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 앗딘 마수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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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즈 앗딘 마수드 1세는 1174년 누르 앗딘 사후 다마스쿠스와 알레포의 지배권을 두고 경쟁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모술의 아타베그가 되었다. 그는 살라흐 앗딘과 대립하며 영토를 두고 경쟁했고, 알레포와 신자르를 교환하는 등의 외교적 행보를 보였다. 1190년 살라흐 앗딘의 지하드에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으며, 1193년 살라흐 앗딘 사후 아이유브 왕조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실패하고 모술에서 사망했다. 그의 아들 누르 앗딘 아르슬란 샤 1세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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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 앗딘 마수드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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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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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 | 장기 왕조 |
아버지 | 쿠틉 앗딘 마우두드 |
통치 | |
즉위 | 1181년 |
퇴위 | 1193년 |
전임자 | 사이프 앗딘 가지 2세 |
후임자 | 누르 앗딘 아르슬란 샤 1세 |
생애 | |
출생 | 알 수 없음 |
사망 | 1193년 |
사망 장소 | 알레포 |
매장 장소 | 알 수 없음 |
칭호 | |
모술 에미르 | 1180년 ~ 1193년 |
알레포 에미르 | 1182년 |
신자르 에미르 | 1182년 |
종교 | |
종교 | 수니파 이슬람교 |
2. 생애
이즈 앗딘 마수드 1세는 장기 왕조의 아미르 사이프 앗딘 가지 2세의 형제이자 그의 군대 지휘관이었다.[2] 1174년 누르 앗딘이 사망한 후 벌어진 권력 투쟁 속에서 다마스쿠스와 알레포 확보에 실패했으며[4], 1175년에는 형의 명령으로 살라흐 앗딘과 싸웠으나 패배했다.[5]
1180년 형 사이프 앗딘 가지 2세가 사망하자, 마수드는 모술의 아타베그로 추대되었다.[2] 1181년에는 사촌 앗살리흐 이스마일의 유언에 따라 알레포의 지배자가 되었으나[2], 살라흐 앗딘의 위협 속에서 모술과 알레포를 동시에 통치하는 데 어려움을 느껴 1182년 형제 이마드 앗딘 장기 2세와 영지를 교환하여 신자르의 통치자가 되었다.[2][6]
그러나 살라흐 앗딘의 공세는 계속되어 1182년 신자르를 빼앗겼고[7][8], 1185년에는 모술이 공격받기도 했다.[9] 결국 마수드는 1186년 살라흐 앗딘과 강화 조약을 맺고 그의 봉신이 되었다.[2] 봉신으로서 1190년 살라흐 앗딘의 ''지하드''에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10]
1193년 3월 3일 살라흐 앗딘이 사망하자 마수드는 아이유브 왕조로부터 독립을 시도했으나, 같은 해 8월 28일 모술에서 병으로 사망하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11] 그의 지위는 아들 누르 앗딘 아르슬란 샤 1세가 계승했다.[12][13][3]
2. 1. 초기 생애와 권력 승계
이즈 앗딘 마수드 1세는 장기 왕조의 아미르 사이프 앗딘 가지 2세의 형제이자 그의 군대 지휘관이었다.[2] 1174년 5월 15일 누르 앗딘이 죽은 직후에, 마수드 1세는 다마스쿠스와 알레포의 지배권을 확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4] 이듬해인 1175년, 형 가지 2세는 마수드에게 군대를 맡겨 살라흐 앗딘을 공격하게 했다. 살라흐 앗딘은 큰 위협을 느끼고 다마스쿠스 북쪽 영토를 양보하는 조건으로 강화를 제안했지만, 마수드는 이를 거절했다. 결국 1175년 4월 23일, 하마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살라흐 앗딘에게 크게 패배했다.[5]1180년 6월 23일, 형 가지 2세가 죽었다. 가지 2세는 자신의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그의 아미르들은 어린 군주가 살라흐 앗딘에 맞설 수 없을 것이라 판단하여 마수드 1세를 아타베그로 추대했다.[2] 또한, 1181년, 사촌이었던 알레포의 앗살리흐 이스마일은 죽기 직전 그의 주요 지휘관들에게 이즈 앗딘 마수드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을 요구했다.[2]
이스마일이 죽은 뒤, 마수드 1세는 살라흐 앗딘이 알레포를 차지할 것을 우려하여 즉시 알레포로 향했다.[2] 그는 알레포를 점령한 뒤 병사들에게 돈을 주고, 앗살리흐의 어머니와 결혼했다.[2] 그러나 모술과 알레포를 동시에 통치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마수드 1세는 1182년, 신자르를 다스리던 형제 이마드 앗딘 장기 2세에게 신자르와 알레포를 교환하자고 요청했다. 장기 2세는 이에 동의했고, 두 사람은 영지를 교환했다.[6][2] 이 무렵 하마에서 살라흐 앗딘의 조카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나 마수드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시리아 주민들이 여전히 장기 왕조에 대한 지지를 보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6] 마수드 1세는 이 교환으로 신자르의 아미르가 되었다.
