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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카와 가즈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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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시카와 가즈마사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이었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전향했다. 그는 1558년 테라베 성 포위전 등 이에야스를 수행하며 활약했고, 1562년 기요스 동맹 성립에 기여했다. 이후 미카타가하라 전투, 나가시노 전투 등 주요 전투에 참여했으며, 1585년 히데요시에게 투항하여 도쿠가와 가문에 큰 영향을 미쳤다. 히데요시 사후에는 영지를 박탈당하고 은퇴하여 1609년에 사망했다. 그의 출분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하며, 다양한 소설, 드라마 등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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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카와 가즈마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나가시노 전투에서의 이시카와 가즈마사
이름이시카와 가즈마사
본명이시카와 가즈마사
일본어 이름石川 数正
출생1534년
사망1609년
출생지미카와국
가문이시카와 씨
별칭요시치로, 호키노카미, 이즈모노카미
계명자쿠온인덴조요료젠다이고지위
묘소나가노현 마쓰모토시 시마다테의 쇼교지
아이치현 오카자키시 미아이정의 혼종지
관위종5위하, 호키국 국사
주군도쿠가와 이에야스도요토미 히데요시
씨족세이와 겐지 요시토모류 이시카와 씨
부모아버지: 이시카와 야스마사
어머니: 마쓰다이라 시게요시의 딸
형제가즈마사, 여 ( 마쓰다이라 이에노부의 부인), 이시카와 쇼하야토
배우자정실: 나이토 요시키요의 딸, 마쓰다이라 이에히로의 딸
자녀시게마사, 야스나가, 야스카쓰, 세이레이, 야스쓰구, 사다마사
관직
마쓰모토 성주시작: 1590년
종료: 1609년
군사 정보
소속 부대마쓰모토성
충성마쓰다이라 씨
이마가와 씨
도쿠가와 씨
도요토미 씨
주요 전투데라베 성 공방전 (1558년)
마루네 성 공방전 (1560년)
가미노고 성 공방전 (1562년)
아즈키자카 전투 (1564년) (1564년)
아네가와 전투 (1570년)
미카타가하라 전투 (1573년)
나가시노 전투 (1575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1584년)

2. 생애

이에야스를 섬기며 1558년 테라베 성 포위전과 1560년 마루네 성 포위전에 참전했다. 1560년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가문으로부터 독립한 후, 가즈마사는 이에야스 휘하에서 가치 있는 가신이자 행정관이 되었다.

1562년,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우지자네를 설득하여 인질로 잡혀 있던 가족들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카미노고 성 전투에 참여했으며, 당시 매우 위험한 임무였던 이마가와 가문의 감시자 역할을 수행했다.

1567년까지 도쿠가와 군대의 병력은 크게 두 부대로 나뉘었으며, 가즈마사는 13명의 다이묘 가신 병력을 지휘했고, 그의 상대인 사카이 타다츠구는 18명의 다이묘 가신 병력을 지휘했다.

1573년 미카타가하라 전투[1]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도 참전했다.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시바타 가쓰이에를 상대로 승리하자, 이에야스는 가즈마사를 통해 히데요시에게 축하의 뜻을 전했다. 이후, 가즈마사와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도쿠가와의 결정에 따라 히데요시를 공격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가즈마사는 1584년 코마키·나가쿠테 전투 동안 코마키 본부에서 복무했다.

1585년, 가즈마사는 도쿠가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항하는 무모한 저항의 길을 걷는다고 보고 매우 실망하여, 히데요시 측으로 전향했다. 이는 가즈마사가 도쿠가와 조직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야스에게는 군사 조직과 방어 정책을 재구성해야 하는 불편함을 초래했다.

2. 1. 출신 배경

가계는 가와치 겐지의 일족으로,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여섯째 아들인 미나모토노 요시토키가 가와치국 이시카와 장(현재의 오사카부 하비키노시 츠보이)을 상속받은 것에서 시작한다. 요시토키의 셋째 아들 미나모토노 요시모토가 이시카와 겐지, 즉 이시카와 씨를 칭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미카와국으로 이주한 이시카와 씨의 일파라고 자처했다.

