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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앙 디블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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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리앙 디블랭은 12세기 예루살렘 왕국의 귀족으로, 이블랭 영주의 막내아들이다. 그는 몽기사르 전투에서 살라딘의 군대를 격파하는 데 기여했고, 아모리 1세의 미망인 마리아 콤네네와 결혼하여 나블루스 영지를 받았다. 그는 예루살렘 왕국의 정치에 관여하여 보두앵 4세와 보두앵 5세의 섭정을 지지했으며, 기 드 뤼지냥의 왕위 계승을 반대했다. 하틴 전투 이후 예루살렘을 방어하다가 살라딘에게 항복하고, 제3차 십자군 당시 이사벨라 1세의 남편 코라도를 지지했다. 그는 1193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장 디블랭은 베이루트 영주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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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앙 디블랭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발리앙 디블랭의 인장
발리앙 디블랭의 인장
원래 이름발리앙 디블랭
작위이블랭 영주
재위1170년경–1187년
전임자보두앵 디블랭
후임자(폐지)
작위 2나블루스 영주
재위 21177년–1187년
전임자 2마리아 콤네네
후임자 2(폐지)
작위 3카이몽 영주
재위 31192년–1193년
전임자 3(신설)
후임자 3장 디블랭?
출생일1143년경?
사망일1193년
가문이블랭가
아버지바리장 디블랭
어머니엘비스 드 라믈라
배우자마리아 콤네네
자녀엘비스 디블랭
장 디블랭
마가렛 디블랭
필리프 디블랭
종교천주교

2. 초년 생애

바리장 디블랭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으며, 위그, 보두앵 두 형이 있었다. 바리장 디블랭은 자파 백국의 기사로, 자파 백작 위그 2세가 예루살렘 왕 풀크에게 모반한 것을 진압한 공로로 이블랭 영주로 봉해졌다. 바리장은 부유한 라믈라 영지의 상속녀인 엘비스 드 라믈라와 결혼했다. 바리장의 막내아들 이름 역시 바리장이었는데, 1175년-1176년경에 "발리앙"이라는 이름을 칭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발리앙의 정확한 생년은 불명이지만 1156년 헌장에 이름이 처음 언급될 때는 미성년자라고 되어 있는데, 2년 뒤인 1158년에는 성년(대략 15세)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대략 생년을 짐작할 수 있다.

1169년경 바리장의 장남 위그가 사망하면서 이블랭 성은 차남 보두앵에게 상속되었다. 보두앵은 라믈라 영지를 선호했기에 이블랭 성을 발리앙에게 양보했다. 발리앙은 형인 라믈라 영주 보두앵의 제후였고, 라믈라 영주는 예루살렘 왕의 제후였기에 간접적으로 예루살렘 왕의 제후였다.

3. 예루살렘 왕국 정치 관여

발리앙은 1174년 예루살렘 왕국의 보두앵 4세의 섭정으로 밀레 드 플랑시가 아닌 레몽 3세 드 트리폴리 백작을 지지했으며, 1177년에는 몽기사르 전투에 참여하여 무슬림 전열을 격파하는데 기여했다. 같은 해, 발리앙은 아모리 1세의 미망인이자 비잔티움 제국 황족 출신인 마리아 콤네네와 결혼하여 이사벨라의 양아버지가 되었고, 나블루스 영지를 받았다. 1179년 야곱 여울 전투에서 발리앙의 형 보두앵이 살라딘에게 포로로 잡히자, 발리앙은 형의 몸값을 지불하기 위해 노력했고, 비잔티움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노스가 그 몸값을 지불했다.

1183년 발리앙은 레몽 3세와 기 드 뤼지냥 사이의 분쟁에서 다시 레몽 3세를 지지했다. 나병을 앓고 있던 보두앵 4세는 기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조카 보두앵 5세를 공동 왕으로 임명했고, 1185년 보두앵 4세가 죽기 직전 성묘 교회에서 보두앵 5세의 대관식이 거행되었을 때 발리앙이 보두앵 5세를 무등 태워 주었다. 이는 발리앙을 비롯한 레몽파가 보두앵 5세를 지지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1186년 보두앵 5세가 요절한 후, 발리앙과 마리아는 레몽 3세의 지지를 받아 마리아의 딸 이사벨라를 여왕 후보로 내세웠으나, 이사벨라의 남편 옹프로이 4세 드 토롱이 왕관을 거부하고 기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계획은 실패했다. 발리앙은 마지못해 기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형 보두앵은 이를 거부하고 안티오키아로 망명했다.

