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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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락은 후한 말 백파군의 지휘관 출신으로, 헌제가 이각과 곽사의 난을 피해 낙양으로 향할 때 동승, 한섬, 호재와 함께 헌제를 호위했다. 그는 헌제를 따라 안읍으로 이동하여 정북장군에 임명되었으나, 헌제가 낙양으로 입성한 후 하동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헌제를 호위하는 역할로 등장하지만, 실제 역사와는 달리 악행을 저지르고 서황에게 죽는 인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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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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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원래는 한섬, 호재와 함께 하동 백파군(백파적)의 지휘관(두목)이었다.
흥평 2년(195년), 이각·곽사의 난에서 헌제가 장안을 탈출하여 낙양으로 향했을 때 동승·양봉(양봉도 원래는 백파군 지휘관)은 백파군을 초청했다. 이락은 한섬, 호재와 함께 이에 응하여 이각, 곽사의 추격으로부터 헌제를 호위했다. 이때 이락은 동승과 함께 헌제의 좌우에서 시중을 들고, 횃불을 밝혀 도하의 선두를 서는 등 비교적 활약이 두드러졌다. 낙양으로 가는 도중에 헌제가 안읍을 임시 수도로 삼았을 때 이락은 정북장군에 임명되었다. 건안 원년(196년) 7월, 헌제는 낙양에 입성했다.
그러나 헌제의 낙양 입성 후 이락은 호재와 함께 하동으로 돌아갔다. 그 후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이락은 하동 주둔 중에 병사했다.
2. 1. 황제 구원
195년(흥평 2년) 11월(음력), 장안을 나와 동쪽으로 향하던 헌제 일행은 여러 사건으로 인해 이각, 곽사, 장제의 습격을 받았다.[1] 이를 호위하던 흥의장군(興義將軍) 양봉과 안집장군(安集將軍) 동승은 큰 피해 끝에 간신히 조양간(曹陽澗)에 닿아서는 하동군에 있던 옛 백파적 이락, 한섬, 호재, 그리고 남흉노의 거비(去卑)에게 구원을 청했다.[1] 이락은 한섬, 호재와 함께 이에 응하여 이각 등을 물리치고 수천 명을 참수하였다.[1] 이때 이락은 동승과 함께 헌제의 좌우에서 시중을 들고, 횃불을 밝혀 도하의 선두를 서는 등 비교적 활약이 두드러졌다.[1]2. 2. 황하 도하
섣달, 이각 등이 다시 추격해와 헌제 일행은 크게 패했다.[2] 이락은 “사세가 급박하니 폐하께선 말에 오르셔야 합니다!”라고 외쳤으나, 헌제는 백관들을 버릴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2] 많은 사람이 죽고 홍농군 섬현(陝縣)까지 내몰렸다.[2] 호분과 우림은 채 백 명도 남지 않았는데 이각 등이 둘러싸고 함성을 지르니 관리와 병사들은 실색해 사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2] 이락은 두려워 황하에 배를 띄워 물길을 타고 지주(砥柱)를 지나 맹진(孟津, 盟津)으로 나가자고 하였다.[2] 태위 양표는 “신은 홍농 사람입니다. 여기서부터 동쪽으로는 36개의 여울이 있어 천자가 갈 만하지 않습니다.”라며 반대했고,[2] 종정(宗正) 유애(劉艾)도 자신이 섬현령이었을때 그 위험을 경험했기에 지금은 군사도 없으니 더욱 위태롭다며 반대하였다.[2]결국 야음을 틈타 황하를 도하하기로 하고, 이락은 먼저 북쪽으로 건너가 선박을 구한 후 불을 피워 신호하였다.[2] 강안 절벽은 십여 장(丈) 높이였다.[2] 혹자는 기어 내려오다가 혹자는 뛰어내리다가 죽거나 다쳤으며, 가까스로 내려온 자들은 저마다 배에 오르려 발버둥 쳤다.[2] 동승과 이락이 매달린 손가락들을 내리쳐서야 배가 겨우 나아갈 수 있었다.[2] 잘린 손가락들이 나뒹굴고, 동사하거나 익사한 이들도 허다하여 그 참혹함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다.[2] 비록 수십 인밖에 남지 않았지만 마침내 하동군 대양현(大陽縣)을 거쳐 안읍현(安邑縣)에 당도하였다.[2]
