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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제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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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제83호)은 높이 약 93cm의 금동으로 제작된 반가사유상으로, 3개의 산 모양 보관을 쓰고 있어 삼산관반가사유상이라고도 불린다. 이 불상은 7세기 전반 신라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사실적이면서 생동감 있는 조각 기법과 깊은 사색에 잠긴 듯한 얼굴 표현이 특징이다. 인도의 반가사유 자세를 본떠 만들어졌으며, 일본 교토 고류사의 목조반가사유상과 유사한 점이 많아 주목받고 있다. 1960년 이후 여러 차례 해외 전시되었으며, 2013년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전시, 2016년 고류사와의 상호 교환 전시 추진 등 관련 논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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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제83호)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한자 표기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로마자 표기Geumdong Mireuk Bosal ban-gasang
다른 로마자 표기Kŭmdong Mirŭk Posal pan'gasang
문화재 정보
국가대한민국
유형국보
지정 번호83
수량1구
주소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시대삼국시대
지정일1962년 12월 20일
문화재청 번호11,00830000,11
이미지
반가사유상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2. 작품 설명

측면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단순함을 강조한 둥근 조형감,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옷 주름 표현, 움직이는 듯 조각된 두 손과 발의 모습 등에서 사실적이면서 생동감이 잘 나타난다. 얼굴에 보이는 잔잔한 미소는 깊은 사색에 잠긴 종교적인 평온함과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천의(天衣)는 몸에 밀착되어 옷주름이 거의 표현되지 않았지만, 군의(裙衣)의 옷 주름은 두 다리를 덮으며 무릎과 다리의 볼륨감을 강조하고 대좌 위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린다. 허리 양쪽에서 내려온 옷자락은 양다리 옆 둥근 고리를 통해 늘어져 엉덩이 밑으로 감추어져 있다. 이는 경상북도 봉화에서 출토된 경북대학교 박물관 소장 석조반가상과 양식적으로 비교된다.

머리에는 삼층의 관을 쓰고 있는데, 다른 작품들에 비해 매우 단순하다. 광배는 오래전에 없어졌지만, 광배 구조 일부가 불상에 부착된 채 남아 있다. 상반신이 나체인 점도 불상의 단순함을 더한다.

이 불상은 고요한 명상과 함께 역동적인 움직임의 느낌을 준다. 인물의 비례가 완벽하고 드레이핑의 관능성은 조각가가 실제 모델을 바탕으로 제작했음을 시사한다. 다른 미륵불상들은 종종 예술적 전통에 맞추기 위해 왜곡되거나 양식화되기도 한다.

2. 1. 세부 묘사

이 불상은 둥근 받침대에 앉아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 위에 얹고, 오른손은 뺨에 대고, 왼손은 겹친 다리 위에 놓고 있다. 이러한 사색에 잠긴 자세는 불교 미술에서 인기 있는 소재였다. 높이는 약 93cm로, 3개의 둥근 산 모양의 보관(寶冠)을 쓰고 있어 ‘삼산관반가사유상’(三山冠半跏思惟像)이라고도 한다. 얼굴은 둥근 편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있어 사유하는 모습이며 양 눈썹과 콧등의 선은 길게 연결되면서 날카롭게 표현되어 있다.

금동반가상의 왼쪽 다리는 별도로 마련된 연화족좌(蓮花足座) 위에 놓여 있는데 왼쪽 발과 족좌의 앞부분은 후에 수리된 것이다. 대좌는 불상에 비해 높이가 낮은 편으로 받침대 위에 둥근 방석이 놓여 있는 특이한 등나무 의자의 형태로 되어 있다. 몸에는 두 줄로 융기된 목걸이 외에는 다른 장식이 없어 전반적으로 단순미를 강조하였다.

3. 제작 시기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균형 잡힌 신체 비례, 생동감 있고 안정감 있는 모습 등으로 보아 7세기 전반 신라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중국 동위에서 북제 시대에 유행한 반가사유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2]

최근에는 상 전체의 둥근 조형감 등이 백제적인 요소라는 점에서 백제 무왕(재위 602년-641년)대에 조성되었다는 견해도 있다.[2]

3. 1. 삼국시대의 반가사유상

반가사유상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에서 모두 만들어졌으며, 6세기 후반부터 7세기에 걸쳐 많이 제작되었다. 특히 신라에서는 청년 귀족 집단인 화랑 제도와 미륵 신앙이 결합하여 미륵보살의 화신으로서 반가사유상이 많이 만들어졌다.[2]

미륵보살반가상 (일본 고류지)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은 일본 교토 고류지에 있는 목조반가사유상과 양식상 매우 비슷하지만, 얼굴 표정이나 두 다리와 옷 주름 표현 등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일본의 목조반가상은 많은 부분이 보수되어 변형되었지만, 수리 이전의 모습을 보면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과 더 비슷하다. 고류지 반가사유상의 제작지에 대해서는 백제와 신라 두 가지 설이 있지만, 고류지를 창건한 진하승이 신라계 도래인이었다는 점이나, 신라에서 온 불상을 이 절에 모셨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은 이 상이 신라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또한, 고류지의 목조반가상이 한국, 특히 경상도에 많은 적송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은 당시 삼국과 일본과의 교류 관계를 고려할 때, 한반도, 특히 신라에서 제작되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따라서 일본의 고류지 반가상은 재질은 다르지만, 형태와 양식이 매우 비슷하여 한국 반가사유상의 국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미륵불상은 삼국 시대 조각가들과 신앙인들에게 인기 있는 주제였다. 대부분의 반가사유상 불상은 6세기 후반부터 통일신라 초기까지 100년 동안 제작되었다. 이 시기는 정치적 격변기였으며, 불교와 미륵불은 한반도 통일을 앞두고 중요한 상징적 역할을 했다.

