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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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랑은 531년 고환에 의해 옹립되어 북위의 황제가 되었으나, 532년 효무제에게 양위하고 살해된 인물이다. 그는 북위 절민제와 황위를 다투었으며, 고환의 지지 속에 신도에서 즉위하여 연호를 중흥으로 정했다. 이후 고환이 이주씨를 물리치고 실권을 장악하면서 효무제를 옹립하려 하자, 원랑은 폐위되어 안정군왕으로 강등되었다. 결국 효무제에 의해 동해왕 원엽과 함께 살해되었으며, 아들 원황두가 작위를 물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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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랑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원랑 |
한자 표기 | 元朗 |
가문 | 원 |
왕조 | 북위 |
출생 | 513년 |
사망 | 532년 12월 26일 |
재위 | |
북위 황제 | predecessor: 절민제 reign: 531년 10월 31일 – 532년 6월 6일 successor: 효무제 |
연호 | |
연호 | 중흥 (531-532)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장무왕 원융 |
어머니 | 정씨 |
배우자 | 후궁 |
기타 정보 | |
휘 | 원랑 |
자 | 중철 |
추가 정보 (번역 필요) | |
묘호 | 없음 |
시호 | 없음 |
2. 생애
531년 고환이 신도(信都)에서 이주씨에 대항하는 군사를 일으키자, 음력 10월 6일 손등(孫騰)의 요청으로 원랑을 황제로 세웠다. 원랑은 신도성 서쪽에서 즉위하여 연호를 중흥(中興)으로 정했다. 이로써 북위는 절민제와 원랑, 두 명의 황제가 대립하게 되었다.
원랑은 고환을 시중·승상·도독중외제군사·대장군·녹상서사·대행대(侍中·丞相·都督中外諸軍事·大將軍·錄尙書事·大行臺)로, 고건을 시중·사공(侍中·司空)으로, 고오조(高敖曹)를 표기대장군·의동삼사·기주자사(驃騎大將軍·儀同三司·冀州刺史)로, 손등을 상서복야·하북행대(尙書左僕射·河北行臺)로, 위란근(魏蘭根)을 우복야(右僕射)로 삼았다.
532년 음력 2월 26일, 이주조에게 살해된 이전 황제 원자유에게 경종(敬宗) 무회황제(武懷皇帝)라는 시호를 추숭했다. 음력 2월 29일 고환을 대승상(大丞相)·주국대장군(柱國大將軍)·태사(太師)로 삼았고, 음력 3월 2일에는 고환의 아들 고징(高澄)을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으로 삼았다. 음력 3월 13일 백관을 인솔하고 업(鄴)의 궁궐로 들어갔다.
고환이 한릉(韓陵)에서 이주천광의 군사를 격파하여 이주씨가 크게 패하자, 절민제는 중서사인 노변(盧辯)을 보내 고환을 위로했다. 고환은 노변에게 원랑을 알현케 했으나, 노변은 항의하며 사양했고, 고환은 이를 꺾지 못하고 놓아주었다.
음력 4월 8일 후경이 항복해오자 상서복야·남도대행대·제주자사(尙書僕射·南道大行臺·濟州刺史)로 삼았다. 음력 4월 13일 안동장군(安東將軍) 신영(辛永)이 건주(建州)를 바치고 항복해왔다. 음력 4월 18일 원랑이 낙양 북쪽 망산(邙山)에 도착했는데, 고환은 원랑과의 관계가 소원하여 절민제를 다시 옹립하려 했다. 그러나 절민제의 통제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여 절민제를 폐위했다.
이후 고환이 효무제를 옹립하려 하자, 효무제는 원랑에게 조책(詔策)을 만들어 선양하게 했다. 음력 4월 25일 효무제가 즉위하자 원랑은 안정군왕으로 강봉되었고, 음력 11월 14일 효무제에게 동해왕 원엽과 함께 살해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배경
513년 북위의 주요 관리였던 장무왕 원융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정씨이다. 선무제의 먼 친척이었다. 526년 아버지 원융이 농민 반란 지도자 거롱과 싸우다 전사하자, 형 원경철(元景哲)이 장무왕 작위를 물려받았다. 원랑은 젊은 시절 총명했다고 전해진다.529년 16세의 원랑은 군 장교가 되어 노군의 원수(元肅) 휘하에서 근무했다. 원수는 사주(肆州, 대략 현대 산서성 신주에 해당)의 지사였다. 531년 봄, 발해군(渤海, 현대 하북성 창주에 해당)의 지사가 되었다.
