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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리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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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베리아 왕국은 813년 아쇼트 1세가 클라르제티 공국에서 건국한 왕국이다. 아랍의 침략과 전염병으로 황폐화된 조지아 지역 재건을 위해 노력했으며, 비잔티움 제국과 동맹을 맺어 주변 지역을 정복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아쇼트 1세 사후 분열을 겪었으나, 내부 분쟁과 압하지야의 지배를 거쳐 바그라트 2세가 쿠로팔라테스로 즉위하며 타오 지역을 통치했다. 이후 다비트 3세의 통치 하에 조지아 통일의 기반을 다졌고, 1008년 바그라트 3세가 타오 공국과 압하지야를 모두 차지하면서 통일 조지아 왕국을 건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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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리아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이베리아 왕국 영역
이베리아 왕국(빨간색 선)의 영역
기본 정보
현지 이름ქართველთა სამეფო
로마자 표기kartvelta samepo
일반 명칭이베리아 왕국
다른 표기ქართლის სამეფო
kartlis samepo
존속 기간 시작888년
존속 기간 끝1008년
이전 국가이베리아 공국
계승 국가조지아 왕국
다른 계승국비잔티움 제국
국기 그림Kartli_-_drosha_jvari.svg
수도아르다누지
바나
공용어중세 조지아어
종교조지아 정교회
정부 형태공국
(c. 813~888)
봉건군주제
(888 ~ 1008)
시대중세 초기
정치
지도자 칭호공작
 •813–826
 •826–876
 •876–881
 •881–888

 •888–923
 •923–937
 •937–945
 •958–994
 •994–1008
지도자 이름
아쇼트 1세
바그라트 1세
다비트 1세
아다르나제 4세

아다르나제 4세
다비트 2세
바그라트 1세
바그라트 2세
구르겐
역사
사건건국
사건 날짜888년
계승조지아 왕국으로 계승
계승 날짜1008년
오늘날
국가조지아
터키

2. 역사

813년, 바그라티온 왕조의 아쇼트 1세는 클라르제티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바흐탕 1세가 건설했다고 전해지는 아르타누지 성을 재건하고 비잔티움의 보호를 받으며 이베리아의 왕자이자 쿠로팔라테스로 인정받았다. 아쇼트 1세는 아랍인들과 싸우며 주변 지역을 점차 아랍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했다.[1] 그는 조지아인들의 재정착을 장려하고 칸드즈타의 그레고리가 시작한 수도원 생활을 후원했다. 이로 인해 이베리아의 정치 및 종교 중심지는 이베리아 중부에서 남서쪽 타오-클라르제티로 이동했다.[1]

카프카스의 아랍 에미르들이 독립적으로 성장하면서, 칼리프는 트빌리시 에미르에 대항하기 위해 아쇼트를 이베리아의 왕자로 인정했다. 아쇼트는 압하지아의 테오도시우스 2세와 동맹을 맺고 에미르와 싸워 승리했다.[1]

아쇼트 1세 사후 그의 영지는 세 아들 사이에 분할되었다.

아들통치 지역비고
아다르나세 2세수도 아르타누지, 샤브셰티, 서부 클라르제티대공
바그라트 1세콜라, 타오 대부분아쇼트 영토의 전략적 핵심
구아람삼츠케, 자바케티, 트리아레티(카르틀리 서부)통치자 칭호



850년 카프카스(독일어).


아쇼트 사후 아랍인들은 카르틀리(이베리아 중부)를 점령하고 세금을 요구했다. 바그라트 1세는 칼리프와 동맹을 맺고 트빌리시 에미르국 등에 대항했다. 853년 그는 이베리아 중부를 잠시 되찾았으나, 압카지아인들이 그를 몰아냈다.

구아람은 확장 정책을 추구했다. 880년 그는 트빌리시의 아랍 에미르를 체포하여 콘스탄티노플로 압송했고, 이 승리로 트리아레티와 자바케티를 얻었다. 876년 이전에 구아람은 자신의 영지 일부를 형제들에게 넘겨주고 수도원으로 은퇴했다.[2][3][4]

리파리트는 클데카르니 요새를 건설하여 876년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구아람의 조카인 다비트 1세의 종주권 하에 들어갔다. 이로 인해 구아람의 아들 나스라는 상속 재산을 잃게 되었고, 881년에 사촌 다비드 1세를 살해하게 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나스라는 비잔티움 영토로 도망쳤고, 아르메니아의 아쇼트 1세는 아다르나세 4세를 지지했다. 결국 나스라는 아스핀자에서 패배하여 처형당했다.[2][3][4]

