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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클리 체레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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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라클리 체레텔리는 1881년 조지아에서 태어난 러시아 제국의 사회주의 정치인이다.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 학생운동에 참여하여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났고, 1903년 조지아로 돌아와 멘셰비키에 합류했다. 1907년 러시아 제국 두마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1917년 2월 혁명 이후 러시아 임시 정부에서 우편 및 전신부 장관,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조지아의 독립 운동에 참여했으며, 1921년 볼셰비키의 침공으로 망명하여 프랑스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미국으로 이주하여 회고록을 집필했으며, 1959년에 사망했다. 체레텔리는 국제주의적 신념을 유지하며, 동시대 인물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볼셰비키 혁명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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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클리 체레텔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17년의 체레텔리
본명이라클리 기오르기스 제 체레텔리
출생일1881년 12월 2일
출생지러시아 제국 쿠타이스 현 고리사
사망일1959년 5월 20일
사망 장소미국 뉴욕 시티
안장 장소뢰빌 묘지, 파리, 프랑스
국적조지아인
로마자 표기Irakli Giorgis dze Tsereteli
러시아어 표기Irakliy Georgievich Tsereteli
정치 경력
정당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조지아 사회민주당
러시아 임시 정부 우편전신부 장관총리: 게오르기 리보프
임기 시작: 1917년 5월 5일
임기 종료: 1917년 8월
전임: 신설
후임: 알렉세이 니키틴
러시아 임시 정부 내무부 장관총리: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임기 시작: 1917년 7월 7일
임기 종료: 1917년 7월 25일
전임: 게오르기 리보프
후임: 니콜라이 아브크센티예프

2. 초기 생애 및 교육 (1881-1903)

이라클리 체레텔리는 1881년 12월 2일(구력 11월 20일) 러시아 제국 쿠타이시 현 고리사(현재 이메레티)에서 조지아 정교회 신자인 귀족 체레텔리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1] 아버지 기오르기 체레텔리는 급진적 작가였으며, 어머니 올림피아다 니콜라제는 저널리스트 니코 니콜라제의 누이였다. 체레텔리는 엘리코(1877–1950)라는 누이와 레반(1879–1918)이라는 남동생이 있었다.[1]

아버지 기오르기와 삼촌 니코는 모두 조지아의 민족주의자이자 사회 민주주의자 그룹인 ''메오레 다시''(''მეორე დასი''; "두 번째 그룹")의 일원이었다. 이들은 이라클리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2]

체레텔리는 어린 시절을 쿠타이시에서 보냈고, 가족 소유의 고리사 저택에서 여름을 보냈다.[3] 그는 어릴 때부터 가족과 하인 및 지역 농민 사이의 불평등을 인지하고 불균형을 해결하고자 했다.[4] 세 살 때 어머니가 사망하여 그와 그의 형제자매들은 쿠타이시의 두 이모에게 보내졌고, 기오르기는 코카서스의 행정 중심지인 티플리스(현재 트빌리시)로 이주하여 가끔 아이들을 방문했다.[5]

체레텔리는 나중에 티플리스로 이주하여 김나지움에 다녔다.[6] 그곳에서 그는 아르메니아계인 아나스타샤 투마노바와 재혼한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체레텔리의 전기 작가 W.H. 루볼은 체레텔리가 투마노바에 대해 거리를 두면서 기오르기가 아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감소했다고 말한다.[7] 조지아 민족주의에 대해 더 신중했던 니콜라제의 견해도 체레텔리의 이상이 변화하는 데 기여했을 가능성이 있다.[8]

김나지움에서 체레텔리는 죽음과 그 의미에 의문을 제기하며 기독교와 거리를 두었고, 영국의 자연주의자이자 생물학자인 찰스 다윈의 저서를 접하게 되면서 종교에서 멀어지게 되었다.[9] 그는 1900년에 학교를 졸업했고, 같은 해 아버지의 사망 이후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모스크바 대학교로 이주했다.[10] 모스크바 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하여 법조인을 목표로 했으나, 학생 운동에 참여하고 사회주의 서클에 가입했다. 1902년 체포되어 이르쿠츠크로 유형을 떠났다.

