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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조 (17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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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원조는 1792년에 태어나 1875년에 사망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사도세자의 호위 무사의 증손으로, 1809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 강릉부사, 제주목사, 대사간, 대사헌, 공조판서, 한성부 판윤,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했다. 1864년 고종에게 향약 보급과 천주교 비판 등을 상주했으며, 저서로 《응와문집》, 《응와잡록》 등이 있다.

2. 생애

경상북도 성주군 출신으로, 사도세자의 호위 무사였던 이석문(李碩文)의 증손이며, 복잡한 입양 과정을 거쳐 큰아버지 이규진(李奎鎭)의 양자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나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었으며, 1809년(순조 9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부모의 권유로 10년간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더욱 정진하였다.

1837년(헌종 3년)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삼사의 요직과 강릉부사, 제주목사 등 내외직을 거쳤다. 특히 철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병조참판 재직 시에는 왕의 특별 지시로 생부 가계 3대가 증직을 받기도 하였다. 경주부윤 재직 중 암행어사의 탄핵으로 잠시 물러났으나, 곧 복귀하여 대사간, 대사헌, 공조판서, 한성부판윤, 판의금부사 등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다.

고종 즉위 후에는 향약 보급, 천주교 경계, 효경·소학 권면 등을 상소하며 국가 기강 확립에 힘썼다. 평소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부득이', '어쩔 수 없다'는 태도를 경계하였다. 만년에는 고향 성주군 가야산 근처의 만귀정(晩歸亭)에서 여생을 보냈다.

2. 1. 가계와 유년 시절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에서 태어났다. 증조부는 사도세자의 호위 무사였던 이석문(李碩文)이며, 할아버지는 이민겸(李敏謙)이다. 아버지는 진사 통덕랑 함청헌 이형진(涵淸軒 李亨鎭)이고, 어머니는 함양 박씨(咸陽朴氏)로 박난경(朴鸞慶)의 딸이다.

큰아버지이자 종숙(從叔)인 정언 농서 이규진(農棲 李奎鎭)에게 입양되었다. 양어머니는 동래 정씨(東萊鄭氏)로 정홍좌(鄭弘佐)의 딸이다.

그의 선조들은 대대로 성주읍내에 거주하였으나, 읍내에 역참이 들어서고 역을 관리하는 중인들이 모여들자 양반이 살 곳이 못 된다며 대산리로 이주하였다. 1721년(경종 1년)에는 고조부 이이신(李頤臣)이 대산리 내 현재의 응와종택(凝窩宗宅) 주변으로 옮겨와 정착했다.

가계에는 다소 복잡한 사정이 있었는데, 생부 이형진(李亨鎭)은 본래 아들이 없던 자신의 숙부 이민검(李敏儉, 증조부 이석문의 다른 아들)에게 양자로 입양되었다. 이후 이형진의 친형인 이규진(李奎鎭)에게 아들이 없자, 이형진은 자신의 둘째 아들인 이원조를 형 이규진에게 다시 양자로 보냈다. 생부 이형진의 생부는 조부 이민겸(李敏謙)이고, 생조부는 이석문(李碩文)인데, 생부 이형진의 양부 이민검(李敏儉)은 생조부 이석문(李碩文)의 아들이 된다.

이원조가 후에 크게 성공하면서 그의 양부 이규진(李奎鎭), 조부 이민겸(李敏謙), 증조부 이석문(李碩文)은 여러 차례 증직(贈職) 교지를 받았다. 철종은 이원조를 특별히 아껴, 그가 병조참판에 임명되자 그의 생부 이형진(李亨鎭), 생부의 양부였던 이민검(李敏儉), 생부의 양조부 이석유(李碩儒)에게도 각각 증 호조참판, 증 좌승지, 증 사복시정의 벼슬을 특별히 추증하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집안의 학문(가학, 家學)을 배웠으며, 이후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10세에 사서(四書) 등을 통독하였고, 12세에는 과거 시험에 필요한 글쓰기를 익혔다. 후에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를 찾아가 학문을 배웠다.