아다르나세가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비잔티움 황제는 그의 사촌인 타오의 구르겐 1세를 쿠로팔라테스로 임명했다. 아다르나세는 하 타오 지역에서 확장 정책을 시작했다. 아다르나세와 구르겐 사이의 관계는 긴장이 고조되어 전쟁으로 악화되었다. 891년에 구르겐은 아다르나세에게 치명상을 입고 포로로 잡혔다. 비잔티움 정부는 891년 구르겐이 사망하자 아다르나세를 쿠로팔라테스로 인정했다.[5]

아다르나세는 아쇼트 1세에게 충성했고, 899년 직접 왕관을 씌워주었다. 904년에 아다르나세는 콘스탄틴 3세를 사로잡아 슴바트에게 넘겼다. 그러나 슴바트는 아다르나세의 세력 성장을 견제하여 포로를 석방했다. 이로 인해 아다르나세는 슴바트에게 등을 돌렸고, 904년 콘스탄틴 3세에게 쫓겨났다. 슴바트는 914년 사지드 왕조에게 패배하여 죽임을 당했다.[5] 아다르나세는 타오에 있는 바그라티드 가문의 상속지에 머물게 되었다. 이것은 거의 60년간 이베리아를 지배한 압카스의 시작이었다.

아다르나세가 죽자 그의 소유지는 그의 아들들 사이에 분할되었다.

아들통치 지역비고
다비트 2세자바케티와 아르타아니내부 이베리아는 압카스 지배
아쇼트 2세타오 하부, 파시아네파시아네는 952년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양도
바그라트 1세타오 상부구르겐 2세 사망 후 획득
슴바트 1세형 아쇼트 2세 사망 후 획득



압카스의 게오르기 2세는 이베리아에 대한 지배권 유지를 목표로 팽창주의 정책을 계속했다. 917년, 그는 아들 콘스탄틴을 이베리아의 총독으로 임명했지만, 3년 후 콘스탄틴은 아버지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켰다. 게오르기 2세는 이베리아로 진입하여 콘스탄틴을 유인하여 눈을 멀게 하고 거세했다. 게오르기 2세는 또 다른 아들 레온을 임명했다. 게오르기 2세는 바그라티드 왕가와 동맹을 맺고 딸을 바그라트 2세의 아들과 결혼시켰다.

다비드 3세 쿠로팔라테스 왕(현재 터키 에르주룸 주)의 부조.


958년, 슴바트 1세의 아들 바그라트 2세는 아버지의 작위를 계승하여 하부 타오만을 통치했다. 바그라트는 다비드 3세와 협력하여 라와디드 왕조에 대항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다비드는 비잔티움 황제 바실 2세와 동맹을 맺어 반란을 일으킨 귀족을 격파하였다(976~979). 그 공로로 광대한 영토를 하사받아 남 코카서스에서 가장 강력한 통치자가 되었다.[7] 987~989년 비잔티움 제국과의 분쟁으로, 다비드는 사후 그의 영토를 바실 2세 황제에게 양보하는 데 동의해야 했고, 이후 그의 영토는 이베리아 테마로 편입되었다.

다비드는 바그라트(미래의 국왕)를 입양했다.[8] 975년 다비드는 그를 카르틀리(중앙 이베리아)에 거주하는 왕자로, 나중에는 압카스의 왕(978)으로 임명했고, 994년 바그라트 2세 사망 후 바그라트의 친부 구르겐이 이베리아 왕으로 즉위하도록 도왔다. 1001년 다비드의 사망 후 구르겐과 바그라트는 바실과 만났지만, 다비드의 영토가 비잔티움 제국에 병합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새로운 국경을 인정해야 했다.

1008년 바그라트 3세는 아버지 구르겐이 사망하자 통일된 조지아 왕국의 첫 번째 통치자가 되었다. 바그라트의 통치 기간은 수 세기 동안 지속된 권력 투쟁에서 조지아 바그라티드 왕조의 최종 승리를 가져왔다.[7] 바그라트는 왕족들의 자치권을 없애거나 최소한 축소시켰다. 그의 눈에는 가장 큰 내부 위협은 왕의 사촌인 숨바트와 구르겐이 이끄는 바그라티오니 가문의 클라르제티 계열이었다. 바그라트는 화해 회의라는 구실로 사촌들을 파나스케르티 성으로 유인하여 1010년에 감옥에 가두었다. 숨바트와 구르겐은 1012년까지 감옥에서 사망했다.