덴분 2년(1533년)에 이시카와 야스마사의 아들(다른 설에 따르면 이시카와 마사카츠의 아들)로 미카와국에서 태어났다.[3] 조부는 이시카와 키요카네, 숙부는 이시카와 이에나리, 사촌은 이시카와 야스미치이다.

2. 2.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신 시절

도쿠가와 이에야스이마가와 요시모토 밑에서 인질 생활을 하던 시절부터 측근으로 섬겼다. 1560년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가문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가즈마사는 이에야스 휘하에서 핵심적인 가신이자 유능한 행정가로 활동했다. 그는 이마가와 우지자네와의 교섭을 통해 인질로 잡혀 있던 이에야스의 가족들을 구출하는 데 성공했으며, 1562년에는 오다 노부나가와의 기요스 동맹 체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미카와 잇코잇키가 발생했을 때, 아버지와 달리 이에야스에게 충성을 유지하며 진압에 기여했고, 이후 가로에 임명되어 사카이 타다츠구와 함께 도쿠가와 가문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1567년 무렵에는 사카이 타다츠구와 함께 도쿠가와 군대의 주력을 양분하여 지휘하는 핵심 인물이 되었으며, 아네가와 전투, 미카타가하라 전투[1], 나가시노 전투 등 다수의 주요 전투에 참전하여 무공을 세웠다. 또한, 이에야스의 적자 마쓰다이라 노부야스의 후견인을 맡았고, 노부야스가 사망한 후에는 오카자키 성 성대를 역임했다.

오다 노부나가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세력을 확장하자, 가즈마사는 이에야스의 대(對) 히데요시 외교 교섭을 전담했다. 1583년에는 히데요시의 시바타 가쓰이에 격파를 축하하는 사절로 파견되기도 했으나, 이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 참전하는 등 히데요시와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히데요시와의 화의를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1585년 3월 무렵, 가즈마사는 잠시 '''야스테루'''(康輝)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여 활동했다.[4] 그러나 같은 해 11월, 히데요시에 대한 이에야스의 강경 노선에 실망하여 결국 히데요시 측으로 전향했다. 도쿠가와 가문의 내부 사정과 군사 기밀에 정통했던 그의 이탈은 이에야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군사 체계 및 방어 정책의 재검토를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2. 2. 1. 초기 활동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스루가 국의 다이묘 이마가와 요시모토 밑에서 인질 생활을 하던 시절부터 측근으로 섬겼다. 1558년 테라베 성 포위전과 1560년 마루네 성 포위전에 이에야스를 따라 참전했다.

1560년 (에이로쿠 3년),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패배하고 마쓰다이라 모토야스(이에야스)가 독립하자, 가즈마사는 이마가와 우지자네와 교섭하여 당시 이마가와 씨의 인질이었던 이에야스의 적자 노부야스와 슨푸에 머물던 정실 쓰키야마도노를 데려왔다. 이 시기부터 이에야스 휘하에서 유능한 가신이자 행정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1561년 (에이로쿠 4년), 이에야스가 오다 노부나가와 세키가세에서 충돌했을 때 선봉을 맡아 활약했다.

1562년 (에이로쿠 5년), 가미노고 성 전투에 참여했으며, 오다 노부나가와의 교섭을 통해 기요스 동맹 체결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우지자네를 설득하여 인질로 잡혀있던 자신의 가족들을 풀어주도록 하는 과정에서, 가즈마사는 이마가와 가문의 감시자 역할을 수행했는데 이는 당시 매우 위험한 임무였다.

1563년 (에이로쿠 6년) 미카와 잇코잇키가 발발했을 때, 아버지 야스마사는 이에야스를 배반한 것으로 추정되나 가즈마사는 정토종으로 개종하며 이에야스에게 충성을 다했다. 이시카와 종가의 가독은 숙부 이시카와 이에나리가 이었지만, 가즈마사는 이에야스의 측근으로서 신임을 얻어 잇키 진압 후 가로에 임명되었고, 사카이 타다츠구, 이시카와 이에나리 등과 함께 중용되었다. 이후 노부야스가 원복을 치르자 그의 후견인이 되었다.

