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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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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붕당은 본래 중국에서 정치인 집단을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조선 시대에는 사림 세력의 성장과 함께 정치 세력 간의 파벌을 의미하게 되었다. 조선 시대 붕당은 유학파의 대립, 왕실 내척의 내분, 제도상의 결함 등 여러 요인으로 발달하였으며, 특히 선조 때 동인과 서인으로 시작된 붕당 정치는 이후 여러 차례 분열과 통합을 거듭하며 조선 정치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붕당은 견제와 균형을 통해 정치적 안정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잦은 당쟁과 환국으로 인해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18세기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 시도를 거치며 붕당은 점차 약화되었고, 19세기 세도 정치를 거치면서 붕당 정치의 의미는 퇴색되었다. 붕당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공존하며, 붕당 정치가 조선 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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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당
정의
정의붕당(朋黨)은 조선 시대에 정치적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 형성한 집단을 가리킨다. 이는 당파를 이루어 정치를 운영하는 붕당정치(朋黨政治)의 핵심 요소였다.
붕당 정치
개념붕당정치는 삼사(三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언로를 통해 조정에서 벌어진 정치적 담론 과정을 의미한다. 이러한 토론을 당의(黨議)라고 불렀다.
용어당쟁(黨爭)이라는 용어는 당의를 악의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명칭이다.
붕당의 종류
동인동인
서인서인
남인남인
북인북인
노론노론
소론소론

2. 배경

유교는 본래 붕당 형성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다. 『논어』에는 "군자는 자존심을 지키며 다투지 않고, 무리를 지어 당을 짓지 않는다"(위령공 편), "군자는 두루두루 사귀고 편 가르지 않으며, 소인은 편을 가르고 두루두루 사귀지 않는다"(위정 편)라는 공자의 발언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근대 중국에서 붕당이 자주 형성되었고, 반대파로부터 공격을 받아 정변(당고의 금)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후기에 발생한 우이의 당쟁은 붕당 정치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송대에 들어서면서 관료의 언론 활동이 활발해졌다. 과거 제도 도입으로 혈연, 혼인 관계와 무관하게 합격자를 등용했지만, 실제 임관에는 상위 관직자의 추천(보거)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과거 동기, 동료, 같은 지역 출신 간의 관계 구축이 승진에 중요해져 붕당 형성을 촉진했다. 또한, 정치적 사상, 언론에 기반한 붕당을 옹호하는 "군자유당론"도 등장하였다. 왕우칭, 구양수, 범중엄, 사마광, 유안세는 "도"에 의한 군자의 붕당과 "리"에 의한 소인의 붕당을 구별하고, 소인의 붕당은 배제해야 하지만 군자의 붕당은 국가에 이바지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구양수의 『붕당론』은 명문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현실의 북송 정치에서 붕당 간의 대립은 반대파를 소인 붕당으로 비난하고 추방하는 데 그쳐 정치적 혼란을 초래했다. 황제가 권력 집중을 강화해가는 송대 이후의 왕조에서, 군주에게 예속되어야 할 관료가 횡적인 연결로 정치 집단을 형성하여 여론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있는 붕당은 황제의 권력 행사를 위협하는 것으로 억압, 나아가 금압되는 방향으로 향하게 된다.

남송 고종은 소흥 2년(1132년) 4월에 붕당 엄벌 조서를 내렸고, 홍무제는 『대명률』에 붕당 금지 조항을 설치했으며, 옹정제는 『어제붕당론』에서 구양수를 비난하며 일체의 붕당을 부정했다.