원랑이 발해군 지사가 되었을 당시, 북위 조정은 최고 사령관 이주세륭의 세력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효장제가 530년에 이주세륭을 살해한 후, 이주씨 세력은 효장제를 폐위시키고 살해한 뒤, 원엽과 절민제를 차례로 옹립했다. 531년 여름, 장군 고환은 이주씨 세력이 부패하고 민심을 잃었다고 판단하여 신도군(信都, 현대 허베이성 형수에 해당)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고환은 처음에는 이주씨 세력을 몰아내고 절민제를 인정하겠다고 주장했지만, 곧 그의 장군 손등의 권유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조서를 내릴 수 있는 황제를 옹립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531년 겨울, 고환은 원랑의 발해군을 장악한 후, 원랑을 황제로 선포했다. 비록 원랑의 혈통이 최근 황제들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고, 심지어 황족도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2. 2. 즉위 과정
531년 고환이 신도(信都)에서 군사를 일으켰고, 그해 음력 10월 6일 손등(孫騰)의 요청을 받아들여 원랑을 황제로 세웠다. 원랑은 신도성 서쪽에서 황제 자리에 올랐고, 연호를 중흥(中興)으로 바꿨다.[6] 이로써 북위는 절민제와 원랑, 두 명의 황제가 대립하게 되었다.원랑은 고환을 시중·승상·도독중외제군사·대장군·녹상서사·대행대(侍中·丞相·都督中外諸軍事·大將軍·錄尙書事·大行臺)로 삼았고, 고건을 시중·사공(侍中·司空)으로 임명했다. 고오조(高敖曹)를 표기대장군·의동삼사·기주자사(驃騎大將軍·儀同三司·冀州刺史)로 삼았고, 손등을 상서좌복야·하북행대(尙書左僕射· 河北行臺)로, 위란근(魏蘭根)을 우복야(右僕射)로 삼았다.
532년 음력 2월 26일, 이주조에게 살해된 이전 황제 원자유에게 경종(敬宗)의 묘호와 무회황제(武懷皇帝)의 시호를 추숭했다. 같은 해 음력 2월 29일 고환을 대승상·주국대장군·태사(大丞相・柱國大將軍・太師)로 삼았고, 음력 3월 2일에는 고환의 아들 고징(高澄)을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으로 삼았다. 음력 3월 13일 백관을 인솔하고 업(鄴)의 궁궐로 들어갔다.
이후 고환이 한릉(韓陵)에서 이주천광의 군사를 이겨 이주씨들이 크게 패하자, 절민제가 중서사인 노변(盧辯)을 보내 업에서 고환을 위로했다. 고환은 노변에게 원랑을 알현케 했으나, 노변은 항의하며 사양했고, 고환은 이를 꺾지 못하고 놓아주었다. 음력 4월 8일 표기대장군·행제주사(驃騎大將軍·行濟州事) 후경(侯景)이 항복해오자 상서복야·남도대행대·제주자사(尙書僕射·南道大行臺·濟州刺史)로 삼았다. 음력 4월 13일 안동장군(安東將軍) 신영(辛永)이 건주(建州)를 바치고 항복해왔다. 음력 4월 18일 원랑이 수도 낙양 북쪽 망산(邙山)에 도착했는데, 고환은 원랑이 탁발황의 현손이었던 까닭에 소원(疎遠)하여 절민제를 다시 받들려고 했다. 그러나 절민제의 정신이 고상하고 밝아 통제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절민제를 폐위했다. 이후 고환이 효무제를 찾아내 세우려 하자, 효무제는 원랑에게 조책(詔策)을 만들어 자리를 선양케 했다. 음력 4월 25일 효무제가 즉위하자 원랑은 안정군왕으로 강봉되었다.[7]
2. 3. 재위 기간
531년 음력 10월 6일, 고환이 이주씨 토벌을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키면서, 손등(孫騰)의 요청으로 원랑을 황제로 추대했다. 원랑은 신도성 서쪽에서 즉위하여 연호를 중흥(中興)으로 정하고, 북위는 절민제와 원랑의 두 황제가 대립하는 상황이 되었다.[6]원랑은 고환을 시중·승상·도독중외제군사·대장군·녹상서사·대행대(侍中·丞相·都督中外諸軍事·大將軍·錄尙書事·大行臺)로, 고건(高乾)을 시중·사공(侍中·司空)으로, 고오조(高敖曹)를 표기대장군·의동삼사·기주자사(驃騎大將軍·儀同三司·冀州刺史)로, 손등을 상서좌복야· 하북행대(尙書左僕射· 河北行臺)로, 위란근(魏蘭根)을 우복야(右僕射)로 임명했다.