1567년 무렵, 도쿠가와 군대의 병력은 크게 두 부대로 나뉘었는데, 가즈마사는 13명의 다이묘 가신 병력을 지휘했고, 사카이 타다츠구는 18명의 다이묘 가신 병력을 지휘했다. 1569년 (에이로쿠 12년)에는 니시미카와의 깃발 대장이었던 숙부 이에나리가 엔슈 동부의 요충지인 가케가와로 옮겨가자, 그 자리를 이어받아 니시미카와 깃발 대장이 되었다.

군사적인 면에서도 활발히 활동하여 1570년 (겐키 원년) 아네가와 전투, 1572년 (겐키 3년) 미카타가하라 전투[1], 1575년 (덴쇼 3년) 나가시노 전투 등 여러 주요 전투에 참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1579년 (덴쇼 7년) 노부야스가 할복하자 오카자키 성 성대가 되었다.

1582년 (덴쇼 10년)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한 후, 그의 중신이었던 하시바 히데요시가 급부상하자, 가즈마사는 이에야스의 명을 받아 히데요시와의 외교 교섭을 담당하게 되었다. 1583년 (덴쇼 1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시바타 가쓰이에를 상대로 승리하자, 이에야스는 가즈마사를 보내 축하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이후 가즈마사와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도쿠가와 가문의 결정에 따라 히데요시를 공격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1584년 (덴쇼 12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는 고마키의 본진에서 활동했으며, 이 전투 중 이에야스에게 히데요시와의 화의를 건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85년 (덴쇼 13년) 3월까지 가즈마사는 '''야스테루'''(康輝)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짧은 기간이지만 이 이름으로 문서를 발급했다.[4] 하지만 같은 해 11월 13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 무모한 항전 노선을 걷고 있다고 판단하여 크게 실망하고 히데요시 측으로 출분했다. 이는 도쿠가와 가문의 내부 사정과 군사 기밀에 정통했던 가즈마사의 이탈이었기에, 이에야스에게는 군사 조직과 방어 정책을 재구성해야 하는 불편함을 초래했다.

2. 2. 2. 주요 전투 참여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스루가 국의 다이묘 이마가와 요시모토 밑에서 인질 생활을 하던 시절부터 측근으로 섬겼다.

1558년 테라베 성 포위전과 1560년 마루네 성 포위전에 이에야스를 따라 참전했다. 1560년(에이로쿠 3년)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요시모토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패사하고 이에야스가 독립하자, 가즈마사는 이마가와 우지자네와 교섭하여 당시 이마가와 가문의 인질이었던 이에야스의 적자 노부야스와 정실 쓰키야마도노를 구출했다. 1561년(에이로쿠 4년) 이에야스가 오다 노부나가와 세키가세에서 충돌했을 때는 선봉으로 활약했다.

1562년(에이로쿠 5년)에는 카미노고 성 전투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오다 노부나가와 교섭하여 기요스 동맹 성립에 크게 기여했다. 1563년(에이로쿠 6년) 미카와 잇코잇키가 발생했을 때, 아버지 야스마사는 이에야스를 배반한 것으로 보이나, 가즈마사는 정토종으로 개종하며 이에야스에게 충성을 다했다. 전쟁 후 이에야스로부터 가로에 임명되었고, 사카이 타다츠구, 이시카와 이에나리 등과 함께 중용되었다. 이후 노부야스가 원복을 하자 그의 후견인이 되었다.

1567년까지 도쿠가와 군대는 두 개의 사단으로 나뉘었는데, 가즈마사는 13명의 다이묘 가신 병력을 지휘하는 사령관 중 한 명이 되었다. 그의 상대인 사카이 타다츠구는 18명의 다이묘 가신 병력을 지휘했다. 1569년(에이로쿠 12년)에는 숙부 이에나리를 대신하여 니시미카와의 깃발 대장이 되었다.