2. 1. 붕당의 기원

붕당은 본래 중국에서 정치인 집단을 가리키는 말로, 유교적 정치 이념에서는 붕당 형성을 범죄로 인식하였다. 조선의 군주 체제에서도 신하가 붕당을 결집하는 것은 범죄에 해당하며,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에는 이에 대한 처벌 규정이 있었다.[17] 그러나 송나라 이후 신유학에서는 구양수, 주희 등이 성리학 이념에 따라 군자(君子)끼리 모인 '군자당'(君子黨)이 소인(小人)을 배제하고 정치를 주도하여야 한다는 논리를 제시하였다.[17][22] 조선의 유학자들도 이를 받아들여 조선 중기 이후 붕당을 결집하기 시작하였다.[23]

공자는 『논어』에서 "군자는 자존심을 지키며 다투지 않고, 무리를 지어 당을 짓지 않는다"(위령공 편), "군자는 두루두루 사귀고 편 가르지 않으며, 소인은 편을 가르고 두루두루 사귀지 않는다"(위정 편)라고 하여 붕당 형성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근대 중국에서 붕당이 자주 형성되었고, 반대파로부터 공격을 받아 정변의 원인(당고의 금)이 되기도 하였다. 후기에 발생한 우이의 당쟁은 붕당 정치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송대에 들어서면서 관료의 언론 활동이 활발해졌고, 과거 제도 도입으로 혈연, 혼인 관계와 무관하게 합격자가 등용되었지만, 실제 임관에는 상위 관직자의 추천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과거 동기, 동료, 같은 지역 출신 간의 관계 구축이 승진에 중요해져 붕당 형성을 촉진했다. 왕우칭, 구양수, 범중엄, 사마광, 유안세는 "도"에 의한 군자의 붕당과 "리"에 의한 소인의 붕당을 구별하고, 소인의 붕당은 배제해야 하지만 군자의 붕당은 국가에 이바지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구양수의 『붕당론』은 명문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현실의 북송 정치에서 붕당 간의 대립은 반대파를 소인 붕당으로 비난하고 추방하는 데 그쳐 정치적 혼란을 초래했다. 남송 고종은 소흥 2년(1132년) 4월에 붕당 엄벌 조서를 내렸고, 홍무제는 『대명률』에 붕당 금지 조항을 설치했으며, 옹정제는 『어제붕당론』에서 구양수를 비난하며 일체의 붕당을 부정했다.

2. 2. 사림의 조정 장악

선조 즉위 이후 사림파가 대거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서 척신정치가 사라지고 훈구파는 사림으로 흡수되었다.[26] 선조는 기묘사화(1519년) 때 희생된 자들을 사면, 복권하여 사림의 조정 진출 길을 열었고, 이조전랑의 권한을 바탕으로 사림파가 대거 중앙 정계에 진출하였다.[26] 사림 정치가 확산되면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으나, 기성 사림과 신진 사림의 분화가 촉진되고 여러 붕당(朋黨)을 형성하여 서로 경쟁하는 양상으로 변하였다.

2. 3. 근본 원인

조선 시대에 붕당이 발달하게 된 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유학파(儒學派)의 대립, 왕실 내척(王室內戚)의 내분, 제도상의 결함이다. 특히 제도상의 결함은 양반의 수는 늘어가는데 양반에게 수급권을 줄 토지가 부족해진 데에 원인이 있다. 이 와중에 과전법은 직전법으로 바뀌면서 기성 세력과 신진 세력 사이에 알력이 생겨났다. 이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이었다.[27] 이러한 대립은 성종 때까지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나 연산군 때부터 차츰 불거지게 되었고, 결국 선조 때 김효원심의겸의 대립이 직접적 원인으로 작용하면서 붕당 정치가 시작되었다.

3. 역사

조선은 1392년 건국되어 중앙 집권적인 양반 관료제를 기반으로 통치 질서를 확립했다. 왕조 초기에는 양반 귀족들이 세습적 지위를 확립하는 계층을 형성했다. 15세기 중반 이후 농업 경제력이 향상되면서 상업이 크게 발전했고, 중국, 일본, 류큐 왕국과의 무역이 활발해져 부를 획득할 기회가 증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훈구 대신들과 그 친척들은 농장 확장, 국제 무역, 곡물 거래 등을 통해 상업적 이익을 추구했다. 이 과정에서 일반 백성에 대한 수탈이 심하게 이루어졌으며, 군역 부과, 공물 징수 등의 현상이 나타났다. 한편, 중소 지주의 후예들은 향교, 서재와 같은 교육을 통해 지식인화 과정을 거쳤으며, 정치 의식을 높였다.