3. 정치 입문 및 초기 활동 (1903-1907)

1902년 학생 시위 주도로 시베리아 유형을 가게 되었고, 이 시기에 마르크스주의를 접하게 되었다.[14] 시베리아 유형은 당시 학생 시위자에게 내려진 가장 긴 형벌이었다.[14] 체레텔리는 시베리아 행정 중심지인 이르쿠츠크에서 떨어진 툴룬 마을에 도착했다가, 늦여름 무렵 이르쿠츠크로 이주하는 것이 허락되었다.[17] 이 유배 기간 동안 체레텔리는 러시아 사회 민주주의자, 특히 마르크스주의에 익숙해졌으며, 블라디미르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었지만 레닌이 옹호하는 견해는 싫어했다.[18]

1903년 조지아로 돌아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RSDLP) 조지아 지부에 합류했으며, 당내 소수 파벌인 조지아 멘셰비키로 알려지게 되었다.[19] 그는 아버지의 이전 출판물인 ''크발리'' (''კვალი''; ''추적'')의 편집자로 일하며 주요 기사를 대부분 작성했다.[20] 1904년 1월, ''크발리''는 금지되었고, 체레텔리는 체포되어 티플리스의 메테히 감옥에서 두 달을 보냈다.[20] 이후 삼촌의 영향으로 조지아를 떠나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베를린 대학교에서 법학 공부를 재개했다.[20]

1905년 러시아 혁명 발발 소식에 1906년 5월 조지아로 귀국했다.[22] 1907년 1월, 러시아 입법 선거에 출마하여 고향인 쿠타이시 현을 대표하는 사회 민주당 후보로 초청받았다.[23] 그는 동료 조지아 출신 멘셰비키 노에 조르다니아의 권유를 받았는데, 조르다니아는 나중에 회고록에서 "이것이 이라클리가 내 말을 들은 유일한 때였다"고 회상했다.[24] 조지아의 7개 의석은 모두 사회 민주당이 차지했다.[25]

제국 두마의 최연소 의원(25세)임에도 불구하고,[25] 체레텔리는 사회민주당 의원단의 주요 연설가로 활동하며 두각을 나타냈다.[26] 그는 사회 민주당의 견해를 요약하고 정부를 비판하는 세 번의 연설로 유명했다.[27] 그는 표트르 스톨리핀 총리의 농지 개혁과 관련하여 야당이 정부와 협력하지 말 것을 촉구했고, 무장 봉기를 촉구하는 것 직전에서 멈췄다.[27]

4. 체포와 시베리아 유형 (1907-1917)

정부 전복 시도 혐의로 체레텔리는 1907년 6월 3일 체포되었다.[32] 이 혐의는 스톨리핀 총리가 사회민주당원들을 두마에서 추방하고 자신의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 날조한 것이었다.[33] 11월에 체레텔리는 유죄 판결을 받고 5년 중노동형을 선고받았으나, 건강 문제로 징역형으로 감형되었다.[25]

체레텔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1년, 니콜라예프에서 4년, 알렉산드롭스키 중앙 감옥을 거쳐 1913년 가을, 시베리아 횡단 철도 지선에 위치한 우솔예로 이주했다.[34][35]

체레텔리는 시베리아 유형 기간 동안 다른 망명자들과 교류하며 정치적 논의를 이어갔다. 볼셰비키멘셰비키 모두 이 논의에 참여했고, 체레텔리는 두 파벌의 재결합을 기대했다.[36]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체레텔리는 사회주의 및 노동 정당 기구인 제2 인터내셔널이 전쟁 종식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39] 이르쿠츠크 지역의 다른 사회 민주주의자들과 함께 전쟁에 대한 견해를 토론하며 '시베리아 치머발트주의'라는 독자적인 전쟁관을 발전시켰다.[41]

체레텔리는 저널 편집을 통해 시베리아 치머발트주의자들의 멘토 역할을 했다.[42] 시베리아 치머발트주의는 전쟁에 반대하고 제2 인터내셔널을 복원하려는 이상을 기반으로 했다. 체레텔리는 "인터내셔널과 전쟁" 등의 기사를 통해, 특정 상황에서 방어 전쟁을 허용하는 입장을 밝혔다.[45]

5. 1917년 러시아 혁명과 임시 정부 (1917)

2월 혁명으로 차르가 물러나고 러시아 제국이 종식되었다는 소식이 1917년 3월 2일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자, 체레텔리는 다음 날 아침 이르쿠츠크로 출발했다.[50] 체레텔리는 지역 총독을 체포하고 이르쿠츠크를 자유 도시로 선포하는 데 참여했다.[51] 도시 운영을 위해 주요 사회 단체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결성되었고, 병사들의 소비에트(평의회)가 만들어졌다.[50] 체레텔리는 이 위원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열흘 후 사임했다. 가족과 친구들은 조지아로 돌아갈 것을 권유했지만, 체레텔리는 페트로그라드로 가서 3월 19일 또는 20일에 도착했다.[52][53]

