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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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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창부는 당나라 말기 봉상 절도사를 역임한 인물이다. 884년 형 이창언의 뒤를 이어 봉상 절도사가 되었으며, 환관 전령자와 연합하여 왕충영과 대립했다. 이후 주매와 연합하여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려 했으나, 주매와의 갈등으로 희종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사도 칭호를 받았다. 희종과의 갈등 끝에 887년 양수립에게 패하여 롱주로 도주했으나, 롱주의 지현 설지추에게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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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2. 생애

당나라의 정사인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이창부의 전기가 수록되어 있지 않아, 그의 출신 배경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사서에서 최초로 언급된 것은 884년으로, 이창언이 병으로 위독해지자 이창부를 유후(留後)로 임명했을 때였다. 이후 당 희종은 이창부를 정식 절도사로 임명했다.[8]

2. 1. 봉상 절도사 취임

884년이창언이 병으로 위독해지자 유후(留後)로 임명되었고, 이후 당 희종에 의해 정식 절도사로 임명되었다.[8]

2. 2. 주매와의 연합과 결별

885년, 이창부는 환관 전령자와 호국 절도사(護國, 현대 산시성 윈청시에 본부를 둠) 왕충영 간에 호국 절도사의 염전을 두고 벌어진 권력 투쟁에 연루되었다. 전령자는 희종에게 조서를 내려 왕충영을 태녕 절도사(泰寧, 현대 산둥성 지닝시에 본부를 둠)로, 태녕 절도사 기가량을 의무 절도사(義武, 현대 허베이성 바오딩시에 본부를 둠)로, 의무 절도사 왕처촌을 호국 절도사로 임명하여 왕충영을 제거하려 했다. 왕충영은 이 명령을 거부하고 전령자와 대립할 준비를 했으며, 그의 동맹인 하동 절도사(河東, 현대 산시성 타이위안시에 본부를 둠) 이극용과 연합했다. 한편 전령자는 이창부 및 경난 절도사(靜難, 현대 산시성 시안시에 본부를 둠) 주매와 동맹을 맺었다. 새해 즈음에 이극용과 왕충영의 군대는 사원(沙苑, 현대 산시성 웨이난시)에서 전령자, 이창부, 주매의 군대와 교전하여 그들을 격파했다. 이후 이극용이 수도 장안으로 접근하자 전령자는 희종을 데리고 봉상으로 도주했고, 그 후 흥원(興元, 현대 산시성 한중시)으로 갔다.[3]

한편, 주매와 이창부는 전령자와의 동맹에 난처함을 느껴, 대신 전령자의 영향을 받지 않는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주매는 희종의 먼 친척인 이운 양왕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두고 있었다. 그는 이창부와 합의하여 이운을 장안으로 데려와 처음에는 섭정으로, 그 다음에는 황제로 선포했다. 또한 흥원에 있는 희종을 잡기 위해 군대를 보냈지만 격퇴당했다. 그러나 주매가 스스로 재상이 된 후 이운의 조정을 독자적으로 통제하는 모습을 보이자, 이창부는 분노하여 이운이 수여한 모든 칭호를 거부하고, 흥원에 있는 희종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희종은 이창부에게 명예직인 임시 ''사도''(司徒, 삼공 중 하나)의 칭호를 수여했다.[3]

2. 3. 희종과의 갈등 및 최후

886년 말, 주전충은 자신의 부하 왕행유에게 살해되었고, 이윤은 왕중영에게 달아났지만 왕중영에게 살해당했다. 이후 희종은 887년 봄에 장안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면서, 먼저 풍상으로 향했다. 이창부는 희종이 장안으로 돌아가면 이전에 주전충과 연합하여 그를 잡으려 했던 일이나, 최소한 그에 대한 호의가 줄어들 것을 우려하여, 장안의 궁궐이 수리되지 않았다는 핑계로 희종에게 풍상에 더 오래 머물러 줄 것을 요청했다. 희종은 이에 동의했다.[3]

그러나 황제를 풍상에 붙잡아 두는 것은 이창부에게 재앙으로 이어졌다. 887년 여름, 이창부의 행렬이 황실 장군 양수립(楊守立)의 행렬과 마주치면서 사건이 시작되었다. 그들의 군사들은 서로 싸웠고, 희종의 환관들이 중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싸움은 멈추지 않았다. 그날 밤, 이창부는 풍상에 있는 희종의 임시 궁궐을 공격했지만, 곧 양수립에게 패배했다. 그는 가족을 데리고 롱주(隴州, 현대 바오지)로 도망쳤다. 이후 희종은 무정절도사(武定, 현대 한중) 이모진을 보내 롱주에서 이창부를 공격하게 했다. 그 후 887년 가을, 롱주의 지현 설지추(薛知籌)가 항복하여 이창부와 그의 가족을 살해했다. 이모진은 이후 풍상절도사를 장악했다.[4]

3. 평가

이창부는 당나라 말기 혼란한 시대에 등장한 군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권력을 잡기 위해 이합집산을 거듭했지만,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창부의 사례는 중앙 정부의 권위가 약화되고 지방 세력이 강화되는 당나라 말기의 시대상을 반영한다.

참조

[1] 웹사이트 Chinese-Western Calendar Converter http://sinocal.sinic[...]
[2] 서적 Old Book of Tang vol. 19, part 2
[3] 서적 Zizhi Tongjian vol. 256
[4] 서적 Zizhi Tongjian vol. 257
[5] 웹사이트 대만 중앙연구원 중국력(中國曆) ↔ 서력(西曆) 변환기 http://sinocal.sinic[...]
[6] 서적 자치통감 제257권
[7] 문서 8월 23일은 이무정이 이창부와 그의 가족들이 처형되었다고 선포한 날짜였다. 그러나 이창부가 당일, 또는 그 직전에 살해되었는지를 의미한 것은 완전히 명확하지 않다.
[8] 서적 자치통감 제25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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