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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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일은 함경북도 출신의 고려인으로, 소련군 참전 및 북한 고위직을 역임한 인물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소련군으로 참전하여 스탈린그라드 전투 등에서 활약했으며, 한국 전쟁 당시 휴전 협상 공산측 수석 대표를 맡았다. 이후 외무상, 부수상 등을 역임했으나, 1976년 교통사고로 사망했으며, 김정일에 의한 암살 의혹이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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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이름 | 남일 |
| 출생 이름 | 야코프 페트로비치 남 |
| 로마자 표기 | Nam Il |
| 한자 표기 | 南日 |
| 출생일 | 1915년 6월 5일 |
| 사망일 | 1976년 3월 7일 |
| 출생지 | 러시아 제국 프리모르스키 지방 골루보프카 |
| 사망지 | 평양, 북한 |
| 묘지 | 애국렬사릉, 북한 |
| 가족 | 남종선 |
| 소속 | |
| 소속 국가 | 북한 소련 |
| 군대 | 조선인민군 소련 육군 |
| 복무 기간 | 1948년–1976년 1940년대 |
| 최종 계급 | 대장 |
| 직책 | |
| 직책 | 내각 부총리 |
| 임기 시작 | 1957년 9월 20일 |
| 임기 종료 | 1976년 3월 7일 |
| 총리 | 김일 김일성 |
| 동료 부총리 | 김일 홍명희 정일용 박의완 정준택 이주연 리종옥 김광협 김창만 최용진 고혁 박성철 김창봉 김만금 최재우 홍원길 |
| 직책 | 경공업위원회 위원장 |
| 임기 시작 | 1972년 12월 26일 |
| 임기 종료 | 1976년 3월 7일 |
| 총리 | 김일 |
| 전임자 | 신설 |
| 후임자 | 허순 |
| 직책 | 국가건설위원회 위원장 |
| 임기 시작 | 1960년 8월 |
| 임기 종료 | 1962년 12월 |
| 총리 | 김일성 |
| 전임자 | 김웅상 |
| 후임자 | 김두삼 |
| 직책 | 외무상 |
| 임기 시작 | 1953년 3월 3일 |
| 임기 종료 | 1959년 10월 23일 |
| 총리 | 김일성 |
| 전임자 | 박헌영 |
| 후임자 | 박성철 |
| 추가 정보 | |
| 기타 직책 | 교육성 부상 내무성 부상 교통성 부상 문화선전성 제1부상 보건성 부상 외무상 문화상 정무원 내각 대외경제위원장 |
| 경력 | 당 대표최고전임위원 겸 당무위원 |
| 복무 기간 (소련군) | 1940년 1월 31일 ~ 1948년 8월 20일 |
| 소련군 계급 | 대위 |
| 복무 기간 (조선인민군) | 1948년 9월 9일 ~ 1953년 9월 9일 |
| 조선인민군 계급 | 상장 |
| 근무 | 조선인민군 지상군 총본부 |
| 지휘 | 조선인민군 참모장 (1948년 9월 9일 ~ 1948년 10월 6일)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1950년 8월 18일 ~ 1953년 2월 1일) 조선인민군 총합참모본부 예하 지상군사령관 (1953년 3월 14일 ~ 1953년 4월 11일) |
| 참전 전투 | 제2차 세계 대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베를린 공방전 한국 전쟁 |
2. 생애
남일(Nam Il, Яков Петрович Намru)은 함경북도에서 태어났으며[9], 고려인으로 소련 극동 지역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3] 스몰렌스크 군사학교와 타슈켄트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소련군 사단 참모부장 보좌관으로 대위 계급으로 참전하여 스탈린그라드와 베를린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활약했다.[3] 군 복무 외에는 교육 분야에서 일했으며, 톰스크 대학교를 졸업한 후[11] 사마르칸트주 인민교육부장을 역임했다.
1946년, 남일은 소련계 고려인 출신 전직 소련 군 장교들로 구성된 파견대의 일원으로 김일성을 지원하기 위해 소련 점령하의 북한으로 파견되었다.[3] 1948년 소련군 제대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에 참여하여 조선인민군 참모장을 거쳤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후, 전사한 강건을 대신하여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에 임명되었다.[3] 유성철은 "남일은 체계적인 군사 상식이 없었다"고 증언한다.[12]
1951년 7월 한국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남일은 휴전 협상에서 공산측 수석 대표를 역임했다.[4] 1953년 한국휴전협정 당시 북측 인사들 중 눈에 띄는 외모로 주목받았으며, 같은 해 7월 27일 휴전 협정 문서에 “조선인민군·중국인민지원군 대표단 수석대표, 조선인민군 대장”으로 서명했다.[13] 휴전 협정 직후인 1953년 9월 9일 조선인민군 지상군 상장으로 예편하였다.
