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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나키스트 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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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아나키스트 연맹(JAF)은 1946년 결성되어 1968년 해산된 일본의 아나키스트 단체이다. 20세기 초 고토쿠 슈스이의 아나키즘 운동을 기원으로 하며, 초기에는 아나코-공산주의와 아나코-신디칼리즘 간의 대립이 있었다. JAF는 미군정의 반공주의 정책, 일본 공산당과의 갈등, 내부 노선 갈등 등으로 인해 대중적 지지를 얻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분열과 해산을 겪었다. 이후 재건되기도 했지만, 1968년 해산되었으며, 현재는 다른 이름의 아나키스트 단체가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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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나키스트 연맹
기본 정보
단체명일본 아나키스트 연맹
로마자 표기Nihon Anakisuto Renmei
약칭NAR
창립1946년 1월 15일
해산1968년
조직
이념아나키즘
정치적 입장급진적 좌파
국제 제휴국제 아나키스트 연맹
역사
배경태평양 전쟁 후
활동노동 운동
반전 운동
학생 운동
주요 사건경찰관 구타 사건
미군기지 점거 투쟁
영향일본 신좌파 운동에 영향
관련 인물
주요 인물이토 노에
야마카와 기쿠에
구로하타 가쓰오
미야지 가즈오
관련 인물일본의 아나키스트
기타
관련 항목아나키즘
일본의 아나키즘
무정부주의
원어 명칭日本アナキスト連盟 (일본 아나키스토 렌메이)

2. 역사적 배경

1904년 11월 13일 사회주의 신문 「헤이민 신문」의 일부


일본의 아나키즘은 도쿠가와 시대 일부 공동체 마을의 평등주의적 구조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현대적인 형태의 아나키즘은 20세기 초 고토쿠 슈스이의 활동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자유지상주의 사회주의 신문인 「헤이민 신문」을 편집했으며, 피터 크로포트킨의 저작을 번역하여 일본에 소개하면서 초기 아나키스트 운동이 공산주의적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영향을 주었다.

이후 일본의 아나키스트 운동은 아나코 생디칼리즘과 순수 아나키즘으로 분화되었다. 산시로 이시카와 등은 유럽에서 생디칼리즘 조직 방식을 배워와 아나코-생디칼리즘을 지향한 반면, 사쿠타로 이와사 등은 상호부조 원칙을 중시하는 아나코-공산주의, 즉 '순수 아나키즘'을 주장했다. '순수 아나키스트'들은 노동조합이 권력을 장악하더라도 자본주의의 착취적 성격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며 소비에트 연방의 예를 들어 신디칼리스트 방식을 비판했다.

1928년, 이 두 파벌은 결국 분열되었다. 이후 일본이 군국주의화되면서 아나키즘 운동은 탄압받았고, 1931년 만주 사변 이후에는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 사실상 활동이 불가능했다.[3]

2. 1. 초기 아나키즘 운동

일본의 아나키즘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도쿠가와 시대 일부 공동체 마을의 평등주의적 구조에서 기원했다고 볼 수 있다.[1] 하지만 현대적인 형태는 20세기 초 자유지상주의 사회주의 신문 「헤이민 신문」을 편집한 아나키스트 고토쿠 슈스이의 정치 활동에서 비롯되었다.[2] 고토쿠 슈스이는 아나코 콤뮤니스트 작가 피터 크로포트킨으로부터 일본어 번역 허가를 받아 그의 작품을 번역했고, 이는 초기 아나키스트 운동을 공산주의적 방향으로 이끄는 데 기여했다.[1]

산시로 이시카와를 포함한 다른 아나키스트 운동가들은 아나코 생디칼리즘으로 향했다. 산시로 이시카와는 유럽 체류 중 프랑스 노동조합으로부터 신디칼리즘 조직 방식을 배웠다.[3] 반면, 사쿠타로 이와사와 같은 아나코-공산주의 지지자들은 크로포트킨이 주창한 공동체 연대와 상호부조 원칙에 강하게 초점을 맞추었다. 그들의 초점과 아나키즘에 반대되는 것으로 인식한 사상의 거부는 아나코-신디칼리스트들이 그들의 이념에 '순수 아나키즘'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만들었다. '순수 아나키스트'들은 신디칼리스트 방식을 강하게 비판하고, 노동조합이 권력을 장악하더라도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착취적 성격은 남아 있을 것이며, 소비에트 연방에서 그랬던 것처럼 주장했다.

