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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포석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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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포석보는 조선시대 왜구를 막기 위해 1450년(문종 즉위년) 목책성으로 처음 설치되었으며, 이후 석성으로 축조된 보(堡)이다. 삼도 도체찰사 정분의 건의로 시작되어 1459년(세조 5)에 완공되었으며, 왜구 방어를 위한 군사 요충지였다. 전체 둘레는 755m이며, 일제강점기에 정자항 방파제 건설에 사용되면서 훼손되었지만 역사적·학술적 보존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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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포석보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유포석보
유포석보
명칭유포석보
위치울산광역시 북구 정자동 625번지 일원
상세 정보
종류기념물
지정 번호17
지정일1998년 10월 19일
시대조선시대
면적52필지 37,362.7m²
수량1개소
관리북구

2. 역사

유포석보(柳浦石堡)는 조선 시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된 보(堡)이다.[2] 1450년(문종 즉위년) 삼도 도체찰사 정분(鄭苯)의 건의로 처음 목책 형태로 설치되었으며, 이후 논의를 거쳐 1459년(세조 5년)에 석성으로 완공되었다.[2] 이곳은 왜구 방어를 위한 군사적 요충지였기에 경상좌병사의 지휘 아래 병력이 주둔하며 수비 임무를 수행했다.[2] 성의 전체 둘레는 약 755m이며, 일제 강점기에 정자항 방파제 건설 당시 성의 돌을 가져다 사용하여 일부 훼손되었으나, 여전히 역사적 및 학술적 가치가 높은 유적으로 평가받는다.[2]

2. 1. 조선시대 축성 과정

조선 시대의 보(堡)는 제진(諸鎭)을 보조하는 방어 시설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보는 최전방에서 적의 동태를 살피고 인근 주민을 대피시키는 한편, 유사시에는 전투를 치르는 소규모 성곽이었다. 또한 보 주변에는 봉수가 설치되어, 신호나 포성 같은 소리를 통해 주변 주민과 인근 지역 및 내륙에 상황을 신속히 알리는 기능을 했다.[2]

유포석보는 왜구의 침입을 방어할 목적으로 세워졌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1450년(문종 즉위년) 당시 삼도 도체찰사였던 정분(鄭苯)의 건의에 따라 처음에는 나무로 울타리를 두른 목책 형태로 축조되기 시작했다. 이후 1452년(문종 2년), 정분은 목책을 돌로 쌓은 석성으로 개축할 것을 다시 건의하였고, 이를 두고 여러 차례 논의가 이루어졌다. 본격적인 석성 축조는 1455년(세조 1년)부터 추진되었으며, 기존 목책이 있던 위치에서 5리 떨어진 곳에 성을 쌓기로 결정되었다. 마침내 1459년(세조 5년)에 석보가 완공되었다. 이곳은 왜구 방어를 위한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경상좌병사의 지휘 아래 울산과 경주 지역의 병사 300명이 3개 조로 나뉘어 교대로 주둔하며 수비 임무를 수행했다.[2]

2. 2. 군사적 중요성

조선시대의 보(堡)는 제진(諸鎭)의 보조적 방어시설로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다. 보는 최전방에서 적의 동태를 감시하고, 인근 주민을 대피시키며, 유사시에는 전투를 벌이는 소규모 성이었다. 또한, 보 주변에는 봉수가 설치되어 신호나 포성 같은 소리를 통해 주변 주민과 인근 지역, 나아가 내륙까지 상황을 신속하게 알리는 역할을 했다.[2]

유포석보(柳浦石堡)는 특히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설치된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기록에 따르면, 1450년(문종 즉위년) 삼도 도체찰사였던 정분(鄭苯)의 건의로 처음에는 나무 울타리로 만든 목책성(木柵城) 형태로 세워졌다.[2] 이후 1452년(문종 2) 정분이 다시 목책을 돌로 쌓은 석성(石城)으로 개축할 것을 건의했으며, 여러 차례 논의를 거쳤다. 1455년(세조 1)부터 본격적으로 축성이 추진되어, 기존 목책 위치에서 5리 떨어진 곳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1459년(세조 5)에 완공되었다.[2] 이곳은 왜구 방어를 위한 핵심 거점이었기 때문에,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의 지휘 아래 울산경주 지역의 병사 3백 명이 3개 조로 나뉘어 교대로 주둔하며 방어 임무를 수행했다.[2]

2. 3. 일제강점기 훼손

일제 강점기에 정자항의 방파제를 만들 때 이 성의 큰 돌들을 뽑아 사용하였기 때문에 훼손되었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포석보는 역사적·학술적인 보존가치가 높은 유적으로 평가받는다.[2]

3. 구조

유포석보(柳浦石堡)의 전체 둘레는 755m 정도이며, 구릉 기슭의 낮은 평지와 계곡을 안으로 삼고 그 주위를 좁게 쌓았다.[2] 현재 가장 잘 남아 있는 동문 근처 성벽의 높이는 220cm 정도이다.[2] 일제 강점기에 정자항방파제를 만들 때에 이 성의 큰 돌들을 뽑아 사용하였기 때문에 훼손이 되었으나 역사적·학술적인 보존가치가 높은 유적이다.[2]

참조

[1] 웹인용 유포석보 https://www.bukgu.ul[...] 2022-01-29
[2] 문서 현지 안내문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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