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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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학구는 일제강점기 국민학교 교사 출신으로, 한국 전쟁에 북한군 장교로 참전했다가 미군에 투항한 인물이다. 그는 1946년 보안간부 제2훈련소 정찰참모로 임관하여 군사부 연대장, 민족보위성 총참모부 훈련과장을 거쳐, 한국 전쟁에 제2군단 작전부장으로 참전했다. 춘천 전투 실패 후 참모장으로 강등되었고, 낙동강 전선에서 상관에게 권총을 발사하고 미군에 투항했다. 이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친공 포로 조직을 지휘하고, 윌리엄 F. 딘 소장과의 포로 교환을 통해 북으로 송환되었으나, 1963년 자살했다. 그는 인민군 내에서 유능한 장교로 평가받았으며, 포로수용소 내에서의 행적과 관련하여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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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구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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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리학구 |
한자 표기 | 李學九 |
로마자 표기 | Ri Hak-gu |
출생일 | 1920년~1921년 |
사망일 | 1963년 |
소속 조직 | 조선인민군 |
최종 계급 | 총좌(인민군) |
군사 경력 | |
군 복무 | 조선인민군 |
기타 정보 |
2. 생애
이학구는 1920년경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태어나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인민군 총좌까지 승진한 인물이다. 한국 전쟁 중 미군에 투항하여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으며, 친공 포로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윌리엄 F. 딘 소장과 포로 교환으로 북송되었으나, 1963년 자살하였다.[2]
그의 생애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 한국전쟁 이전: 국민학교 교사, 조선인민군 장교 (총좌)
- 한국전쟁 참전과 투항: 조선인민군 제2군단 작전부장, 제13사단 참모장, 미군에 투항
- 포로수용소 생활과 북송: 거제도 포로수용소 수감, 친공 포로 지도자, 윌리엄 F. 딘 소장과 교환
- 북송 이후: 1963년 자살
이학구의 생애는 하위 섹션에서 보다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2. 1. 한국전쟁 이전
1920년경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태어났다.[1]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국민학교 교사를 지냈다.[1]1946년 말, 보안간부 제2훈련소 제5연대 정찰참모(대위)가 되었다.[1] 이후 연대작전과장(소좌)과 군사부연대장(중좌)을 역임했으며, 능력과 성실함, 수려한 용모 등을 인정받아 민족보위성 총참모부 훈련과장으로 발탁되어 총좌로 승진했다.[1]
2. 2. 한국전쟁 참전과 투항
1950년 6월, 이학구는 제2군단 작전부장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2] 춘천 전투의 실패로 제13사단(사단장: 최용진) 참모장으로 강등되었다.[2]
1950년 9월 20일, 낙동강 전선에서 이학구는 최용진 소장에게 권총을 발포하여 부상을 입히고 탈출했다.[2] 이튿날인 9월 21일, 미 제1기병사단 제8기병연대에 투항했다.[2] 이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2. 3. 포로수용소 생활과 북송
일본에서 심문을 받은 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2] 귀순 의사를 밝혔으나, 미국군은 윌리엄 F. 딘 소장과의 교환을 위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2] 거제도 66수용소에서 '해방동맹'이라는 친공포로 조직을 지휘하며 포로 폭동을 주도했다.[2] 이후 윌리엄 F. 딘 소장과 포로 교환으로 북한으로 송환되었다.[2]2. 4. 북송 이후
인천 상륙작전 후 낙동강 전선에서 인민군 13사단장 최용진 소장의 팔을 권총으로 쏜 후 탈출하여, 미 1 기병사단에 투항한 그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2] 이학구는 거제도 66수용소에서 '해방동맹'이라는 친공포로 조직을 지휘하였으며, 포로수용소 폭동 발생 시 북한 포로들의 대리자로 협상에 참여하였다.[2] 원래 이학구는 국군으로 귀순하여 국군 장교로서 군복무를 하고 싶었으나, 미군이 바라본 이학구 총좌는 개전 초기에 조선인민군에게 포로로 잡힌 윌리엄 F. 딘 소장과 전쟁 포로 교환의 도구로서만 쓸모가 있었기 때문에 이학구의 귀순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 게다가 당시 포로수용소에 있던 인민군 포로 중에 이학구의 계급이 가장 높았기 때문에 이학구는 친공포로의 수장이 된 것이다.[2]미군은 그에게 특별대우를 해주었고, 미 24사단장인 윌리엄 F. 딘 소장과 상호간 포로교환이 이루어졌다.[2] 휴전 후 처벌을 감수하고 포로송환으로 북으로 돌아갔으나 1963년 자살하였다.[2] 이는 당시 남북한 간의 긴장 관계와 이념 대립 속에서 겪었을 심리적 압박과 고립감의 결과로 추정된다.
3. 인물 평가 및 기타
주영복에 따르면, 이학구는 유머 감각이 뛰어나고 사람들을 잘 웃게 만드는 성격이었다. 인민군 내에서 혁명 경험이 없는 지방 출신 장교 중에서는 이학구만큼 승진이 빠르고 요직에 오른 인물이 없었다고 한다.[1] 이학구는 학구열이 높고 군사 이론에도 정통하여 인민무력성 내에서도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았다.[1]
강동호(제13사단 독전대장, 대좌)는 이학구가 포로 폭동의 지도자가 된 것은 수용소 내 광신자들로부터 배신자가 공격받을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포로들의 대변자가 된 것뿐이라고 증언한다.[2]
참조
[1]
간행물
전쟁이 낳은 비극적 인물 이학구
http://koreada.com/j[...]
보해
2004-07-01 # 여름호를 7월 1일로 가정
[2]
웹인용
국방블로그
https://blog.naver.c[...]
대한민국 국방부
2020-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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