발리앙은 예루살렘 왕국에 남아 기의 고문이 되었다. 1186년 말, 우트르조르당 영주 르노 드 샤티용이 무슬림 대상을 공격하자 살라딘이 예루살렘 왕국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살라딘은 레몽 3세의 영지인 티베리아스와 동맹을 맺었고, 기는 나사렛에서 군대를 모아 티베리아스를 공격하려 했지만, 발리앙은 이에 반대하며 레몽에게 사절을 보내 화해를 권고했다. 1187년 부활절 이후, 발리앙과 제라르 드 리데포르, 로저 드 물랭, 시돈의 르노, 티레 대주교 요시쿠스가 다시 트리폴리로 가서 레몽을 설득하기로 했다.

사절단은 트리폴리로 가는 길에 발리앙의 영지인 나블루스를 지났는데, 발리앙은 나블루스에 잠시 머무르며 나머지 사람들을 먼저 보냈다. 5월 1일 크레송 전투에서 살라딘의 아들 알아프달이 성전기사단구호기사단을 격파했다. 발리앙은 사마리아에서 축일을 기념하기 위해 하루 늦게 도착했고,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이 숙영했던 라 페베 성이 파괴되고 생존자가 거의 없음을 알게 되었다. 레몽 역시 이 소식을 듣고 티베리아스에서 사절단을 만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로 동의했다.

3. 1. 왕위 계승 분쟁

1174년, 보두앵 4세의 섭정 자리를 두고 레몽 3세 드 트리폴리 백작과 밀레 드 플랑시가 대립하자 발리앙은 형 보두앵과 함께 레몽 3세를 지지했다. 1177년 디블랭 형제는 몽기사르 전투에서 선봉에 서서 무슬림 군대를 격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같은 해, 발리앙은 아모리 1세의 미망인이자 비잔티움 제국 황족 출신인 마리아 콤네네와 결혼하여 아모리 1세의 딸 이사벨라의 양아버지가 되었다.

또한 마리아가 아모리 1세와 결혼할 때 지참금으로 받은 나블루스 영지도 물려받았다. 1179년 발리앙의 형 보두앵이 야곱 여울 전투에서 살라딘에게 사로잡히자, 발리앙은 형의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고, 마누엘 1세 콤네노스 황제가 그 몸값을 지불해 주었다.

1183년 레몽 3세와 기 드 뤼지냥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자 디블랭 형제는 다시 레몽 3세를 지지했다. 기는 아모리 1세의 큰딸 시빌라의 남편이자, 나병으로 죽어가던 보두앵 4세의 섭정이었다. 보두앵 4세는 기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시빌라의 아들 보두앵 5세를 공동 왕으로 임명했다. 1185년 봄, 보두앵 4세는 성묘 교회에서 조카의 대관식을 거행했는데, 이때 키가 컸던 발리앙이 보두앵 5세를 어깨에 태워 올렸다. 이는 발리앙을 비롯한 레몽파가 보두앵 5세를 지지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보두앵 4세가 죽고 보두앵 5세가 단독 왕이 되었으나, 1186년 보두앵 5세마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발리앙과 마리아는 레몽 3세의 지지를 받아 마리아의 딸 이사벨라(당시 14세)를 여왕 후보로 내세웠다. 그러나 이사벨라의 남편 옹프로이 4세 드 토롱이 왕관을 거부하고 기 드 뤼지냥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발리앙은 마지못해 기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형 보두앵은 이를 거부하고 안티오키아로 망명했다. 보두앵은 아들 토마스와 라믈라 영지를 발리앙에게 맡겼다.

