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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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주중원은 북위 후기의 인물로, 육진의 난 당시 이주영을 따라 종군했으며, 이주영 사후 권력을 장악하여 전횡을 일삼았다. 530년 이주영이 살해되자 낙양으로 진군하여 세력을 확장했고, 원엽을 옹립하며 여러 관직을 역임했지만, 부패와 전횡으로 인해 대행대에서 면직되었다. 고환이 거병하자 이에 맞섰으나 패배하여 양나라로 망명, 객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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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씨 - 이주영 (북위)
이주영은 북위 말 군벌로, 하음의 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효장제를 옹립하여 권력을 강화했지만, 효장제와의 갈등으로 암살당하며 북위의 쇠퇴를 가속화했다. - 이주씨 - 이주천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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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중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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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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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자원(子遠) |
시호 | 무(武) |
생몰년 | 493년 ~ 532년 |
자 | 자원(子遠) |
관직 | 북위의 권신 |
가계 | |
아버지 | 이주영 |
형제 | 이주조, 이주세륭, 이주천광 |
친척 | 이주박(사촌) |
주요 활동 | |
봉기 진압 | 형 이주조와 함께 갈영 토벌 |
낙양 진공 | 효장제를 옹립하고 정권을 장악 |
이주영 암살 후 | 효장제를 폐위하고 새로운 황제 옹립 시도 |
최후 | 고환에게 패배하여 처형됨 |
2. 생애
육진의 난 당시 이주영을 따라 종군했다. 효장제 즉위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청하군공(淸河郡公)에 봉해졌고,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및 좌광록대부(左光禄大夫)를 겸했다.
530년 이주영이 살해당하자 낙양으로 진군하여 효장제에 맞섰고, 원엽을 옹립한 뒤 팽성왕(彭城王)으로 추봉되었다. 이후 대장군(大將軍) 및 상서령으로 승진했다.
이주중원은 부자들에게서 세금을 빼앗거나 무고한 여인에게 함부로 손을 대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532년 고환과의 전투에서 패한 뒤 양나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객사하였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북위 화주(동주) 자사(華州刺史) 이주매진(爾朱買珍)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필서로 생계를 유지했다. 육진의 난이 일어나고 이주영이 두각을 나타내자, 이주중원은 이주영 휘하에서 종군했다. 이주영의 글씨를 흉내 내고, 이주영의 위조 도장을 새겨 상서령사와 통하여 매관매직을 행하고, 재산을 얻어 주색에 탕진했다.528년, 효장제 즉위 후, 이주중원은 영원장군(寧遠將軍)·보병교위(歩兵校尉)에 임명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평북장군(平北將軍)·건흥군(建興郡) 태수가 되었고, 돈구현개국후(頓丘縣開國侯)에 봉해졌다. 이후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더해졌다. 건흥군이 건주로 바뀌자, 사지절(使持節)·거기장군·건주(虔州) 자사로 전임되었다. 시중이 더해졌고, 작위는 공으로 진급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하군공(淸河郡公)으로 개봉되었고,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좌광록대부(左光禄大夫)가 더해졌다. 사지절·거기장군·서주 자사로 전임되었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삼서주대행태(三徐州大行臺)를 겸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본관 그대로, 도독삼서주제군사(都督三徐州諸軍事)로 진급했다. 군관 부족을 보충할 때, 군의 사정에 맞추도록 상주하여 정실 인사를 횡행시켰다.
2. 2. 이주영 사후 권력 장악과 전횡
530년 이주영이 살해되자, 이주중원은 군사를 이끌고 낙양으로 향해 서연주를 점령하고 동군을 공격했다. 효장제는 정선호와 하발승에게 이주중원 토벌을 명했으나, 하발승은 패배 후 항복했고 정선호는 이주조가 합세하자 도주했다.이후 이주중원은 다른 이주씨 일족과 함께 원엽을 옹립하고, 표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 서주자사, 동도대도독, 대행대에 임명되었으며, 팽성왕으로 추봉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장군 및 상서령으로 승진했으며, 서주에 부임하지 않고 대량에 주둔하며 본장군 및 연주자사를 겸했다.
이주중원은 부자들에게 세금을 빼앗고, 무고한 여인에게 함부로 손을 대거나, 형양 동쪽에서 징수되는 세금을 모두 자신이 사적으로 사용하는 등 전횡을 저질렀다. 이 때문에 대행대에서 면직된 후 태재가 되었다.
2. 3. 고환과의 대립과 몰락
530년, 이주영이 살해되자 이주중원은 군사를 이끌고 낙양으로 향했다. 서연주(西兗州)를 점령하고 동군(東郡)을 공격하려 했다. 효장제는 정선호(鄭先護)와 하발승(賀拔勝)에게 이주중원을 토벌하도록 명했으나, 하발승은 패배하여 항복했고 정선호는 이주조(爾朱兆)가 합세하자 도주하였다.이후 이주중원은 다른 이주씨 일족과 함께 원엽(元曄)을 옹립하고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 서주자사(徐州刺使) · 동도대도독(東道大都督) · 대행대(大行臺)를 제수받았으며, 팽성왕(彭城王)으로 추봉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표기대장군의 지위가 더해졌고, 상서령을 겸했다. 서주에 부임하지 않고, 대량에 주둔했다. 본관 그대로, 도독동도제군사·표기대장군·연주 자사로 전임되었다.
이주중원은 부자들에게서 재산을 빼앗아 사유화하고, 미인을 보면 함부로 손을 대는 등 횡포를 부렸다. 형양(滎陽) 동쪽에서 운반되는 세금은 모두 자신의 군대 회계에 넣어 낙양으로 보내지 않았다. 이주천광(爾朱天光)은 관우(關右)에서, 이주중원은 대량(大梁)에서, 이주조는 병주(幷州)에서, 이주세륭(爾朱世隆)은 낙양에서 각자 마음대로 행동하여, 이주씨의 권세에 필적하는 자는 없었다. 이주중원은 대행대에서 해임된 후 태재(太宰)가 되었다.
531년, 고환이 이주씨 일족을 섬멸하기 위해 거병하자 이주도율(爾朱度律) 등과 함께 고환을 막았다. 그러나 이주조가 진양에서 와서 이주씨 군대가 합류했음에도, 고환의 이간책에 빠져 이주씨 일족은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며 철수하게 되었다. 532년, 이주중원은 이주천광 등과 함께 한릉에서 싸워 패배한 후 동군으로 도망쳐 남조 양으로 망명했다. 남조 양의 무제는 이주중원에게 정락장군(定樂將軍)의 칭호를 내리고 하남왕(河南王)에 봉했다. 이후 이주중원은 강남(江南)에서 객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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