군사 면에서도 활약하여 1570년(겐키 원년) 아네가와 전투, 1572년(겐키 3년) 미카타가하라 전투, 1575년(덴쇼 3년) 나가시노 전투 등 여러 합전에 출진하여 많은 무공을 세웠다.[1] 1579년(덴쇼 7년) 노부야스가 할복하자 오카자키 성 대리가 되었다.

1582년(덴쇼 10년)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고 하시바 히데요시가 부상하자, 이에야스의 명으로 히데요시와의 교섭을 담당했다. 1583년 히데요시가 시바타 가쓰이에에게 승리하자 이에야스를 대신해 축하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와 함께 히데요시를 공격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1584년(덴쇼 12년) 코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는 코마키 본진에서 복무하며 이에야스에게 히데요시와의 화해를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85년(덴쇼 13년) 3월까지 가즈마사는 '야스테루'(康輝)로 개명했으며, 이 이름으로 잠시 문서를 발급했다.[4] 그러나 같은 해,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 무모한 저항을 계속한다고 판단하여 히데요시 측으로 전향했다. 이는 도쿠가와 가문의 내부 사정을 잘 아는 가즈마사의 이탈이었기에, 이에야스에게는 군사 조직과 방어 정책을 재구성해야 하는 큰 부담을 안겨주었다.

2. 2. 3.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교섭

덴쇼 10년(1582년) 오다 노부나가혼노지의 변에서 사망하고, 그의 뒤를 이어 하시바 히데요시가 세력을 키우자, 가즈마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히데요시와의 교섭을 전담하게 되었다. 1583년 히데요시가 시바타 가쓰이에를 상대로 승리한 후, 이에야스는 가즈마사를 통해 축하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이후, 가즈마사는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와 함께 도쿠가와의 결정에 따라 히데요시를 공격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덴쇼 12년(1584년) 벌어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는 고마키 본진에서 이에야스를 보좌했으며[1], 이 전투 중에 이에야스에게 히데요시와의 화의를 건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덴쇼 13년(1585년) 3월 무렵, 가즈마사는 잠시 '''야스테루'''(康輝)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여 활동하기도 했다.[4] 하지만 같은 해, 가즈마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무모하게 저항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크게 실망하고, 결국 히데요시 측으로 전향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이탈은 도쿠가와 가문의 내부 사정과 군사 기밀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에야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군사 체계와 방어 전략을 재검토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2. 3. 도요토미 가문으로 전향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83년 시바타 가쓰이에에게 승리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가즈마사를 사신으로 보내 히데요시에게 축하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이후 가즈마사와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도쿠가와 가문의 결정에 따라 히데요시를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1584년 코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는 고마키의 본진에서 이에야스를 보좌했다.

그러나 덴쇼 13년(1585년) 11월 13일, 가즈마사는 돌연 이에야스를 떠나 히데요시에게 귀순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출분(出奔)은 여러 추측을 낳았으나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가즈마사는 미카와 시절부터 도쿠가와 가문의 핵심 인물이었기에 군사 기밀에 정통했고, 그의 이탈은 이에야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에야스는 기존의 미카와 군제를 다케다 가문의 방식으로 개편하게 된다.

히데요시에게 귀순한 가즈마사는 가와치국 내에서 8만 석의 영지를 받았고,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활동했다. 이때 통칭을 이즈모노카미(出雲守)로 바꾸고, 히데요시에게 이름 한 글자(偏諱, 헨키)를 받아 '''요시테루'''(吉輝)로 개명했다고 전해진다.[5] 덴쇼 18년(1590년) 오다와라 정벌호조 가문이 멸망하고 이에야스가 간토 지방으로 영지를 옮기자, 가즈마사는 히데요시로부터 시나노국 마쓰모토(영지는 지쿠마군과 아즈미군) 10만 석(혹은 8만 석)으로 영지가 늘어나 이봉되었다. 마쓰모토에서 가즈마사는 마쓰모토 성 축성, 조카마치 건설, 덴슈 건립 등 영지 경영에 힘썼다.