2. 1. 건국

813년, 바그라티온 왕조의 시조 아다르나세 1세의 아들 아쇼트 1세는 클라르제티 지역에 공국을 건국했다. 그는 5세기에 바흐탕 1세가 건설했다고 알려진 아르타누지 성을 복구하고,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이베리아의 통치자이자 쿠로팔라테스로 인정받으면서 점차 주변 지역을 정복해나갔다.[10]

아쇼트 1세는 아랍인의 침략과 전염병으로 황폐해진 조지아 지역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칸츠타의 그레고리가 세운 지역 수도원 공동체를 후원하고, 조지아인들의 정착을 장려했다. 그 결과 이베리아의 정치적·종교적 중심지는 중부 이베리아에서 남서쪽의 타오-클라르제티로 이전되었는데, 이곳은 오랫동안 문화적 안전지대이자 조지아의 가장 중요한 종교 중심지 중 하나였다.[10]

캅카스 지역의 아랍 토후국들이 독립적으로 성장하자, 아바스 칼리파는 아쇼트 1세를 이베리아의 왕으로 인정하고 트빌리시 토후국의 아미르 이스마일 이븐 슈아이브에 맞서도록 했다. 트빌리시 토후국은 카헤티의 그리고리 왕과 조지아 고원 지대의 차나르족의 지원을 받아 아쇼트 1세에게 대항했다. 810년대 후반, 아쇼트 1세는 압하지야 왕국의 테오도시우스 2세와 동맹을 맺고 크사니 강에서 승리하여 중부 이베리아에서 카헤티 세력을 몰아냈다.[10] 그러나 아르메니아의 아바스 총독 칼리드 이븐 야지드 알 샤이바니가 827년 ~ 828년경 동부 이베리아로 쳐들어오자, 아쇼트 1세는 타오-클라르제티 지역으로 후퇴하였다.

2. 2. 분열

아쇼트 1세가 죽자 그의 영토는 세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아들통치 지역비고
아다르나제 2세수도 아르타누지, 샤브셰티, 서부 클라르제티대공 (에리스타브-에리스타비)
바그라트 1세콜라, 타오 대부분아쇼트 1세 영토의 전략적 핵심 지역
과람삼츠헤, 자바헤티, 카르틀리 서부통치자 칭호 소유



아쇼트 사후, 아랍인들은 카르틀리 지역을 점령하고 공물을 요구했다. 바그라트 1세는 트빌리시 토후국과 카헤티 공국에 맞서 아바스 칼리파국과 동맹을 맺었다. 853년 아바스 장군 부그하 알 카비르와 함께 카르틀리를 수복했으나, 압하지야인들의 침입으로 축출되었다. 876년 바그라트 1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다비트 1세가 공작위를 계승했다.

869년 아다르나제 2세가 죽자, 그의 아들들인 구르겐 1세와 슴바트 1세가 각각 타오, 클라르제티를 물려받았다.

과람은 적극적인 확장 정책을 펼쳤다. 880년 그는 트빌리시 토후국의 가불로트를 사로잡아 콘스탄티노플로 보냈다. 876년 이전에 과람은 영토 일부를 형제들에게 넘겨주었고, 882년 사망 후 오피자 수녀원에 묻혔다. 사후 그의 아들 나스라가 공작위를 계승하였다.

2. 3. 내부 분쟁

876년, 리파리트가의 리파리트는 트리알레티 산맥에 클데카리 요새를 건설하고 그 일대를 중심으로 공국을 건국한 다음 다비트 1세에게 복속했다. 이는 나스라에게 실질적인 유산을 남기지 않아, 881년 그가 다비트 1세를 살해하는 음모를 꾸미게 된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11][12][13] 나스라는 다비트 1세 살해 후 비잔티움 영토로 도망쳐 자신의 형부인 클라르제티의 바그라트 1세와 만났다. 이들은 곧 비잔티움 제국의 군사 지원을 받아 조지아 지역을 침공했다. 아르메니아의 아쇼트 1세는 캅카스 지역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다비트 1세의 아들 아다르나세를 지원하며 개입했다. 이로 인해 사촌들 간의 불화는 지역 분쟁으로 확대되었다. 나스라는 오드즈르케, 후아리스티케, 롬시안타 등의 요새를 점령했지만, 아스핀차에서 패배하여 처형당했다.[11][12][13]

아다르나세가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비잔티움 제국은 아다르나세 대신 그의 사촌 타오의 구르겐 1세를 쿠로팔라테스로 임명했다. 아르메니아와 동맹을 맺은 아다르나세는 하부 타오를 거점으로 남쪽으로 확장 정책을 펼쳐 차브체티 시를 요새화하고 에르주룸까지 세력을 넓혔다. 이후 카르틀리, 클라제티 및 타오 일부 지역을 포함한 동부 및 남부 조지아 일대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했다.

