는 인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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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건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손건 |
원어 이름 | 孫乾 |
로마자 표기 | Son Geon |
자 | 공우 (公祐) |
출생지 | 산둥성 서우광 시 |
사망 추정 시기 | 기원후 214년경 |
직업 | 외교관, 정치인, 장군 |
관직 | |
소속 | 유비 |
벼슬 | 종사 (從事) 종사중랑 (從事中郎) 병충장군 (秉忠將軍) |
종사 임기 시작 | 194년 |
종사 임기 종료 | 201년 |
종사중랑 임기 시작 | 201년 |
종사중랑 임기 종료 | 214년 |
병충장군 임기 | 214년 |
가족 관계 | |
성씨 | 손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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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적
유비가 서주를 다스릴 때 정현의 추천으로 종사가 된 손건은 유비를 따라 각지를 떠돌았다. 유비가 조조를 배반하고 원소에게 의탁했을 때와 유표에게 들어갈 때 사자로 파견되는 등 유비의 신임을 받았다.[9]
214년 유비가 익주를 평정한 후, 손건은 종사중랑 · 병충장군으로 임명되어 미축에 버금가고 간옹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9]
2. 1. 초기 생애와 유비와의 만남
손건은 현재의 산둥성 수광시에 위치한 북해군 출신이다. 그는 같은 북해 출신의 저명한 학자 정현의 추천으로 유비 휘하에서 종사(從事)로 일하게 되었다.[2] 194년, 유비가 도겸의 뒤를 이어 서주의 자사(牧)가 되었을 때, 이 일은 정현의 명성을 더욱 높이는 데 기여했다고 전해진다.[3]199년, 유비가 서주에서 다시 자리를 잡고 조조의 통제에서 벗어나자, 손건을 조조의 주요 경쟁자였던 원소에게 파견하여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관도 전투로 이어진 과정에서 유비와 원소에게 불리한 상황이 전개되었고, 201년 유비는 원소를 격파한 조조가 도착하자, 여남군에서의 입지를 포기해야 했다. 유비는 손건과 미축을 형주 자사 유표에게 보내 망명을 성사시켰다.[4]
202년 원소가 사망했지만, 그의 아들들 간의 권력 다툼으로 후계자 문제가 불거졌고, 유표는 원소의 셋째 아들이자 후계자인 원상에게 보낸 편지에서 원상과 그의 맏형 원담 사이의 갈등을 언급했다. 유표는 "장군 유비(유비)와 손공유(손건의 자)와 함께 이 문제(원상과 그의 형제 간의 갈등)에 대해 논의할 때마다 매우 마음이 아프고 슬펐다"라고 썼다. 유비와 유표 모두 손건을 높이 평가했다.[5]
2. 2. 유비의 책사로서의 활약
유비가 서주를 다스릴 때, 정현의 추천을 받아 유비의 종사가 되었고, 유비를 따라 각지를 떠돌았다. 194년, 유비가 도겸의 뒤를 이어 서주의 자사(牧)가 되었을 때, 손건은 같은 북해군 출신의 유명한 학자 정현의 추천을 받아 유비 휘하에서 보좌관(從事)으로 일하게 되었다.[2] 그는 이후 유비의 부하로 남았다.[3]199년, 유비가 서주에서 다시 자리를 잡고 조조의 통제에서 벗어나자, 손건을 조조의 주요 경쟁자였던 북쪽의 원소에게 파견하여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관도 전투로 이어진 과정에서 유비와 원소에게 불리한 상황이 전개되었고, 201년 유비는 원소를 격파한 조조가 도착하자, 여남군에서의 입지를 포기해야 했다. 유비는 손건과 미축을 형주 자사 유표에게 보내 망명을 성사시켰다.[4] 유비가 조조를 배반하고 원소에게 붙었을 때 원소에게 사자로 갔으며, 후에 유비가 유표에게 들어갈 때 미축과 함께 유표에게 사자로 갔다.
202년 원소가 사망했지만, 그의 아들들 간의 권력 다툼으로 후계자 문제가 불거졌고, 유표는 원소의 셋째 아들이자 후계자인 원상에게 보낸 편지에서 원상과 그의 맏형 원담 사이의 갈등을 언급했다. 유표는 "장군 유비(유비)와 손공유(손건의 자)와 함께 이 문제(원상과 그의 형제 간의 갈등)에 대해 논의할 때마다 매우 마음이 아프고 슬펐다"라고 썼다. 유표가 원상에게 보낸 편지에서 손건이 유비와 매양 의논한다고 언급할 정도로 유비와 유표 모두 손건을 높이 평가했다.[5][9]
건안 19년(214년),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고서 손건을 종사중랑 · 병충장군으로 삼아, 대우는 미축에 버금가고 간옹과는 동등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병사했다.[9]
2. 3. 평가
진수는 손건에 대해 "미축, 손건, 간옹, 이적은 품행이 단정하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의 생각은 널리 알려졌다. 그들은 예의를 잘 지키는 것으로 유명했다."라고 평가했다.[7]3. 《[[삼국지연의]]》에서의 손건
《삼국지연의》에서 손건은 도겸이 임종 시 서주를 유비에게 양도하기로 결정했을 때, 유비를 보좌할 인재로 추천받았다. 그는 유비의 문관이자 외교관으로서 정사 이상의 활약을 보이며, 관우, 조운, 장비의 조언자로서 활약하는 모습도 그려진다.