발리앙은 예루살렘 왕국에 남아 기의 조언자가 되었다. 1186년 말, 기의 측근인 우트르조르당 영주 르노 드 샤티용이 무슬림 대상을 공격하자, 이집트-다마스쿠스 술탄 살라딘이 예루살렘 왕국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살라딘은 레몽 3세의 영지인 티베리아스와 동맹을 맺었다. 기는 나사렛에서 군대를 모아 티베리아스를 공격하려 했지만, 발리앙은 이에 반대하며 레몽에게 사절을 보내라고 조언했다. 기가 살라딘의 대군에 맞서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화해 시도는 실패했고, 1187년 초까지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그해 부활절 이후, 발리앙과 제라르 드 리데포르(성전기사단 총장), 로저 드 물랭(구호기사단 총장), 시돈의 르노, 티레 대주교 요시쿠스가 다시 트리폴리로 가서 레몽을 설득하기로 했다. 일행은 트리폴리로 가는 길에 발리앙의 영지인 나블루스를 지났는데, 발리앙은 나블루스에 잠시 머물렀다. 5월 1일 크레송 전투에서 살라딘의 아들 알아프달이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을 격파했다. 발리앙은 사마리아에서 축일을 기념하느라 하루 늦게 도착했고,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이 숙영했던 라 페베 성이 파괴되고 생존자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레몽도 이 소식을 듣고 티베리아스에서 사절단을 만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3. 2. 살라딘과의 대립

1174년 보두앵 4세의 섭정 자리를 두고 레몽 3세 드 트리폴리 백작과 밀레 드 플랑시가 대립하자 발리앙은 형 보두앵과 함께 레몽 3세 편에 섰다. 1177년 몽기사르 전투에서 디블랭 형제는 선두에서 무슬림 전열을 무너뜨리는 데 기여했다. 같은 해 발리앙은 아모리 1세의 미망인이자 비잔틴 제국 황족인 마리아 콤네네와 결혼하여 아모리 1세의 딸 이사벨라의 양아버지가 되었다. 또한 마리아가 결혼 지참금으로 받은 나블루스 영주 자리도 물려받았다. 1179년 야곱 여울 전투에서 형 보두앵이 살라딘에게 포로로 잡히자, 발리앙은 형의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고, 비잔틴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노스가 그 몸값을 지불했다.

1183년 레몽 3세와 기 드 뤼지냥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자 디블랭 형제는 다시 레몽 3세 편에 섰다. 기는 시빌라의 남편이자 나병으로 죽어가던 보두앵 4세의 섭정이었다. 보두앵 4세는 기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조카 보두앵 5세를 공동 왕으로 임명했다. 1185년 보두앵 4세가 죽기 직전 성묘 교회에서 보두앵 5세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는데, 이때 키가 컸던 발리앙이 보두앵 5세를 무등 태워 주었다. 이는 발리앙을 비롯한 레몽파가 보두앵 5세를 지지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보두앵 4세가 죽고 보두앵 5세가 단독 왕이 되었지만, 1186년 보두앵 5세도 요절했다. 발리앙과 마리아는 레몽 3세의 지지를 받아 마리아의 딸 이사벨라(당시 14세)를 여왕 후보로 내세웠다. 그러나 이사벨라의 남편 옹프로이 4세 드 토롱이 왕관을 거부하고 기 드 뤼지냥 편에 서면서 계획은 실패했다. 발리앙은 마지못해 기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형 보두앵은 이를 거부하고 안티오키아로 망명하며 아들 토마스와 라믈라 영지를 발리앙에게 맡겼다.

발리앙은 예루살렘 왕국에 남아 기의 고문이 되었다. 1186년 말, 기의 친위세력인 우트르조르당 영주 르노 드 샤티용이 무슬림 대상을 공격하자 이집트-다마스쿠스 술탄 살라딘이 예루살렘 왕국 국경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살라딘은 레몽 3세의 영지인 티베리아스와 동맹을 맺었다. 기는 나사렛에서 군대를 모아 티베리아스를 공격하려 했지만, 발리앙은 이에 반대하며 레몽에게 사절을 보내 화해를 권고했다. 1187년 부활절 이후, 발리앙과 제라르 드 리데포르(성전기사단 총장), 로저 드 물랭(구호기사단 총장), 시돈의 르노, 티레 대주교 요시쿠스가 다시 트리폴리로 가서 레몽을 설득하기로 했다.