유교에서는 붕당 형성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으나, 실제로는 전근대 중국에서 붕당이 자주 형성되었다. 송대에는 관료에 의한 언론 활동이 활발해졌고, 과거 제도의 도입으로 붕당 형성이 촉진되었다. 구양수의 『붕당론』은 군자의 붕당은 국가에 이바지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붕당 간의 정치 대립이 정치적 혼란을 초래하기도 했다. 홍무제는 붕당을 금지했으며, 옹정제는 『어제붕당론』을 저술하여 일체의 붕당을 인정하지 않았다.

조선에서는 1575년 이조전랑직 임명 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서인동인이 결집하면서 최초의 붕당 대립 구도가 성립되었다. 이후 붕당은 정치적 이념과 학문적 경향에 따라 결집되어 정파적 성격과 학파적 성격을 동시에 가지게 되었다. 선조가 즉위하면서 사림파가 정치 주도 세력이 되었고, 동인과 서인의 대립, 동인의 분열을 거쳐 숙종 대에 이르러 서인과 남인의 대립은 격화되었다.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을 거치며 남인과 서인은 서로를 숙청했다.

영조탕평책을 펴 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정조는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였으나, 붕당 간의 당쟁은 시파벽파로 이어졌다. 1800년 정조가 죽고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 붕당은 정치 세력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게 됐다.

3. 1. 붕당의 형성

1575년(선조 8년) 이조전랑직 임명 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심의겸을 추종하는 기성 사림인 서인과 김효원을 영수로 하는 신진 사림인 동인이 결집하면서 최초의 붕당 대립 구도가 성립되었다. 심의겸은 서울 서쪽에, 김효원은 동쪽에 살았기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28] 이조 전랑은 5품·6품의 낮은 자리이지만, 삼사(三司)의 하나인 홍문관(옥당) 출신의 엘리트 관료가 임명되는 것이 관례였다. 이조전랑은 삼사(三司)의 공론(公論)을 수렴하여 대신들을 견제하고, 물러날 때에는 후임자를 스스로 천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자리를 거치면 재상으로 쉽게 오를 수 있는 요직이었다. 따라서 전랑의 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는 권력 경쟁의 핵심 과제였다.

이러한 분당의 배경에는 기성 관료와 신진 관료의 이해 충돌, 학파와 지연의 차이, 그리고 척신 정치에 대한 강·온의 태도 차이가 있었다. 특히 척신 잔재 청산을 놓고 온건한 입장을 취한 선배 세력과 달리, 후배 선비 세력은 김효원의 천거를 반대한 심의겸을 관직에 등용하려 한 것에 불만을 품었다. 심의겸을 옹호하는 세력은 서인이 되었고, 김효원을 지지하는 세력은 동인이 되었다.

당시 동인은 주로 이황조식의 학문을 계승한 철학자들로 구성되었으며, 서인은 이이의 참여로 학문적 연계성이 강화되었다. 사림 내 최초의 학문적 붕당인 동인과 서인은 처음부터 강한 학문적 연계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조선만의 독특한 정치 세력을 형성하게 했다.[7]

3. 2. 동인 대 서인

선조가 즉위하면서 훈구파는 자연스럽게 몰락하였고, 그동안 훈구파의 탄압을 견디어낸 사림파가 정치 주도 세력이 되었다.

동인은 조선 최초의 붕당으로 16세기 중엽 사림파 중 신진 세력인 김효원, 류성룡, 이산해 등이 연합하여 결성하였다. 주로 이들은 영남 명유인 이황, 조식의 문하였으며, 이 밖에도 개성의 처사학자인 서경덕 문인들도 가담하여, 이들의 연합은 학연의 성격이 짙었다. 동인은 대체로 지방의 청류를 자처하는 한사(寒士)들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일원적인 학맥과 정책을 가진 것이 아니어서 자체 내에 이질적 요소를 많이 지닌 청류의 연합 세력과 비슷했다. 동인의 구성원들은 신진 사림의 급진파로 이루어져 있어 훈구파의 척신 정치 청산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7]

서인은 대체로 서울 근방에 생활 근거를 둔 고관들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학문적으로는 이이, 기대승, 김인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초기에 기성 사림 중심의 서인은 학문적 구심이 없어 큰 세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동인과 서인 사이의 중재역을 자처하던 이이가 서인에 합류하고 성혼도 서인에 합류하면서 두 사람이 서인의 구심을 이루게 되었다.[7]

이후 붕당은 정치적 이념과 학문적 경향에 따라 결집되어 정파적 성격과 학파적 성격을 동시에 가지게 되었다.