2. 2. 살라흐 앗딘과의 관계
이즈 앗딘 마수드 1세는 장기 왕조의 주요 인물로서, 아이유브 왕조를 세운 살라흐 앗딘과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초기에는 1174년 누르 앗딘 사후의 혼란 속에서 다마스쿠스와 알레포의 지배권을 두고 경쟁했으며[4], 1175년에는 형 사이프 앗딘 가지 2세의 명령으로 살라흐 앗딘과 직접 군사적으로 충돌하기도 했다.[5]1180년 형의 뒤를 이어 모술의 아타베그가 된 마수드는 1181년 사촌 앗살리흐 이스마일의 사후 알레포를 차지했으나[2], 살라흐 앗딘과의 지속적인 영토 분쟁과 협상 끝에 1182년 알레포를 형제 이마드 앗딘 장기 2세의 신자르와 교환했다.[2][6] 살라흐 앗딘의 군사적 압박은 계속되었고, 1182년 신자르를 빼앗겼으며[7][8], 1185년에는 모술이 공격받기도 했다.[9] 결국 마수드는 1186년 3월 3일 살라흐 앗딘의 봉신이 되는 강화 조약을 맺었다.[2]
봉신으로서 1190년 살라흐 앗딘의 ''지하드''에 군대를 파견하는 등 협력하기도 했으나[10], 1193년 3월 3일 살라흐 앗딘이 사망하자 아이유브 왕조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시도했다.[11][3] 그러나 같은 해 8월 28일 마수드 역시 모술에서 병사하면서 그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11][3][12][13]
2. 2. 1. 초기 대립
1174년 5월 15일 누르 앗딘이 죽은 직후에 이즈 앗딘 마수드 1세는 다마스쿠스와 알레포의 지배권을 손에 넣기 위해 싸웠지만 실패했다.[4] 그 이듬 해에 그의 형제 사이프 앗딘 가지 2세는 마수드에게 살라흐 앗딘를 정벌할 군대를 맡겼다. 이에 크게 위협을 느낀 살라흐 앗딘은 마수드에게 다마스쿠스 이북의 영토 모두를 양보하겠으니, 강화를 맺어주기를 부탁했으나, 마수드는 거절했다. 결국 1175년 4월 23일, 양군대는 하마 인근에서 격돌했고, 이 전투에서 살라흐 앗딘은 대승을 거두었다.[5]1180년 6월 23일, 가지 2세가 죽었다. 이때 그는 그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하지만 그의 아미르들이 어린 그의 아들이 살라흐 앗딘과 싸울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해, 이즈 앗딘 마수드 1세를 모술의 아타베그로 옹립했다. 또, 1181년, 사촌이었던 알레포의 앗살리흐 이스마일은 죽기 직전 그의 주요 지휘관들에게 이즈 앗딘 마수드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을 요구했다.