2. 3. 하동 주둔
헌제 일행은 하동군 대양현(大陽縣)과 안읍현(安邑縣)에 도착하여 하내태수 장양에게 쌀을, 하동태수 왕읍(王邑)에게 비단을 공급받았다. 이락, 한섬, 호재는 모두 장군직에 가절(假節)을 받았으며 삼공처럼 개부하였다.[2]196년(건안 원년), 동승과 장양은 헌제의 환도에 적극적이었으나, 양봉과 이락은 소극적이었다.[3] 호재와 이락은 하동군에 남았고,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3.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13회에 동승·양봉의 구원 요청에 응하면서 첫 등장한다. 이락의 군병들은 위양(渭陽)에서 곽사군이 길에 뿌린 물건에 정신이 팔리는 바람에 이각·곽사에게 격파된다. 헌제 일행은 이들에게 쫓겨 황하 기슭에 이르고, 이락은 헌제와 복황후가 타고 건널 작은 배 한 척을 찾아낸다. 배로 내려가지 못한 자들이 계류삭을 잡아당겨 배가 못 나가자 모두 베어 물속에 떨어뜨린다. 대양에 다다라 정북장군에 임명된다.
안읍현에 도달한 후 한섬과 연명으로 묵형을 받은 이, 부곡(部曲), 무의(巫醫), 주졸(走卒) 200여 명을 교위(校尉)나 어사(御史) 등의 관리로 추천한다. 동승과 양봉은 낙양으로의 환도에 나선다. 이락은 따르지 않고 남아서는 이각·곽사와 협동해 헌제를 겁략하려 한다. 동승·양봉·한섬이 이를 알고는 속히 기관(箕關)으로 향한다. 이락도 이각·곽사를 기다리지 않고 진군해서는 이들을 사칭한다. 제14회, 양봉의 부하 서황에게 단 1합 만에 도끼를 맞고 사망한다.
《삼국지연의》에서 이락은 양봉의 초청을 받아 헌제를 호위하는 부분까지는 사적과 동일하다. 그러나 강을 건너는 중에 필사적으로 배에 매달리는 관리들의 손을 창으로 쳐서 자르는 등, 포악무도한 모습을 보인다. 안읍에 도착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낙양으로 향할지를 두고 양봉과 대립한다. 이락은 배신하여 이각·곽사와 동맹을 맺고 낙양으로 출발한 헌제를 빼앗으려 하지만, 양봉의 부하 서황에게 참살당하는 역할로 나온다.
그러나 사적에서는 관리들을 쳐서 죽인 것은 '''동승'''이며, 배신하여 서황에게 참살당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완전한 창작에 불과하다.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연의》의 이락은, 동승이나 다른 백파군 출신 무장들의 악행을 뒤집어 씌운 것이다. 그러나 상술한 바와 같이, 사적의 이락은 그 정도로 내부 항쟁에 휘말리지 않았으며, 헌제의 도피 행적에 관여한 요인 중에서는 비교적 평온하게 일생을 마친 인물이었다.
4. 평가
4. 1. 긍정적 평가
4. 2. 부정적 평가
4. 3. 종합적 평가
참조
[1]
서적
《후한서》동탁전, 《[[삼국지]]》무제기, 원굉의 《후한기》에서는 [[우현왕]]
[2]
서적
이때의 관직명은 사서마다 제각각이라 전모를 알 길이 없다. 《삼국지》 동탁전에서는 한섬이 정동장군(征東將軍), 호재가 정서장군(征西將軍), 이락이 정북장군(征北將軍)을, 《후한서》 동탁전에서는 호재만이 정동장군을, 《후한기》 28권에서는 호재가 정북장군, 이락이 정서장군, 한섬이 정동장군을 받았다고 하였다.
[3]
서적
《후한기》2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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