사절단은 트리폴리로 가는 길에 발리앙의 영지인 나블루스를 지났는데, 발리앙은 나블루스에 잠시 머무르며 나머지 사람들을 먼저 보냈다. 5월 1일 크레송 전투에서 살라딘의 아들 알아프달이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을 격파했다. 발리앙은 하루 늦게 움직였으며, 사마리아에서 축일을 기념하기 위해 또 머물렀다. 그 후 발리앙은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이 숙영했던 라 페베 성에 도착했고, 그곳이 쑥밭이 되었으며 생존자가 거의 없음을 알게 되었다. 레몽 역시 이 소식을 듣고 티베리아스에서 사절단을 만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로 동의했다.

레몽 3세와 화해한 기는 세포리아까지 북상했지만, 티베리아스까지 메마른 척박지를 가로질러 가기를 고집했다. 물이 떨어진 상태에서 기의 군대는 7월 초 티베리아스 외곽 하틴에서 살라딘의 군대에 포위되었다. 7월 4일 하틴 전투가 시작되었고, 발리앙은 조슬랭 3세 드 에데사 백작과 함께 후위를 맡았다. 전투는 십자군 측의 대패로 끝났다.

하틴 전투의 패배로 예루살렘은 위기에 처했다. 왕 기는 살라딘에게 포로로 잡혔고, 거의 모든 읍성과 성관들이 살라딘에게 함락당했다. 발리앙은 레몽 3세, 시돈의 르노 등 극소수의 생존자들과 함께 티레로 도망쳤다. 레몽과 르노는 각자의 영지를 지키기 위해 떠났고, 코라도 델 몬페라토가 티레를 지휘하게 되었다. 발리앙은 티레를 떠나면서 살라딘에게 예루살렘의 처자식을 데리고 트리폴리로 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고, 살라딘은 발리앙이 다시는 자신에게 칼을 들지 않는 조건으로 허락했다.

3. 3. 하틴 전투와 예루살렘 함락

알 아프달이 예루살렘 왕국 국경을 넘은 것은 레몽 3세와의 동맹 덕분이었으나, 레몽은 그 행동을 후회하고 기 드 루지냥과 화해했다. 기는 세포리아까지 북상했는데, 그 이후 티베리아스까지 메마른 척박지를 가로질러 가기를 고집했다. 물이 떨어진 상태에서 기의 군대는 7월 초 티베리아스 외곽 하틴에서 살라딘의 군대에 포위되었다. 7월 4일부터 하틴 전투가 개시되었다. 발리앙은 이 전투에서 조슬랭 3세 드 에데사 백작과 함께 후위를 맡았다. 전투는 십자군 측의 대패로 끝났다.

하틴 전투의 대패는 곧바로 예루살렘을 풍전등화의 지경에 밀어넣었다. 수도를 지켜야 할 왕 기는 살라딘에게 포로로 잡혔고, 거의 모든 읍성과 성관들이 살라딘에게 함락당했다. 발리앙은 레몽 3세, 시돈의 르노, 하이파의 파이앵 등 극소수의 생존자들과 함께 티레 쪽으로 도망쳤다. 레몽과 르노는 곧 각자의 영지를 지키기 위해 떠나 버렸고, 티레는 보두앵 5세의 친삼촌(즉 시빌라 여왕의 전남편의 형제) 코라도 델 몬페라토가 지휘하게 되었다. 발리앙은 티레를 떠나면서 살라딘에게 예루살렘의 처자식을 데리고 트리폴리로 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살라딘은 발리앙이 다시는 자신에게 칼끝을 들지 않는 조건으로 이 부탁을 들어 주었다.

