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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겸등필 수월관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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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의겸등필 수월관음도는 1730년 승려 화가 의겸이 그린 수월관음도로, 관음보살이 보타락가산에 거주하며 중생을 구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은 고려 시대 수월관음도의 형식을 계승하면서도, 정면을 향한 관음의 모습, 천의의 색채, 정병과 쌍죽의 표현 등 조선 시대 수월관음도의 특징을 보여준다. 의겸의 다른 수월관음도들과 비교했을 때, 관음의 상호는 비슷하지만 정병 위치, 대나무 표현, 인물 배치 등에서 차이를 보이며, 이는 의겸의 뛰어난 필력을 보여주는 증거로 평가받는다. 의겸은 18세기 전반 전라도와 경상남도 지역에서 활동했으며, 그의 화풍은 채인과 긍척 등에게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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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겸등필 수월관음도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의겸등필 수월관음도
명칭의겸등필 수월관음도
구분보물
지정 번호1204호
지정일1994년 7월 29일
시대조선시대 1730년 (조선 영조 6년)
소유자국유
관리자국립중앙박물관
소재지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참고규모·양식 : 105.5×143.7cm, 재료 : 비단채색

2. 수월관음도

관음은 자비를 상징하는 보살로, 중생을 고난에서 안락의 세계로 이끌어 준다. 수월관음도에는 관음이 사는 정토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이 그림은 가로 105.5cm, 세로 143.7cm 크기이다. 머리에 크고 높은 보관을 쓴 관음의 얼굴과 이목구비는 둥글고 예쁘게 묘사되어 화면 중앙을 가득 채운다. 건장한 신체로 어깨가 벌어지고 넓고 큰 하체를 가지고 있다. 옷은 녹색과 붉은색이 대비를 이루지만 약간 색이 바래 보인다. 관음의 오른쪽 바위 위에는 버들가지가 꽂힌 화병이 있고 왼쪽에는 한 쌍의 대나무가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 그림과 유사한 구도이다. 고려와 비교하면 배치 구도는 비슷하지만, 정면을 바라보는 관음의 모습과 옷 색깔, 바위 형태 등은 많이 달라진 모습으로 조선시대 특징을 보인다.

영조 6년(1730)에 18세기 최고의 승려화가인 의겸이 그린 이 수월관음도는 당대 최고의 작품이다. 특히 고려 때에는 수월관음도가 많이 그려졌으나 조선시대에는 찾아보기 힘든 매우 귀한 것으로 회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관음보살에 대해 언급하는 대표적인 경전으로는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과 《화엄경(華嚴經)》의 입법계품(入法界品)이 있다. 여기에 따르면 관음보살은 남쪽의 보타락가산(補陀洛迦山)에 살면서 중생을 제도하며, 그곳에는 온갖 보배와 꽃, 과일이 풍부하고 바다를 접하고 있다고 한다. 입법계품에는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찾아다니는 선지식(善知識)의 하나로 관음보살이 나오는데, 이러한 장면을 그린 것이 바로 수월관음도이다.

수월관음도고려불화(高麗佛畵)의 주요 도상(圖像)으로 채택되어 많은 사례를 남겼으나, 조선시대에는 흔하게 접할 수 없는 불화 중 하나이다.

이 수월관음도는 관음상이 화면 가득히 그려지고 있으며, 얼굴은 둥글고 이목구비가 예쁘게 묘사되고 있다.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는데, 고려시대의 수월관음도가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점과 차이를 보인다.

보관은 높고 큼직하며, 화려한 얼굴이나 신체는 건장하여 어깨가 벌어지고 넓고 큰 하체를 지니고 있으며, 유희좌(遊戱座)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수월관음이 후덕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반하여 이 그림의 수월관음은 예쁜 여인네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관음의 오른쪽 화면에 버들가지를 꽂은 정병(淨甁)을 바위 위에 그려 넣고 있으며, 왼쪽 화면에 쌍죽(雙竹)이 솟아있는 형태는 고려시대의 형식을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관음을 향하고 있는 동자상이 화면의 좌측 구석이 아니라 정병 바로 아래에 묘사되고 있음은 고려불화의 일반적인 경향과 차이를 보인다.

수월관음의 광배는 두광과 신광을 모두 갖추고 있는데, 두광은 대보름달 같은 원형으로 그려지고 밝은 녹색으로 채색되어 화면에서 돋보이도록 처리되고 있다. 신광 또한 원형으로 그려져 있으나 배경색과 동일하게 채색되어 있으며, 테두리에만 백색 선으로 경계를 표현하여 배경이 되는 산수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천의(天衣)의 색채는 녹색과 홍색을 주조색으로 사용하면서도 상호 대비효과를 보여주고 있으나 현재의 색채는 다소 퇴색되어 있다.

이 그림은 영조 6년(1730)에 당대 최고의 승려 화가로 일컬어지는 의겸에 의해 제작되었다. 이외에도 숙종 29년(1703)에 제작된 경남 고성의 운흥사(雲興寺) 수월관음도, 경종 2년(1723)에 제작된 전남 여수의 흥국사(興國寺) 원통전 관음보살도가 의겸이 제작한 것으로 서로 비교하여 참고할 수 있다.