가즈마사의 사망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분로쿠 2년(1593년) 10월 23일 교토에서 사망했다는 설[6]과, 분로쿠 원년(1592년) 12월 14일에 교토 시치조가와라(七条河原)에서 장례가 치러졌다는 기록[7]을 근거로 그 이전에 사망했다는 설 등이 있다.

가문의 가독은 장남 야스나가가 이었으며, 야스나가는 8만 석, 차남 야스카쓰(康勝)는 1만 5천 석, 삼남 야스쓰구(康次)는 5천 석을 분할하여 상속받았다.

2. 3. 1. 출분 이유에 대한 여러 설

덴쇼 13년(1585년) 11월 13일, 가즈마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곁을 떠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로 향했다. 그의 출분(出奔, 주군을 떠나 달아남) 이유에 대해서는 "도요토미 가문과의 화친을 주장하다 가신단 내에서 고립되었다", "히데요시로부터 귀순 권유를 받았다"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정확한 원인은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가즈마사는 미카와 통치 시절부터 도쿠가와 가문의 핵심 인물이었기에 군사 기밀을 상세히 알고 있었고, 그의 이탈은 이에야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에야스는 기존의 미카와 군제를 다케다 가문의 군제로 전면 개편하게 된다.

가즈마사가 출분한 구체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추측들이 존재한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인물됨과 능력에 감탄하여 스스로 귀순했다는 설.
  • 히데요시가 제시한 파격적인 보상에 마음이 움직였다는 설.
  • 혼다 다다카쓰와 같은 히데요시 강경파들이 가즈마사가 히데요시와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하면서, 도쿠가와 가문 내에서 가즈마사의 입지가 크게 악화되었기 때문이라는 설.
  • 과거 가즈마사가 도쿠가와 가문 휘하에 두었던 오가사와라 사다요시가 히데요시 측으로 돌아서자, 그 책임을 추궁당할 것을 우려하여 출분했다는 설.
  • 히데요시와의 비밀 협상을 통해, 자신이 히데요시에게 넘어가는 대신 이에야스와의 전면전을 피한다는 약속이 있었다는 설.
  • 가즈마사는 이에야스의 적장자 노부야스의 후견인이었는데, 덴쇼 7년(1579년) 노부야스가 할복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이에야스와 사이가 벌어졌다는 설.
  • 노부야스 사후, 도쿠가와 가문의 권력 중심이 가즈마사를 비롯한 오카자키(岡崎) 그룹(노부야스파)에서 사카이 다다쓰구 등 하마마쓰(浜松) 그룹(이에야스 직속파)으로 옮겨가면서 가즈마사의 영향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라는 설.
  • 가즈마사의 아버지 이시카와 야스마사가 이에야스와 대립하다 실각한 후, 이에야스의 인척인 숙부 이시카와 이에나리가 이시카와 가문의 중심 인물로 부상하면서, 가즈마사는 자신의 공적에도 불구하고 가문 내에서 입지가 좁아졌다는 설.
  • 실제로는 이에야스와 사전에 약속된 행동으로, 도쿠가와 가문을 보존하기 위해 가즈마사가 스스로를 희생하여 히데요시에게 거짓으로 투항했다는 설.
  • 히데요시와의 교섭을 담당하며 현실적인 세력 차이를 인지한 가즈마사가, 이를 알지 못하고 주전론을 주장하는 혼다 다다카쓰,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등 강경파 가신들을 설득하고 전쟁을 막기 위해 출분이라는 강수를 두었다는 설.
  •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실제로는 가게무샤(影武者, 대역 무사)였던 세라다 지로사부로 모토노부에게 살해당했고, 이 가게무샤가 실권을 장악하고 정당한 후계자인 노부야스마저 제거하자 이에 격분한 가즈마사가 도쿠가와 가문을 떠났다는 설. 이 설에 따르면, 가즈마사는 이에야스가 불의의 죽음을 맞이한 후 가문 유지를 위해 가게무샤의 존재를 묵인했지만, 노부야스마저 희생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그림자 무사설'은 전문 역사학계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설이다.