체레텔리는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한 주요 망명 정치인 중 가장 먼저 도착하여, 기차역에서 많은 군중의 환영을 받았다.[54] 그는 즉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로 가서 혁명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지만, 사회주의 정책을 시행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경고했다.[55] 당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와 임시 정부는 모두 권위를 주장했지만, 명확한 지도자가 없었다. 소비에트는 대중의 지지를 받았지만 정부로 간주되지 않았고, 임시 정부는 합법적인 정부 후계자라고 주장했지만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56] 양측은 서로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서로가 필요했다.[57] 이 "이중 권력" 시스템은 비효율적이었지만, 양측 모두 권력을 잃을까 봐 균형을 깨뜨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58]

체레텔리는 과거 두마 의원이었기 때문에 3월 21일 소비에트의 자문 역할로 임명되었다.[59] 그는 러시아가 자국을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국방을 "혁명의 기본 원칙 중 하나"라고 불렀다.[60] 그는 독일 제국으로부터 국가와 혁명을 방어해야 하지만, 소비에트가 임시 정부에 민족 자결을 인정하고 합병을 포함하지 않는 평화 협상을 압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정책은 "혁명적 국방주의"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61] 체레텔리는 소비에트 측을 이끌어 임시 정부와 협상하여 비합병 정책을 채택하게 함으로써 소비에트 내에서 사실상 지도자가 되었다.[62]

4월 위기는 러시아의 전쟁 참여에 대한 시위와 러시아가 콘스탄티노폴 병합에 관심이 있다는 내용의 각서로 인해 발생했으며, 임시 정부의 붕괴를 초래할 뻔했다. 이는 소비에트와의 연립 정부 구성을 위한 협상을 통해 살아남았다.[64] 체레텔리는 연립 정부에 참여하는 것을 꺼렸지만, 소비에트의 지원 없이는 임시 정부가 위협에서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지지했다.[65] 체레텔리는 사회주의자들이 새 내각을 장악하면 대의명분에 해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여 15개 자리 중 6개만 차지했다.[66]

체레텔리는 내각에 들어가기 위해 만들어진 우편 및 전신부 장관직을 맡았다.[67] 그는 임시 정부 해체와 내전 발발을 막기 위해 장관직을 수락했으며, 1917년 8월까지 장관직을 수행하면서 실제 행정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소비에트에 집중했다.[68] 체레텔리는 장관 재직 기간에 대해 회고록에서 언급하지 않았고, 주목할 만한 행동은 우체국 직원들의 급여 인상 시도뿐이었다.[69] 체레텔리의 내각 내 지위는 임시 정부와 소비에트 사이의 연락 역할이었다.[67] 빅토르 체르노프는 그를 "총무 장관", 니콜라이 수하노프는 "소비에트 내 정부의 위원"이라고 불렀다.[67] 게오르기 르보프 총리에게 높이 평가받은 체레텔리는 임시 정부의 실질적인 권력을 쥔 "내부 내각"의 일원이었다.[71]

러시아 임시 정부의 두 번째 내각. 체레텔리(세 번째 줄, 맨 오른쪽; 11번)는 새 내각이 구성되기 전 2주 동안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르보프는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의 지위에 대한 내각 내 이견으로 1917년 7월 2일 총리직에서 사임했다.[73] 체레텔리는 우크라이나의 자결권을 존중하면서 러시아의 방어를 보장하는 방법을 협상하기 위해 임시 정부 대표단과 함께 키예프로 갔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인들이 자국 영토를 계속 방어하도록 허용하는 동시에 자치권을 확대했다.[74] 7월 시위가 페트로그라드에서 발생하여 임시 정부를 위협했지만, 임시 정부는 위협을 견뎌냈고,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총리직을 맡았다. 체레텔리는 르보프 사임 배후로 보았던 케렌스키를 반대했지만, 동의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76]