1809년(순조 9년) 향시(鄕試)에 두 차례 합격하고 상경하여, 그 해의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관직에 나아가는 것이 좋지 않다는 생부 이형진(李亨鎭)과 양부 이규진(李奎鎭)의 권유에 따라, 급제 후 약 10년간 관직에 나가지 않고 독서에 매진하며 학문을 더 쌓았다.

2. 2. 과거 급제와 관직 생활

어려서부터 가학(家學)을 배우고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었다. 10세에 사서(四書) 등을 통독하고 12세에는 과거 시험에 필요한 글쓰기를 익혔으며, 이후 입재 정종로(立齋 鄭宗魯)를 찾아가 학문을 배웠다. 1809년(순조 9년) 향시(鄕試)에 두 차례 합격한 뒤 서울로 올라가 그 해의 별시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벼슬길에 나서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긴 생부 이형진과 양부 이규진의 권유로, 급제 후 10년 동안은 관직에 나가지 않고 독서에 전념하며 학문을 더 깊이 닦았다.

1837년(헌종 3년)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면서 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 정언으로서 그는 사회 기강이 해이해져 사족(士族)들의 사치가 극에 달한 반면, 연이은 흉년으로 백성들의 생활고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심각하다고 지적하며 국가적인 쇄신책을 강력히 건의하였다. 같은 해 정언을 시작으로 삼사(三司)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1840년(헌종 6년) 4월에는 강릉부사(江陵府使)로 임명되어 지방관으로 활동했다. 이듬해인 1841년(헌종 7년) 1월에는 제주목사(濟州牧使)로 발령받아 부임하였다.

1849년(철종 즉위년) 병조참판으로 재직하던 중, 철종의 특별한 배려로 그의 생부 이형진, 생부의 양부 이민검, 생부의 양조부이자 그의 종증조부인 이석유 3대가 증직(贈職)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이는 철종이 그를 각별히 아꼈음을 보여주는 일이다. 1850년(철종 1년)에는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경주부윤으로 재직하던 중, 경상좌도 암행어사 김세호(金世鎬)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후 다시 조정에 기용되어 1854년(철종 5년) 대사간에 임명되었고, 여러 차례 대사간 직을 다시 맡았다. 이어서 대사헌을 거쳐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1856년(철종 7년)에는 대사헌과 호군(護軍)을 역임하였다.

1864년(고종 1년), 새로 즉위한 고종에게 향약을 널리 보급할 것과 천주교의 확산을 경계해야 함을 아뢰고, 선비들에게 《효경(孝經)》과 《소학(小學)》을 읽도록 권면할 것을 상주(上奏)하였다. 같은 해 다시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며, 1865년(고종 2년)에는 한성부판윤으로 발탁되었다. 1869년(고종 6년)에는 과거에 급제한 지 60년이 되는 해를 맞아 문과 회방인(回榜人)으로서 특별히 1계급 승진하였고,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871년(고종 8년)에는 판의금부사에 이르렀다. 그는 평소 '부득이',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나라를 망치는 말이라 비판하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실천하는 자세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만년에는 성주군 가천면 화죽리에 있는 가야산 포천계곡 근처의 만귀정(晩歸亭)에서 여생을 보냈다.

2. 3. 만년과 사후

만년에는 성주군 가천면 화죽리, 가야산 포천계곡 근처 만귀정에서 여생을 보냈다.

저서로는 《응와문집 (凝窩文集)》과 《응와잡록 (凝窩雜錄)》이 있다. 문집 《응와집》 또는 《응와문집 (凝窩文集)》은 사후인 1926년 박봉세(朴鳳洗) 등에 의해 정리되어 간행되었다. 《응와잡록 (凝窩雜錄)》은 대윤과 소윤의 갈등을 시작으로 붕당의 흐름을 다루었으며, 허봉(許篈)이 야사와 잡기에서 추려 엮은 《해동야언초》의 일부 내용을 발췌하여 실었다. 또한, 효종의 딸 숙정공주의 남편인 동평위 정재륜(東平尉 鄭載崙)이 50여 년간 궁중에 출입하며 보고 들은 기록 모음집과, 세종 때부터 숙종 때까지의 고사에서 일화를 엮은 《견한록(遣閑錄)》의 일부 내용도 발췌하여 수록했다.

사후 1875년(고종 12년)에는 정헌(定憲)이라는 시호가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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