발리앙과 그 기사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하틴에서 전투를 지휘할 귀족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 예루살렘 시민들은 그들에게 제발 머물러 달라고 애원했다. 예루살렘 총대주교 헤라클리우스도 기독교인들이 발리앙을 필요로 하는 공익이 발리앙이 비기독교인과 개인적으로 한 약속보다 우선한다는 논리에 따라, 발리앙이 살라딘과의 약속을 어겨도 죄가 없음을 보증하며 거들었다. 발리앙이 도시 안을 돌아보니 기사들은 불과 열네 명 밖에 없었고(가장 적은 기록에서는 불과 두 명이었다고도 한다) 발리앙은 자유민들 중 60명을 추려 그 자리에서 기사로 서임했다. 예루살렘 방어전에서 시빌라 여왕이 한 일은 거의 없어 보이며, 예루살렘 군민들은 발리앙을 주군으로 따르며 충성을 바쳤다. 발리앙은 헤라클리우스 대주교와 함께 방어전을 준비했고, 9월 살라딘이 도착해 공성을 시작했다. 예루살렘 공성전이 시작된 이 시점에서 살라딘은 예루살렘, 이블랭, 나블루스, 라믈라, 아스칼론을 제외한 예루살렘 왕국의 직속 영지를 모두 점령한 상태였다. 살라딘은 발리앙이 자신과의 약속을 어겼음에도 화를 내지 않고 발리앙의 처자식을 트리폴리까지 호위해 주었다. 당시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들 중 최선임자였던 발리앙은 무슬림들에게 왕 또는 그에 준하는 존재로 받아들여졌다(이븐 알아티르의 기록).

살라딘은 예루살렘 성곽 일부를 허물었지만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시내로 진입할 수는 없었다. 발리앙은 대표로 밖으로 나와,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무력으로 취하려 할 시 자신들이 예루살렘 시내를 모조리 파괴해 버린 뒤 너도 죽고 나도 죽을 것이라 협박했다. 협상 결과, 예루살렘을 살라딘에게 넘겨주는 대가로 예루살렘의 기독교인 성인 남자 7천 명을 총 3만 베잔트에 해방하고, 여자는 두 명당, 아동은 열 명당 성인 남자와 같은 값으로 해방해주기로 했다. 10월 2일 발리앙은 예루살렘의 성채다윗의 탑 열쇠를 살라딘에게 넘겼고, 50일에 걸쳐 몸값 지불이 이루어졌다. 몸값을 내지 못한 이들은 노예가 되었지만 살라딘이 해방시켜 주었다. 이후 1099년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함락시켰을 당시와 같은 학살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기독교도들을 3개 열로 정리하여 질서정연하게 도시를 떠나도록 했다. 발리앙은 헤라클리우스 총대주교와 함께 몸값을 내지 못한 기독교도들을 대신해 인질로 잡히겠다고 자처했지만 살라딘은 필요없다고 거부했고, 발리앙과 헤라클리우스는 마지막 열의 인솔을 맡아 마지막으로 도시를 떠났다. 발리앙을 비롯한 마지막 기독교도들이 예루살렘을 떠난 것은 대략 11월 20일경으로 추측된다. 이후 발리앙은 트리폴리로 가서 처자식과 합류했다.

3. 4. 예루살렘 방어전 (1187)

발리앙과 그 기사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하틴 전투에서 지휘관들을 모두 잃은 예루살렘 시민들은 그들에게 제발 머물러 달라고 애원했다. 헤라클리우스 예루살렘 총대주교도 기독교인들이 발리앙을 필요로 하는 공익이 발리앙이 비기독교인과 개인적으로 한 약속보다 우선한다는 논리로 발리앙이 살라딘과의 약속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설득했다. 발리앙은 도시 안을 돌아보니 기사들은 불과 열네 명 밖에 없었고(가장 적은 기록에서는 불과 두 명이었다고도 한다) 자유민들 중 60명을 추려 그들을 그 자리에서 기사로 서임했다. 시빌라 여왕은 예루살렘 방어전에서 한 일이 거의 없어 보이며, 예루살렘 군민들은 발리앙을 주군으로 따르며 충성을 바쳤다. 발리앙은 헤라클리우스 대주교와 함께 방어전을 준비했고 9월 살라딘이 도착해 공성을 시작했다. 예루살렘 공성전이 시작된 이 시점에서 살라딘은 예루살렘, 이블랭, 나블루스, 라믈라, 아스칼론을 제외한 예루살렘 왕국의 직속 영지를 모두 점령한 상태였다. 살라딘은 발리앙이 자신과의 약속을 어겼음에도 화를 내지 않고 발리앙의 처자식을 트리폴리까지 호위해 주었다. 당시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들 중 최선임자였던 발리앙은 무슬림들에게 왕 또는 그에 준하는 존재로 받아들여졌다(이븐 알아티르의 기록).