3. 3. 동인의 분열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정여립 모반 사건)를 계기로 서인이 정권을 잡았다.[8] 동인 중 일부 급진 세력이 이 사건에 관련되어 처벌받았기 때문에, 서인에 대한 동인의 감정이 격해졌다. 2년 뒤인 1591년(선조 24)에 동인은 정철이 세자 책봉을 왕에게 건의한 사실(건저문제)을 문제 삼아 정철 일파를 내몰았다.[8]

선조가 동인의 편을 들어주면서 동인은 세력을 회복했다. 이후 정철의 처벌 문제를 두고 강경파(급진파)인 이산해 중심의 조식·서경덕계 북인(北人)과 온건파인 류성룡 중심의 이황남인(南人)으로 분열되었다.[8] 기축옥사 때 피해를 본 세력이 조식·서경덕계였기 때문에 북인은 서인에 대한 반감이 컸다.[8]

정철 일파가 실각하면서 동인, 특히 북인이 우세해진 가운데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혼란한 상황 속에서 정권을 잡은 남인은 일시적으로 서인, 북인과 공존 체제를 취했다.[8] 그러나 일본과의 화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강경책을 주장했던 북인이 득세했다. 북인은 다시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大北)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小北)으로 분열되었고, 광해군 즉위와 함께 대북이 정권을 잡았다.[8] 서인과 남인에 비해 학문적 기반이 약했던 대북은 왕권 중심의 강력한 정치를 지향하며 다른 당파를 배제하려 했다. 그러나 북인에게 탄압받던 남인서인이 연합하여 1623년 인조반정을 일으켰고, 이후 북인은 정계에서 숙청되어 남인에 흡수되거나 흥선대원군 집권 이전까지 정계에서 배제되었다.[8]

3. 4. 당쟁의 격화

숙종 대에 이르러 서인과 남인의 대립은 격화되었다.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을 거치며 남인과 서인은 서로를 숙청하고 정치적으로 제거하는 데 힘을 쏟았다.[8]

이때, 붕당 정치의 변질을 가져온 대표적인 사건은 예송 논쟁이다. 예송은 효종과 효종 비 인선왕후의 상복을 입는 기간에 관한 문제로, 자의대비(장렬왕후)가 상복을 입는 기간에 대해 서인남인이 대립하였다. 1차 예송에서는 서인이, 2차 예송에서는 남인이 승리하였다.

하지만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고 인현왕후를 숙종의 계비로 들였다. 이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고 희빈 장씨가 중전이 되었으며, 인현왕후는 폐비되었다. 이 과정에서 서인은 송시열 중심의 노론과 윤증·박세채 중심의 소론으로 분열되었다.[8] 갑술환국을 통해 노론과 소론은 복권하면서 남인을 완전히 제거하였고, 희빈 장씨는 사약을 받고 인현왕후가 복귀되었으나 곧 병사하였다.

3. 5. 탕평책

영조는 즉위하던 해(1724년) 당쟁의 폐단을 지적하고 탕평책(蕩平策)을 폈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 사이의 화해를 유도하고 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정조는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국정 철학으로 명절과 의리를 제시하고 자신의 국정 운영에 부합하는 세력을 중용하였다.[29] 영조의 탕평책과 대비하여 정조의 탕평책은 준론탕평(峻論蕩平, 옳고 그름을 명백히 가리는 탕평책)이라 불린다.[30] 그러나 붕당 간의 당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정조의 정책에 찬성하는 시파(時派)와 반대하는 벽파(僻派)로 새로운 당파를 형성하여 당쟁을 계속하였다.