이들 세 작품은 수월관음도의 형식을 취하면서 관음의 얼굴이 모두 예쁘게 묘사되는 등 매우 흡사한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병의 위치, 암좌에 표현된 대나무, 그리고 동자 등의 인물 배치에서 서로 다른 점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이는 의겸이 불화를 제작함에 있어 동일한 초본을 바탕으로 제작하지 않았거나, 또는 동일한 주제의 불화라도 똑같은 형태로 제작하기를 꺼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는 결국 의겸이 필력이 뛰어난 화승(畵僧)이었음을 보여준다.

의겸은 18세기 전반 전라지역을 중심으로 경상남도 일부지역에서도 크게 활약했던 화승으로 30여 점의 많은 작품을 남겼다. 한편 그의 화풍은 채인(彩仁)ㆍ긍척(亘陟) 등에게 전하여 계승되었다.

수월관음도는 고려시대 수월관음도를 계승하면서도 정면을 향하고 있는 수월관음의 형태, 천의의 색채, 정병이나 쌍죽, 그리고 암좌의 형태 등에서 색다른 조선시대 수월관음도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당대의 최고 승려 화가 의겸이 그린 3점의 수월관음도 중 하나이면서도 형태를 달리하여 제작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고 평가받고 있다.

3. 의겸의 수월관음도

18세기 최고의 승려 화가 의겸은 영조 6년(1730)에 이 수월관음도를 그렸다. 이 작품은 고려 수월관음도의 형식을 계승하면서도 정면을 향한 관음의 자세, 천의(天衣) 색채, 정병(淨甁)과 쌍죽(雙竹) 및 암좌 형태 등에서 조선시대 수월관음도의 특징을 보여준다.[1]

의겸은 18세기 전반 전라도와 경상남도 일부 지역에서 활약한 화승으로, 30여 점의 작품을 남겼으며 그의 화풍은 채인, 긍척 등에게 계승되었다.[1] 고려 시대에는 수월관음도가 많이 그려졌으나 조선 시대에는 찾아보기 힘든 매우 귀한 것으로 회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3. 1. 작품의 특징

수월관음도조선 영조 6년(1730) 당대 최고의 승려 화가 의겸이 그린 작품이다. 고려 수월관음도의 형식을 계승하면서도, 정면을 향한 관음의 자세, 천의(天衣) 색채, 정병(淨甁)과 쌍죽(雙竹) 및 암좌 형태 등에서 조선시대 수월관음도의 특징을 보여준다. 의겸이 그린 다른 수월관음도들과 비교했을 때, 세부 묘사에서 차이를 보여 독자적인 가치를 지닌다.[1] 의겸은 18세기 전반 전라도와 경상남도 일부 지역에서 활약한 화승으로, 30여 점의 작품을 남겼으며 그의 화풍은 채인(彩仁)과 긍척(亘陟) 등에게 계승되었다.[1]

3. 1. 1. 도상 및 구도

관음은 중생을 고난에서 안락의 세계로 이끄는 자비를 상징하는 보살이며, 수월관음도에는 관음이 사는 정토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이 그림은 가로 105.5cm, 세로 143.7cm 크기로, 머리에 크고 높은 보관을 쓴 관음의 얼굴과 이목구비가 둥글고 예쁘게 묘사되어 화면 중앙을 가득 채우고 있다. 건장한 신체에 어깨가 벌어지고 넓고 큰 하체를 가지고 있다. 옷은 녹색과 붉은색이 대비를 이루지만 약간 색이 바래져 보인다. 관음의 오른쪽 바위 위에는 버들가지가 꽂힌 화병이 있고 왼쪽에는 한 쌍의 대나무가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 그림과 유사한 구도이다. 고려와 비교하면 배치 구도는 비슷하지만, 정면을 바라보는 관음의 모습과 옷 색깔, 바위 형태 등은 조선시대의 특징을 보여준다.[1]

수월관음도고려불화의 주요 도상으로 많이 그려졌으나, 조선시대에는 흔하지 않다. 이 수월관음도는 관음상이 화면 가득히 그려져 있고, 얼굴은 둥글고 이목구비가 예쁘게 묘사되어 있다.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는데, 이는 하단을 내려다보는 고려시대 수월관음도와 차이를 보인다.[1]

보관은 높고 크며 화려하고, 신체는 건장하여 어깨가 벌어지고 넓고 큰 하체를 지니고 있으며, 유희좌(遊戱座) 자세를 취하고 있다. 고려시대 수월관음이 후덕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그려진 반면, 이 그림의 수월관음은 예쁜 여인 모습으로 표현되었다.[1]

관음 오른쪽 화면에 버들가지를 꽂은 정병(淨甁)을 바위 위에 놓고, 왼쪽 화면에 쌍죽(雙竹)이 솟아있는 묘사는 고려시대 형식을 계승한다. 그러나 관음을 향하는 동자상이 화면 왼쪽 구석이 아닌, 정병 바로 하단에 묘사된 점은 고려불화와 다르다.[1]