체레텔리는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새 내각이 구성될 때까지 2주 동안 재직했다.[77] 소비에트 내 선임에도 불구하고, 체레텔리는 총리직에서 제외되었다. 연립 정부는 개혁을 원했고, 소비에트의 영향력이 이를 막을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78] 케렌스키가 자주 부재했기 때문에, 체레텔리는 "사실상" 총리 역할을 했고, 국내 개혁을 시행하고 전국에 질서를 회복하려고 노력했다.[79] 케렌스키가 귀국하여 새 내각을 구성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체레텔리는 소비에트에 집중하기 위해 거절했다.[80] 그는 레프 트로츠키를 석방하도록 케렌스키에게 압력을 가했다. 체레텔리는 트로츠키와 볼셰비키가 카데트에 대항하여 소비에트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지원할 필요가 있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곧 볼셰비키가 소비에트를 장악하도록 지시하여 체레텔리를 축출했다.[81]

6. 조지아 귀환과 독립 운동 (1918-1921)

1918년 2월 23일, 조지아로 돌아온 체레텔리는 자캅카스 소비에트 센터에서 연설하며 러시아의 상황을 보고했다. 그는 이중 권력이 초래한 문제점을 경고하며 소비에트가 입법 기관에 권력을 넘겨야 한다고 주장했다.[90] 이는 같은 날 창설된 '자캅카스 세임'을 통해 실현되었다.[91] 체레텔리는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조지아를 포함하는 자캅카스를 오스만 제국 군대로부터 방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92] 그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강력하게 비난했는데, 이 조약은 흑해 항구 도시 바투미와 같은 자캅카스의 중요 영토를 오스만 제국에 넘기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응하여 자캅카스는 4월 14일 오스만 제국에 전쟁을 선포했다.[93]

4월 22일, 자캅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이 결성되었지만, 오스만 제국의 침략과 세 집단 간의 통일성 부족으로 인해 불안정한 상황에 놓였다.[94] 조지아인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걱정하며 독일과 협상을 시작했고, 이는 독립 국가의 형태로 나타날 것이었다. 5월 26일, 체레텔리는 세임에서 자캅카스 공화국이 국민의 단합 부족으로 인해 운영될 수 없었다고 말했다.[95] 같은 날, 조지아 지도부는 조지아 민주 공화국을 선포했다.[96] 이틀 후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과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이 뒤따르면서 자캅카스 공화국은 해체되었다.[97]

체레텔리는 1919년 2월에 선출된 제헌 의회 의원이 되었지만,[98] 조지아 정부에서 주요 직책을 맡지는 않았고, 주로 자문 역할을 수행했다.[99] 그는 조지아 내 소수 민족의 대의를 옹호하는 등, 민족 국가 이상의 국가를 원했다.[100]

니콜라이 체이체, 체레텔리와 함께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했다.


1919년, 체레텔리는 니콜라이 체이제와 함께 파리 강화 회의에 조지아 대표단을 이끌도록 요청받았다. 이들은 유럽 내 인맥과 조지아 정부 내 주요 직책이 없다는 점 때문에 대표로 선정되어 장기간 조지아를 떠날 수 있었다.[102] 이들은 조지아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많은 대표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여러 신문 인터뷰를 통해 조지아가 독립에 대한 ''법적'' 승인만을 원한다는 입장을 밝혔다.[103] 체레텔리는 이후 런던을 방문하여 영국 정부에 영향을 주려 노력했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그러나 조지아 정부는 1920년 1월 10일 ''사실상'' 승인을 받았는데, 이는 영국이 볼셰비키가 터키와 동맹하여 이 지역을 장악할 경우를 대비해 이 지역에 동맹국을 원했기 때문이다.[104]

외교적 노력을 마친 후, 체레텔리는 다시 사회주의를 옹호했다. 1920년 여름, 그는 조지아 사회 민주당을 대표하여 노동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스위스 회의에 참석하여 조지아를 사회주의 국가로서 홍보했다.[101] 또한 1920년 8월, 카를 카우츠키가 조지아에 대한 책을 연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105] 그러나 건강 문제로 인해 12월에 휴식을 취해야 했다.[106]

7. 망명과 말년 (1921-1959)