이스마일이 죽은 뒤 마수드 1세는 살라흐 앗딘이 선수를 칠까 두려워 알레포로 달려갔다. 그는 알레포를 점령한 즉시 그곳의 병사들에게 돈을 주고, 앗살리흐의 어머니와 결혼했다.[2] 그러나 그는 알레포와 모술을 동시에 지배하기 어렵다는 생각에 신자르를 지배하던 형제 이마드 앗딘 장기 2세에게 신자르와 알레포를 교환하자고 요청했다. 장기 2세는 이에 동의했고, 1182년, 두 사람은 영지를 교환했다. 이즈음에 하마가 살라흐 앗딘의 조카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들은 마수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는 아직까지도 시리아의 주민들이 장기 왕조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이다.[6]
1182년 9월, 살라흐 앗딘은 유프라테스강을 건넜다. 그는 인근의 도시들의 항복을 받은 뒤에 알레포로 진군했으나, 점령하는데는 실패하고 신자르로 가서 그곳을 점령했다. 1183년 5월 21일, 살라흐 앗딘은 알레포로 다시 진군했다. 장기 2세는 당시 알레포의 시민들에게 인기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살라흐 앗딘에게 알레포와 본래 자신의 영지였던 신자르를 교환할 것을 제의했다. 살라흐 앗딘은 이에 동의했고, 장기 2세는 신자르를 영지로 돌려받는 대신 살라흐 앗딘의 속신이 되었다.[7][8]
1185년 6월, 살라흐 앗딘은 또 한번 모술의 성벽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수드는 자신의 모친을 비롯한 귀부인들을 보내 강화를 애원했다.[9] 살라흐 앗딘은 그들을 공손하게 대우했으나, 모술 점령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모술 사람들의 저항이 너무나 대단했기 때문에 점령에는 실패했다. 살라흐 앗딘은 결국 퇴각했고, 이듬해 3월 3일에 모술과 강화 조약을 맺었다. 이를 통해 모술의 아타베그는 살라흐 앗딘의 가신이 되었다.[2]
2. 2. 2. 영토 교환 및 협상
1174년 5월 15일 누르 앗딘이 사망하자, 이즈 앗딘 마수드 1세는 다마스쿠스와 알레포의 지배권을 확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4] 이듬해인 1175년, 그의 형 사이프 앗딘 가지 2세는 마수드에게 살라흐 앗딘을 공격할 군대를 지휘하게 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살라흐 앗딘은 다마스쿠스 북쪽 영토를 양보하는 조건으로 강화를 제안했지만, 마수드는 이를 거절했다. 결국 1175년 4월 23일, 하마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살라흐 앗딘이 대승을 거두었다.[5]1180년 6월 23일, 사이프 앗딘 가지 2세가 사망하면서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아미르들은 어린 후계자가 살라흐 앗딘에 맞서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이즈 앗딘 마수드 1세를 모술의 아타베그로 추대했다. 1181년, 그의 사촌이자 알레포의 통치자였던 앗살리흐 이스마일은 병사하기 직전, 자신의 주요 지휘관들에게 마수드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지시했다.