2. 2. 순수 아나키즘과 아나코 생디칼리즘의 대립

일본의 아나키스트 운동 내에서 아나코 생디칼리즘을 지향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유럽에 머물면서 프랑스 노동조합으로부터 생디칼리즘 조직 방식을 배운 산시로 이시카와가 있었다.[3] 반면, 사쿠타로 이와사 등 아나코-공산주의 지지자들은 피터 크로포트킨이 주창한 공동체 연대와 상호부조 원칙에 깊이 공감했다. 이들은 아나키즘에 반대되는 사상을 거부했고, 아나코 생디칼리스트들은 이들의 이념을 '순수 아나키즘'이라고 불렀다. '순수 아나키스트'들은 신디칼리스트 방식을 강하게 비판했다. 노동조합이 권력을 잡더라도 자본주의의 착취적 본성은 그대로 남을 것이며, 이는 소비에트 연방의 사례와 같다고 주장했다.

1928년, 이 두 파벌 사이의 갈등으로 일본 아나키스트 연맹은 분열되었다.[2]

2. 3. 전전(戰前) 아나키즘 운동의 탄압

일본 제국이 점차 군국주의화되면서, 아나키즘과 같은 정치 운동에 대한 탄압도 강화되었다. 특히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아나키스트 조직 활동은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3]

3. 전후(戰後) 일본 아나키스트 연맹(JAF)의 활동

1946년 2월, 이와사 사쿠타로 위원장, 콘도 켄지 서기장, 이시카와 사부로 등이 참여한 일본 아나키스트 연맹(JAF)이 설립되었다.[1] 이들은 「반권력」과 「무지배」를 내걸고 기관지 「평민신문」(메이지 시대의 평민사와는 별개)을 발행했다.[2][3] JAF는 아나키즘 계몽 외에 특별한 활동은 없었고, 1970년대 전후에 해산했다. 이후 후계 조직으로 보리사가 설립되었고, 1960년대 후반 전공투 운동의 영향으로 학생 조직인 자유사회주의평의회(CSL)가 형성되었다.

3. 1. JAF의 결성과 초기 활동

전쟁 후 미군 점령 하에, 무정부주의자들은 1946년 5월 새로운 일본 무정부주의 연맹(JAF)을 결성했다. 무정부공산주의자와 무정부노조주의자들이 모두 참여하여 전쟁 전 분열을 극복하고자 했다.[1] 주요 인물로는 이시카와 산시로와 이와사 사쿠타로가 있었으며, 이와사는 연맹의 전국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어 조직적인 역할을 주로 담당했다. 1946년 6월, 연맹은 고토쿠 슈스이의 잡지 이름을 따서 '평민신문'(平民新聞)을 발간하기 시작했다.[2][3]

그러나 JAF는 여러 요인으로 인해 대중의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다. 미국 주도 연합군 점령군의 반공주의 정책으로 인해 차별을 받았고, 일본 공산당과 그 강력한 노동조합의 존재로부터도 반대에 직면했다. 전쟁 후 실시된 토지 개혁은 전쟁 전 무정부주의 운동의 핵심 기반이었던 소작농 계급을 사실상 없애버렸다. JAF 내 무정부주의자들은 정치 전략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여 자주 다투었으며, '평민신문'은 대중적 관심사보다는 이상주의에 초점을 맞추어 대중적 지지를 얻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순수' 무정부주의자와 노조주의 무정부주의자 간의 긴장이 다시 고조되었다. 1950년 5월, '무정부노조주의 그룹'(Anaruko Sanjikarisuto Gurūpu)이라는 분열 조직이 결성되었고, 1950년 10월 JAF는 완전히 분열되어 해산되었다. 1951년 6월, 무정부공산주의자들은 '일본 무정부주의 클럽'(Nihon Anakisuto Kurabu)을 만들었으며, 이와사 사쿠타로는 이 클럽에 가입하여 연맹의 중심 인물을 잃게 되었다.

3. 2. JAF의 내부 갈등과 분열

미군 주도 연합군 점령군의 반공주의 정책으로 인해 무정부주의자들은 차별을 받았고, 일본 공산당과 그 강력한 노동조합의 존재로부터도 반대에 직면했다.[1] 전쟁 후 실시된 토지 개혁은 전쟁 전 무정부주의 운동의 핵심 기반이었던 소작농 계급을 사실상 없애버렸다.[2] JAF 내 무정부주의자들은 정치 전략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여 자주 다툼을 벌였다. 대중의 실질적인 고려 사항보다는 이상주의가 '평민신문'의 초점이 되었고, 이는 대중적 지지를 얻는 데 장애가 되었다.[3]

이러한 상황에서 '순수' 무정부주의자와 노조주의 무정부주의자 간의 긴장이 다시 고조되었다. 1950년 5월, '무정부노조주의 그룹'(Anaruko Sanjikarisuto Gurūpu)이라는 분열 조직이 결성되었고, 1950년 10월, JAF는 완전히 분열되어 해산되었다. 1951년 6월, 무정부공산주의자들은 '일본 무정부주의 클럽'(Nihon Anakisuto Kurabu)을 만들었으며, 이와사 사쿠타로는 공산주의자들을 따라 클럽에 가입하여 연맹에서 중심 인물을 잃게 되었다.