1921년 2월 그루지야의 붉은 군대 침공과 그에 따른 볼셰비키의 점령 소식을 들었을 때, 체레텔리는 프랑스에서 요양 중이었다.[107] 이 소식은 그의 건강에 해로운 영향을 미쳤고, 그는 여름 동안 프랑스 마을에서 은거했다. 그는 또한 니콜라제 숙모들이 볼셰비키 점령으로 상당한 돈을 잃었기 때문에 그들을 걱정했다. 10월에 건강이 호전되자 체레텔리는 파리로 이주하여 망명 그루지야 정부에 합류했다.[108] 망명 생활에서 그는 검소하게 살았고, 프랑스에 머무는 것에 빠르게 지쳐 여행할 기회를 즐겼다. 1926년 치헤이제의 자살은 체레텔리에게 심오한 영향을 미쳤고, 망명 생활에 대한 그의 혐오감을 악화시켰다.[109]

그는 서방 사회주의 정당들이 그루지야에 대해 "플라톤적 태도"를 취하고 곤경에 처한 국가에 충분한 지원을 제공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매우 분개하여 볼셰비즘을 문제의 원인으로 계속 여겼지만, 볼셰비키 정권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108] 그는 국제 회의에 계속 참석하여 이 조직이 더 강력한 반볼셰비키 입장을 채택하도록 노력했지만 성공은 제한적이었다.[113] 그는 베를린에서 열린 세 개의 인터내셔널 회의에 참석했고, 그루지야 문제가 주요 주제였다.[114] 1928년까지 볼셰비키 내부의 갈등이 끝나면서, 체레텔리는 그들이 그렇게 쉽게 권력에서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루지야로 돌아가려는 그의 희망은 사라졌다.[115]

체레텔리는 점차 동료 그루지야 망명자들과 거리를 두었고, 자유주의 민족주의자 주라브 아발리슈빌리와 사회 민주주의자 노에 조르다니아 모두에게 반대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그루지야 정치에 대해 해외에서 광범위하게 글을 썼다.[116] 체레텔리는 그루지야 독립을 위한 투쟁 원칙을 받아들였지만, 볼셰비키 지배가 러시아 지배와 실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조르다니아 및 다른 그루지야 망명자들의 견해를 거부했다. 또한 그는 러시아와 그루지야 반볼셰비키 사회주의자들 간의 긴밀한 협력을 주장했지만, 그루지야 민족주의자들과의 협력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체레텔리는 동료 망명자들 사이에서 고립되었고, 정치 활동에서 크게 물러났다.[117] 보이틴스키가 미국으로 초청하자, 체레텔리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인 1948년에 마침내 이주했다. 컬럼비아 대학교는 그에게 회고록을 완성해 줄 것을 요청했고, 그는 1959년 사망할 때까지 이 작업을 계속했다.[118] 1973년, 그는 파리 근처의 르빌 묘지에 다시 묻혔다.[119]

8. 정치적 견해 및 유산

체레텔리는 평생 동안 국제주의적 신념을 유지했으며, 러시아 제국 내 민족들이 단결하여 사회주의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26][120] 그의 사상은 스승인 파벨 악셀로트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121] 1902년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은 후에는 레닌의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했다.[18] 1920년대에 다른 조지아 멘셰비키들이 민족주의적으로 변모했을 때도, 체레텔리는 국제주의적 입장을 고수하여 갈등을 겪었다.[101]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시베리아 유배지에서 '시베리아 치머발트주의'라는 독자적인 노선을 제시했다.[123] 이는 1915년 짐머발트 회의에서 제시된 사회주의적 전쟁관을 바탕으로, 특정 상황에서 방어 전쟁을 허용하는 입장이었다.[124] 체레텔리는 벨기에만이 이러한 기준에 부합한다고 주장했다.[124]

동시대인들은 체레텔리를 높이 평가했다. 레닌은 그를 "혁명의 양심"이라 칭했고,[125] 트로츠키는 "도덕적 권위가 강한 훌륭한 연설가"라고 평가했다.[126] 르보프는 "소련의 유일한 진정한 정치가"라고 불렀다.[127] 그러나 체레텔리는 1917년 10월까지 볼셰비키를 과소평가하여 10월 혁명을 막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128] 동시대 마르크스주의자인 게오르기 플레하노프는 "체레텔리와 그의 친구들은 스스로 알지도, 바라지도 않으면서 레닌을 위한 길을 준비했다"고 말했다.[128]

렉스 A. 웨이드는 체레텔리가 케렌스키나 밀류코프만큼 서방에 알려지지 않아 주목받지 못했다고 언급했다.[129] 로볼은 체레텔리의 정치 경력을 "급격한 부상, 짧은 리더십 기간, 그리고 점진적인 정치적 고립"으로 요약했다.[13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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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서적 My Life: An Attempt at an Autobiography Penguin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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