888년, 아르메니아 왕국은 아다르나세에게 이베리아의 왕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이로 인해 아다르나세와 구르겐 1세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891년 양측은 아르타아니 근처의 음글리나비에서 전투를 벌였고, 구르겐 1세는 패배하여 치명상을 입은 채 포로로 잡혔다. 구르겐 1세는 얼마 후인 891년에 사망했고, 비잔티움 제국은 현실을 인정하여 아다르나세를 쿠로팔라테스로 인정했다.[14]

2. 4. 왕국의 부활

아다르나세 4세는 아쇼트 1세와 그의 아들 슴바트 1세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890년, 아바스 총독 아흐메드 이븐 이사트가 쳐들어오자 아다르나세와 슴바트 1세는 함께 대항하기도 했으며, 904년에는 압하지야 왕국의 왕 콘스탄틴 3세를 물리치기 위해 서로 협력했다. 아다르나세는 협상하는 척하다가 콘스탄틴 3세가 방심한 틈을 타서 사로잡고는 슴바트에게 인질로 보냈다.[5]

그러나 슴바트 1세는 아다르나세의 권세가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경계하여 4개월 만에 콘스탄틴 3세를 풀어주고, 아르메니아가 쿠타이시를 다스리는 것을 용인하는 대가로 압하지야 왕국이 카르틀리를 지배하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아다르나세는 이에 분노하여 슴바트 1세를 배신자라고 비난하며 대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어진 분열과 적대 관계는 두 군주 모두에게 재앙이었다. 904년, 콘스탄틴 3세가 재차 침입하여 아다르나세의 영지를 약탈했고, 914년에는 아제르바이잔의 사지드 왕조 통치자 유수프가 쳐들어와 슴바트를 살해했다.[5] 이러한 사건들의 여파로 아다르나세는 타오 지역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약 60년에 달하는 압하지야 지배기의 시작이었다.

아다르나세가 죽자, 그의 영지는 아들들에게 나누어졌다.

아들통치 지역비고
다비트 2세자바헤티와 아르타아니내부 이베리아는 압하지야 지배
아쇼트 2세타오 하부, 파시아네파시아네는 952년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양도
바그라트 1세타오 상부구르겐 2세 사망 후 획득
슴바트 1세형 아쇼트 2세 사망 후 획득



다비트 2세는 왕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쿠로팔라테스 칭호를 받지 못하고 마기스테르라는 칭호만 받았을 뿐이었다. 따라서 그의 영향력과 위신은 동생에게 가려지게 되었다. 구르겐 2세와 다비트는 비잔티움 제국이 아르타누지를 점령하는 것을 단호히 반대하기도 했다.

2. 5. 압하지야 지배기

압하지야의 게오르기 2세(923–957)는 이베리아 통제권 유지를 주 목표로 삼고, 전임자 콘스탄틴 3세의 팽창 정책을 이어받아 주변국 정복 활동을 계속했다. 917년, 그는 반항적인 지방 귀족들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아들 콘스탄틴을 이베리아 총독으로 임명했으나, 3년 뒤 콘스탄틴은 오히려 그들과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켰다. 게오르기 2세는 곧장 이베리아로 진격하여 업리스티키를 포위했고, 콘스탄틴을 거짓으로 유인한 후 사로잡아 눈을 멀게 하고 거세했다. 이후 게오르기는 이베리아 패권을 장악하고자 또 다른 아들 레온(훗날 압하지야 왕 레온 3세)을 파견했고, 바그라티온 가문과 동맹을 맺은 뒤 그의 딸 구란두크트를 구르겐 바그라티오니(바그라트 2세의 아들)과 결혼시켰다.

2. 6. 독립



958년, 슴바트 1세의 아들 바그라트 2세가 쿠로팔라테스로 즉위하여 하부 타오 지역을 통치했다. 그는 당시 바그라티온 가문 내 인물 중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친척 다비트 3세를 도와 아제르바이잔의 라와드 왕조에 대항하기도 했다.