532년 음력 2월 26일, 이전 황제 원자유에게 경종(敬宗) 무회황제(武懷皇帝)라는 시호를 추숭했다.[6] 음력 2월 29일 고환을 대승상(大丞相)・주국대장군(柱國大將軍)・태사(太師)로 삼았고, 음력 3월 2일 고환의 아들 고징(高澄)을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으로 삼았다. 음력 4월 8일, 후경이 항복해오자 상서복야·남도대행대·제주자사(尙書僕射·南道大行臺·濟州刺史)로 삼았고, 음력 4월 13일 안동장군(安東將軍) 신영(辛永)이 건주(建州)를 바치며 항복해왔다.[6] 같은해 음력 4월, 고환이 한릉(韓陵)에서 이주천광의 군대를 격파하고 이주씨 세력이 크게 약화되자, 절민제는 중서사인 노변(盧辯)을 보내 고환을 위로했으나, 노변은 원랑을 알현하지 않고 항의하다가 풀려났다.
고환은 원랑과 함께 낙양으로 진군하면서, 원랑의 혈통이 황제 자리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절민제를 다시 옹립하려 했으나, 절민제의 통제가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에 효무제를 새 황제로 세우기로 결정했다.[6] 결국 음력 4월 25일 원랑은 효무제에게 양위하는 조칙을 내리고, 안정군왕으로 강등되었다.[7]
2. 4. 폐위와 죽음
532년 음력 4월 8일, 후경이 항복해오자 그를 상서복야·남도대행대·제주자사로 삼았다.[5] 같은 달 13일에는 안동장군 신영이 건주를 바치며 항복해왔다. 18일, 원랑은 수도 낙양 북쪽의 망산에 도착했는데, 고환은 원랑이 탁발황의 현손이었던 까닭에 그와 소원(疎遠)하여 절민제를 다시 옹립하려 했으나, 절민제의 정신이 고상하고 밝아 통제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결국 그를 폐위했다.[6] 이후 고환이 효무제를 찾아내 세우려고 하자, 효무제는 원랑에게 조서를 내려 자리를 선양하게 했다.[7] 같은 해 음력 4월 25일, 효무제가 즉위하자 원랑은 다시 안정군왕으로 강등되었고, 그해 음력 11월 14일에 효무제에게 원엽과 함께 살해되었다.3. 가족 관계
- 안평왕 원황두(?–559) 安平王 元黃頭중국어 - 북제 건국 후 작위가 강등됨.
4. 연호
참조
[1]
문서
ren'yin day of the 10th month of the 2nd year of the Jian'ming era
Book of Wei
[2]
문서
xin'si day of the 4th month of the 2nd year of the Zhong'xing era
Bei Shi
[3]
문서
jiachen day of the 11th month of the 4th year of the Zhong Datong era
Zizhi Tongjian
[4]
문서
Yuan Lang's biography in Book of Wei
[5]
문서
Yuan Lang's biography in Book of Wei
[6]
서적
高歓以安定王疏遠、使僕射魏蘭根慰諭洛邑、且観節閔帝之為人、欲復奉之
[7]
서적
乃為安定王作詔策而禅位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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