한국 전쟁 이후 남일은 박헌영을 대신하여 외무상에 취임했다.[13] 1954년 8월 30일, 일본 정부의 재일 한국·조선인 처우에 항의하며 “재일 조선인은 공화국의 외국 시민”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남일 외무상 성명).[14] 이는 재일 조선인 운동에 큰 전환점을 가져왔고,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결성(1955년 5월)으로 이어졌다. 1955년 2월, 소련의 평화 공존 노선에 따라 일본 하토야마 이치로 정권에 무역과 문화 교류를 통한 우호 관계 수립을 제창했고,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대련 (1958년 나가사키 국기 사건 이후는 홍콩)을 경유하여 일조 무역이 확대되었다.[14]
1956년 4월 조선로동당 제3차 당대회에서 당 중앙위원 및 당 상무위원에 선출되어 당내 서열 9위가 되었다.[15] 같은 해 8월 종파 사건에서 소련파가 숙청되었지만, 남일은 방학세와 함께 숙청을 극복하고 지위를 유지했다.[3] 1957년 부수상 겸 외무상이 되었으며, 1958년 9월 일본 정부에 재일 조선인의 “귀국” 조치를 요구했다(재일 조선인의 귀환 사업 참조).
1959년 가을, 중소 관계 악화를 배경으로 흐루쇼프 방북 연기와 관련하여 책임을 지고 외무상직에서 물러났다.[16] 이후 1960년 국가건설위원회 위원장, 1966년 부수상 겸 철도상 등을 역임했다. 1970년 11월 제5차 당대회에서는 당 정치위원회에서 제외되어 강등되었다. 1972년 12월 28일 제5기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에서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정무원 부총리, 경공업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76년 3월 7일, 지방 시찰 중 교통사고로 사망했으며, 3월 9일에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사고가 아니라고 의심했고, 일부는 김정일을, 다른 이들은 김일성을 비난했다.[3][7] 남일은 국장례를 치렀으며 혁명렬사릉에 안장되었다.[6][7]
2. 1. 청년 시절과 소련군 복무
남일은 1913년 러시아 제국 우수리스크에서 출생하였다.[9] 일가족과 함께 연해주(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고, 이후 일제강점기 조선으로 잠시 입국하여 함경북도 경원 등지를 떠돌아다녔다. 1925년 9월경 일가족과 함께 함경북도 청진을 떠나 출국하였으며, 소비에트 우즈베키스탄에 재이주하여 타슈켄트 사범대학교 인민초등교육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소련군에 입대하여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베를린 공방전 등 독소전쟁에 참전하였으며,[12] 대위로까지 승진했다. 소련군 시절 최종 계급은 소련 육군 대위였으며, 사단 참모장 대리 직책을 담당했다.스몰렌스크 군사학교와 타슈켄트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군 복무 외에는 교육 분야에서 일했다.[3] 1946년 소련계 고려인 출신 전직 소련 군 장교들로 구성된 파견대의 일원으로 소련이 점령한 북한으로 파견되어 김일성을 지원했으며, 소련에 있는 아내와 딸을 남겨두었다.[3]
2. 2. 북한 귀국과 한국전쟁 참전
남일(Nam Il, Яков Петрович Намru)은 함경북도에서 태어났으며[9], 고려인으로 소련 극동 지역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3] 스몰렌스크 군사학교와 타슈켄트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소련군 사단 참모부장 보좌관으로 대위 계급으로 참전하여 스탈린그라드와 베를린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활약했다.[3] 군 복무 외에는 교육 분야에서 일했으며, 톰스크 대학교를 졸업한 후[11] 사마르칸트주 인민교육부장을 역임했다.1946년, 남일은 소련계 고려인 출신 전직 소련 군 장교들로 구성된 파견대의 일원으로 김일성을 지원하기 위해 소련 점령하의 북한으로 파견되었다.[3] 1948년 소련군 제대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에 참여하여 조선인민군 참모장을 거쳤다.[19]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후, 전사한 강건을 대신하여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에 임명되었다.[3] 유성철은 "남일은 체계적인 군사 상식이 없었다"고 증언한다.[12]
1951년 7월 한국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남일은 휴전 협상에서 공산측 수석 대표를 역임했다.[4] 1953년 한국휴전협정 당시 북측 인사들 중 눈에 띄는 외모로 주목받았으며, 같은 해 7월 27일 휴전 협정 문서에 “조선인민군·중국인민지원군 대표단 수석대표, 조선인민군 대장”으로 서명했다.[13] 휴전 협정 직후인 1953년 9월 9일 조선인민군 지상군 상장으로 예편하였다.[19]
한국 전쟁 이후 남일은 박헌영을 대신하여 외무상에 취임했다.[13] 1954년 8월 30일, 일본 정부의 재일 한국·조선인 처우에 항의하며 “재일 조선인은 공화국의 외국 시민”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남일 외무상 성명).[14] 이는 재일 조선인 운동에 큰 전환점을 가져왔고,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결성(1955년 5월)으로 이어졌다. 1955년 2월, 소련의 평화 공존 노선에 따라 일본 하토야마 이치로 정권에 무역과 문화 교류를 통한 우호 관계 수립을 제창했고,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대련 (1958년 나가사키 국기 사건 이후는 홍콩)을 경유하여 일조 무역이 확대되었다.[14]
1956년 4월 조선로동당 제3차 당대회에서 당 중앙위원 및 당 상무위원에 선출되어 당내 서열 9위가 되었다.[15] 같은 해 8월 종파 사건에서 소련파가 숙청되었지만, 남일은 방학세와 함께 숙청을 극복하고 지위를 유지했다.[3] 1957년 부수상 겸 외무상이 되었으며, 1958년 9월 일본 정부에 재일 조선인의 “귀국” 조치를 요구했다(재일 조선인의 귀환 사업 참조).[14]