2. 7. 타오 지역의 공국

다비트 3세는 정의로운 통치자이자 교회의 동맹자였다. 그는 비잔티움 제국 황제 바실리오스 2세와 동맹을 맺고 반란을 일으킨 비잔티움 귀족 바르다스 스클리로스를 물리쳤다.[7] 그 대가로 유프라테스 강 상류 북서부에서 에르주룸 일대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받았다. 이 지역은 당시 조지아 기록에서 "그리스의 상부 지역"으로 알려졌다. 다비트 3세는 이 영토를 기반으로 캅카스 남부에서 가장 강력한 통치자가 되었으며, 그의 영역은 북쪽의 타오-클라르제티부터 남쪽의 반 호수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989년 바실리오스 2세와의 갈등으로 인해 그는 일부 영토(훗날의 이베리아 테마)를 비잔티움 제국에게 양도해야 했다.[8]

다비트 3세는 조지아를 통일하려는 큰 야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 국가들과의 갈등과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978년, 그는 바그라트 2세의 손자이자 자신의 양자인 바그라트를 압하지야의 군주로 임명했다. 이후 998년까지 디야르바크르의 마르완 토후국, 쿠르드족, 아제르바이잔의 라와드 왕조 등을 잇달아 격파하며 조지아 대부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001년, 다비트 3세는 귀족들에게 독살당했다. 그의 영지는 바그라트 3세와 그의 친부 구르겐에게 양도되었다. 바그라트 3세는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쿠로팔라테스 칭호를 받았고, 구르겐은 마기스테르 칭호를 받았다. 비잔티움 제국은 구르겐이 아들에게 질투심을 느껴 내분을 일으키도록 유도하려 했으나, 구르겐이 아들의 높은 지위를 인정하면서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2. 8. 통일

1008년 바그라트 3세는 아버지 구르겐이 사망하자 통일 조지아 왕국(공식 명칭: "압하스인과 이베리아인의 왕국")의 첫 번째 통치자가 되었다. 바그라트 3세의 통치 시기는 조지아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로, 수 세기 동안 이어진 권력 투쟁에서 조지아 바그라티드 왕조가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7]

바그라트 3세는 보다 안정적이고 중앙 집권화된 왕국을 만들기 위해 왕족들의 자치권을 없애거나 최소한으로 줄이고자 했다. 그의 눈에 가장 큰 내부 위협은 왕의 사촌인 숨바트와 구르겐이 이끄는 바그라티오니 가문의 클라르제티 계열이었다. 그들은 바그라트 3세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여전히 클라르제티의 왕이자 군주로 불렸다.

바그라트 3세는 자신의 아들인 게오르기의 왕위 계승을 확실히 하기 위해, 화해 회의를 명분으로 사촌들을 파나스케르티 성으로 유인하여 1010년에 감옥에 가두었다. 숨바트와 구르겐의 아이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망쳤지만, 숨바트와 구르겐은 1012년까지 감옥에서 사망했다.

3. 추가 문헌


  • 로버트 W. 톰슨(Robert W. Thomson), 《코카서스 역사 다시 쓰기》(Rewriting Caucasian History) (1996)
  • 데이비드 브라운드(David Braund), 《고대 조지아: 콜키스와 트랜스코카서스 이베리아의 역사, 기원전 550년-서기 562년》(Georgia in Antiquity: A History of Colchis and Transcaucasian Iberia, 550 BC-AD 562) (뉴욕: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 1994)
  • 데이비드 마샬 랭(David Marshall Lang), 《조지아인》(The Georgians) (런던: 템즈 & 허드슨, 1966)
  • 투마노프, 시릴, 《기독교 코카서스 역사 연구》(Studies in Christian Caucasian History) (워싱턴 D.C.: 조지타운 대학교 출판부, 1963)

참조

[1] 서적 Studies in Medieval Georgian Historiography: Early Texts And Eurasian Contexts Peeters Publishers
[2] 서적 The Making of the Georgian Nation Indiana University Press
[3] 서적 Studies in Christian Caucasian History Georgetown University Press
[4] 서적 Studies in Medieval Georgian Historiography: Early Texts And Eurasian Contexts Peeters Publishers
[5] 서적 Studies in Christian Caucasian History Georgetown University Press
[6] 서적 Studies in Christian Caucasian History Georgetown University Press
[7] 서적
[8] 서적 Studies in Christian Caucasian History Georgetown University Press
[9] 서적 The Sasanian World Through Georgian Eyes, Caucasia and the Iranian Commonwealth in Late Antique Georgian Literature Routledge
[10] 서적 Studies in Medieval Georgian Historiography: Early Texts And Eurasian Contexts Peeters Publishers
[11] 서적 The Making of the Georgian Nation https://archive.org/[...] Indiana University Press
[12] 서적 Studies in Christian Caucasian History Georgetown University Press
[13] 서적 Studies in Medieval Georgian Historiography: Early Texts And Eurasian Contexts Peeters Publishers
[14] 서적 Studies in Christian Caucasian History Georgetown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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