3. 6. 시파 대 벽파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싸고 시파와 벽파 간의 당쟁이 일어났다. 장헌세자 사후 그의 죽음을 동정하는 시파와 그의 죽음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벽파가 생겨났다. 홍봉한 일파는 시파에 속하고 김귀주 일파는 벽파에 속했는데, 이로써 노론의 분열은 물론 소론·남인도 주로 시파에 속하는 등 당쟁의 양상은 더욱 복잡해졌다. 그 후 정조가 즉위하자 자연히 시파를 가까이했으며, 순조가 즉위했을 때는 영조의 계비인 김씨가 섭정을 함에 따라 벽파가 정권을 잡았다. 1801년(순조 1년)에 일어난 신서파와 공서파의 대립이었던 신유사옥도 이 시파·벽파의 대립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1]

3. 7. 붕당 정치의 종말

1800년 정조가 죽고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하던 정순왕후 김씨1801년 신유박해를 일으켜 국내 로마 가톨릭 신자 탄압을 빌미로 시파를 모두 숙청하였다.[10]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난 후에는 김조순이 정권을 잡고, 그의 딸을 왕비로 삼으면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시작되었다.[10] 이와 동시에 붕당은 정치 세력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게 됐다.[10]

4. 당파의 분할 과정

조선 전기에는 훈구파와 사림파라는 두 개의 파벌이 있었는데, 명종 시대까지는 훈구파가 정치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 첫 붕당은 파평 윤씨 일가인 윤임과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대윤과 소윤이다. 대윤과 소윤은 중종 때부터 명종 때까지 주요 당파였으나, 윤임과 윤원형의 죽음으로 거의 사라졌다. 선조 때부터는 사림파가 득세하였는데, 이때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이이이황을 중심으로 대립하였다. 두 당파는 동서분당을 계기로 완전히 갈라섰다.

이후 동인은 이황의 제자인 남인과 그 외 인물은 북인으로 분할되었고, 이이의 당파인 서인은 광해군 시절 북인이 대북과 소북으로 분열되면서 정치적 입지를 잃었다. 서인은 인조반정으로 다시 득세한 이후 남인과 당쟁을 벌였고, 남인을 꺾은 이후 노론과 소론으로 다시 분할되어 당쟁을 벌였다.

현종 때부터 숙종 때까지 남인과 서인이 번갈아 정권을 잡았다. 이때 남인은 서인 처벌을 엄히 하자는 청남과 느슨하게 하자는 탁남으로 나뉘었다가 영조 때에 다시 남인으로 통합된다.

영조는 탕평책을 실시하여 사색당파를 고루 등용하려 했지만, 사도세자가 죽는 임오화변의 영향으로 사색당파가 벽파와 시파로 나뉘었다. 노론은 대체로 벽파로서 사도세자에 반대하여 그 죽음을 방조 또는 찬성했으며, 시파는 대체로 노론과 북인을 제외한 나머지로서 사도세자를 지지하여 그 죽음을 반대하였다. 정조의 즉위로 시파가 득세했지만, 정조 말년에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오면서 그에 대해 극렬하게 반대한 공서파와 그에 대해 느슨하게 대한 신서파로 나뉘었다. 공서파는 벽파가 주를 이루며, 신서파는 시파가 주를 이루었으나 동일한 당파는 아니었다.

순조가 즉위한 이후로는 대왕대비의 벽파가 크게 득세한 가운데 공서파도 세를 얻지만, 시파는 일시적으로 약화되고, 신서파는 몰락한다. 그 뒤 시파인 김조순의 세도 정치로 붕당은 종말되었다.

사색당파인 동인, 서인, 남인, 북인은 정치적 당파이면서 학파의 성격을 지녔지만, 시파·벽파 및 공서파·신서파는 정치적 당파일 뿐 학파와는 무관하다.

5. 역사적 평가

붕당 정치에 대한 평가는 크게 당쟁론과 붕당정치론(군신공치론)으로 나뉜다.