3. 3. JAF의 재건과 새로운 경향

1956년 일본 무정부주의자 연맹은 공산주의 계파와 재결합하지는 않았지만 재결성되었다.[1] 같은 해, JAF는 새로운 저널인 ''쿠로하타''(黒旗, '흑기')를 발행하기 시작했고, 나중에 ''지유렌고''(自由連合, '자유연맹')로 이름이 바뀌었다.[2] 이 과정에서 오사와 마사미치(Ōsawa Masamichi)라는 새로운 무정부주의 이론가가 등장했다. 그는 정치적 측면보다는 사회적, 문화적 측면에 초점을 맞춘 점진적인 혁명을 주장했다. 그의 사상은 논란이 많았고, 일부 사람들에게는 '개정주의'로 비난받았지만, 무정부주의 운동 내에서 보다 개혁적인 경향을 확고히 자리 잡게 했다.[3]

3. 4. 직접 행동과 한계

일본 아나키스트 연맹(JAF)은 존속 기간 동안 여러 차례 직접 행동을 지지했다. 1960년 일본-미국 안보 조약에 대한 전국적인 반대 운동이 그 중요한 사례 중 하나이다. 주요 도시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총련을 비롯한 노동조합들이 약 400만~600만 명의 노동자 파업을 주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조약을 승인했다. 이러한 헌법 정치에 대한 환멸은 전국학생자주연맹(Zengakuren) 학생 운동의 '주류파'가 JAF와 함께 정치적 폭력을 저항의 한 형태로 촉구하게 만들었다.[1]

1965년에는 대한민국과의 한일기본조약에 대한 유사한 항의가 발생했고, 결과 또한 비슷했다. 오사와는 ''자유연맹(Jiyu-Rengo)''에서 정부의 행동을 '폭거'라고 비판했지만, 이러한 일이 반복적으로 발생했고, 매번 언론인들이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을 이야기할 때마다 두 진영의 정치인들이 서로의 행동을 맹렬히 비난한 다음 휴전을 맺고 문제를 무시했다고 언급했다.[2]

이러한 환멸 속에서 아나키즘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 중에 생겨난 전국학생투쟁위원회(Zenkyoto)를 포함한 저항 운동 내에서 지지 기반을 확대했다. 저항 단체의 부상은 일본 아나키스트 연맹이 1968년 '직접 행동 시대의 개막'을 선언하게 만들었다.[3] 이는 1968년 몇 달 동안 무정부주의 학생들에 의한 도쿄대학교 점거로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이 학생들이 주장한 무정부주의는 JAF의 그것과는 달랐다. 대학의 '연합 투쟁 위원회'는 그들이 노동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투쟁하는 "귀족 무정부주의자"이며, 정치 투쟁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귀족적 속성을 부정하려고 시도한다고 선언했다. 오사와는 폭력적인 전술의 사용을 승인했지만, 그것이 대중으로부터 너무 고립되어 있다고 우려하며, 설령 성공한다 해도 "새로운 스탈린주의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4. 일본 아나키스트 연맹(JAF)의 해산과 유산

1968년, 일본 아나키스트 연맹은 당시의 정치 시위와 분리되면서 조직의 약점이 드러나 결국 해산되었다.[1] 새로운 조직 형태를 만들기 위한 시도로 "창의적인 해산"을 결의하고, 1969년 1월 1일 ''자유연맹(Jiyu-Rengo)''에서 공식적으로 해산을 발표했다.[2]

이후 아나코-공산주의 경쟁 조직인 일본 아나키스트 클럽은 1980년 3월까지 활동을 유지했다.[3] 1988년 10월에는 일본 아나키스트 연맹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또 다른 단체가 결성되었다. 한편, 후계 조직으로 보리사가 설립되었고, 1960년대 후반의 전공투 운동에 자극받아 학생 조직으로 자유사회주의평의회(CSL)를 형성했다.

참조

[1] 서적 近代日本総合年表 第四版 岩波書店
[2] 서적 現代日本思想大系、第16巻(松本三之介) https://books.google[...]
[3] 서적 警察白書(1988年)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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