1959년 가을, 중소 관계 악화를 배경으로 흐루쇼프 방북 연기와 관련하여 책임을 지고 외무상직에서 물러났다.[16] 이후 1960년 국가건설위원회 위원장, 1966년 부수상 겸 철도상 등을 역임했다. 1970년 11월 제5차 당대회에서는 당 정치위원회에서 제외되어 강등되었다. 1972년 12월 28일 제5기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에서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정무원 부총리, 경공업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76년 3월 7일, 지방 시찰 중 교통사고로 사망했으며, 3월 9일에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19]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사고가 아니라고 의심했고, 일부는 김정일을, 다른 이들은 김일성을 비난했다.[3][7] 남일은 국장례를 치렀으며 혁명렬사릉에 안장되었다.[6][7]
2. 3. 한국전쟁 이후 활동과 의문의 죽음
남일은 1913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나[9] 소련 연해주에서 고려인으로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를 경험했다.[11] 톰스크 대학교를 졸업하고[11] 제2차 세계 대전 중 소련군 사단 참모부장 보좌관으로 스탈린그라드와 베를린 전투 등 주요 전투에 참전했다.[3]1946년 소련계 고려인 출신 전직 소련 군 장교들과 함께 북한으로 파견되어 김일성을 지원했다.[3]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에 참여하여 조선인민군 참모장을 거쳤으며, 한국 전쟁 발발 후 전사한 강건을 대신하여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3] 1951년 7월부터 한국휴전협정 협상에서 공산측 수석 대표를 역임했으며,[4]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에 서명했다.[13] 당시 182cm의 큰 키와 잘생긴 외모로 주목받았다.[19]
휴전 협정 직후인 1953년 9월 9일 조선인민군 지상군 상장으로 예편하였다. 전쟁 후, 남일은 외무상을 역임하며[3] 1954년 재일 한국·조선인 처우에 대해 "재일 조선인은 공화국의 외국 시민"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14] 1955년에는 일본 하토야마 이치로 정권에 대해 무역과 문화 교류를 통한 우호 관계 수립을 제창했다.[14]
1956년 8월 종파 사건에서 소련파가 숙청되었지만, 남일은 방학세와 함께 숙청을 극복하고 지위를 유지했다.[3] 1957년 부수상 겸 외무상이 되었고,[3] 1958년 일본 정부에 재일 조선인의 “귀국” 조치를 요구했다.[14] 1959년 중소 관계 악화와 관련된 책임을 지고 외무상직에서 물러났으며,[16] 이후 국가건설위원회 위원장, 철도상 등을 역임했다.[16] 1972년 정무원 부총리 겸 경공업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16]
1976년 3월 7일, 지방 시찰 중 교통사고로 사망했다.[16] 김정일이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교통사고를 위장하여 암살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3][7][17][20][21] 남일은 국장례를 치렀으며 혁명렬사릉에 안장되었다.[6][7]
2. 4. 사후
3. 암살 의혹
1976년 봄에 원인을 알 수 없는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일각에서는 남일의 뛰어난 능력, 엄청난 카리스마와 더불어 상당히도 굉장한 미남이라는 그야말로 외모, 능력, 인품이 모두 완벽한 남일을 질투한 김정일이 교통사고를 위장한 암살을 자행했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20][21] 남일 사망 35년 후, 탈북자(前 북한 정부 고위 관계자라고 주장)의 남일 암살 의혹 증언이 조선일보 2011년 8월 10일 자 기사에 실렸다.[17] 이 증언은 당시 사고 현장 감식을 담당했던 사회안전부 교통조사과 부과장의 비밀 보고서를 바탕으로 한다. 살해 동기는 김일성 후계자 경쟁에서 김정일의 경쟁자였던 김평일(김정일의 이복동생)의 핵심 후견인 중 한 명이었던 남일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4. 평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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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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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do so many North Korean officials die in car cras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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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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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央公論新社
2013-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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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종파사건’ 때 사라진 ‘反김일성파’ 신상기록 발굴
http://weekly.chosun[...]
2024-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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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천자칼럼] 북한의 교통사고
https://www.hankyung[...]
2024-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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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김정일이 北 전쟁영웅 남일 죽였다
https://www.chosun.c[...]
조선일보
2024-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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