4. 자세의 기원

반가사유 자세는 인도에서 처음 구상되어 중국을 거쳐 한국에 전래되었다. 이 자세는 석가모니가 출가하기 전 왕자였을 때 농부들이 밭을 가는 것을 보고 인간 고통의 순환적 속성을 깨달았던 순간을 묘사한 것으로, 미륵상들은 이 깨달음의 순간을 나타내고 있다.[3] 이 자세는 특히 부처가 아닌 보살의 자세가 되었다.

5. 유사한 작품

일본 교토 고류지(廣隆寺)에 있는 목조반가사유상은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과 매우 유사하여 주목받고 있다. 고류지 반가사유상은 붉은 소나무(적송)로 만들어졌으며, 《일본서기》의 기록 등을 통해 신라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4] 두 불상은 우아하고 사색적인 자세, 뛰어난 신체 비례, 사실적인 옷주름, 날씬한 체형, 간소한 삼산관 등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5. 1. 비교: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일본 교토 고류지에 있는 목조반가사유상과 양식상 매우 유사하여 주목받지만, 침울한 얼굴 표정이나 입체감이 적은 두 다리와 옷 주름 표현 등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일본의 목조반가상은 많은 부분이 보수되어 변형되었으나, 수리 이전의 모습을 보면 얼굴 표현에서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과 더욱 유사한 점을 보여준다.[4]

고류지 반가사유상의 제작지에 대해서는 백제신라 두 가지 설이 있으나, 고류지를 창건한 진하승(秦何勝)이 신라계 도래인이었다는 사실이나 신라에서 온 불상을 이 절에 모셨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은 이 상이 신라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욱이 고류지의 목조반가상이 한국, 특히 경상도에 많은 적송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은 당시 삼국과 일본과의 교류 관계를 통해 볼 때 한반도, 특히 신라에서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따라서 일본의 고류지 반가상은 목조상으로 서로 재질은 다르나 형태와 양식에서 매우 유사성을 가지고 있어 한국 반가사유상의 국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믿어진다.

일본 국보 중 하나인 교토 고류사의 미륵보살상은 거의 확실히 한국에서 만들어진 상이며, 쌍둥이 상과 같다. 이 미륵보살상은 붉은 소나무로 조각되었으며, 《일본서기》에 언급된 신라 왕이 야마토 궁정에 보낸 상일 가능성이 있다. 두 상 모두 우아하고 사색적인 자세, 비율이 뛰어난 신체, 사실적인 옷주름, 날씬한 체형, 그리고 간소한 삼각관을 공유한다.

이 상은 사색적인 자세 때문에 종종 오귀스트 로댕의 작품인 ''생각하는 사람''과 비교된다.

6. 해외 전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0년 이후 총 7차례 해외에 전시되었다.[7]

6. 1. 전시 논란

2013년 미국 뉴욕시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열린 '황금의 나라, 신라' 전에 출품되었다. 당시 문화재위원회와 변영섭 문화재청장은 '해외로 반출되는 문화재가 너무 많다'며 전시 불가 심의를 내렸으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측의 요청과 문화관광부의 개입으로 출품이 성사되었다.[7]

2016년 국립중앙박물관은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아 83호 반가사유상과 일본 고류사의 반가사유상의 상호 교환 전시를 추진했다.[7] 그러나 고류사 측 주지가 '목조반가사유상의 해외 전시는 불가하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83호 반가사유상의 일본 전시는 무산되었고, 대신 국보 78호 반가사유상과 일본 국보 23호 주구사 목조반가사유상의 교환 전시로 변경되었다.[7]

참조

[1] 뉴스 Korea's National Treasures Revealed http://english.donga[...] The Dong-A Ilbo 2005-11-21
[2] 서적 Handbook of Korean Art: Buddhist Sculpture Yekyong Publishing 2002
[3] 서적 Handbook of Korean Art: Buddhist Sculpture Yekyong Publishing 2002
[4] 뉴스 Japanese Art and Its Korean Secret http://www2.kenyon.e[...] The New York Times 2003-04-06
[5] 간행물 국가지정문화재<보물> 지정 문화재청장 2010-06-28
[6] 웹사이트 國博,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으로 교체 전시 http://news.buddhapi[...] 붓다뉴스
[7] 뉴스 '모나리자처럼'…우리에게도 죽어도 빌려줄 수 없는 국보 보물이 있다 https://news.naver.c[...] 경향신문 2020-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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