2. 4. 사망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막부가 세워진 뒤, 가즈마사와 그의 가족은 영지를 빼앗기는 처벌을 받았다. 이후 가즈마사는 은퇴하여 아들 이시카와 야스나가와 함께 지내다가 1609년에 사망했다.

3. 등장 작품

이시카와 가즈마사(石川数正)를 소재로 한 작품 목록이다.

'''소설'''


  • 미야케 고타로, 《이시카와 카즈마사》, 인물 문고, 가쿠요 서방
  • 난바라 미키오, 《모략가 이시카와 카즈마사》, 신초 문고
  • 마쓰모토 세이초, 〈군의(群疑)〉 (《오우의 두 사람(奥羽の二人)》 수록), 고단샤 문고
  • 다키가와 쿄, 〈이단의 미카와 무사(異端の三河武士)〉 (《반신(叛臣)》 수록), 고분샤 문고
  • 니시 코이치로, 〈오사카의 난관(逢坂の難関)〉 (《이에야스의 유언(家康の遺言)》 수록), 고단샤
  • 히사카 마사시, 〈독만주(毒まんじゅう)〉 (《상시전장(常在戦場)》 수록), 분슌 문고


'''텔레비전 드라마'''

  • 도쿠가와 이에야스 (1983년, NHK 대하드라마) - 배우: 에하라 신지로
  • 태합기 (1987년, TBS 대형 시대극 스페셜) - 배우: 다카나미 고
  • 도쿠가와 이에야스 (1988년, TBS 대형 시대극 스페셜) - 배우: 지바 신이치
  • 다케다 신겐 (1988년, NHK 대하드라마) - 배우: 무라카미 미키오
  • 전국 최후의 승리자! 도쿠가와 이에야스 (1992년 1월 3일, TV 아사히, 신춘 대형 5시간 시대극 스페셜) - 배우: 이시바시 렌지
  • 오다 노부나가 (1994년, TV 도쿄 12시간 초와이드 드라마) - 배우: 오바야시 다케시
  • 히데요시 (1996년, NHK 대하드라마) - 배우: 마코토 나오야
  • 도쿠가와의 여자 (1997년, TV 도쿄) - 배우: 하라다 기요토
  • 토시이에와 마츠 ~카가 백만석 이야기~ (2002년, NHK 대하드라마) - 배우: 노 히로지
  • 공명의 갈림길 (2006년, NHK 대하드라마) - 배우: 오코치 히로시
  •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세 명의 여자 (2008년, TV 아사히) - 배우: 혼다 히로타로
  • 사나다마루 (2016년, NHK 대하드라마) - 배우: 이토 마사유키
  • 온나 조슈 나오토라 (2017년, NHK 대하드라마) - 배우: 나카무라 오리오
  • 어떻게 할까 이에야스 (2023년, NHK 대하드라마) - 배우: 마츠시게 유타카

참조

[1]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0 2000
[2] 서적 『三百藩藩主人名事典』
[3]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辞典 第5版 三省堂 2009
[4] 논문 石川康輝(数正)出奔の政治背景
[4] 서적 戦国・織豊期大名徳川氏の領国支配 岩田書院
[5] 문서 随筆『[[塩尻 (書物)|盬尻]]』第四巻
[6] 서적 『松本市史』上巻 名著出版 1973
[7] 문서 『[[言経卿記]]』文禄元年12月14日条 岩波書店 1967
[8] 웹사이트 どうした?石川数正 ~なぜ家康の忠臣は出奔したのか~ https://www.nhk.jp/p[...] NHK
[9] 문서 마쓰다이라 씨 제3대 당주 [[마쓰다이라 노부미쓰]]의 증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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