앗살리흐 이스마일이 사망하자, 마수드 1세는 살라흐 앗딘이 알레포를 선점할 것을 우려하여 즉시 알레포로 향했다. 그는 알레포를 점령하고 그곳의 병사들에게 자금을 지급했으며, 앗살리흐의 어머니와 결혼했다. 그러나 마수드는 알레포와 모술을 동시에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신자르를 다스리던 형제 이마드 앗딘 장기 2세에게 신자르와 알레포의 영지를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장기 2세는 이에 동의했고, 1182년 두 사람은 영지를 교환하여 마수드는 신자르의 통치자가 되었다.[2] 이 시기 하마에서 살라흐 앗딘의 조카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나 마수드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이는 당시 시리아 주민들이 여전히 장기 왕조에 대한 지지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6]
1182년 9월, 살라흐 앗딘은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주변 도시들을 복속시킨 뒤 알레포로 진군했으나 점령에 실패하고, 대신 마수드가 다스리던 신자르를 점령했다. 1183년 5월 21일, 살라흐 앗딘은 다시 알레포로 진군했다. 당시 알레포 시민들에게 인기가 없었던 장기 2세는 살라흐 앗딘에게 알레포를 넘기는 대신 자신의 옛 영지였던 신자르를 돌려받는 조건으로 협상했다. 살라흐 앗딘은 이를 수락했고, 장기 2세는 신자르를 돌려받는 대가로 살라흐 앗딘의 봉신이 되었다.[7][8]
1185년 6월, 살라흐 앗딘은 다시 모술 성벽 앞에 나타났다. 마수드는 자신의 어머니를 포함한 귀부인들을 보내 강화를 간청했다.[9] 살라흐 앗딘은 그들을 정중히 대했지만 모술 점령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모술 주민들의 강한 저항으로 인해 점령에는 실패하고 퇴각했다. 결국 1186년 3월 3일, 살라흐 앗딘과 모술 사이에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고, 이 조약을 통해 모술의 아타베그인 마수드는 살라흐 앗딘의 봉신이 되었다.[2]
1190년 4월, 마수드는 살라흐 앗딘이 아크레를 포위하며 진행 중이던 ''지하드''에 자신의 아들이 이끄는 군대를 파견하며 봉신으로서의 의무를 다했다.[10]
1193년 3월 3일 살라흐 앗딘이 사망하자, 이즈 앗딘 마수드 1세와 그의 형제 이마드 앗딘 장기 2세는 아이유브 왕조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시도했다. 그러나 회력 589년 샤반 월 27일(서력 1193년 8월 28일), 마수드 1세가 모술에서 병으로 사망하면서 이 시도는 좌절되었다.[11][3] 그의 지위는 아들 누르 앗딘 아르슬란 샤 1세가 계승했다.[12][13]
2. 2. 3. 봉신 관계와 협력
1174년 5월 15일 누르 앗딘이 사망한 직후, 이즈 앗딘 마수드 1세는 다마스쿠스와 알레포의 지배권을 확보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4] 이듬해인 1175년, 그의 형제인 모술의 아타베그 사이프 앗딘 가지 2세는 마수드에게 군대를 맡겨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흐 앗딘을 공격하게 했다. 살라흐 앗딘은 위협을 느끼고 마수드에게 다마스쿠스 북쪽 영토를 양보하는 조건으로 강화를 제안했지만, 마수드는 이를 거절했다. 결국 1175년 4월 23일, 두 군대는 하마 인근에서 격돌했고, 이 전투에서 살라흐 앗딘이 큰 승리를 거두었다.[5]1180년 6월 23일, 사이프 앗딘 가지 2세가 사망하면서 자신의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아미르들은 어린 군주가 살라흐 앗딘에 맞서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이즈 앗딘 마수드 1세를 모술의 아타베그로 추대했다. 1181년, 사촌인 알레포의 앗살리흐 이스마일은 죽기 직전 자신의 주요 지휘관들에게 마수드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라고 지시했다.