유비가 관우, 장비의 죽음에 격분하여 이릉 전투로 출진하려 하자, 손건은 유비를 말릴 수 없다고 판단하여 남만으로 움직여 추장들을 설득해 이릉 전투에 참전시키려는 작업을 했다. 그 결과 추장들 중 한 명인 사마가가 유비를 도와 이릉 전투에 참전하게 된다.[10]
도겸이 죽을 때 유비에게 유서를 남겨 유비가 소극적으로 서주를 다스리는 것을 돕도록 했다. 원술(후한)과 싸우기 전에 유비에게 서주를 다스릴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경고했지만 유비가 장비를 선택한 것은 서주가 여포의 손에 넘어가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196년에는 장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술의 또 다른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여포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추천했고, 유비가 서신을 보내 도움을 받았다. 유비가 여포에게 공격을 받자 조조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하비 북문의 방어를 맡았지만 도시가 함락되었을 때 탈출에 성공했고 유비에게 조조에게 의탁할 것을 조언했다.
유비가 조조에 대항하여 서주에서 일어섰을 때, 원소에게 사신으로 가서 조조에 대항하는 방어선을 구축하는 방법을 조언했다. 예상된 공격이 오자 원소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원소는 막내아들인 원상의 건강이 좋지 않아 절망에 빠져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손건은 유비와 공도가 그를 데려간 여남으로 가게 되었고, 조조군의 침입을 염탐하는 스파이 역할을 했지만 체포되어 관우에게 끌려갔다. 손건은 관우에게 유비가 원소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알리고, 공도와 유비에게 관우에게 가짜 패배를 하도록 준비했다. 관우가 떠나고 그들이 여남을 되찾았을 때, 원소에게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파견되었고, 원소는 유비를 보냈지만, 손건은 원소 진영의 분열된 상황에 감명을 받지 못했고, 유비에 의해 관우에게 원소에게 가지 말라고 경고하기 위해 보내졌다. 관우가 조조를 떠나는 여정에 동행하여 유비의 부인 감부인과 미씨 부인을 지키는 것을 도왔다. 그들이 장비가 고성에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손건은 장비에게 이 사실을 알리러 갔고, 장비가 무장하고 관우와 싸우려 하는 반응에 놀랐다. 채양을 죽임으로써 장비가 진정되자 손건은 관우와 함께 여남으로 가서 유비를 만나고, 그 후 북쪽으로 가서 원소와 대화하러 간 유비를 만났다.
유비는 부하들과 가족들과 재회했지만 201년에는 조조군에 의해 여남에서 쫓겨났다. 절망한 유비에게 운은 바뀔 수 있으며, 그는 자리를 잘 잡은 친척인 유표에게 갈 수 있다고 위로했다. 사신으로 파견되어 유비를 한나라의 충신이자 지원이 필요한 영웅으로 칭찬하고, 유비는 예의로 유명한 친척이며, 손건이 유비에게 손권 대신 가라고 조언한 곳이라고 칭찬했다. 채모는 유비가 다른 군주들과의 전력이 있었고 유비를 초대하는 것은 조조의 공격을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하여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손건을 처형하여 신호를 보내자고 제안했다. 손건은 자신의 군주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으며, 채모가 덕망 있는 사람을 모함했다고 비난했고, 유표는 손건의 편을 들어 유비를 초대했다.
채모가 유비를 죽이려 한 시도 이후, 유비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어떤 음모가 일어나고 있다고 의심한 사람은 손건이었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자 유비는 모든 것을 밝혔다. 축제에서 채모의 또 다른 음모가 있은 후, 채모가 한 일을 밝히는 서신을 전달하기 위해 파견되었고, 강력한 채모를 처형하는 것에 반대하며 경에서 유비의 삶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고 우려했다. 유비의 첫 번째 책략가인 서서가 어머니가 조정에 있어 조조에게 가려고 하자, 서서가 그들의 비밀을 알고 있으므로 서서를 억류하여 어머니가 살해되고 서서가 조조에게 복수심을 품도록 하라고 제안했지만, 유비는 거절했다.