살라딘은 예루살렘 성곽 일부를 허물었지만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시내로 진입할 수는 없었다. 발리앙이 대표로 밖으로 나와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무력으로 취하려 할 시 자신들이 예루살렘 시내를 모조리 파괴해 버린 뒤 너도 죽고 나도 죽을 것이라 협박했다. 그래서 협상 결과 예루살렘을 살라딘에게 넘겨주는 대가로 예루살렘의 기독교인 성인 남자 7천 명을 총 3만 베잔트에 해방하고, 여자는 두 명당, 아동은 열 명당 성인 남자와 같은 값으로 해방해주기로 했다. 10월 2일 발리앙은 예루살렘의 성채다윗의 탑 열쇠를 살라딘에게 넘겼고 50일에 걸쳐 몸값 지불이 이루어졌다. 몸값을 내지 못한 이들은 노예가 되었지만 살라딘이 해방시켜 주었다. 이후 1099년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함락시켰을 당시와 같은 학살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기독교도들을 3개 열로 정리하여 질서정연하게 도시를 떠나도록 했다. 발리앙은 헤라클리우스 총대주교와 함께 몸값을 내지 못한 기독교도들을 대신해 인질로 잡히겠다 자처했지만 살라딘이 필요없다고 거부했고, 발리앙과 헤라클리우스는 마지막 열의 인솔을 맡아 마지막으로 도시를 떠났다. 발리앙을 비롯한 마지막 기독교도들이 예루살렘을 떠난 것은 대략 11월 20일경으로 추측된다. 이후 발리앙은 트리폴리로 가서 처자식과 합류했다.

1490년경, 「프랑스인들이 터키인과 기타 해외 사라센인 및 무어인에 대항하여 해외에서 수행한 여정」(Les Passages faits Outremer par les Français contre les Turcs et autres Sarrasins et Maures outremarins)에서 발리앙 드 이벨랭이 살라딘에게 예루살렘 시를 항복하는 모습

4. 제3차 십자군과 이후의 생애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1190년 아크레 공방전 중에 시빌라 여왕이 죽자, 예루살렘 왕위를 둘러싼 분쟁이 다시 발생했다. 시빌라의 여동생이자 발리앙의 수양딸인 이사벨라가 정당한 계승자였으나, 기는 왕위를 포기하지 않았고 이사벨라의 남편 옹프리는 계속 기에게 충성했다. 발리앙 부부는 이사벨라를 잡아 가두고 이혼을 강요했다. 이후 이사벨라와 코라도 사이에 중매가 섰다.

피사 대주교 우발도 란프란치와 보베 주교 필리프 드 드뢰는 이 결혼이 무효라고 주장했다. 왕위 계승 분쟁은 제3차 십자군이 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제3차 십자군의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는 기를 지지했고, 프랑스 왕 필리프 2세는 코라도를 지지했다. 리처드 1세와 그 추종자들은 발리앙과 마리아가 이사벨라를 이혼시키고 코라도를 왕으로 민 것을 매우 혐오했다.

1192년 4월, 투표에 의해 코라도가 결국 왕으로 선출되었지만, 그로부터 불과 며칠 뒤 코라도가 티레에서 암살당했다. 리처드 1세가 이 암살을 사주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사벨라는 코라도가 죽고 1주일 만에 앙리 2세 드 샹파뉴 백작과 재혼했다.

발리앙은 앙리의 자문역이 되었고, 자파 전투에서 티베리아스의 기욤과 함께 리처드 1세의 군대 후위를 맡았다. 이후 리처드와 살라딘 사이에 맺어진 라믈라 조약을 중개함으로써 제3차 십자군이 끝나는 데 기여했다. 이 조약에 의해 제3차 십자군이 재정복한 해안 지역들은 기독교도들에게 남겨졌지만 발리앙의 영지인 이블랭나블루스는 살라딘에게 넘어갔다. 리처드가 돌아간 뒤 살라딘은 발리앙에게 보상 차원으로 카이몽 성을 비롯한 영지 다섯 개를 넘겨주었다.

발리앙 디블랭은 50대 초반의 나이로 1193년 죽었다. 마리아 콤네네와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다. 장녀 엘비스 디블랭은 시돈의 르노, 기 드 몽포르와 결혼했고, 장남 장 디블랭은 베이루트 영주, 예루살렘 사법관을 역임했으며 이후 조카 마리아 델 몬페라토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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