붕당은 근대 이전의 시대적 한계 속에서도 발전된 정치 형태로서 기능했다. 붕당 정치는 외척과 공신의 폐해가 컸던 조선 사회에서 특정 가문이나 공신 집단의 횡포를 효과적으로 견제했다. 또한 절대 군주제 하에서도 신하들의 소수 의견이 자유롭게 개진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정치 참여 기회를 중소 지주 계급 전체로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

일부 학자들은 당쟁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건창의 《당의통략》에 따르면, 당쟁이 격심했던 1680년(숙종 6년) 경신대출척부터 1727년(영조 3년) 정미환국까지 약 50년 동안 정치적 이유로 희생된 사람은 79명으로, 1년에 약 1.6명에 불과하다.

이는 프랑스 혁명 당시 1792년 8월 10일 하루 동안 1,300명이 희생된 것이나, 파리 코뮌 기간 중 1871년 5월 21일부터 28일까지 7일 동안 25,000명이 희생된 것, 러시아의 “피의 일요일”(1905년 1월 22일)에 150명이 사형당한 것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수이다.

당파는 주자학에 대한 철학적 이해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율곡학파는 서인, 퇴계학파나 조식학파는 동인으로 모였다.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과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라는 존재론적 문제에 대한 해석 차이가 사림 분화를 초래했다.[34]

대한민국 드라마 ''이산''(2007)에서 노론은 정조의 주요 적으로 묘사된다.

5. 1. 당쟁론

조선 선조 이후의 정치사 연구는 당쟁론과 군신공치론(君臣共治論)에 입각한 붕당정치론이 공존하고 있다.[14] 당쟁론은 조선의 당파를 이익 집단 내지 파당, 곧 특권적 권력 집단으로 보고 이들에 의한 권력 쟁탈전으로 보는 시각이다.

당쟁의 폐해를 조선 멸망의 원인으로 보던 주장에 대해서는 일본식민사관의 영향이라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도 당대 지식인들의 당쟁에 대한 비판은 존재하였다. 이익은 '붕당론'을 통해 당쟁의 폐단을 지적하며, 당쟁의 원인은 관직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라고 비판하였다.[31] 구한말 유생 황현은 《오하기문》을 통해 붕당의 폐해가 극심하면 반드시 나라가 망하였다고 언급하였다.[32]

시데하라 아키라 등은 한국인의 민족성이 본래 싸움을 좋아하기 때문에 당쟁이 가열되었다고 주장하였고,[33] 임진왜란 초반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한 이유가 동인과 서인 사이의 대립 때문이라고 보기도 했다. 호소이 하지메는 "조선 사람의 혈액에 특이한 검푸른 피가 섞여 있어" 당쟁이 일어났다는 이론을 내놓았다. 미지나 쇼에이는 조선이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있었기 때문에 독립성이 결여돼 서로 의존해야 하는 당파를 만들었다는 이론을 내놓았다.[34]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5. 2. 붕당정치론 (군신공치론)

붕당정치론은 붕당 간의 비판과 견제를 통해 균형을 유지하며 공존을 원칙으로 한 정치 형태라는 시각이다.[14] 특정 가문이나 공신 집단의 횡포를 견제하고, 신하들의 소수 의견이 자유롭게 개진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는 긍정적 평가가 있다.

순조 이후 붕당 정치가 붕괴하고 특정 가문이 독재하는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 조선 왕조가 쇠퇴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붕당의 정치적 자정 기능을 짐작할 수 있다. 당쟁이 격심했던 시기에 민생이 안정되었다는 역설적인 측면도 있는데, 이는 견제와 균형만이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교훈을 오늘날 역사에 일깨워준다.

물론 붕당이 자파의 이해를 극대화하기 위해 파벌 다툼을 벌이고 성리학적 대의명분에 지나치게 집착해 현실적인 대응력을 떨어뜨린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34]

6. 여담

2013년 TGR21에 탕수육 소스를 부어 먹는 것과 찍어 먹는 것에 대한 논쟁을 붕당 정치의 관계에 대입시켜 '탕수육으로 본 조선시대 붕당의 이해'로 정리한 글이 있다.[35][3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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