수월관음의 광배는 두광과 신광을 모두 갖추고 있다. 두광은 둥근 보름달처럼 밝은 녹색으로 칠해져 화면에서 돋보인다. 신광 또한 원형이지만 배경색과 동일하게 채색하고 테두리만 백색 선으로 경계를 표현하여 배경 산수와 조화를 이룬다.[1]

천의(天衣)는 녹색과 홍색을 주조색으로 사용하면서 대비 효과를 보여주지만, 현재 색채는 다소 퇴색되었다.[1]

이 그림은 영조 6년(1730) 18세기 최고의 승려 화가 의겸이 제작했다. 의겸이 제작한 숙종 29년(1703) 경남 고성 운흥사 수월관음도, 경종 2년(1723) 전남 여수 흥국사 원통전 관음보살도와 비교할 수 있다.[1]

이들 세 작품은 수월관음도 형식을 취하면서 관음의 얼굴이 모두 예쁘게 묘사되는 등 매우 흡사하지만, 정병 위치, 암좌에 표현된 대나무, 동자 등 인물 배치에서 서로 다르다. 이는 의겸이 불화를 제작할 때 동일한 초본을 사용하지 않았거나, 같은 주제라도 똑같이 제작하기를 꺼렸기 때문일 수 있다. 이는 의겸의 뛰어난 필력을 보여준다.[1]

3. 1. 2. 색채 및 표현 기법

관음은 머리에 크고 높은 보관을 쓰고 있으며, 얼굴과 이목구비는 둥글고 예쁘게 묘사되어 있다. 건장한 신체로 어깨가 벌어지고 넓고 큰 하체를 가지고 있다. 옷은 녹색과 붉은색이 서로 대비를 이루고 있으나 약간 색이 바래져 보인다. 관음의 오른쪽 바위 위에는 버들가지가 꽂힌 화병이 있고 왼쪽에는 한 쌍의 대나무가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 그림과 유사한 구도이다. 그러나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관음의 모습과 옷의 색깔, 바위의 형태 등은 고려시대와 많이 달라진 모습으로 조선시대의 특징을 보여준다.[1]

수월관음의 광배는 머리 뒤의 두광과 몸 뒤의 신광을 모두 갖추고 있다. 두광은 밝은 녹색의 원형으로 그려져 화면에서 돋보이도록 처리되었다. 신광 또한 원형이지만 배경색과 동일하게 채색하고 테두리에만 백색 선으로 경계를 표현하여 배경이 되는 산수와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다.[1]

천의(天衣)의 색채는 녹색과 홍색을 주조색으로 사용하면서도 서로 대비 효과를 보여주고 있으나, 현재는 색채가 다소 퇴색되어 있다.[1]

이 그림은 고려시대 수월관음도를 계승하면서도 정면을 향하고 있는 수월관음의 형태, 천의의 색채, 정병이나 쌍죽, 암좌의 형태 등에서 조선시대 수월관음도의 특징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1]

3. 2. 다른 작품과의 비교

수월관음도조선 영조 6년(1730)에 당대 최고의 승려 화가로 일컬어지는 의겸이 제작하였다. 의겸이 제작한 다른 수월관음도로는 숙종 29년(1703)에 제작된 경남 고성의 운흥사 수월관음도, 경종 2년(1723)에 제작된 전남 여수의 흥국사 원통전 관음보살도가 있다. 이 세 작품은 수월관음도의 형식을 취하면서 관음의 상호가 모두 예쁘게 묘사되는 등 매우 흡사하지만, 정병의 위치, 암좌에 표현된 대나무, 동자 등의 인물 배치에서 서로 다른 점을 보여준다.[1] 이는 의겸이 불화를 제작할 때 동일한 초본을 바탕으로 제작하지 않았거나, 같은 주제의 불화라도 똑같은 형태로 제작하기를 꺼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는 의겸의 뛰어난 필력을 보여주는 점이다.[1]

의겸은 18세기 전반 전라 지역을 중심으로 경상남도 일부 지역에서도 크게 활약했던 화승(畵僧)으로 30여 점의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화풍은 채인, 긍척 등에게 전해져 계승되었다.[1]

수월관음도고려시대 수월관음도를 계승하면서도 정면을 향하고 있는 수월관음의 형태, 천의의 색채, 정병이나 쌍죽, 암좌의 형태 등에서 색다른 조선시대 수월관음도의 특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고 평가받고 있다.[1]

4. 의의와 가치

18세기 최고의 승려화가 의겸이 영조 6년(1730)에 그린 이 수월관음도는 당대 최고의 작품이다. 고려 때에는 수월관음도가 많이 그려졌으나 조선시대에는 찾아보기 힘든 매우 귀한 것으로 회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1]

수월관음도는 고려시대 수월관음도를 계승하면서도 정면을 향하고 있는 수월관음의 형태, 천의의 색채, 정병이나 쌍죽 그리고 암좌의 형태 등에서 색다른 조선시대 수월관음도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당대의 최고 승려 화가 의겸이 그린 3점의 수월관음도 중 하나이면서도 형태를 달리하여 제작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고 평가받고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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