장판 전투에서 손건은 유비를 따르기로 선택한 백성들의 대피를 감독하는 임무를 맡았고, 관우와 호송 부대와 함께 유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서신을 전달하여 도움을 받았다. 적벽의 연합군의 승리 이후, 승리한 동오의 사령관 주유에게 축하와 선물을 전달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주유는 그로부터 유비의 위치를 알 수 있었고 유비가 남군을 점령하려 한다는 것을 예측했으며 주유 역시 이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주유가 유비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혼인을 주선하려 할 때, 손건은 유비 측의 사신으로 선택되었고, 손권의 의도가 진실임을 확신시키려 했다.
장비는 방통이 뇌양의 수장으로서 술에 취했다는 소식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되었고, 유비는 손건을 보내 냉철한 태도를 취하게 했으며, 손건은 장비에게 방통을 단순히 무시하는 것보다 더 깊이 조사하도록 설득했다. 방통이 반나절 만에 백일간의 방치된 일을 해결하자 장비는 설득되었고, 손건에게 그러한 인재를 잃을 뻔한 것을 막아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익주 정복 중에 유비는 마초를 존경했는데, 마초는 한중의 종교적 군벌 장로가 유장을 돕기 위해 파견한 사람이었기에 제갈량은 손건을 보냈다. 먼저 부패한 고문 양송에게 뇌물을 주어 알현을 얻은 다음, 장로에게 마초에게 한중왕을 옹립하는 것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물러나라고 명령하도록 설득했다. 마초가 물러나라는 명령을 거부한 것은 장로와 마초 사이에 분열을 일으켰고, 후자는 곧 유비에게 합류할 정도로 소외되었다.
《삼국지평화》에서는, 간옹에 이은 고참 중 한 명으로 유비의 황건적 토벌에 종군하는 묘사가 있다.
3. 1. 유비 삼형제의 재회에 기여
유비 삼형제가 조조에 의해 흩어졌을 때, 관우는 장료에 의해 조조에게 가게 된다. 관우는 조조를 공격한 원소의 무장 안량과 문추의 군대를 격파하고 둘을 죽인다. 원소는 유비가 조조와 내통하고 있을 거라 의심하지만 곧 사실을 알고 분을 가라앉힌다.[10]조조는 황건적 잔당이 여남을 휩쓸고 있어 조홍이 고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관우에게 5만의 군사를 주어 여남으로 보낸다. 여남에 도착한 관우는 밀정으로 보이는 사람을 데려온 병사를 만나는데, 그가 바로 손건이다.[10]
손건은 관우에게 유비가 원소에게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자신이 유벽과 공도의 무리라는 것을 알려주며 내일 거짓으로 패하는 척하겠다고 한다. 다음날, 관우는 계획대로 승리하여 여남을 평정한다. 관우는 얼마 후 조조를 떠나게 된다.[10]
이후 손건은 관우의 휘하에 들어가 배원소, 주창과 만나고, 장비의 성에 들어가 합류한다. 유비와도 만나 원소와 떨어지게 하고, 조운과 합류한다. 장비는 유비가 온다는 소식에 성채 밑까지 달려온다. 이렇듯 유비 삼 형제의 재회에는 손건의 활약이 있었다.[10]
3. 2. 유비의 외교적 책사
199년, 유비가 서주에서 다시 자리를 잡고 조조의 통제에서 벗어나자, 손건은 조조의 주요 경쟁자였던 북쪽의 원소에게 파견되어 지원을 요청했다.[4] 하지만 관도 전투로 이어진 과정에서 유비와 원소에게 불리한 상황이 전개되었고, 201년 유비는 원소를 격파한 조조가 도착하자, 여남군(군)에서의 입지를 포기해야 했다. 유비는 손건과 미축을 형주 자사 유표에게 보내 망명을 성사시켰다.[4]202년 원소가 사망했지만, 그의 아들들 간의 권력 다툼으로 후계자 문제가 불거졌고, 유표는 원소의 셋째 아들이자 후계자인 원상에게 보낸 편지에서 원상과 그의 맏형 원담 사이의 갈등을 언급했다. 유표는 "장군 유비(유비)와 손공유(손건의 자)와 함께 이 문제(원상과 그의 형제 간의 갈등)에 대해 논의할 때마다 매우 마음이 아프고 슬펐다"라고 썼다. 유비와 유표는 모두 손건을 높이 평가했다.[5]
참조
[1]
서적
A biographical dictionary of Later Han to the Three Kingdoms (23–220 AD)
Brill
[2]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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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4]
간행물
[5]
간행물
[6]
간행물
[7]
간행물
[8]
서적
A biographical dictionary of Later Han to the Three Kingdoms (23–220 AD)
Brill
[9]
위키문헌
삼국지
三國志/卷38
[10]
문서
삼국지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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