앗살리흐 이스마일이 사망하자, 마수드 1세는 살라흐 앗딘이 먼저 알레포를 차지할 것을 우려하여 즉시 알레포로 향했다. 그는 알레포를 점령하고 병사들에게 자금을 분배했으며, 앗살리흐의 어머니와 결혼하여 지배 기반을 다졌다.[2] 그러나 모술과 알레포를 동시에 통치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마수드 1세는 신자르를 다스리던 형제 이마드 앗딘 장기 2세에게 신자르와 알레포의 영지를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장기 2세는 이에 동의하여 1182년 영지 교환이 이루어졌다.[2] 비슷한 시기, 하마에서 살라흐 앗딘의 조카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났고, 반란 세력은 마수드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이는 당시 시리아 주민들이 여전히 장기 왕조에 대한 지지를 보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6]
1182년 9월, 살라흐 앗딘은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북진했다. 그는 주변 도시들을 복속시킨 뒤 알레포로 진군했으나 점령에는 실패하고, 대신 신자르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1183년 5월 21일, 살라흐 앗딘은 다시 알레포로 진군했다. 당시 알레포 주민들에게 인기가 없었던 장기 2세는 살라흐 앗딘에게 알레포를 넘기는 대신 자신의 이전 영지였던 신자르를 돌려받는 조건을 제시했다. 살라흐 앗딘은 이를 수락했고, 장기 2세는 신자르를 돌려받는 대가로 살라흐 앗딘의 봉신이 되었다.[7][8]
1185년 6월, 살라흐 앗딘은 다시 모술을 공격했다. 마수드는 자신의 어머니를 포함한 귀부인들을 보내 강화를 간청했으나[9], 살라흐 앗딘은 모술 점령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모술 시민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살라흐 앗딘은 점령에 실패하고 퇴각했다. 결국 이듬해인 1186년 3월 3일, 모술과 살라흐 앗딘 사이에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고, 이 조약을 통해 마수드 1세는 살라흐 앗딘의 봉신이 되었다.[2]
봉신 관계를 맺은 후, 1190년 4월, 마수드는 살라흐 앗딘이 제3차 십자군에 맞서 아크레를 포위하고 있던 ''지하드''에 자신의 아들이 이끄는 군대를 파견하여 협력했다.[10]
1193년 3월 3일, 살라흐 앗딘이 사망하자 이즈 앗딘 마수드 1세와 그의 형제 이마드 앗딘 장기 2세는 아이유브 왕조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시도했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28일 (회력 589년 샤반 월 27일) 마수드 1세가 모술에서 병으로 사망하면서 이 시도는 좌절되었다.[11][3] 그의 지위는 아들 누르 앗딘 아르슬란 샤 1세가 계승했다.[12][13]
2. 3. 죽음과 유산
1185년 6월, 살라흐 앗딘은 다시 한번 모술 성벽 앞에 나타났으나, 모술 사람들의 강한 저항으로 점령에는 실패하고 퇴각했다.[9] 이듬해인 1186년 3월 3일, 마수드는 살라흐 앗딘과 강화 조약을 맺고 그의 봉신이 되었다.[2] 이후 1190년 4월, 마수드는 살라흐 앗딘이 제3차 십자군에 맞서 아크레를 포위하며 벌인 지하드에 자신의 아들이 이끄는 군대를 파견하여 지원하기도 했다.[10]1193년 3월 3일, 살라흐 앗딘이 다마스쿠스에서 사망하자[11] 이즈 앗딘 마수드 1세는 그의 형제 이마드 앗딘 장기 2세와 함께 아이유브 왕조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시도했다. 그러나 같은 해 회력 589년 샤반 월 27일(서력 1193년 8월 28일), 마수드 1세가 모술에서 병으로 사망하면서[11][3] 장기 왕조의 독립 시도는 좌절되었다. 그의 지위는 아들 누르 앗딘 아르슬란 샤 1세가 계승했다.[12][13][3]
참조
[1]
서적
Whelan Type II, 181-2; S&S Type 63.1; Album 1863.2
[2]
서적
Runciman, pp. 445-446
[3]
서적
The Chronicle of Michael the Syrian - (Khtobo D-Makethbonuth Zabne) (finished 1193-1195)
[4]
서적
Histoire des croisades - II
[5]
서적
Histoire des croisades - II
[6]
서적
Histoire des croisades - II
[7]
서적
살라딘
[8]
서적
Histoire des croisades - II
[9]
서적
살라딘
[10]
서적
Histoire des croisades - III
[11]
서적
Histoire des croisades - III
[12]
웹사이트
Foundation for Medieval Genealogy
http://fmg.ac/Projec[...]
[13]
서적
The Chronicle of Michael the Syrian - (Khtobo D-Makethbonuth Zabne) (finished 1193-1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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