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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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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주도율은 북위 시대의 인물로, 사촌형인 이주영의 정벌에 종군하며 관직을 시작했다. 안서장군, 삭주자사 등을 거쳐 위장군, 좌광록대부, 경기대도독을 역임했다. 이주영 사망 후 원엽을 옹립하고 태위공에 올랐으며, 이주조와 함께 낙양을 지켰다. 이후 고환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곡사춘에게 붙잡혀 낙양에서 처형되었다.

2. 생애

이주도율은 소박하고 과묵한 성품을 지녔으며, 사촌형인 이주영의 정벌에 통군(統軍)으로 종군했다.

528년 안서장군(安西將軍) 및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임명되었으며, 낙향현개국백(樂鄕縣開國伯)에 봉해졌다. 이후 안북장군(安北將軍) 및 삭주 삭주자사(朔州刺史)를 역임했다. 산기상시(散騎常侍) 및 우위장군(右衞將軍)을 거쳐 위장군(衛將軍) ·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 · 경기대도독(京畿大都督)을 겸하였다.

530년 이주영이 살해당하자 이주세륭 등과 함께 장광왕 원엽을 옹립하고 태위공(太尉公) · 사면대도독(四面大都督)이 되었으며 상산왕(常山王)으로 추봉되었다. 이주조와 함께 낙양에 입성한 뒤, 이주조가 진양으로 귀환하자 낙양을 지켰다.

531년, 고환이 이주씨 일족에 대항하여 거병하자, 사지절(使持節) · 시중(侍中) · 대장군(大將軍) · 태위(太尉)를 제수받고 고환과 싸웠으나 이주씨 일족의 내분으로 패하였다. 532년, 곡사춘에게 붙잡힌 뒤 낙양으로 보내져 사형당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관직

이주도율은 소박하고 과묵한 성품을 지녔다. 사촌형인 이주영의 정벌에 통군(統軍)으로 종군했다. 528년 안서장군(安西將軍) ·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임명되었으며, 낙향현개국백(樂鄕縣開國伯)에 봉해졌다. 이후 안북장군(安北將軍) 및 삭주 삭주자사(朔州刺史)를 역임했다. 산기상시(散騎常侍) 및 우위장군(右衞將軍)을 거쳐 위장군(衛將軍) ·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 · 경기대도독(京畿大都督)을 겸하였다.

2. 2. 이주영 사후 권력 장악

530년 이주영이 살해당하자 이주세륭 등과 함께 장광왕 원엽을 옹립하고 태위공(太尉公) · 사면대도독(四面大都督)이 되었으며 상산왕(常山王)으로 추봉되었다. 이주조와 함께 낙양에 입성한 뒤, 이주조가 진양으로 귀환하자 낙양을 지켰다.

2. 3. 고환과의 대립 및 최후

531년, 고환이 이주씨 일족에 대항하여 거병하자, 이주도율은 사지절(使持節) · 시중(侍中) · 대장군(大將軍) · 태위(太尉)를 제수받고, 상서령(尙書令) · 동북도대행대(東北道大行台)를 겸하여 이주중원과 함께 고환과 싸웠다. 그러나 고환의 이간책으로 이주조와 서로 의심하게 되어 내분이 발생했고, 결국 패배했다. 이주도율의 어머니 산씨(山氏)는 아들의 패전 소식을 듣고 "나는 네가 살해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며 사망했다.

532년, 대행대(大行臺) 지위가 해제되고 한릉(韓陵)에서 다시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했다. 곡사춘이 하량(河梁)에 주둔하자 이를 공격하려 했으나, 폭우로 인해 군사들이 피로해져 율파진(㶟波津)으로 철수하다가 곡사춘에게 붙잡혔다. 곡사춘은 이주도율의 신병을 고환에게 넘겼고, 고환은 그를 낙양으로 압송하여 도성 저자거리에서 참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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